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25화 (25/175)

25화 김사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다(2)

“사범, 나이스 수비!”

“뭘, 보통이지.”

물을 가지러 가는 척 은근슬쩍 폴리의 앞을 지나간다.

전혀 반응이 없는 녀석.

‘내 자료가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하긴, 나라도…….’

내가 그에게 준 자료는 고등학교부터 수술 전까지 그의 피칭을 분석한 자료다.

고등학교 시절, 90마일 초반대의 포심과 체인지업을 가지고 꽤 훌륭한 성적을 냈던 폴리.

마이너에 와서 강속구를 던지며 성적은 더 훌륭해졌지만, 세부 스탯은 오히려 하락했다. 그리고 좋은 성적의 비결이었던 구속을 수술로 잃은 지금, 그 세부 스탯이 도드라지게 나빠져 지금 이 상황까지 왔다.

‘가장 큰 차이는 포지션이지.’

고등학교 시절, 불펜으로 뛰었던 폴리는 마이너에 와서 선발로 전향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훌륭했던 제구와 갑자기 늘어난 구속. 불펜으로 두기엔 팀도 본인도 아쉬웠겠지.’

원래 수준급 불펜과 중간급 선발투수의 단순 비율 스탯을 비교하면 불펜이 유리하다. 표본이 적어 금방금방 바뀌기도 하고. 아마 팀에서도 폴리의 스탯을 그렇게 받아들였을 것 같다.

“좋아! 한 방 날리라고!”

그러다 수술 한 방에 와르르 무너진 거다.

따악!

어제와 같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경기, 나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팀원들과 같이 타자를 독려하기 시작했다.

* * *

경기 후, 플라잉 타이거즈의 감독실.

타이거즈의 감독 피터와 코칭스텝이 모여 있다.

“피터, 요즘 분위기가 좋네요.”

“그렇군, 사붐이 합류하고 타선이 많이 좋아졌어. 내 욕심 같아선 더 오래 데리고 있고 싶군.”

“하하, 피터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다니. 정말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갑자기 헛기침하는 피터.

“큼, 뭐, 말이 그렇다는 걸세. 사붐은 됐고, 요즘 눈에 띄는 녀석 없나? 슬슬 보고서를 올려 줘야지.”

각자 서류를 뒤지는 코칭스태프. 이내 투수 코치가 입을 연다.

“아직 눈에 띄는 선수는 없습니다. 음, 다른 의미로 눈에 띄는 선수는 있네요.”

“음……. 폴리 말인가?”

“네. 갈수록 자신감을 잃고 있어요. 일단 로우로 내려서 자신감을 쌓고 다시 올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후. 우리 맘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대로 가면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안 좋은 건 확실하지.”

들고 있는 펜으로 서류를 톡톡 치며 고민에 빠지는 피터.

“이봐, 불펜은 어때?”

다른 코치가 투수 코치에게 말을 건넨다.

“불펜이요? 흠, 루키 이후에는 선발만 뛰어서, 구단에서도 선발투수로 육성하는 게 방침이기도 하고요.”

톡. 톡.

계속해서 펜을 움직이던 피터가 이내 자세를 바로 하고 입을 연다.

“불펜, 좋은 생각이군.”

“네? 시즌 준비를 선발로 했는데……. 오히려 악영향이 가지 않을까요?”

“말은 안 했지만, 모두 알고 있지 않나? 저번 경기도 그렇고, 4이닝 이상 넘어가면 구위가 너무 떨어져. 구속이나 구위보다 그게 더 큰 문제야.”

서류를 뒤적거려 폴리의 기록을 찾는 피터.

“기록도 마찬가지고. 수술 전과 후의 폴리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보면 쉬운 판단이야.”

“흠…….”

“내일 폴리에게 말해 보게. 본인의 의사도 중요하니까. 자, 그럼 회의는 이 정도로 하자고. 각자 보고서 내일까지 올려 주고.”

회의가 끝나고. 한 선수의 야구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 * *

경기를 준비하는 내게 다가오는 어두운 그림자.

“킴, 이야기 좀 하자.”

올게 왔다.

폴리다.

“그, 그래. 경기 끝나고 이야기할까? 그때 그 스테이크집 괜찮던데.”

“아니, 지금.”

얘 뭔데, 무서워.

라커룸 밖으로 나온 폴리와 나. 폴리가 입을 연다.

“그 자료, 킴이 만든 거야?”

“그렇긴 하지. 자료는 이곳저곳에 부탁했지만.”

잠시 날 뚫어져라 바라보는 폴리.

“그 자료, 내가 믿어도 되나?”

내가 만약 확신이 없었다면 이 대목에서 많이 부담됐을 것 같다.

“응, 믿어. 적어도 나는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해.”

하지만 난 경기를 마무리할 때마다 포효하던 그의 모습을 봤었다.

“좋아, 지금 나는 누구라도 믿고 싶으니까. 네 말을 받아들일게.”

“어? 바로? 코칭스태프에게 이야기도 하고, 마음의 준비도 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냐?”

“오늘 아침에 투수 코치가 이야기했어. 불펜으로 전환해 보자고. 난 오늘 안에 대답해 주기로 했고.”

그런가? 그럼 원래는 여기서 이 제안을 거부한 건가?

계속해서 말하는 폴리.

“그 말을 들었을 땐 다 때려치우고 싶었는데. 일단 널 믿어 볼게. 하지만, 만약에…….”

점점 굳어가는 녀석의 표정을 보고 갑자기 잊고 있던 무언가가 기억났다.

“후, 아니다. 그건 널 탓할 게 아니지. 아무튼. 너만 믿고 던져보겠어. 지금 난 믿을 게 하나도 없거든.”

제이슨 폴리. 벤치클리어링의 야수. 다혈질 김병헌과 함께 벤치클리어링 때마다 비글처럼 설치던 모습들.

“그래, 날 믿어. 아니 네가 던졌던 공을 믿어 봐.”

담담하게 대답하는 내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4월이 지나갔다. 비록 디트로이트는 개막 이후 3연패를 시작으로 5할 승률 아래를 헤매고 있지만, 우리는 리그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25전 23승 2패.

플로리다 주 북부리그 신기록을 수립할 정도로.

팀의 분위기는 갈수록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고, 팀원들 모두 월드시리즈 위너 같은 기분으로 살고 있다.

반면 나는, 하루하루 커지는 위협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

“이봐! 붐! 저 건방진 놈들 대가리에 폭탄을 박아 주라고!”

아저씨, 저한테만 들리게 말하세요. 저기 저 투수 화났잖아요.

“볼!”

아니나 다를까. 상대 투수는 내 머리에 폭탄을 꽂아 넣고 싶었나 보다.

내 별명이 ‘BOMB’이 됐을 때쯤, 상대 팀의 견제가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여기가 싱글A라는 거지.’

누군가 그랬다. 타자의 영원한 약점은 몸쪽 공이라고.

반원을 그리는 스윙의 궤적 상 물리학적으로 장타가 나올 확률이 제일 낮으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다.

제구만 좋다면, 그게 문제다. 몸쪽 공을 던지면서 제구가 잘되는 투수가 싱글A에 있을 리 없으니까.

깜짝 놀란 몸을 추스르고, 다시 타석에 섰다.

“제구 안 되면 몸에 던지지 말라고 해, 깜짝 놀랐잖아.”

이번 4연전을 하며 안면을 익힌 상대 포수에게 말을 건다.

“글쎄, 워낙 다혈질인 놈이라. 장담 못 해.”

씨익 웃으며 내 말을 받아치는 포수.

분명 다음 공도 몸쪽이겠지. 내기해도 좋다. 슬라이더를 던지는 투수니까. 몸쪽 슬라이더?

“흡!”

눈가의 주름을 지우지도 않은 채, 빠르게 다음 공을 던지는 투수.

제대로 제구된 슬라이더가 존을 향해 온다.

그렇다면, 이 공은 이제 내 꺼다.

빠가아악!

폭력적인 타구음. 어제에 이은 손맛이다. 역시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한 투수들은 실력으로 밟아 줘야 제맛이다.

가볍게 조깅하듯 다이아몬드를 돌고, 내 배트를 들고 덕아웃으로 복귀한다.

“또 넘겼어! 시즌이 한 달밖에 안 지났는데 20개가 말이 돼?”

“붐! 붐! 붐! 붐!”

날 환영해 주는 동료들, 팬들의 환호. 으스대며 그 한가운데를 뚫고 간다. 쏟아지는 주먹들은 아프지만.

내 배트를 놓고 와서, 시원한 물을 들이켠다.

그사이에 내 배트를 들고 자신에 몸에 문대는 동료들, 일주일 전인가? 한 녀석이 동양의 기를 받겠다고 저러다가 홈런을 친 이후, 일종의 행사가 되었다.

“어? 이거 뭐야?”

내 배트를 몸에 문대다가 뭔가를 발견했는지 놀라는 녀석.

“뭐가?”

“이 배트, 금 간 거 같은데?”

“뭐?”

재빨리 달려가서 살펴본 배트엔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커다란 금이 가 있다.

타석에 나가기 전에는 멀쩡했는데?

아, 그래서 소리가…….

잠시 후.

퍼어억!

“스트라잌! 아웃!”

펑!

“스츄라이크! 아웃!”

따악!

“아웃!”

공 12개로 이닝을 삭제한 폴리의 투구를 끝으로, 오늘의 경기도 끝이 났다.

* * *

디트로이트, 단장 알의 사무실.

“알, 괜찮아요?”

“괜찮지. 내 팀은 괜찮지 않지만.”

휴스턴의 미라클 시즌으로 메이저리그에 들불처럼 번져 나간 유행, 일명 ‘탱킹’.

스몰마켓 팀이 미래를 위해 현재를 버린다는, 일견 합리적인 구단 운영이지만, 아무도 그 반대급부인 팬의 비난과 구단의 에너지 상실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조금만 더 힘내죠.”

“그래, 알고 있네, 알고 있지만 힘들군.”

나날이 떨어지는 매출, 영업 이익의 축소, 분명 목적이 확실한 탱킹이지만, 디트로이트의 단장 알은 가끔 회의감에 휩싸이곤 한다.

“좋은 소식 하나 알려 드릴까요?”

“그래? 요즘 들어선 좋은 소식이 진짜 좋은 소식일지 의심부터 드네만.”

“킴을 승격시켜야 한답니다. 싱글A는 너무 좁다네요.”

비서의 말이 끝나자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알.

“그래? 그건 정말 좋은 소식이군. 적응은 어떻다던가?”

“고용했던 통역사도 거의 필요 없답니다. 워크에식도 훌륭하고, 성격도 활발해서 다른 어린 선수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크다고 하고요.”

“아직 어린 선수들에겐 좋은 본보기가 필요하니까. 그래, 적응을 위해 보낸 거니까. 적응이 끝났으니 올려야지.”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알을 비서가 잠시 제지한다.

“아, 그리고 또 같은 팀의 투수도 같이 올렸으면 한답니다.”

“투수? 누구지?”

“제이슨 폴리. 이번 시즌엔 선발로 시작했던데, 마무리로 보직을 바꿨나 봅니다.”

“뭐, 현장의 추천이면 들어줘야지. 더블A의 마무리 자리는 어떻지?”

“뭐, 그저 그렇습니다. 올려도 상관없을 겁니다.”

“좋아. 두 명이라. 아주 좋군.”

불확실한 미래, 안개가 낀 도로를 조금씩 밝혀 나가는 것이 알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 * *

경기가 끝난 후, 이제 루틴화된 스트레칭을 한다. 몸에 가해지는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다.

그렇게 한참 몸을 늘리던 도중, 누군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린다.

“킴! 피터가 찾던데? 감독실로 가 봐!”

올 게 왔다.

서둘러 찾아간 감독실. 익숙한 뒷모습이 보인다.

“폴리, 너도?”

내 모습을 보고 갑자기 웃는 폴리. 무섭다.

“킴!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 타이밍에 선수를 호출하는 건 둘 중 하나잖아? 위로, 아니면 아래로.”

아, 내가 있으니까 위로 가는 거다?

“나는 위로 가고 너는 아래로 갈 수도 있잖아?”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하얘지는 녀석.

나도 모르게 뼈를 때렸나 보다. 조금 미안한데.

갑자기 벌컥 열리는 감독실의 문.

“여기서 뭐 하나? 노크하길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야지?”

“네, 넵! 죄송합니다. 딸꾹!”

불쌍한 폴리. 곧 찾아올 행복한 순간을 딸꾹질하며 맞이하다니.

감독실 안.

우리 둘에게 차를 권하는 피터.

여유로운 내 모습과 쉼 없이 딸꾹질을 하는 폴리의 모습이 대조된다.

“예상은 했겠지만 킴, 승격이네. 내일 아침에 구단 직원이 데리러 올 거야.”

딸꾹.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후르르릅, 후, 딸꾹!

“뭘, 우리가 알려 준 게 있어야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간다고 생각하게. 자넨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아 그리고 폴리?”

“네딸꾹!”

“자네는 아쉽게도…….”

덜그럭덜그럭, 폴리는 오늘 사운드박스다. 본인의 성적을 알긴 하나? 안다면 저런 반응이 나오지 않을 텐데.

12경기 12 2/3이닝 13K, 방어율 1.3

그가 불펜으로 전환하고 난 뒤의 성적이다.

“아쉽게도 우리와 같이 지낼 수 없겠군, 자네도 승격이네. 킴과 같이 가면 돼.”

“웁, 후, 후아. 알겠습니다.”

분명 소리 지르려고 했다. 그래도 한 번 더 놀랐는지 딸꾹질은 멈췄군.

곧 감독실을 나온 우리.

폴리가 내게 말을 건다.

“이봐, 킴.”

“왜?”

“나 웃겼지? 우스웠지?”

“조금?”

잠깐의 정적.

“그래도 존나 신나잖아! 킴! 오늘 저녁은 내가 쏠게! 가자!”

당연히 가야지. 머리통만 한 스테이크도 오늘이 마지막인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