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김사범, 더 나은 미래를 향해(2)
시간은 흘러 7월 9일. 그날이 왔다.
올스타 퓨처스 게임. 마이너리그의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모이는 경기.
돌아오기 전에는 TV로만 봤던 그라운드, 비록 하루 전날이지만 난 지금 그곳에 서있다.
마이너리그와 차원이 다른 퀄리티의 라커룸에서는 다국적 선수들의 대화가 오간다.
“요즘 어때?”
“뭐, 마이너가 똑같지. 하루하루 보내면서 로스터 빈자리를 기다리는 거.”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부터 시작해서.
“#[email protected] (#tás hoy?”
“Muy bien, #)$# hacer un @#!%# hoy.”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
“今日の天#@#良かっ!#@!ら幸いだ.”
가끔 들리는 일본어까지. 이 정도면 한국의 기상을 널리 펼치기 위해 애국가라도 불러야 할 판이다.
‘그놈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헤이, 붐.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한참 스페인어로 여러 선수와 대화하던 녀석이 용케 날 알아보고 말을 건다.
어렴풋이 리그에서 마주쳤던 기억이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긴장? 긴장은 내가 아니라 저기 미국팀이 해야지.”
남자는 자신감이니까. 진실이기도 하고.
4할 5푼에 가까운 타율과 전반기 더블A에서만 28개의 홈런을 친 타자를 가볍게 볼 투수는 없으니.
내 목소리가 컸는지 근처에서 껄껄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갑자기 내 어깨에 올라온 두툼한 손.
“이 친구 맘에 드는데? 그래, 맞아. 걱정해야 할 건 우리가 아닌 상대방이지.”
순간 고개를 돌려 바라본 얼굴이 익숙하다.
‘혹시?’
“반갑다. 난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 아마 오늘 3루에서 많이 보게 될 거야.”
그가 내민 오른손을 맞잡으며 말한다.
“나도 반갑다. 사범 킴. 유격수다.”
이미 성공한 유망주. 아버지의 명성을 그대로 이어받아 더 큰 명성을 얻게 될 선수. 2019년 메이저 데뷔가 확실시됐지만 작은 부상으로 아쉽게 마이너에서 시즌을 시작했다고 알고있다. 그의 메이저리그 기록은 2020년부터였으니까.
4월에 올라올 그를 위해 3루 자리를 비워 놨던 토론토는 그의 갑작스런 부상 때문에 임시 3루수로 취급받던 솔라르테의 팀 옵션을 부랴부랴 발동시켰다.
“더블A를 박살 내고 있다면서? 그쯤 되면 부술 맛이 나지. 그 전엔 투수들이 너무 설익어서 재미가 없어.”
오만할 정도의 자신감을 뿜어내는 게레로 주니어에게 대꾸해 주었다.
“그렇지. 더블A에 오니까 배팅볼 피처가 아닌 제법 투수 같은 녀석들이 있더라고.”
지금의 나는 그에게 견주어 밀리지 않으니까. 아니, 오히려 수비력은 내가 한참 앞선다.
내 말이 끝나자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레로 주니어.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정말 마음에 들어. 게임에서 보자고.”
즐기기 위한 경기지만 지고 싶지는 않다. 상대 팀에게도, 팀 동료에게도.
그렇게 본의 아닌 소외감을 잠시 느끼는 와중,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와, 사람 많네.”
이제 혼자 애국가를 부르지 않아도 될 거 같다.
“오랜만이다? 그래도 한국인이라고 반갑긴 하네.”
살갑게 다가서며 하는 말에 미간을 좁히는 김병헌.
“한국인이 아니면? 내가 늦은 건가?”
“아마도? 다른 투수들은 아까 다 도착했던데?”
그 옛날 후진 공을 던지며 뻥뻥 홈런을 맞던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마이페이스인 성격이다.
“엊그제 경기 뛰고 바로 왔더니 피곤해서. 야, 요즘 날아 댕긴다며?”
“보통이지. 너는?”
“나는 뭐, 언제나 잘 던지지.”
내 옆에 자리를 잡는 김병헌. 그렇게 잠시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고 있자, 다시 라커룸의 문이 열리고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가 들어온다.
“반갑다! 나는 멘트 아슨. 오늘 월드 팀의 감독이다. 긴 말은 필요 없겠지? 라인업을 먼저 발표하겠다.”
인상과 다르게 와다다 쏟아 내는 말들. 나를 포함한 50명의 선수들은 숨 쉴 새도 없이 그가 불러 주는 라인업에 집중했다.
“……2번 블라디미르 주니어, 3번 사범 킴. 4번…….”
강타자들을 2, 3번에 배치하는 메이저리그의 전형적인 타순. 개인적으로 4번을 선호하는 나지만, 그래도 인정받는 건 언제나 즐겁다.
* * *
경기 전 그라운드. 그라운드 적응과 기본적인 합을 맞추려 쉴 새 없이 펑고를 받는 와중에도 자유로운 분위기가 흐른다.
시프트는 당연히 없고, 중요한 상황이 아니면 사인 없이 선수 개인의 판단에 맡긴다는 파격적인 전술을 들고 나온 감독.
물론 이게 보통인 것 같다.
잠깐의 연습이 끝나고 온갖 간식이 가득한 덕아웃에서 미국팀의 연습을 구경했다. 간간이 보이는 익숙한 얼굴, 그들의 앳된 얼굴을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어느새 관중들로 가득 찬 프로그레시브 필드. 경기 전 행사가 끝나고. 마운드에 미국 팀의 선발투수 포레스트 휘틀리가 연습구를 던진다.
“킴, 저 녀석의 공, 한 타석 만에 때릴 수 있겠어?”
게레로 주니어가 옆에서 도발한다,
3~4년 뒤 사이영을 바라보는 투수를 상대로 안타를 칠 수 있냐고.
“당연하지. 내기할까?”
“콜. 첫 타석 결과로. 뭘 걸 거야?”
“바로 주고받는 게 편하지 않겠어? 100불, 콜?”
“푸하하핫! 좋아, 적당하네. 콜.”
좋겠다. 100불이 적당한 배팅 금액이라. 나는 가져온 현금 중 사용할 수 있는 전부인데.
월드 팀의 1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선다.
그리고 얼마 안 돼 바로 돌아왔다.
던진 4개의 공 모두 다른 구종으로, 모두 다른 코스를 공략해 삼진을 잡은 포레스트.
부디 어슬렁거리는 걸음걸이로 타석을 향해 걸어가는 게레로 주니어에게도 뜨거운 철퇴를 내려주길. 내 100불을 위해.
* * *
타석에 들어서는 게레로 주니어.
‘안타도 치고, 돈도 벌고. 이번 타석은 얻을 게 많겠네.’
게레로 주니어는 타격을 준비하며 동양에서 온 덩치 큰 유격수에 대해 생각했다.
‘투쟁심도 있고, 자신감도 있어. 실력만 받쳐 주면 앞으로 15년은 재미있는 선수 생활을 할 수 있겠군.’
그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투수가 투구자세를 취한다.
앗 하는 사이에 들어오는 포심. 공 끝이 살아서 으르렁대는 것 같다.
“스트라이크!”
‘공 좋네. 괜히 휴스턴에서 애지중지하는 게 아냐. 하나 먹었으니까, 집중하자고.’
그의 아버지보다 더 훌륭한 타자가 될 재목으로 불리는 게레로 주니어는 이내 집중하기 시작한다.
2구, 존을 향해 공이 다가온다.
게레로 주니어의 배트가 공을 쪼갤 듯이 나아가다 갑자기 멈춘다.
“볼!”
스트라이크 존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슬라이더. 회전만 없다면 스플리터라고 생각할 정도로 떨어지는 낙폭이 컸다.
‘후.’
가벼운 한숨과 함께 게레로 주니어는 투수를 노려본다. 흔히 볼 수 있는 기싸움.
마운드의 투수, 포레스트도 자신의 루틴을 가져가면서도 게레로 주니어에게 시선을 떼지 않는다.
“불붙었네.”
“그러게. 둘 중 하나는 크게 상처받겠어.”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덕아웃의 동료들은 한마디씩 내뱉는다.
3구째, 포심. 바깥쪽에 꽂히는 포심에 게레로 주니어의 배트가 늦다. 파울.
타석에서 벗어나 잠시 스윙을 해보는 게레로 주니어. 곧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타석에 들어선다.
4구. 역시 포심. 하지만 몸쪽에 꽉 차는 아주 날카로운 코스다.
던진 포레스트도, 받는 포수도 만족할 만큼 잘 던진 공.
하지만 게레로 주니어의 타격이 그들이 던진 공보다 조금 더 앞섰다.
* * *
대기타석에서 벗어나 타석을 향해 걸어간다.
2루에서 나를 보며 웃고 있는 게레로 주니어.
‘벌써 이겼다고 생각하는 건가?’
담장 직격 2루타. 30cm만 더 높았어도 홈런이 될 타구였다.
주심에게 가벼운 목례를 한 뒤, 땅을 고르고 오른발을 깊게 박아 넣는다.
‘원래 오늘 컨셉은 이런 게 아니지만, 어쩔 수 없지.’
오늘을 위해 준비한 퍼포먼스가 많은데. 감독에게 허락도 받아 놨고.
투수를 바라본다. 안타를 맞을 때만 해도 붉으락푸르락했던 얼굴이 어느새 평온해져 있다.
어린 나이치고 자신을 추스르는데 능한 것 같다. 뭐, 곧 확인해 볼 수 있겠지.
사인 교환이 끝나고 초구가 날아온다.
‘자신감이 넘치는 투수들은 이래서 쉽다니까.’
빠아악!
100불짜리 공이 무서운 기세로 하늘을 향해 날아간다.
시끌시끌하던 관중석도,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포수도, 2루에 있던 게레로 주니어도 내 타구를 눈으로 쫒고 있다.
단 한 명, 공을 던진 투수를 제외하고.
텅!
백스크린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와 함께, 주심의 손이 홈런을 선언했다.
다이아몬드를 돈 후, 베이스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게레로와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내가 졌어. 돈은 경기 후에 주지. 진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는데…….”
“그래? 나도 질 거라고 생각을 안 해서. 잘 쓸게.”
“하하, 역시 재미있어. 좋아. 오래오래 야구 하자고.”
뜬금없는 말과 함께 덕아웃으로 먼저 들어가는 게레로 주니어. 곧 나도 따라서 들어간다. 쏟아지는 환대. 헬멧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 그리고 옆구리를 꼬집는 손.
“악!”
당연한 이야기지만 고개를 돌린 곳에는 김병헌이 서 있었다.
* * *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 나정혁은 오늘도 새벽까지 인터넷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지금 올스타전 보는 사람 있음? 개꿀잼ㅋㅋ(new)]
그러던 중 눈에 들어온 한 게시글.
‘올스타전을 새벽에 한다고? 뭔 헛소리야?’
야신을 사랑하고 인천의 팬인 그는 자연스럽게 게시물을 클릭했다.
[지금 마이너리그 올스타전 하는데 한국 선수 두 명 나옴 ㅋㅋ 유격수랑 투수 ㅋㅋㅋ KBN에서 하는데 해설자랑 캐스터 난리 났다 ㅋㅋ]
‘아, 마이너리그. 그러고 보니 작년에 누가 간다고 시끌시끌했던 거 같은데.’
그가 자랑하는 듀얼 모니터의 버튼을 눌러 TV를 킨 나정혁. 발밑에 있는 리모콘을 자연스럽게 발가락으로 누른다.
곧 켜진 화면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서있는 동양인 투수가 보인다.
‘보자, 투아웃에 만루? 저래 놓고 웃어?’
뒤이어 들리는 캐스터의 목소리.
[5회 말, 앞선 투수의 승계주자를 놓고 김병헌 선수가 몸을 풀고 있습니다! 투아웃 만루! 위험한 상황에 나섰다는 건 감독이 김병헌 선수를 신뢰한다는 거겠죠?]
[하하, 그렇다기보단 그만큼 김병헌 선수의 구위가 좋다는 거겠죠. 사실 엊그제 등판해서 퓨처스 게임엔 등판할 가능성이 적다고 봤는데, 이렇게 또 보게 되네요.]
[지금 시청하시는 시청자분들께는 좋은 소식입니다. 1회 김사범 선수의 벼락같은 초구 홈런도 좋은 볼거리였죠?]
[두 번째 타석에서는 볼넷 후 깜짝 도루까지 선보였습니다. 도루왕 출신이신 최 위원님은 어떻게 보셨나요?]
[투수의 폼을 뺏는 도루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반 템포 정도 늦은 출발이었거든요? 근데 넉넉하게 산 걸로 봐서는 김사범 선수의 주력도 만만치 않은 거 같습니다.]
[네! 말씀드리는 순간! 김병헌 선수가 초구를 던집니다!]
“스트라이크!”
5.1 채널 서라운드 사운드로 스트라이크 콜이 울려 퍼진다.
“우왁! 쟤 뭐야? 왜 이렇게 잘 던져?”
주변에 아무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묻는 나정혁.
그의 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방금 공 뭐임? 99마일? 그럼 몇 키로야?]
[157 정도 될걸? 쟤 고등학교 때도 150대 후반 던지던 놈임.]
[ㄷㄷㄷ 포심만 놓고 보면 탈아시안이네]
[오타니도 있는데 뭔 탈아시안? 그냥 적당히 던지는 거지]
[157을 적당히라 말하는 클라스 보소]
[메이저에서 뛰려면 저 정도는 기본 아님?]
순식간에 불판이 된 그의 게시글. 그도 질 수 없다는 듯 손가락의 RPM을 올렸다.
한참을 전문가들과 트리위키 사이를 알트탭과 함께 누비던 나정혁은 문득 떠오르는 궁금증에 다시 새글쓰기를 눌렀다.
[그건 그렇고, 방금 오지는 수비한 유격수도 한국인임?]
그리고 그의 게시글에 다시 한 번 불지옥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