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김사범, 2020시즌
타석에 서서 생각을 정리한다.
‘포심, 커브, 체인지업. 평범한 커브보다는 파워커브에 가깝다. 체인지업은 주로 좌타자 상대로 던진다고 했지.’
체인지업은 충분히 보고 나서 대처할 수 있다. 카운트가 몰리기 전까지 포심과 커브만 노리고 간다.
투수가 몇 번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런 경우엔 보통 한가운데 직구가 들어오곤 하지.
펑!
“스츄라이크!”
역시나, 한복판 높은 직구가 들어왔다.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전광판의 구속을 확인한다.
‘94마일.’
7회 들어 90마일까지 떨어졌던 구속이 다시 올라왔다.
루키에게는 맞을 수 없다는 건가?
뭐, 나야 좋지.
타석에 들어서며 배트로 포수 앞 땅을 몇 번 두드린다.
“반가워요, 킴이라고 해요.”
도발은 포수의 전유물이 아니니까.
역시나 내가 먼저 말을 걸자 마스크 너머로 확연히 찡그려지는 얼굴이 보인다.
“애송아, 머리에 야구공 장식을 달고 싶지 않으면 그런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투수는 얕보고, 포수는 화내고.
“아, 죄송해요. 메이저는 처음이라.”
“잡담 그만하고 진행하지.”
조금만 더 긁으면 될 거 같았는데, 심판의 제지가 들어온다.
2구째, 단번에 고개를 끄덕인 베리오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몸에 힘을 뺐다.
“……볼.”
몸쪽 아주 깊은 커브. 대비를 하고 있던 나도 피할 뻔한 날카로운 커브였다.
그리고 3구.
“스츄라이크!”
아, 실수다. 포수를 도발한다는 게 심판의 심기도 거슬린 것 같다. 타이트하던 바깥쪽 존이 넓어진 게 느껴진다.
순간 당황해서 심판에게 되물을 뻔했지만, 이삭이 알려 준 ‘루키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에서 가장 많이 강조한 부분이라 참았다.
한가운데 포심, 몸쪽 커브. 바깥쪽 포심을 던진 공격적인 투수와 화난 포수가 던질 공을 생각한다.
‘이 상황에서 던질건 하나밖에 없지.’
그리고 볼카운트 1-2에서 던진 4구.
투수의 손에서 떠난 공이 스트라이크 존으로 날아온다.
‘몸쪽 높은 직구!’
판단은 빠르게. 오른팔을 최대한 몸에 붙이고, 다른 요소를 제외하고 몸통 회전으로만 배트를 돌린다는 느낌으로 강한 힙턴을 한다.
빠악!
팔로스루. 강한 회전 때문에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잘 맞은 타구 같은데, 파울은 아냐.’
허둥지둥 일어나 1루를 향해 달려갔다. 1루 베이스를 밟고 오버런을 하며 3루 코치를 바라보니 나를 향해 웃는 얼굴이 보인다.
‘어, 뭐지?’
코치 옆의 3루심이 이제야 눈에 보인다. 홈런.
으르렁!
그라운드에 호랑이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우와아아아!
난 데뷔전, 데뷔 타석에서 투런 홈런을 기록했다.
기쁨도 잠시, 몰려오는 창피함에 고개를 푹 숙이고 베이스를 돈다.
“붐, 천천히!”
3루를 돌 때 들려오는 소리에 앞을 보자 미기의 등이 코앞이다. 난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성취감과 창피함이 섞인 상태로 덕아웃에 들어서자 아무도 날 보지 않는다. 다행이다. 혼자 있고 싶었는데.
자연스럽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차분하게 내 배트와 장비를 정리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몇 초인지, 몇 분인지 모를 시간이 흐르고 결국 참을성 없는 몇몇이 함성을 지르며 내게 다가왔다.
함성소리를 들으니 이제야 창피함이 가시고 실감이 난다. 오늘은 최고의 날이다.
* * *
어두운 밤.
철컥.
피곤한 얼굴을 한 남자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 한 손에 든 고지서 뭉치에 그의 이름이 보인다.
‘잭 엘링턴’
잭은 디트로이트의 GM사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벌이는 시원치 않지만 요즘엔 공장 가동률이 좋아 예년보단 살 만하다. 적어도 공과금은 밀리지 않고 제때 낼 수 있으니까.
잭은 들어오자마자 고지서 뭉치와 키를 던지듯 신발장 위에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를 꺼냈다. 소파에 앉아 자연스럽게 튼 TV엔 마침 메이저리그 하이라이트가 방영되고 있다.
‘아이스하키 경기 하이라이트나 중계할 것이지, 아무튼 방송국 놈들은 돈을 벌 줄을 몰라.’
[오늘, 코메리카 파크에선 타이거즈와 트윈스의 메이저리그 개막전 경기가 펼쳐졌습니다.]
화면에 나오는 아나운서의 말을 흘려들으며 핸드폰을 꺼내는 잭.
‘레드윙스가 이겼나? 잔업 때문에 경기도 못 보고, 이래선 살아도 사는 게 아니군.’
[타이거즈는 6회까지 안타 1개, 볼넷 하나만 얻어 답답한 경기를 펼쳤는데요.]
‘그리고 또 졌겠지. 언제나처럼.’
잭이 처음부터 야구에 관심이 없던 건 아니다. 예전엔 경기장을 찾아 야구를 볼 만큼 나름 타이거즈를 사랑하던 팬이었다.
[하지만 7회 말, 단숨에 3점을 뽑아 역전승을 거뒀습니다.]
‘응? 이겼다고?’
잭의 눈이 핸드폰에서 TV화면으로 옮겨갔다.
[그 중심엔 2020년 타이거즈의 핫 루키, 사범 킴이 있었습니다. 그의 홈런 장면을 보시죠.]
화면에 나오는 커다란 덩치의 동양인. 몇 개의 공을 지켜보더니 이상한 자세로 공을 때려 홈런을 만들었다.
‘덩치만 보면 훌륭한데?’
[훌륭한 스윙이죠?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화면엔 스윙을 하고나서 오른쪽 무릎을 꿇으며 반 바퀴를 도는 사범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나왔다.
.
“저게 뭔 스윙이야?”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전력 질주. 잭은 자기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파하핫, 자기가 홈런 친 줄도 모르는 거야? 루키답네. 재밌어.”
쇼파에 기대있던 몸이 TV에 가까워진다. 핸드폰은 어느새 소파에 내려놓았다.
[오늘의 마지막 장면까지 보시죠.]
아무 반응 없는 덕아웃에 당황하지 않고 마치 삼진을 당한 타자처럼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는 사범.
“뭐야? 제법인데?”
무관심 세레머니를 똑같이 무관심으로 갚은 루키. 흥미로운 녀석이 타이거즈에 나타난 것 같다.
* * *
“그러나 이 사진이 표지로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응?”
내 혼잣말에 미기가 반응한다. 마운드의 짐머맨은 덥지 않은 날씨에도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고 있다.
“짐머맨은…….”
“아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 붐, 그래도 그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게 팀워크거든.”
워싱턴 시절의 짐머맨은 이제 없다. 남은 건 그저 그런, 리그 평균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투수뿐.
그가 토미존 수술을 하고 난 직후 시즌보다 떨어진 이번 시즌의 평균구속과 흔들리는 제구력으로는 예전 같은 이닝 소화력조차 보여 줄 수 없을 거다.
그렇게 몇 개인가의 안타를 주고 교체된 짐머맨. 아이싱도 하지 않은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그의 모습이 안타깝다.
[마운드에 오를 투수는 넘버 70, 제이슨 폴리입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리고, 마침내 폴리가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올랐다.
4회 말, 투아웃 주자는 2루. 이미 스코어는 8:0까지 벌어져 있다.
“붐, 네 친구 뭔가 이상하지 않아?”
미기의 말에 좀 더 자세히 본다.
아.
표정이 없다. 무표정이 아니라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얼굴 근육조차 굳은 느낌이다.
“이삭! 폴리!”
내 외침을 들은 이삭이 폴리에게 다가간다. 이제 아마 괜찮겠지.
“그걸로 충분해?”
“아마도요? 지금 저런 꼴로 서 있지만, 꽤 터프한 녀석이거든요.”
“글쎄, 공 빠른 거 말곤 별거 없어 보이던데?”
“쓸 만한 커터도 있죠, 근데 사실 별로 필요 없어요. 저 녀석한텐.”
미기가 무슨 말이냐는 듯 나를 바라본다.
“몸쪽 승부에 변태처럼 집착하는 녀석이거든요. 제구도 나름 훌륭해서 잘 통하기도 하고.”
마운드를 다시 바라보자, 겨우 얼굴색이 돌아온 폴리가 심호흡을 하는 게 보인다.
주자는 2루. 셋 포지션에서 폴리의 기념비적인 메이저리그 데뷔전이 시작됐다.
그리고 미네소타의 3이닝이 삭제됐다.
3이닝 퍼펙트, 그리고 4K.
다행이다. 변하지 않아서. 폴리의 미래를 변화시켜서 악영향을 주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나이스 피칭.”
“땡큐.”
집착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오직 스트라이크 존 안에만 쑤셔 넣는 볼 배합과 익숙해질 만하면 몸을 부술 것 같이 날아오는 몸쪽 직구.
이대로 경험만 쌓이면 메이저를 집어삼키는 마무리가 될 거다. 내가 봤던 대로.
“사범, 다음 이닝에 대타로 들어간다. 준비해.”
친구가 좋은 공을 던진 기념으로 축포를 쏴야겠다.
* * *
디트로이트, 알의 단장실.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알의 귀에 인터폰 소리가 들린다.
“알, 론 감독에게 전화가 왔는데 연결할까요?”
“연결해 줘.”
잠시 후,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알, 몸은 어떻소?”
“론, 다른 사람하고 착각한 거 아니에요? 전 멀쩡한데요?”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 둘, 같은 팀의 감독과 단장 아닌가?”
“아, 하하하, 농담이 많이 느셨는데요?”
“젊은 녀석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다 보니 늘더군. 전화한 용건이 뭐냐면…….”
알은 전화 받기 전부터 들고 있던 서류를 다시 쳐다봤다.
“아, 알죠. 킴 때문이죠? 어때요?”
“일주일 동안 이런저런 방법으로 테스트해 봤는데, 내 기준에선 합격이네.”
“사실 이미 어제 경기에서 홈런을 친 걸 보고 이미 결정했어요.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었죠.”
“이제 머서를 팔아도 될 거 같아. 의심해서 미안하네.”
“원래 현장과 프런트는 티격태격하는 맛이 있어야죠. 내일부터?”
“내일부터.”
“좋네요. 내일 경기는 재미있을 거 같아요.”
* * *
리그가 시작한 지 일주일, 나는 세 번의 홈경기와 네 번의 원정경기를 치렀다.
그 일주일 동안 7경기 12타석 5홈런 9안타 2도루. 7할이 살짝 넘는 겸손한 타율과 2-2 클럽에 가입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경기에는 대타, 대수비, 대주자로 나가지만 아무도 나를 그저 그런 선수로 대우하지 않는다. 심지어 나와 같은 포지션인 머서조차.
“루키, 오늘도 몸 좋은데?”
“아, 머서. 웬일이에요? 웨이트 잘 안 하잖아요?”
“내 자리가 위험한데 물불 가리지 말아야지……. 슬슬 쉬는 게 더 편하긴 한데 그래도 쉽게 물러나면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
모두가 알고 있다. 나와 머서도. 시간이 문제일 뿐 결국 주전으로 나서게 되는 건 나라는 걸.
“하하, 그런 말 마세요. 같이 몸이나 푸실래요?”
“좋지. 잠깐만 기다려. 갈아입고 오지.”
밀려나고, 밀어낸다. 스포츠의 세계는 잔혹해서 몰락한 선수뿐만 아니라 자신의 폼을 꾸준하게 유지하는 선수도 언젠가 자신의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줘야 한다.
실력을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시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가오고 있으니까. 나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내가 제일 위험할 수도 있다. 남들보다 훨씬 아슬아슬한 질주를 하는 거니까.
“가자. 가볍게 스트레칭부터 할까?”
머서와 함께 운동하며 생각했다.
나는 미래에 짐머맨일까, 아니면 머서일까.
어느 쪽이든 크게 즐겁지는 않을 것 같다.
영원불멸의 기록을 가지지 못한다면 차라리 최고의 순간에서 사라질 거다.
그렇게 운동을 끝내고 호텔 방에 돌아오니, 오늘의 라인업이 나와 있었다.
[1B 스테판 맥싱…… SS 김사범……]
영원불멸의 기록은 뭐가 있을까? 데뷔시즌 70홈런? 풀시즌 0에러? 커리어 통틀어 한 자릿수 삼진?·우승 반지를 열 손가락에 끼는 것도 모자라서 발가락에 끼기?
내가 어떤 기록을 세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하나다. 난 오늘 경기에서도 잘 때리고, 잘 잡고, 잘 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