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26화 (26/175)

26화 김사범, 그리고 신고식(1)

더블 A, 제리 우트 파크.

여전히 더운 날씨, 뜨거운 태양이 날 비춘다. 알록달록한 삐에로 문양 유니폼은 덕지덕지 붙어있는 나염 때문에 통풍이 안 된다.

투수가 사인을 주고받는다. 타석의 타자 눈빛이 심상치 않다.

1사, 주자는 만루.

따악!

역시나,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는 타자.

땅볼 타구는 빠른 속도로 1루 쪽 마운드를 지나친다. 2루 베이스를 스쳐 지나갈 듯한 타구.

‘빠듯하지만,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빠른 타구는 2루수 뒤쪽으로 나도 몸을 날리는 게 맞다. 더블플레이보다 내야를 빠져나가지 않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

하지만 나는 오히려 달려가던 속도를 늦췄다. 글러브를 준비하고, 2루 베이스 앞에서 잔발로 보폭을 맞춘다.

온전히 2루수를 믿는 플레이. 이번 이닝에서 끝내야 한다. 동점은 없다.

짧지만, 긴장되며, 길게 느껴지는 시간. 내 시야에 몸을 날려 공을 잡아낸 2루수가 보인다.

‘됐다!’

환호는 짧게, 바로 크게 외친다.

“이삭!”

슬라이딩이 끝나고, 무의식적으로 날 보는 녀석. 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이어지는 토스. 그리고 1루를 향한 송구.

깔끔한 병살.

그리고, 마운드에서 제이슨 폴리가 포효했다.

* * *

4달 전, 펜실베니아 이리 공항.

“후, 같은 나라인데 비행기로 5시간이 걸리는 게 말이 되나?”

“이 정도면 괜찮지. 경유도 한 번밖에 안 했잖아.”

폴리와 나는 더블A에 도착했다.

“근데 펜실베니아는 안 춥네? 왠지 느낌이 엄청 추울 거 같은 이름인데.”

“그래? 흠, 뭐 킴은 외국인이니까. 그래도 겨울에는 꽤 춥다던데?”

“흠, 난 미국은 다 덥기만 하거나 춥기만 할 줄 알았어.”

“하하, 촌스럽긴.”

촌스럽다고? 별말은 아니지만, 갑자기 화가 난다.

“그렇지, 내가 좀 딸꾹! 촌스러운 감이 있지. 딸! 컥!”

놀리려다가 괜히 한 대 맞았다. 내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는데.

“네가 야수인 걸 다행으로 여겨라.”

“야수?”

“그런 게 있다.”

폴리와 투닥거리다 보니 우리를 찾아온 구단 직원과 만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이슨 폴리 선수? 사붐 킴 선수?”

“네, 맞습니다. 이리에서 나오셨나요?”

“네.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공항에서 차를 타고 20여 분, 우리는 디트로이트의 더블A, 이리 시울브즈의 홈구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다시 직원의 안내에 따라 감독실로 향했다.

“그래,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선수들이 왔군. 반갑네, 시울브즈의 감독, 베이커네.”

“반갑습니다. 사범 킴입니다.”

“반갑습니다. 제이슨 폴리입니다.”

번갈아 가며 악수하는 우리.

“그래, 둘 다 더블A는 처음이지?”

“네.”

“하하, 좋군. 때 묻지 않은 루키야. 진지하게 말하자면, 이제 프로로서 첫 번째 관문을 지나 본격적으로 경쟁하는 단계네, 좀 더 전문적이고, 치열하게 싸워야 할 거야.”

싱글A가 준비 단계였다면, 더블A는 경쟁의 시작이다.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실.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폴리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질세라 이에 대답한다.

“좋아, 보기 좋군. 가지, 앞으로 함께 할 동료들을 소개해주겠네.”

잠시 후.

“자자 주목, 여긴 오늘 승격되어 팀에 합류하게 된 사범 킴과 제이슨 폴리다. 각각 유격수와 불펜 투수지.”

저기요. 베이커? 우리가 할 말을 다 했는데요.

“그럼, 자기소개는 알아서 하도록 하고, 오늘 상대할 알투나에 대한 자료는 여기 놓도록 하지. 읽어 볼 수 있도록.”

자유방임주의라, 신선하다. 진짜 마이너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같이 온 폴리는 투수조에 몇몇 아는 사람이 있는지 어느새 그쪽에 합류했다.

군중 속의 고독인가. 이럴 땐 내가 먼저 다가가야지.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

후웁.

“킴! 드디어 왔네!”

후우.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다.

“이삭, 오랜만이네, 그새 좀 살이 쪘는데?”

“아무래도 요즘엔 움직임이 덜하니까. 그래도 타구는 쭉쭉 뻗어서 기분은 좋아.”

“그래? 언제 한번 케이지에 같이 들어가야겠네.”

“하하, 사양할게. 아무리 뻗어도 너한텐 안 되지.”

이삭이 더블A로 간 걸 깜빡했다. 다행이다.

“아직 여기 구조도 모르지? 구경시켜 줄까?”

“경기 전이라 바쁜 거 아냐?”

“괜찮아. 어차피 4연전 마지막 경기라 익숙한 놈들이야. 따라와.”

그렇게 나는 친절한 이삭 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홈구장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이제 진짜 라이벌인가? 한 팀에 유격수는 한 명이니까.”

“하하, 이젠 라이벌이 아니라 동료지.”

“응?”

“몰랐어? 나 2루수로 컨버전 했어.”

뭐지? 왜? 원래라면 메이저에서 1년은 유격수 생활을 하다 바뀌는데? 설마 나 때문인가?

“……그래? 어때?”

“좋던데? 뭐, 비슷하지만 수비 부담이 좀 덜하기도 하고. 처음엔 좀 헷갈렸는데 이젠 뭐.”

“단순하게 반대편으로 이동한 건데 많이 헷갈리지? 커버 위치도 다르고.”

나도 안다. 고교리그 처음에 나도 그랬으니까.

“어? 킴 너도 포지션을 바꾼 경험이 있어?”

“2루에서 유격수로. 처음엔 많이 고생했지.”

“그렇지, 그냥 단순히…….”

우린 한동안 수비 위치에 따른 변화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면, 결국 이삭의 수비 위치 변경은 나 때문이다. 하지만 내색 안 하고 즐겁게 이야기하는 녀석. 대인배다.

“아무튼, 그래서 시즌 초반에 아주 어려웠어. 하지만 지금은 뭐, 원래 2루수 보던 녀석이 덕아웃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지.”

“좋은데? 그럼 곧 콤비로 경기에 나갈 수 있겠네.”

“기대할게. 루키.”

“보통 이럴 때 한국에선 오그라든다고 말해.”

“어그라드다? 무슨 뜻이야?”

“잘해 보자고. 그런 뜻이지.”

“오케이. 어그라드다.”

그래. 오그라든다.

다시 돌아온 라커룸, 처음엔 보지 못했지만, 캠프 초반에 봤던 얼굴들이 하나둘 보인다.

‘쟤는 외야수였던 거 같은데, 음, 쟤는 포수였어. 확실해.’

물론 그 많은 얼굴과 이름을 다 외우진 못하고 있지만.

그렇게 이삭에게 하나둘 물어가며 기억을 되새기고 있을 때, 라커룸 저편에서 마른 체구의 사람이 내게 걸어왔다.

“킴? 킴이라고 부르면 되나?”

“응? 그래. 킴이라고 부르면 돼.”

“좋네. 난 버튼햄. 이 팀의 주전 유격수지.”

‘주전’이란 단어에 강한 악센트를 담아 말하는 버튼햄.

“음, 그래. 반갑다.”

별로 반응하고 싶지 않아 자연스럽게 대답해 줬다.

그러자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녀석.

옆에 있는 이삭에게 물어봤다.

“쟤 원래 저런 성격이야?”

“내가 2루수로 컨버전 한 게 자기 때문인 줄 아는 것 같아. 뭐, 성적도 괜찮고. 굳이 사실을 말해서 잘 하는 녀석 멘탈을 깨고 싶지도 않고.”

아, 알 거 같다. 모든 일에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타입. 피곤하게 생겼군.

“왠지 피곤해질 거 같네.”

“좀 그럴걸? 뭐, 아예 근본부터 나쁜 놈은 아냐. 귀엽게 보면 귀엽다니까?”

“그럼 다행이고.”

내 촉이 전혀 귀엽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다.

* * *

그 후, 잠시 적응 기간을 가진 나는 조금씩 경기에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킴! 대타다. 다음 타석에 들어가라.”

2루타

“킴! 7회부터 나간다. 몸 풀고 있어.”

안타 - 삼진

“킴! 준비됐지?”

2루타 - 볼넷 - 홈런

그렇게 천천히 나의 출전 기회가 늘어날수록 버튼햄의 얼굴은 시시각각 썩어 들어갔다.

미국 야구에 도전하면서 이곳저곳에서 조언을 들었다. 그중 하나가 루키헤이징이다.

쉽게 풀어 말하자면 신고식.

메이저리그에서야 그저 옷 좀 찢고, 웃긴 옷 입히고, 이 정도인 것 같지만, 마이너로 내려올수록 그저 장난이 아닌 수준이 된다.

‘곧 들어오겠는데?’

그리고 보통 이런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 *

경기 후.

“킴, 오늘 저녁에 뭐 해?”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버튼햄.

“오늘? 운동 말고는 딱히 계획 없어.”

“그래? 팀에 왔는데 아직 환영도 못 해 줬잖아? 내가 죽이는 스테이크집 아는데, 어때?”

아아. 고기라. 고기는 먹으러 가야지.

“그래? 좋아.”

라커에 오줌 싸고, 경기에 입을 유니폼 찢어 놓고, 스파이크 안에 면도날을 넣을 줄 알았는데.

매일 확인하며 스파이크를 신지 않아도 되겠군.

그렇게 나는 버튼햄과 몇몇 선수들과 함께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으러 갔다. 뭐, 고기니까.

“어때? 좀 멀어도 스테이크가 맛있어서 자주 오는 데지. 괜찮지?”

“오, 괜찮은데? 예상외야.”

“다행이네, 입맛에 맞아서.”

생각보다 괜찮은 스테이크집이라 놀랐다.

왜, 이런 상황에서는 보통 엄청 비싸고 양 적은 데로 데려가서 덤터기를 씌운다던가, 혹은 엄청나게 맛없는 스테이크를 가득 쌓아 놓고 먹인다던가. 이런 걸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만족스러운 식사 후, 우린 다시 버튼햄의 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을까. 갑자기 차가 덜컹거리는 게 느껴졌다.

“어? 이게 왜 이러지?”

“뭐야. 고장 난 거야? 이거 저번에도 그러더니, 아직 안 고쳤어?”

“고쳤어. 고쳤는데……?”

몇 번을 시도해도 시동이 안 걸리는 차.

“후, 이거 일단 세우고 차를 불러야겠는데. 킴. 내려서 트렁크에 있는 표지판 좀 세워 주겠어?”

아, 그거? 꼭 필요하지. 안전을 위해.

“그래, 트렁크에 있다고?”

나는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향해 걸어갔다.

부르릉!

그때, 갑자기 시동이 걸리는 차가 날 버리고 출발한다.

창밖으로 내민 손이 인상적이다. 중지 손가락도.

하하, 이거였어? 참신한데?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핸드폰을 꺼낸다.

“응, 이삭. 아까 거기에서 이리 쪽으로 좀 왔어. 그래. 부탁 좀 할게.”

이제 내 턴인가?

* * *

버튼햄의 차 안.

“하하, 그 자식 표정 봤어?”

“크하하핫! 어리바리한 게 아주 볼만하던데?”

“제대로 먹혔어! 그 자식 예민한 게 웬만한 건 다 눈치챌 거 같던데, 죽이는 계획이었어 버튼햄!”

주변인 1, 2에게 칭송받는 버튼햄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뭐, 보통이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줄 모르는 채, 그들을 태운 차는 이리로 향했다.

* * *

“그래서, 그냥 둘 거야?”

“응? 아니. 생각이 있어.”

당한 건 난데 본인이 더 화를 내는 이삭.

“아무리 그래도 그런 곳에 내버려 두고 가? 또라이들인가?”

“아냐, 또라이 아냐. 괜찮아.”

“하, 킴. 동양인들이 얌전한 건 알지만 이럴 때 그냥 당하고만 있으면 더 난리 치는 게 그런 놈들이라고.”

와, 얌전한 동양인, 이거 상처인데. 우리나라 대표 태권도 선수 박 사장님도 있는데.

“야. 그거 인종차별이야.”

“뭐? 하, 농담이 나오냐?”

“응 나와, 다혈질 멕시칸. 나도 다 생각이 있다니까? 한 달 안에 걔네들 다 없어질걸?”

진짜 없앨 거다. 내 눈앞에서. 그놈들 싹 다.

다음날.

라커룸에 들어온 나를 주시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현실이 더하다더니, 진짜 영화에서 보는 그대로 하는구만?’

덕아웃 저쪽에서 날 향해 다가오는 버튼햄.

“킴, 왔어? 어제는 미안. 갑자기 차가 시동이 걸렸는데 멈추면 또 꺼질 것 같더라고.”

“아, 그래. 이해해.”

“그래, 이해해야지. 어쩌겠어? 안 그래?”

“그래, 이해한다니까.”

이 자식은 이해력이 달리는지 자꾸 이해 이해 거린다. 이해 안 되는 녀석.

그리고 시간이 지나 경기 전 연습시간.

나는 버튼햄과 같이 펑고를 받기 위해 서 있다.

코치의 펑고타구가 1루부터 순회하기 시작한다.

건들대며 서 있는 녀석에게 말을 건다.

“근데 버튼햄.”

“왜?”

“수비할 때 중심을 좀 더 낮게 잡아 봐, 중심을 좀 더 앞으로 하고.”

“뭐?”

[스킬 ‘기분 나쁜 선생님’이 발동합니다. 대상의 습득속도가 증가합니다. 활력이 떨어집니다.]

오늘부터 내가 너희들 담당 코치다.

실력 상승은 보장할게.

한번 지옥에서 굴러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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