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20화 (20/175)

20화 김사범, 메이저리그 캠프에 가다(2)

어느새 사람들이 몰린 그라운드, 켄트 무어는 글러브 속 야구공을 몇 번 고쳐 잡았다.

플로리다의 뜨거운 태양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난, 여기서 다시 부활한다.’

수년간의 슬럼프 기간 동안 약해진 마음을 다시 추스르려 노력하는 켄트.

그는 잠깐 과거를 떠올렸다.

오랜 기간 그에게 붙어 있던 유망주의 탈을 벗어던지고 리그 정상급 투수의 반열에 올랐을 때 느꼈던 환희.

하지만 행복한 시간은 잠시였다. 곧이어 찾아온 불행의 파도.

경기에서 공을 던지다 팔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았을 때.

토미존 수술 이후, 보다 나은 미래를 그렸지만 좀처럼 구속이 올라오지 않았을 때.

커터를 주 무기 삼아 부활을 꿈꿨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방출당했을 때.

켄트는 그때 느꼈던 절망감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새롭게 마음을 다잡고 합류한 팀에서 그가 알 수 있었던 건, 망가진 왼팔과 추락한 자신의 위치였다.

“흠, 켄트. 좀 더 던져 보지. 곧 올라올 거야.”

켄트가 던지는 공을 보다가 성의 없이 말하던 투수 코치.

이런 주변의 태도는 그를 더욱 궁지로 몰아갔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그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다.

구단에서 애지중지하는 유망주들에게 입에 담기 힘든 폭언을 할 정도로.

그리고 지금 그는 애송이를 타석에 두고 질투라는 저열한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투구 준비를 하고 있었다.

* * *

타석에 들어선다. 마운드의 투수는 아마추어처럼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케이지 뒤의 이삭이 크게 외친다.

“타구 판단은 알아서, 애매하면 내가 판단할게. 이견 없지?”

“그래.”

“빨리 시작하지, 이딴 쇼에 오래 어울리고 싶지 않아.”

쇼? 그런 간단한 게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내 능력을 보여 줄 쇼케이스에 가깝다.

‘제물로 메이저리거 투수라……. 아주 좋아.’

완벽한 명분과, 내 분노. 그리고 시간까지. 날 보여 주기에 아주 좋은 상황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저 한심한 녀석을 두들겨 패는 것, 하나뿐이다.

그가 던지는 구종은 이삭에게 들었다. 90마일대의 포심, 좋은 슬라이더와 커브, 그리고 좋지 않은 커터.

내가 그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내가 준비된 것을 확인하고, 이삭이 투수에게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초구, 직구가 존 가운데를 찔러온다. 체감상 140정도의 구속.

“스트라이크.”

자신의 공에 반응을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녀석.

곧바로 2구를 던진다. 아까와 비슷한 구속, 비슷한 코스.

손쉬운 먹잇감이지만, 참는다. 더 큰 절망을 안겨 주기 위해.

0-2

불리한 카운트다. 녀석의 얼굴이 어느새 거만하게 변했다.

어리석다. 3번째 스트라이크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려 줄 시간이다.

3구 역시 존에 들어오는 직구. 커트했다.

4구는 존에서 떨어지는 하드 슬라이더. 커트했다.

5구도, 6구도, 마침내 존 가운데를 통과하는 직구조차 커트해 내자 드디어 켄트의 표정이 봐줄 만하게 변했다.

‘더 던져 봐. 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최선을 다해. 그 순간이 네가 바닥으로 처박힐 때니까.’

“흐압!”

녀석이 괴성까지 질러 가며 던진 9구가 왼손에서 출발하는 순간.

배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999999번의 스윙’이 발동합니다!]

단 한 번의 타격을 위해 휘둘렀던 백만 번의 스윙.

노력. 절실했지만 늘 대가로 돌려받지 못했던 예전과 달리, 이제 내 땀은 날 배신하지 않는다.

손에 들린 배트가 공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빠아악!

그가 던진 공은 다시는 그라운드에서 찾을 수 없었다.

“호, 홈런!”

이삭과 켄트, 둘 다 공이 아닌 나를 본다. 멍한 시선들.

잠시 켄트와 눈을 마주치다가 입을 열었다.

“뭐해? 던져. 두 타석 남았다.”

보기 좋게 일그러지는 녀석의 얼굴.

응징의 시간이다

* * *

그날 오후, 디트로이트의 감독실.

코치들과 리포트를 살펴보던 론이 입을 연다.

“그래, 오늘 아침에 켄트와 루키가 사고를 쳤다고?”

“네. 마침 그 현장에 있던 직원의 말을 들어 보니 켄트가 먼저 인종차별적인 말을 했다더군요.”

론의 이마에 주름이 진다.

“인종차별? 그 멍청이는 무슨 생각으로 그딴 식으로 행동한 거지? 미기가 아직 캠프에 합류하지 않은 게 다행이군.”

“안 그래도 분위기가 험악해져 직원이 말리려 했는데, 갑자기 같이 그라운드로 나갔답니다.”

“아, 그래서 아침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군. 대결이라도 한 건가?”

“루키가 도발했답니다. 켄트가 받아들였고요.”

들고 있던 레포트를 내려놓고 몸을 세우는 론.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지?”

“3타석 승부였다는데, 모두 넘겼답니다.”

“오, 스카우트 팀이 극찬하던데 그 정도인가? 메이저리거의 공을 첫 타석에서 외야로 보낼 정도로?”

“외야가 아닙니다.”

“응?”

“3타석 모두 구장을 넘겼습니다. 장외홈런으로.”

“허허허.”

어이없다는 듯, 허허로운 론의 웃음이 감독실에 퍼져 나갔다.

* * *

“워후, 루키. 오늘 살벌하던데? 그래도 메이저리거의 공인데 말이야. 반가워, 내 이름은 존이야.”

“별말씀을. 김사범, 킴이라고 부르면 돼.”

대결이 끝날 때쯤, 부지런한 선수들과 초청선수들은 거의 모두가 훈련장에 도착해 있었다.

그곳에서 실시간으로 일그러지는 켄트의 모습과, 멀리 날아가는 내 타구를 본 그들의 반응은 두 부류로 갈렸다.

첫 번째는 방금처럼 적극적으로 다가와 친해지려는 부류.

그리고 두 번째는…….

“대단한 루키네, 벌써부터 메이저리거의 공을 넘기고.”

“곧 메이저리거가 되겠군. 나대다가 부상으로 떨어져 나가지만 않는다면.”

은근히 날 비꼬며 경원시하는 부류.

전자와 후자의 온도차가 극명해서, 나는 오히려 이곳의 분위기를 더욱 잘 느낄 수 있었다.

‘오로지 실력이군, 듣던 대로 살벌한 동네야.’

타격으로 인해 무리가 갔을 수도 있는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어 주고 있자니, 이삭이 내게 다가왔다.

“와우. 라이벌이라는 게 농담이 아니었네. 인정할게.”

“뭐야, 이제 알아본 거야?”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는 이삭.

“그전까진 농담, 이제는 진담.”

“그래? 다행이네. 이제 내 진……실력을 알아보는군.”

“그래, 뭐 이 정도면 감독도 별 터치 안 할 거 같은데?”

아, 머리에 열이 올라 잊고 있었다. 내가 한 행동이 일종의 팀워크를 해치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음…… 그럴까?”

“아마도? 일단 저 멍청한 놈이 먼저 인종차별을 했으니까. 감독도 생각이 있다면 별 액션을 하진 않을 거야.”

“그래? 그럼 다행이고.”

“곧 미기도 캠프에 합류할 텐데, 혹시 킴에게 불이익을 줬다 그의 귀에 들어가면 감독 입장도 난처하거든.”

고액 연봉자의 위상이 감독보다 높은 곳. 그 이름하여 메이저리그다.

* * *

며칠 뒤, 선수들이 훈련 중인 그라운드.

“좋아! 몸이 좋은데? 오프시즌 때 좀 굴렀나 봐?”

“하하, 언제나 구르지. 그게 내 일이야.”

타자들이 합류하자마자 바로 시작된 수비연습. 생각보다 더 힘든 일정이지만 몇몇 선수를 제외하곤 거뜬히 소화해 내고 있다.

“원래 이렇게 바로 시작해? 보통은 체력훈련부터 하지 않나?”

펑고를 받고, 내 질문에 대답해 주는 이삭.

“그래? 이게 보통인데? 몸은 알아서 만들어 와야지. 자기 루틴대로 해도 괜찮은 건 20명 정도야. 나머지는 알아서 최고의 몸 상태를 만들어 와야지.”

메이저에서도 자기 자리가 확실한 선수들 빼곤 모두 경쟁한다는 소리다.

“우리 구단이 좀 유별나긴 하지. 알다시피 오랜 기간 탱킹 중이거든. 지금 눈에 띄면 바로 메이저야. 아주 큰 기회지.”

눈을 반짝이며 다시 집중하는 이삭.

그렇다면, 나도 더욱더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한참을 연습하고 있자니, 갑자기 그라운드가 소란스러워졌다.

“헤이, 미기! 몰라보겠는데?”

“하하, 이제 돈값은 해야지.”

“몸은 어때?”

“아주 좋아. 일단 아픈 곳이 없어.”

몰락한 디트로이트의 상징, 그리고 몇 년 후 왕좌의 진정한 주인이 될 선수. 그가 캠프에 합류했다.

* * *

호세 미겔 토마스 카브레라.

한국의 네티즌들은 그를 부를 때 경애와 존경을 담아 ‘쓰레기’라 부른다.

매 시즌 3할-30홈런-100타점이나 근근이 유지하며 간신히 야구로 밥 벌어먹고 사는 선수.

물론 2015년부터 하락세를 보이며 그 명성에 걸맞지 않은 성적을 보여 주지만, 2020년부터 디트로이트가 그리는 상승곡선 초기에 다시금 리그를 주도한다.

트라웃과 하퍼, 이 두 타자로 대변되는 2020년 이후의 메이저리그에서 자신의 건재함을 온몸으로 알렸던 선수.

부상과 기량 하락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은퇴할 때까지 자신의 야구를 보여 줬던 그를 나는 정말 좋아했다.

내 타격자세를 분석하기도 모자란 시간에 그의 달라진 타격자세를 분석해 볼 정도로.

그리고, 내 로망이었던 그가 지금 내 앞에 서 있다.

“네가 그 루키야? 이야긴 들었어. 걱정 마. 넌 정당한 행동을 한 거니까.”

“아…… 네, 네! 감사합니다!”

피식 웃는 미기.

“나한테 감사하지 않아도 돼, 타격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며? 다음 타격 세션 때 같이 어때?”

“네! 좋아요!”

“하하, 어려워하지 마. 난 한물간 퇴물일 뿐이니까.”

그의 저런 자학마저 멋있다.

* * *

디트로이트, 단장실.

“그래, 캠프에서 이벤트가 있었다고?”

“네, 이번에 데려온 켄트와 김사범 간의 신경전이 있었다더군요.”

머리를 부여잡는 알 아빌라 단장.

“하, 한 시즌 쓰려고 데려왔는데 그새를 못 참고 사고를 치는군.”

“켄트가 인종차별적인 말을 했답니다.”

“문제가 심각해지겠는데? 기자들이 냄새를 맡으면 골치 아파져.”

“그렇다고 한 시즌 동안 써먹어야 하는 선발투수에게 징계를 내릴 순 없잖습니까?”

톡, 톡.

검지손가락을 맞부딪치며 고민하는 알 아빌라.

“얼마나 남았지?”

“네?”

“우리의 계획 말일세, 실현 가능할 정도까지 가려면 얼마나 남았을 것 같나?”

예측하기 어려운 질문에 비서의 미간이 찌부려진다.

“음. 길면 5년, 빠르면 3년 정도면 윤곽이 나올 겁니다.”

“그래, 우리 구단은 거기에 사활을 걸어야 해. 우승하지 못하는 구단은 쓸모없으니까.”

침묵하는 비서.

“좋아, 결론은 나왔군. 론에게 전화해야겠어.”

* * *

“이야기 들었어?”

케이지 안에서 배팅을 준비하던 내게 이삭이 다가와 묻는다.

“무슨 이야기?”

“켄트 말이야.”

아직 집중해야 의사소통이 가능한 내가 떠도는 소문을 들을 수 있을 리가.

“구단이 벌금을 물렸어. 지난 일 때문에.”

“그래? 잠깐, 배팅 좀 끝내고 다시 이야기하자.”

마음 같아선 바로 듣고 싶었지만, 이곳의 훈련은 스스로 하지 않으면 누가 챙겨 주지 않는다.

한 세션의 타격훈련이 끝난 뒤, 나는 다시 이삭에게 찾아갔다.

“아까 그 이야기 계속 해봐.”

“응? 아, 켄트?”

“응, 벌금을 낸다고?”

“그렇다던데? 이례적인 일이라 다들 수군대고 있어.”

메이저리거와 루키의 사이에서 구단이 루키의 손을 들어준 거다. 그러니 수군댈 수밖에.

“사안이 사안이어서 그런 거 아닐까?”

“하, 여긴 돈이 지배하는 곳이야. 인종차별 문제가 심각하게 생각되긴 하지만, 그 정도로 이런 결과가 나오지는 않아.”

“그런가?”

경험이 없으니 알 수가 있나.

물을 머리에 뿌리며 이삭이 말한다.

“어푸, 이건 사실상 너를 주요 유망주로 대하고 있다는 의사표시라고. 250만 달러를 주는 메이저리거보다.”

“아, 그런 의미인가?”

“덕분에 그 녀석 코는 납작해졌지. 여긴 성적을 별로 신경 안 쓰는 구단이니까. 태업을 하든 뭘 하든 신경도 안 쓰거든.”

멍청한 행동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간 꼴이다.

“잘됐네, 마이너리거에게 홈런 맞아 패배한 메이저리거란 타이틀에 징계까지. 그 정도면 끝난 거지?”

“하하, 끝난 셈이지. 이번 시즌이야 메이저에 붙어 있을 순 있겠지만.”

얼굴에 퍼지는 웃음. 복수는 달다.

그런 내 얼굴을 보며, 한마디를 하는 이삭.

“하하, 주여. 여기 제 앞에 악마가 있나이다.”

흠. 저 말을 예전에도 한번 들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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