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김사범, 마이너리그로
탬파 공항.
“잘 가요, 짐. 수화물은 맡겨 놨어요.”
“우윽, 고마워요 사범.”
어제 광란의 밤을 지낸 후유증이 짐을 덮친 것 같다.
“그러게 제가 그만 마시라고 할 때 그만 마셨으면 좋았잖아요? 비행기는 타겠어요? 검색대에서 잡힐 것 같은데.”
“후욱, 괜찮아요. 곧 나아질 거예요.”
아닐 것 같은데.
“아무튼, 잘 가요. 다음에 만날 땐 메이저리거로 만날걸요?”
“그래도 꽤 친한 에이전트인데, 몇 년 동안 만나지 않겠다는 소리는 너무하지 않아요?”
이 인간 보게, 아직 술에 쩔어 있는데 입은 살아있네?
“하하, 아무튼. 잘 가요. 이제 슬슬 저도 출발해야겠어요.”
“큼, 아까 공항 올 때 여기 직원하고 연락해 놨어요. 아마 곧 전화가 올 텐데……. 통화하고 차에 타서 출발만 하면 될 거예요.”
“언제 그런 것까지 챙기셨대, 알겠어요. 진짜 헤어집시다. 우리가 연인도 아니고, 필요 이상으로 애틋했어요.”
“그렇죠? 아쉽게도 난 와이프가 있어서. 그럼 잘 가요 사범!”
끝까지 먹이면서 떠난다. 아, 분해.
* * *
공항에서 만난 직원과 함께 차를 타고 두 시간여.
나는 마침내 내 새로운 팀에 도착했다.
하이 싱글A 팀인 레이크랜드 플라잉 타이거즈. 플로리다주 북부 리그에 소속되어 있는 팀이다.
허름할 줄 알았던 경기장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감독실에서 나는 마르고 다소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의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어서 오게, 나는 플라잉 타이거즈의 감독인 피터라고 하네.”
“반갑습니다. 저는 김사범입니다. 킴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사붐? 사버엄? 음. 익숙해질 때까진 킴이라고 불러야겠군. 아무튼 환영하네. 몸 상태는 어떤가?”
역시 사람의 외모는 성격을 따라간다. 깐깐하고, 단도직입적이다.
“아주 좋습니다. 지금이라도 뛸 수 있을 정도로.”
“그래? 좋은 소식이군. 캠프에 잠깐 다녀온 선수들로부터 자네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지. 물론 구단에서도 자료를 건네줬고.”
책상에서 제법 두꺼운 종이뭉치를 꺼내 확인하는 피터.
“그래. 모두가 말하길 엄청난 장타력과 뛰어난 수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맞나?”
내 입으로 말하긴 조금 부끄러운데.
“네, 맞습니다.”
그래도 말할 건 말해야 한다. 이곳은 겸양이 미덕인 한국이 아니니까.
“그래 좋아. 어디 보자, 훈련 세션은 아까 끝났고, 곧 시범경기를 위해 원정을 가느라 바쁠 것 같군. 나도 마찬가지고.”
“아, 시간이 애매하긴 하군요.”
“그래. 조금만 일찍 왔어도 편했을 텐데. 아무튼, 직원을 붙여 줄 테니 경기장 구경을 좀 하고 있게. 그 후 원정 가기 전에 가볍게 소개를 하도록 하지.”
“네, 알겠습니다.”
띠리리리.
울리는 피터의 전화벨. 전화를 받고 몇마디를 나눈 피터가 곧 전화를 끊는다.
“마침 킴의 통역사도 왔다고 하는군. 뭐, 이야기를 해 보니 그리 필요는 없을 것 같네만.”
잠시 후.
똑똑.
노크와 함께 감독실로 두 명이 들어왔다.
동양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내 통역사인가 보다. 약간 통통한 몸매와 대조되는 큰 눈이 인상적이다.
“피터, 통역사를 데려왔어요.”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김사범 선수의 통역을 맡게 된 데니스 오입니다.”
“그래, 고맙네. 이제 여기 있는 킴을 데리고 구장을 구경시켜 주지 않겠나? 나는 오후의 경기를 준비해야 해서.”
“물론이죠. 가시죠.”
가져온 짐을 가지고 직원을 따라갔다.
감독실에서 나온 뒤, 내게 정식으로 인사를 하는 데니스.
“안녕하세요, 김사범 선수. 저는 데니스 오입니다. 교포예요.”
“안녕하세요, 김사범입니다. 유망주죠.”
파하핫!
데니스의 큰 웃음소리가 복도에 퍼졌다. 깜짝이야.
“아, 유머감각이 좋으시네요. 즐거운 생활이 될 거 같아요.”
꾸준히 본 프렌즈가 빛을 봤다. 이제야 미국식 개그를 이해한 것 같다. 하하.
* * *
관중석 제일 높은 곳에서 그라운드를 내려다본다.
“조커 머천트 스타디움은 싱글A 스타디움 중에서도 제일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물론 저희도 관리에 공을 들이고 있죠.”
자랑스럽게 홈구장을 소개하는 직원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그라운드의 선수들을 관찰했다.
‘괜찮은데? 상위 유망주들이 경기를 위해 자리를 비운 걸 감안해도.’
그라운드에서 시선을 못 떼고 관찰을 하고 있다 보니, 데니스가 한국어로 내게 말을 건다.
“생각보다 별로라고 생각하고 계시죠?”
“네? 아니요, 오히려 반대네요.”
“아, 그런가요?”
“생각보다 수준이 높아요. 사실 기대를 안 했었거든요. 그런데 꽤 괜찮네요. 지금까진.”
내 말을 들은 데니스가 목소리를 낮춰 대꾸한다.
“구단 직원이나 팬들에겐 그런 뉘앙스로 말하면 안돼요. 실례거든요.”
“네?”
“‘생각보다’라는 표현이 어떻게 보면 여기를 낮춰 보는 것 같잖아요? 비록 여기가 메이저를 위해 존재하긴 하지만, 구단 직원과 팬들에겐 소중한 ‘우리 팀’이거든요.”
아!
“보통 아시아권 유망주들이 실수하는 부분이죠. 거기는 마이너에 관심을 가지는 팬이 거의 없다죠? 그리고 마이너도 지역사회와 밀접해 있지 않고요.”
“네…… 네.”
“하하, 문화 차이, 아니 인프라 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어차피 최종 목적지야 메이저니까. 별 상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게 쌓여서 결국 사람들이 김 선수를 평가하니까요. 좋은 게 좋은 거, 맞죠?”
난 은연중에 이곳을 내 팀이 아닌, 지나가는 정거장쯤으로 생각한 것 같다. 예전 내가 오래 머물렀던 2군처럼.
정말로 정거장이 되더라도, 그때같이 허투루 생각하지 않아야한다. 플라잉 타이거즈의 팬들에겐 이 팀이 메이저리그 팀과 같을 테니까.
“좋은 지적이었어요. 정말 저는 여길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것 같네요.”
“하하하, 이해합니다. 실력 있는 유망주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기도 하고. 아무튼, 조금 꺼려질 수 있는 주제를 잘 받아들이시네요. 쉽지 않은 건데.”
33살쯤 되면 생각이 유연해지기 시작한다. 비록 몸은 20살일지라도. 아니 여기선 19살인가?
우리의 대화가 끝난 것 같자, 구단 직원이 다시 안내를 시작했다.
그렇게 스타디움 투어가 끝난 뒤, 나는 플라잉 타이거즈의 선수단 앞에 섰다.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온 김 사범입니다. 킴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포지션은 유격수입니다. 일상적인 대화, 야구 내적인 대화는 가능한데, 조금 복잡한 대화는 아직 부족합니다. 그럴 땐 옆의 데니스에게 말하면 될 겁니다. 이상입니다.”
짝짝짝.
의례적인 박수가 끝난 후, 피터의 말이 이어졌다.
“킴은 내일부터 훈련에 참가할 거다. 이상!”
각자의 짐을 들고 우르르 나가는 선수들. 조금 민망하지만, 그래도 느낌이 좋다.
* * *
디트로이트, 단장실.
“알, 이제 드디어 교통정리가 된 것 같군요.”
“그래 찰리. 이삭이 잘 받아들여서 다행이지.”
창밖으로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고급 소파에 두 남자가 마주 보고 앉아있다.
찰리라 불린 남자가 앞에 있는 음료를 마시고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포수 정도인가요? 힘든 여정이었어요.”
“포수에 관한 딜도 진행하고 있어. 카스트로를 엮어서. 마이너 위주로.”
“아, 사범이 있으니 그는 필요 없겠군요. 좋은 선택이에요.”
단장, 알이 입맛을 쩍쩍 다신다.
“뭐, 메이저에도 탐나는 매물은 있지만, 금을 얻으려고 애써 모은 보석을 파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아야지.”
“하하, 리얼무토 말씀이시군요. 이미 다저스와 링크가 났으면 게임 셋이죠.”
“그 녀석들은 리그에서 잘나가는 포수면 일단 모으고 보니까.”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저는 꼭 일리치의 무덤에 우승컵을 바칠 겁니다. 꼭.”
“그래, 자네는 뜻을 이룰 수 있을 거야. 우린 그걸 위해 지난 몇 년을 버렸으니까.”
프로구단의 영원한 목표, 우승.
각자의 의미는 다르지만, 동일한 목적을 지닌 두 남자는 다시금 목표를 되새겼다.
* * *
따악!
코치의 펑고배트에서 익숙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빠듯하긴 하지만 충분히 잡을 수 있다.
내게 오는 공에 집중한다. 백핸드로 잡고, 글러브를 가슴으로 가져오며 오른손을 글러브로 향한다. 이어지는 송구.
“좋아, 킴. 깔끔한데?”
“별말씀을. 네 차례야.”
시즌 개막을 앞둔 지금. 다행히 나는 팀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다.
곧 기본적인 수비연습이 끝나고, 코어 운동을 하기 위해 트레이닝 룸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만난 선수가 내게 말을 건다.
“킴, 또 웨이트 하러 가는 거야?”
“오늘은 요가까지. 너도 할래?”
“요가라. 나는 성격상 잘 못하겠더라고.”
“스트레칭과 균형감각을 기르는 데엔 이거만 한 게 없는데. 유연성 기르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생각해 볼게. 내일 보자.”
‘거의 넘어왔네, 처음엔 질색하더니.’
날 지나치는 그의 등에 적혀있는 이름. 제이슨 폴리. 미래엔 다저스의 클로저로 활약하는 녀석이다.
‘김병헌 선발, 폴리 마무리는 승리 공식이었지.’
나도 자세히 보기 전까진 몰랐다. 그 폴리가 디트로이트에 있었다니.
최고 구속 100마일에 달하는 직구와 준수한 제구, 후엔 제대로 된 체인지업까지 장착해서 그야말로 삼진 잡는 괴물이 되는 클로저.
지금은 토미존 수술 후 재활이 막 끝났다는데, 자연스럽게 구속이 하락해서 자신감 또한 같이 하락한 것 같다.
그럼 채워 줘야지. 누구 좋으라고 저런 대어를 놔주겠는가.
그 외에도 예전에 가끔 TV에서 본 선수들이 훅훅 지나간다. 몇 년 동안 팬들의 비난을 받으며 탱킹을 한 구단의 위엄이다.
‘아니, 애초에 팬이 별로 없는 구단이라 가능했던 건가.’
가볍게 몸을 풀고,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큰 근육부터 시작해서 작은 근육까지. 근육을 이완하고 최대한의 가동범위로 몸을 늘린다.
‘생각보다 팜의 분위기가 좋아. 선수들이 경쟁에서 도태된 패배자가 되는 것을 걱정하는 것보단 더 위로 올라가는 것만 생각하고 있다.’
‘모두 코칭스텝이 분위기를 잘 관리한 덕분이겠지.’
스트레칭 동작이 끝나간다. 천천히 호흡을 고른다.
그렇게 나는 평온한 상태로 운동을 마무리했다.
* * *
“좋아! 사범! 뛰어! 2루까지!”
2루에 도착하기 전, 3루의 주루 코치를 슬쩍 본다. 스탑 사인. 속도를 천천히 줄이며 2루에 안착한다.
공이 내야에 도착하고, 내 타임 요청에 플레이가 멈춘다.
“처음부터 너무 세게 나가는 거 아냐? 시즌은 이제 시작이야.”
“이 정도야 뭐, 괜찮아요. 무리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보호장구를 1루 코치에게 건넨다.
리그 첫 경기, 싱글A 탬파와의 맞대결에서 나는 홈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고 있다.
3번으로 출장하여 1회에 투런 홈런, 4회 말인 지금 2루타.
돌아온 이후 프로 첫 경기라 조금 긴장했지만, 다행히 상대방 투수도 긴장했는지 연신 치기 좋은 공을 던지고 있었다.
“스트라잌! 아웃!”
물론 내가 아닌 팀 동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
“아웃!”
마지막 27번째의 아웃카운트가 올라가고, 경기는 홈팀인 우리의 5:0 승리로 끝났다.
선수단 대부분이 어린 선수로 구성된 만큼 경기 후 라커룸 분위기는 끝이 없을 정도로 올라가고 있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피터. 그의 눈빛 한 번에 선수들이 조용해진다.
모두가 집중하자, 마침내 떨어지는 그의 입.
“좋아, 오늘 경기는 최고였다. 오늘처럼만 할 수 있도록. 이상!”
휘이이익!
누군가의 휘파람 소리를 시작으로 라커룸은 다시 흥이 넘치기 시작한다.
‘정말 못 말리겠군, 누가 보면 월드시리즈 우승 뒤풀이인 줄 알겠어.’
“사범! 그렇게 로봇같이 까닥이고만 있지 말고 좀 더 온몸으로 그루브를 타라고!”
33살의 나는 아니지만, 19살의 내 몸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