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41화 (41/175)

41화 김사범, 2020 시즌(vs 코리 클루버)(3)

홈런을 치고 돌아온 덕아웃은 환호와 박수가 가득한, 축제의 현장이었다.

“킴! 아니 붐! 지금 뭘 넘긴 거야? 우와아악!”

경기 전에 나를 죽이려 했던 폴리는 입을 떡 벌리며 놀라고 있고.

“뒤에서 봤는데, 맞는 순간 코리가 움찔하는 게 눈에 보였어. 그렇게 빠른 타구는 야구 하면서 처음 봤다니까. 딱 하는 순간 눈에서 없어지는데…….”

헬멧을 벗으며 옆의 동료에게 자신이 2루에서 겪은 썰을 푸는 이삭.

“잘했어, 루키. 좋은 타격이었어.”

담담하게 내 타격을 축하해 주는 머서.

“고맙다. 오늘 경기에서만 두 번째네.”

경기의 선발투수인 버로우즈는 심지어 악수까지 청한다.

내민 손을 잡으며 그에게 말했다.

“내가 루키라 별로 경험이 없어서 그런데…….”

“응?”

“투수들이 편하게 던지려면 몇 점 정도 차이가 나야 하지? 말만 해. 편하게 던질 수 있게 해 줄게.”

“뭐? 하하하,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그래?”

맞잡은 손을 풀 때쯤에는 미묘하게 굳어 있던 버로우즈의 표정도 완전히 풀려 있었다.

미기가 빨리 덕아웃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물론 아웃카운트를 올리며 돌아오는 게 아닌 다이아몬드를 돌아서.

1회 말 우리의 공격은 9번을 치는 맥켄의 삼진으로 끝났다.

그때까지 코리가 던진 공은 무려 60개. 비록 실점은 3점밖에 안되지만, 내 홈런 이후에도 루에 주자를 모두 채울 정도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수비를 나가며 덕아웃에 들어온 미기에게 말했다.

“미기, 할 말이 많아요. 공격 때는 쉴 시간이 없을 테니까 지금 푹 쉬어 둬요.”

“뭐? 하핫, 우리 루키가 뭔가 깨달은 게 있나 보군. 알겠어. 지금 푹 쉬어 두지.”

“다녀올게요.”

덕아웃을 나서며 밞은 그라운드, 잔디를 밟으며 나가는 스파이크의 느낌이 좋다.

[자, 폭풍 같던 디트로이트의 공격이 끝나고 2회 초가 시작됩니다.]

[이게 바로 젊은 팀의 무서움입니다. 한번 불이 붙으면 좀처럼 꺼지지 않아요. 라인업을 보면 미구엘 카브레라 선수와 닉 카스테야노스 선수, 제임스 맥켄 선수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25살 미만의 선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투수진도 평균연령이 꽤 낮죠?]

[타자보다는 조금 높지만, 현재 콜업 대기 중인 선수들이 꽤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 선수들이 합류하면 정말로 투타 양쪽에서 젊은 팀이 되는 거죠.]

[디트로이트의 리빌딩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죠?]

[지금 같은 경우는 리빌딩보다는 리로딩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아니, 그 중간이라고 해야 하나요? 현재 뛰고 있는 선수 중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서비스타임을 채우지 못했거든요.]

[말씀하신 순간, 뷰 버로우즈 선수가 초구를 던집니다.]

“스트라이크!”

[바깥쪽 낮은 직구를 제대로 찔러 넣었네요.]

[타선의 지원을 받으니까 많이 안정된 모습이죠?]

[다행입니다. 계속해서 이런 모습을 보여 줬으면 좋겠습니다.]

예전 한국야구에는 향운장이라고 불린 선수가 있었다.

이닝 시작할 때 라면에 물을 붓고, 이닝이 끝나고 나서 먹으려 했더니 아직 익지도 않았다는 우스갯소리를 만들 정도로 빠른 투구 템포와 공격적인 경기운영을 가져간 분이다.

그리고 지금 이닝을 마치고 들어가는 버로우즈의 등 뒤에서 TV에서만 봤던 선배님의 얼굴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뷰, 지금처럼만 해! 아주 좋아!”

경기 중에 투수에게 말을 걸지 않는, 아니 말을 걸 수 없었던 론이 덕아웃에서 크게 외칠 정도로 흠잡을 데가 없던 투구였다.

미기의 옆자리에 앉자마자, 미기가 내게 물었다.

“그래, 붐. 기분이 어때?”

“음, 최고예요. 아니 음…….”

“정확하게 표현할 단어가 없지?”

“네, 아니 있을 거 같은데……. 오늘 집에 가서 사전을 찾아봐야겠어요.”

“하하, 아마 없을 거야. 내가 그랬거든.”

“고마워요. 진심으로.”

“이 정도야 뭐, 붐이 더 성장해야 내가 편하거든. 지명타자 자리에서라도 우승을 한번 해 봐야지.”

“음, 아마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느낌이 들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딱!

이삭이 또다시 안타를 치고 나간다. 클리블랜드의 덕아웃이 분주해지는 게 여기서도 느껴진다.

“갔다 올게요. 불쌍한 코리를 편하게 쉬게 만들어 줘야죠.”

“그래, 좋은 생각이야. 그게 진짜 동업자 정신이지.”

“하하핫.”

이제 시즌은 시작됐고, 우려하던 체력도 아직은 충분하다. 대기타석으로 나가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진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이삭과 카스테야노스를 맞이했다.

“오늘 불타는데, 이삭?”

“보통이지. 너도 빨리 들어와, 알지?”

알다마다.

“카스테야노스, 홈런 축하해요.”

“힘 빠져 헐떡이는 먹잇감이야. 끝내고 와.”

“콜.”

자비로운 사자의 마음가짐으로. 다친 먹잇감의 숨통을 끊을 시간이 됐다.

타석에서 바라본 코리 클루버의 얼굴은 평온하다. 마치 점수를 한 점도 주지 않은 투수처럼.

‘마운드에서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길래……. 신기할 정도로 무표정이네.’

그리고 그가 던진 초구인 투심은 목적지인 포수의 미트가 아닌 반대편 관중석에 떨어졌다.

다시 한 번 쏟아지는 붐 콜.

언제 들어도 짜릿해. 늘 새로워.

내게 홈런을 맞은 이후 코리 클루버는 4회까지 110구가 넘게 던지며 분투했지만, 버로우즈도 100개가 넘는 공을 던지며 6이닝을 버텼다.

9-2,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승리.

나는 4번의 타석에서 2개의 홈런과 4타점, 그리고 2개의 볼넷을 얻었다. 도루 2개는 덤.

그리고 나는 TV에서만 보던 수훈선수 인터뷰를 하게 됐다.

금발 미녀 아나운서와 함께.

들고 있는 마이크를 내게 향하는 아나운서에게 좋은 향기가 난다.

“안녕하세요, 사범 킴 선수. 붐이라고 불러 드릴까요?”

“편하신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그럼 붐이라고 부를게요. 시즌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됐는데 오늘 멀티 홈런을 포함해서 벌써 7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개 차이로 아메리칸리그 홈런 1위를 달리고 있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나는 루키다. 루키니까, 루키다운 자세로 인터뷰를 해야지.

“당연히 기분 좋죠. 아직 시즌 초반이라 1위를 할 수 있는 거 같은데…… 이왕이면 시즌이 끝날 때까지 이 자리에서 머물렀으면 좋겠네요.”

“와우, 공개적으로 홈런 레이스를 선언하시는 건가요?”

“하하, 루키는 겁이 없어야 한다고 덕아웃의 누군가 말했거든요.”

“누군지 궁금하네요. 그건 그렇고. 오늘 1, 2회에 멀티홈런을 치면서 코리 클루버를 침몰시키셨는데, 어떤 공을 노리고 들어가셨나요?”

땀 냄새가 나나? 처음과 달리 나에게서 거리를 두는 아나운서 쪽으로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공을 정하고 타석에 들어간 건 아니었고, 그저 오는 공을 정확하게 맞…… 어푸우으왁!”

큰 통에 가득 채운 음료들이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그래, 이것도 TV에서 많이 본 장면이다.

* * *

“후, 이거 어떡하죠? 좋은 장면은 다 놓쳤는데.”

“어쩔 수 없지. 일단 첫 번째 홈런 장면은 가져온 카메라로 찍은 걸 쓰고, 두 번째는 여기 방송국에 자료요청을 하자고. 그래도 아까 수훈선수 인터뷰 끝나고 추격전은 찍었으니 다행이지.”

“저는 무슨 워터파크 온 줄 알았어요. 화낼 때까지 계속 쏟아붓던데…….”

“그러게, 그런 장난도 팀 분위기를 말해 주는 거니까. 아무튼 서둘러서 오길 잘했어. 아쉽긴 해도 좋은 장면이 많아.”

“이제 내일이면 장비하고 나머지 스태프들도 도착하니까 본격적으로 촬영할 수 있겠네요.”

“잘 만들어 보자고. 느낌이 와. 메이저리그 홈런왕을 노리는 한국인. 아주 좋아.”

장비를 챙기는 김PD의 눈빛이 먹이를 노리는 야생동물처럼 빛난다.

* * *

3일 후.

“수고하셨습니다.”

“아뇨, 저보다 사범 선수가 더 수고하셨죠. 덕분에 좋은 장면 많이 찍어 가네요.”

“오늘 저녁 비행기시죠? 경기 때문에 배웅도 못하고, 아쉽네요.”

“하하, 괜찮습니다. 돌아가서 편집하고 방송일자 정해지면 알려 드릴게요.”

“그러면 저야 좋죠. 아 그리고…… 편집, 잘 부탁드립니다.”

“네? 아, 걱정 마세요. 제가 또 그쪽 분야의 달인이거든요. 아무튼, 이제 출발할게요. 김사범 선수, 화이팅!”

그렇게 3일간 내 주변을 떠나지 않던 카메라들이 떠나갔다. 경기하랴, 인터뷰하랴 정신없던 내 생활 패턴도 이제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겠지.

항상 저녁 늦게 끝나는 야구의 특성상 아침에는 항상 보충 인터뷰를 했다. 며칠간 복잡했던 집이 이제는 좀 휑뎅그렁해 보인다.

‘이렇게 맘이 헛헛할 땐 그걸 해야지.’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시간은 곧 금이니까.

“쓰읍, 후우우우우우.”

모든 동작은 바르게 호흡을 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킴, 벌써 나와서 운동하는 거야?”

“아, 이삭. 웬일이야? 일찍 나왔네?”

“아, 잠깐 볼일이 있어서.”

“그래? 좋은 일인가 봐? 표정이 좋네.”

신난 듯 몸을 흔들며 다가오는 이삭.

나는 이삭이 다가오는 만큼 떨어졌다.

“뭔데? 거기서 말해. 스탑!”

“등장음악 바꿨어. 작년엔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그냥 놔뒀는데 별로 맘에 안 들었었거든. 그래서 바꾸고 왔지.”

“등장음악? 아아, 그래.”

“뭐야? 별로 신경 안 쓰나 보네? 그러고 보니 넌 등장음악이 뭐였지? 기억이 안 나.”

“나도. 멜로디는 기억나는데…….”

“아무튼 그것도 캐릭터야. 리베라나 호프먼처럼 좋은 음악을 선택하면 등장음악만 울려 퍼져도 사람들이 널 생각할걸?”

막상 생각해 보니 떠오르는 노래가 없다.

“음…… 나도 바꾸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떠오르는 노래가 없네. 좀 생각해 봐야겠다.”

“그래, 아무튼 좀 적당히 하고. 몇 시간 후면 경기니까 무리하지 마.”

“오케이. 좀 이따 보자.”

등장음악이라.

* * *

[김사범 : 등장음악으로 쓸 좋은 노래 좀 추천해 줘. 아는 노래가 없다.] 12:08

[서울의1번타자 : 남행열차] 12:08

[한길만꾸준히! : 축구왕 X돌이 OST. 슛! 골은 나의 친구~] 12:09

[서울의1번타자 : 어 그럼 나도 바꿀래. 피구왕X키 가즈아!] 12:09

[김사범 : 진지하게. 도저히 생각이 안 난다. 도와줘.] 12: 14

[민수야가자! : 사범이가 진지하게 물어보는데 다들 왜 그러냐 ㅡㅡ 잠깐만 제목 좀 확인하고 알려줄게] 12:15

[김사범 : 고맙다] 12:15

[민수야가자! 님이 파일을 보내셨습니다.] 12:17

7명 중에서 한 사람 정도는 진지하게 생각해 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고맙다 민수야.

‘근데 불법 다운로드한 건가? 그냥 제목만 알려 주면 되는데. 찝찝하게.’

파일 용량이 크지 않은 듯 금방 다운로드 된 파일을 재생했다.

“꺼어어어어어어어어억!”

아…….

네가 뭘 먹었는지 여기까지 냄새가 나는 거 같다. 이 X끼야.

[서울의1번타자 : 미친 도랏 ㅋㅋㅋㅋㅋㅋㅋㅋ] 12:20

[서울의1번타자 : 와 놀리려고 기까지 끌어모아서 트름한 거야? 미친ㅋㅋㅋㅋㅋ] 12:20

[한길만꾸준히! : 으 ㅅㅂ 거의 잠들었는데 깼어……. 내가 내일 저놈 죽이고 지옥 간다.] 12:20

[민수야가자! : 왜? 메이저리그 가서 딱! 연봉조정 딱! 장기계약 딱! 연봉 꺼억! 좋잖앜ㅋㅋㅋㅋ] 12:21

[김사범 : 다 꺼져. 혼자 있고 싶으니까] 12:23

정말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 녀석들이다. 결국 나는 내가 아는 최고의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짐…… 도움이 필요해요.]

[혹시 사고라도 쳤어요? 아니면 이 밤중에 다운타운이라도 간 거예요?]

[아뇨, 등장음악이 필요해요.]

[네?]

[쿨한 걸로. 들으면 상대방 투수들 오금이 저릴 정도로.]

[내일 이야기하죠. 안 그래도 골라 놓은 트랙이 있어요.]

자본주의 만세. 짐에게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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