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김사범, 메이저리그를 앞두고(2)
“다섯 개만 더! 아직 시간 남았어요!”
쾅!
나도 안다. 힘도 남았다. 하지만 더 이상 하면 몸이 견디지 못할 것 같다.
“멈추지 말고! 더! 더! 더!”
“흡!”
그래도 손에 잡은 바벨을 놓지 않는다. 바벨은 낭창하게 휘어지면서 내 골반과 어깨를 왕복하고 있다.
삐이이-
콰아앙!
마침내 기다렸던 소리가 들리자, 나는 들고 있던 바벨을 던지듯 내려놓고 드러누웠다.
그런 나에게 다가와 하이파이브를 하는 코치.
“와, 제가 크로스핏을 10년 가까이 했는데 이 무게로 행파워클린을 치는 분은 처음 봤네요. 역시 운동선수는 달라요. 와.”
“후욱, 훅. 뭘요. 훅.”
나에겐 칭찬의 시간이 아닌 호흡을 돌릴 잠깐이 더 필요하다.
부족한 내구를 보완하기 위해 내가 찾은 운동은 크로스핏이다.
근력 자체의 증가는 이미 의미 없는 수준이 됐고, 근육의 협응력을 키워 보다 효율적인 힘의 사용을 노린 시도다.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지.’
처음부터 높은 무게를 별 무리 없이 수행하다 보니 이 지경까지 왔다. 이제 코치는 나를 인체실험의 모르모트 정도로 보는 것 같다.
“이것도 해내네? 음…… 그럼 카디오를 중간에 껴 넣으면 좀 더…….”
바로 지금처럼.
나는 애써 코치의 말을 외면한 채 바닥에 누워 충분히 몸을 식힌 뒤, 허공을 응시했다.
[스탯
힘 : 999+(현재 적용 : 712)
민첩 : 10
지능 : 10
내구 : 13
-힘에 비해 현저히 낮은 내구 수치로……]
힘을 제외한 다른 능력치는 전혀 오르지 않는다.
‘차라리 만렙이 아니라 90레벨 정도에서 돌아왔었으면…….’
아쉬웠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힘을 억제하는 훈련이 필요 없었을 테니까.
“오늘 와드는 여기서 끝인데, 더 하실 건가요?”
크로스핏 코치의 말이 멍하니 있던 내 귓가를 때린다.
“아뇨, 안 할 겁니다.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요.”
“하하, 아쉽네요. 저번에 같이 역도 할 때 엄청 재미있었거든요.”
그거 혹시 몰라서 배워 놓은 겁니다. 수틀리면 올림픽 나가서 메달 따려고.
“하하, 저도 재미있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날 노리는 매의 눈빛을 뒤로하고 박스를 나서 다음 스케줄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다리를 좀 더 높게! 30m 거리라고 했죠? 숨 쉬지 마요! 그 정도는 숨 안 쉬어도 돼! 오케이!”
야구에서 베이스 사이의 거리는 27.43m, 슬라이딩하는 거리와 리드 폭을 생각하면 그 거리는 더 짧아진다.
“속도는 충분해요. 문제는 반응속도지. 자, 더 연습합시다.”
초반에는 상관없겠지만, 점점 시즌이 지나갈수록 나에 대한 견제는 심해질 거다. 그때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진짜 육상 해볼 생각 없으세요? 아, 이 정도면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충분히 아시안 게임은 노릴 수 있을 텐데.”
도루 센스는 없지만 근력은 충분하다. 시간이 필요한 센스를 키우는 것보다 달리는 요령을 배우는 게 더 이득이다.
“하하, 야구 그만두고 육상 할 걸 그랬나요?”
“그러실래요?”
단거리 육상 코치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아뇨. 오늘 운동은 여기까지죠?”
“네, 휴식도 중요하니까요. 근데 정말 진지하게…….”
“아뇨, 야구 할 겁니다. 수고하셨어요.”
희망을 주기보다 단칼에 끊어 내는 게 낫다. 모두를 위해서.
이제 집에 가서 갈비를 뜯으면, 오늘 하루도 끝이 난다.
아, 피곤해.
* * *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가? 좀 더 쉬다가지.”
“저도 그러고 싶은데, 미국 가서 할일이 좀 남았어요. 그거 끝나면 바로 스프링 캠프에 합류해야 하고.”
“그래도, 아직 사 놓은 고기 많은데 다 먹고 가야지.”
어째 작년보다 더 아쉬워하시는 어머니의 모습. 괜히 가슴이 찡하다.
“애 가는데 자꾸 그러면 안 돼, 사범아. 어여 들어가라. 여기 엄마랑 같이 있다간 오늘 안에 못 가.”
그러는 아버지의 눈이 빨갛다. 더 있다가는 나도 빨개질 것 같아 얼른 돌아선다.
“다녀올게요. 개막전 맞춰서 휴가 준비하고 계세요.”
끝이 조금 흔들렸지만, 나름 담담하게 말한 것 같다.
“그래, 들어가라.”
“가서 꼭 편지하고!”
어머니, 지금이 어느 시댄데…….
그래도 어머니 덕분에 마지막엔 웃으며 게이트로 들어설 수 있었다.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는 짐에게 말한다.
“가죠, 메이저리그로.”
“그 전에 뉴욕으로.”
“아, 맞아요. 뉴욕으로.”
먼저 뉴욕에 들러 내 타격에 대해 심도 깊게 파악하고, 개량할 예정이다. 아직 난 더 발전할 수 있으니까.
* * *
뉴욕, 제시 모리슨의 스쿨.
“다시 만나서 좋군요. 킴, 아니 붐이라고 불러드릴까요?”
“킴이 좋아요. 붐은 좀…….”
“하하, 그러죠. 바로 분석실로 갈까요?”
“좋죠. 안 그래도 궁금해 죽을 것 같거든요.”
시즌이 끝난 뒤, 짐을 통해 모리슨이 연락했다. 내 타격이 더 발전할 수 있다고.
“킴의 타격 폼을 수정한 후,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어요. 수정 후 10경기 정도는 정확하게 폼이 유지되다가 어느 순간부터 바뀌더군요.”
타격 폼을 시즌 중 수정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근육은 훈련을 기억하니까.
“변화가 커지면 바로 말해 주려고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오히려 성적은 상승했어요. 그 이유를 찾으려 계속해서 영상을 보다 보니, 너무나 익숙한 한 선수가 보였어요. 충격적이었죠.”
“그게 누구죠?”
내가 묻고 싶었는데, 어느새 짐이 끼어들었다.
“일단 가서 보시죠.”
도착한 분석실. 각종 기계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어 궁금한 기분조차 들지 않는다.
“그냥 알려 주면 좀 아쉽고, 퀴즈로 할까요?”
“내기인가요?”
“콜, 3번 안에 맞추면 제가 저녁을 사죠.”
나와 비슷한 타격 폼을 가진 사람이라…….
“캔 그리피 주니어?”
“워, 거긴 너무 갔어요.”
그냥 던져 본 거다. 혹시나 나도 모르게 완벽한 타격 폼을 가졌을 수도 있으니까.
이번엔 짐이 질문한다.
“안타를 많이 때린 선수인가요?”
“물론이죠.”
“비슷하진 않지만, 전문가의 눈은 다를 수도 있으니까…… 이치로?”
“네, 전혀 비슷하지 않아요. 틀렸네요.”
누가 봐도 다르다.
마지막 한 번의 기회를 남기고, 짐과 나는 눈치를 보며 뜸을 들이기 시작했다.
잘못된 답을 이야기하는 순간 상대방이 엄청난 눈치를 줄 것을 알기 때문에.
“두 분 다 모르겠어요? 시간이 아까우니까 카운트다운을 하죠. 5, 4, 3…….”
“잠깐만!”
후후, 이게 프로 선수와 에이전트의 차이다. 참을성의 레벨이 다르지.
“잠깐만이라는 타자는 없어요. 빨리 말해 봐요.”
“그…… 토니, 토니 그윈!”
토니 그윈? 잠깐만.
“정답이에요. 아쉽네요. 거의 이겼었는데.”
그 토니 그윈이라고? 미스터 파드레?
“오, 킴의 반응을 보니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선수인가 봐요? 토니 그윈에게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폼인 줄 알았는데.”
“전혀요. 저도 이야기만 들어 본 타자에요.”
샌디에이고의 프랜차이즈 스타, 통산 타율이 3할 3푼이었나? 고 장효조 선수와 비슷한 타율이라 기억하고 있다.
“엄청난 타자죠. 일본 선수인 이치로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직도 최고의 교타자로 불리고 있을 거예요.”
짐은 어느새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다.
“일단 보죠. 보면서 이야기해 봅시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영상을 보며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그의 폼을 벤치마킹해서 수정하자는 거죠?”
“그렇죠. 지금 자세도 흡사하니까 그가 가진 좋은 타격 폼의 포인트만 이식하면 될 거예요.”
“나아질까요?”
“제가 하는 일이 그거예요. 확신할 수 있어요.”
“좋아요. 해 보죠.”
의자에서 일어서며 모리슨이 말한다.
“하하, 3년 전엔 메이저리그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는데, 이젠 올드스쿨 타격 폼을 부활시키네요. 이래서 이 일을 그만둘 수 없어요. 타격은 언제나 변하니까.”
투수들이 레벨 스윙을 하는 타자들에 맞서 존 아래로 향하는 공을 던지자, 레그킥과 어퍼 스윙이 각광받는다. 물론 타구 발사각도에 대한 연구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결국 시대를 관통하는 타격의 철학은 하나다. 잘 맞추는 것. 단지 시대에 따라 그 방법이 바뀌는 것뿐이다.
좀 더 멀리, 좀 더 정확히.
이 두 가지 타격 요소 중 하나를 아예 배제할 수 있는 나는, 남들보다 훨씬 유리한 고지에 서 있는 셈이다.
그리고 몇 주 뒤.
따악!
경쾌한 타격음이 훈련장에 울려 퍼진다.
“좋아요! 타구 스피드가 많이 올라왔네요!”
“후, 이제야 좀 감을 잡겠네요. 생각보다 까다로웠어요.”
“아예 다른 메커니즘이면 좀 더 빠르게 배울 수 있었을 텐데, 비슷하다 보니 오히려 교정에 시간이 더 걸렸던 것 같네요.”
손의 위치를 약간, 스탠스를 조금, 중심을 살짝.
미세한 포인트도 놓치지 않고 집어 주는 완벽주의자 모리슨 때문에 이제는 바뀐 폼을 눈감고도 떠올릴 수 있다.
“조금 더 연습해 보죠. 캠프 전까지 몸에 확실히 익혀 놔야하니까.”
다시 시작된 연습. 오늘도 난 최고를 위한 최선을 다한다.
* * *
디트로이트, 단장실.
두 남자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오랜만입니다. 알.”
“오래 못 봤네요. 앉으시죠.”
알의 권유에 자리에 앉는 짐.
“자리가 좋은데요? 탐나는 소파예요.”
“하하, 이 방 집기 중 제일 비싼 물건일 겁니다.”
“오. 역시 비싼 물건은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군요. 그러고 보니 저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웃고 있던 알의 얼굴에 작은 경련이 일어난다.
“그렇죠, 아직 제대로 증명된 건 아니지만 기대하고 있어요.”
“저도 기대하고 있어요, 포장을 이쁘게 해야 해서. 그게 제 일이죠.”
잠시 서로를 바라보는 둘.
결국 알이 한숨을 푹 내쉬며 먼저 입을 연다.
“후, 그냥 바로 패를 오픈해야겠군요. 우린 장기계약을 원합니다.”
“옵트아웃은 있나요?”
“7년.”
“옵트아웃 조건은…….”
“조율해 보죠. 옵션 포함 12년 총액 100m, 올해 연봉은 100만 달러부터.”
짐은 알의 말을 듣고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적어요. 그것도 너무. 합의에 도달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나네요.”
“구단 사정상 줄 수 있는 최대치입니다. 이 이상은…….”
“그건 디트로이트가 신경 쓸 문제죠. 사범이 왜 이 구단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조건으로는 제 고객과 계약할 수 없습니다.”
“좋습니다. 어차피 첫 만남에 계약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더 구체적인 제안을 가지고 다시 이야기해 보죠.”
“다음엔 유의미한 제안을 원합니다. 제 고객이 이 구단을 좋아한다는 건 거짓이 아니에요. 하지만 자신의 가치 또한 잘 알고 있죠. 그를 실망시키지 말아요, 알.”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했어요.”
짐이 나간 뒤, 단장실.
잔에 남아 있는 차를 홀짝이던 알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버튼을 누른다.
“CFO, 스카우트 총괄, 팜 디렉터를 호출해 주게. 회의를 열 거야.”
잠시 후, 회의실.
“무슨 일로 갑자기 호출한 거죠, 알?”
“방금 킴의 에이전트가 내 사무실에 왔다 갔지.”
“제길, 100m으로도 안돼요?”
디트로이트의 CFO인 스테판 퀸이 머리를 싸맨다.
“둘 중 하나지, 본인이 트라웃 이상이라고 생각하든가, 서비스 타임을 채우고 다른 구단으로 갈 생각이든가.”
“골치 아프네요. 짐머맨과 미기의 계약으로 여유가 없어요.”
“그래서 모두를 소집한 거야. 자네들이 보기에 킴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
잠시 회의실은 침묵에 빠졌다.
먼저 입을 여는 스카우트 팀장.
“가치는 충분합니다. 앞으로의 성장을 리그 평균치로 잡아도 5툴, 못해도 4툴을 가진 선수입니다. 아직 몸이 다 성장하지 않아 체력적인 면은 보완이 필요합니다만, 긍정적인 관점에서 3~4년 안에 MVP 컨텐더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스카우트 팀장의 말을 팜 디렉터가 이어받았다.
“팀 내 평판을 봐도 성격을 알 수 있죠. 클럽하우스의 리더는 아니지만 자신이 할 일을 영리하게 하는 타입이에요. 두 감독 모두 그의 워크에식을 칭찬하더군요.”
잠시 고민에 빠진 알.
갑자기 종이에 뭔가를 휘갈기듯 쓰더니 사람들에게 보여 준다.
“오늘 아침까지 내게 온 딜이야. 쓸모없는 헛소리를 다 치우고 협상 여지가 있는 것들이지.”
종이를 보던 스카우트 팀장이 화들짝 놀란다.
“탬파베이가 자기들 팜을 탈탈 털었군요. 적어도 3년은 모아 온 선수들인데.”
“다저스도 마찬가지네요. 팜은 물론이고 포수까지…… 하.”
“모두 사범이 포함된 딜이야. 공교롭게도 우리의 가려운 곳을 정확하게 긁어 주는 패키지고, 심지어 1라운드 지명권도 넌지시 이야기하더군.”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스테판이 입을 연다.
“그 정도로 노골적인 딜이면, 킴의 가치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높다는 뜻이겠죠.”
“그렇겠지. 생각해 보자고. 우리에게 뭐가 더 이득인지. 일단 스프링캠프에서 그를 자세히 관찰해 봐. 다행스럽게 아직 시간은 우리 편이야.”
그들이 모여 있는 회의실 창문으로 달빛이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