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김사범, 2020시즌(디트로이트 루키 시티)(2)
오클랜드와의 4연전을 2승 2패로 마무리한 우리는 인터리그를 위해 애리조나로 출발했다.
“애리조나는 어때?”
“뭐, 우리랑 비슷하지. 19시즌 들어가기 전에 다 정리하고 리빌딩 중이야. 예전에 골드슈미츠가 있을 때야 무서운 타선이었는데, 지금은 뭐, 수비가 좋은 팀? 그 정도?”
이삭의 말에 손에 들린 전력분석 자료를 다시 펼친다.
우리와 비슷하게 젊은 선수로 구성되어있는 선수단. 하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우리에게 있는 미기가 저기엔 없고, 우리에게 없는 그레인키가 저기엔 있지.’
로테이션 상 1차전에서 맞붙게 될 투수, 잭 그레인키.
2019년을 앞두고 리빌딩 모드로 들어간 애리조나가 트레이드 매물로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트레이드 거부권을 행사한 그는 아직도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멘트를 남겼다.
‘내가 뛸 팀은 내가 정한다. 왜냐하면 난 그레인키니까.’
날고기는 투수들이 해도 오만하다 평가받을 말이지만, 정작 팬들의 반응은 ‘그레인키답네’였다. 그만큼 자신에 대한 에고가 강하고 솔직한 이미지의 선수니까.
덕분에 애리조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어차피 그레인키 정도의 투수면 FA가 얼마 남지 않은 순간에도 그럭저럭 괜찮은 유망주와 트레이드가 가능하다는 게 애리조나 입장에서 유일한 위안거리다.
그리고 그런 그를 상대하는 투수가 바로 따끈한 루키, 우리의 케이시 마이즈다.
친한 동료의 메이저 데뷔 무대와 TV로만 봤던 투수의 공을 타석에서 볼 수 있다는, 아니 칠 수 있다는 설렘이 더해진 경기
그래서 난 저기에 널브러져 자는 폴리와 달리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 *
다음 날.
경기 전, 케이시의 연습투구를 지켜봤다. 손에서 떠난 공이 멋진 궤적을 그리며 정확하게 포수 미트로 빨려 들어간다.
“케이시, 준비는?”
불펜 투구를 마친 케이시에게 말을 걸었다.
“좋아. 아주 좋아.”
“긴장하지 말고, 그냥 네 공을 던져, 루키.”
“그래. 고맙다 루키.”
케이시의 장점이자 단점은 표정으로 속마음을 읽기 힘들다는 거다.
“그레인키가 상대인데, 걱정되지 않아?”
“내 상대는 타자들이야. 상대 팀 투수가 누군지는 신경 안 써.”
음. 그렇긴 하지.
“이번 경기 인터리그인 거 알지?”
“알지.”
“그레인키도 타석에 들어와.”
“……그래.”
“조심해, 나중에 투수한테 맞았다고 울지 말고.”
“고맙다.”
고맙긴, 긴장하긴 했었구만. 평소에 그렇게 철두철미하던 녀석이 빈틈을 보이다니.
그래도 내가 건 장난에 조금은 긴장이 풀렸기를 바란다.
[안녕하십니까, 한국의 메이저리그 팬 여러분. 잠시 후, 정확히 10분 뒤에 디트로이트와 애리조나, 애리조나와 디트로이트의 경기가 시작됩니다.]
[애리조나의 선발투수로 나서는 잭 그레인키 선수는 한국 팬들에게 익숙한 선수죠? 그에 맞서는 디트로이트의 케이시 마이즈 선수는 얼마 전 콜업 된 루키입니다.]
[하하, 선발투수만 놓고 본다면 한쪽으로 무게추가 쏠리는 느낌인데요, 타선은 어떤가요?]
[디트로이트가 자랑하는 게 바로 이 타선입니다. 1번 이삭 페레데스-2번 카스테야노스-3번 김사범-4번 미겔 카브레라 선수로 이어지는 타선의 파괴력이 대단하거든요?]
[어제 경기로 카브레라 선수도 홈런 개수를 두 자리로 늘렸죠?[
[맞습니다. 상대 팀 선수들이 김사범 선수를 집중적으로 견제하면서 상대적으로 미겔 카브레라 선수와 승부하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이번 시즌 지명타자로 나가면서 체력을 많이 비축한 카브레라 선수가 이런 상황을 놓칠 리 없죠.]
“붐! 뭐해! 한번 뿌려 봐!”
경기 전 그라운드 적응 훈련 중, 오랜만에 1루수 미트를 낀 미기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맞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경기는 내셔널리그 룰로 이뤄지기 때문에 오랜만에 카브레라 선수가 1루수 미트를 끼는 모습을 볼 수 있겠군요.]
[그렇죠, 그것도 오늘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애리조나는 어떻죠?]
[2019년에 마침내 타격 능력을 개화한 소자 주니어 선수를 빼고는 이렇다 할 선수가 없어요. 타선은 디트로이트의 우세입니다.]
[방패와 창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말씀드리는 순간. 경기 시작됩니다.]
익숙하지만, 오늘의 경기는 새로운 기분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하지만 조금 다른 그림의 첫 획을 긋는 느낌.
“플레이 볼!”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더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봐야 알겠지만, 아마 내 예상과 아주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 * *
이삭의 타석을 덕아웃에서 지켜본 나는 그저 감탄사만 내뱉었다.
정확히 이삭의 무릎 근처에서만 노는 공들. 문제는 이삭의 타석에서 그레인키는 단 하나도 같은 구질을 던지지 않았다는 거다.
그야말로 완벽한 제구.
이삭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덕아웃으로 들어오고 있다.
“어때?”
“수 싸움으로는 안 되겠어. 노리는 공은 절대 안 주는 거 같아. 말로만 들었었는데……. 아무튼 뭘 던지든 존 근처로 와. 무조건.”
그레인키는 필요하다면 평균구속 90마일이 안 되는 포심도 한가운데로 던질 수 있는, 대담하고 공격적인 투수다.
타석으로 카스테야노스가 나가고, 대기타석에서 타이밍을 가늠해본다.
‘와인드업, 키킹, 둘, 셋.’
제구가 좋은 투수일수록 투구 타이밍이 일정한 경향이 있으니까, 타석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익혀놔서 나쁠 건 없다.
딱!
카스테야노스의 타구가 내야를 지나 뻗어 나가다 곧 힘을 잃고 떨어졌다.
이제 드디어 내 타석이다.
공격적인 투수에게는 초구에 무조건 풀스윙이다. 스윙에 공이 맞지 않아도 심리적으로 압박을 줄 수 있으니까.
구종에 대한 건 신경 쓰지 말고 존 아래로 들어오는 공만 노린다.
와인드업, 키킹, 그리고 둘 셋……. 넷?
펑!
“스트라이크!”
당했다.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 아래, 가장 먼 꼭짓점을 통과한 포심.
하지만 일부러 타이밍을 늘려 던진 그레인키 때문에 대처하지 못했다.
‘후, 집중. 집중하자.’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타석에서 다시 자세를 잡자, 이번엔 반 템포 빠르게 들어오는 공.
틱!
“파울!”
딱 치기 좋은 코스, 치기 좋은 구속의 공인데 템포를 조절하는 것만으로 파울이 됐다.
이제 내게 남은 스트라이크는 하나. 집중하자.
그리고 3구.
“스트라이크! 아웃!”
난 60마일짜리 커브에 삼진을 당했다.
“대단하지?”
“대단하네.”
내 글러브와 모자를 들고 온 이삭, 우리에게 슬픈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어진 1회 말, 애리조나의 공격.
퍼엉!
내가 돌아오기 전에 봤던 바로 그 공. 97마일에 달하는 포심이 몸쪽 존을 통과했다.
“스트라이크!”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압박하던 타자가 타석에서 벗어나 침을 뱉고 다시 타격자세를 취한다. 아까보다 반걸음 뒤로 물러난 타격 스탠스
내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케이시의 눈빛이 반짝였을 거다. 이런 정보를 충분히 이용할 줄 아는 투수니까.
“스트라이크!”
바깥쪽 슬라이더.
“볼”
몸쪽 높은 포심. 그리고…….
“스트라이크! 아웃!”
케이시가 자랑하는 스플리터가 홈플레이트 한가운데로 날아가다 해머에 찍힌 것처럼 떨어졌다.
데뷔 첫 이닝, 4구 만에 삼진을 잡은 케이시의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하다.
[삼진 한 개와 땅볼, 포수 팝 플라이로 이닝을 종료하는 케이시 선수입니다. 아직 속단하긴 이릅니다만, 초반 경기운영이 좋은데요?]
[맞습니다. 긴장될 법도 한데 아주 잘 던져주고 있네요. 특히 첫 타자를 상대로 던진 스플리터는 정말 예술이네요.]
[구속과 낙차 모두 일반적인 스플리터하고 차이가 있네요?]
[포크볼이나 스플리터를 주 무기로 삼는 투수 중 몇몇은 그립을 얼마만큼 깊게 쥐느냐로 낙차를 컨트롤 한다고 하거든요? 케이시 선수도 가능한 것 같네요.]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노련하군요.]
[노련하다기보단……. 타고났네요. 손재주가 아주 좋은 투수예요.]
[1회는 이렇게 양 팀의 득점 없이 끝났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나이스 볼!”
“보통이지.”
* * *
노히터, 투수가 단 한 개의 안타도 맞지 않고 한 게임을 끝내면 주어지는 기록이다.
팀당 160경기를 넘게 하는 메이저에서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나오는 나름 희귀한 기록이 지금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오늘 경기의 선발투수 둘 다.
[제이크 램, 쳤습니다! 타구는 3-유간으로! 김사범 선수 역동작으로 잡아서…… 점프 후 바로 뿌립니다!]
“아웃!”
“좋았어! 나이스 송구!”
내 수비를 칭찬하는 미기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준다.
후. 이번 공은 정말 아슬아슬했다.
잡기에 충분한 공이었고, 던지기에 충분한 거리였다. 단지 두 개가 합쳐져서 역동작이 걸리다 보니 어려웠을 뿐.
[어려운 타구를 잘 처리했어요. 케이시 선수도 2회 말 볼넷 하나를 제외하고 아직 노히터를 유지합니다.]
[두 투수가 5회까지 정말 잘 던지고 있죠? 오랜만에 보는 명품 투수전입니다. 그레인키 선수야 언제든지 노히터에 도전할 수 있는 선수지만, 케이시 선수. 정말 놀랍습니다.]
[95마일 이상의 포심과 결정구인 스플리터의 조합으로 애리조나 타자들을 상대하고 있는데, 포심의 구위와 제구도 훌륭하지만 스플리터가 정말 알고도 못 칠 정도의 구위네요.]
[사실 이 선수를 올리기 위해 짐머맨 선수를 방출했다고 볼 수 있거든요? 이 정도면 디트로이트의 과감한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되네요.]
“스트라이크. 아웃!”
[또다시 삼진을 잡는 케이시 선수입니다. 슬라이더죠?]
[슬슬 투구 레퍼토리를 바꾸고 있어요. 방금도 타자가 2구째 스플리터를 골랐죠? 눈에 슬슬 익었다는 뜻인데, 그러자 바로 결정구를 바꾼 거죠. 잘 던집니다. 정말 잘 던져요.]
[이 투수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합니다.]
5회를 마친 덕아웃, 아직 5회지만 모두가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다.
“저 이 장면 어디서 본 거 같아요, 미기.”
“그래? 흔한 장면은 아니지.”
“근데 원래 이렇게 일찍부터 조용히 하는 거예요? 보통 경기 마지막쯤에 이러던데.”
“하하, 모두 배려하는 거지. 루키잖아. 밉살맞게 구는 녀석도 아니고.”
“그렇긴 한데, 항상 떠들썩하던 덕아웃이 조용하니까 적응이 안 되네요. 아무튼, 어린 선수들은 분위기에 너무 빨리 휩쓸리는 게 문제예요.”
아차.
“그렇긴 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린 녀석.”
“끄응……. 제가 제 무덤을 팠네요. 그나저나, 케이시의 노히터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는데……. 저 괴물을 어떻게 잡을까요?”
“음. 뭐, 그냥 공 보고 공을 쳐야지. 그게 안 된다면…….”
“안 된다면?”
“머리가 좋은 투수니까 함정을 깔아놔도 좋고. 연기를 잘해야 하겠지만.”
함정이라……. 몇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르긴 한다.
“가능할까요?”
“나는 머리싸움보다 몸으로 싸우는 게 좋아서. 뭔가 떠오르는 게 있나 봐?”
“해 봐야죠. 엄청나게 파격적인 방법도 있고. 덜 파격적인 것도 있고.”
“번트 같은 거?”
“아…….”
엄청나게 파격적인 내 아이디어 1호다. 기습번트.
“자신 있으면 해봐. 근데 저 녀석, 수비도 꽤 할걸? 내야수 출신일 텐데. 골드글러브도 있고.”
“흠…….”
“밑밥이 중요해. 오늘 경기에서 당했던 공들을 생각해 봐.”
첫 타석엔 슬로우커브, 두 번째 타석엔 몸쪽 꽉 찬 공.
“어쩌면 이제 저 녀석이 준비해 온 수작질이 다 떨어졌을 수도 있고. 집중하자고. 수비부터 착실하게. 오늘 경기는 수비가 생각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어.”
“하긴, 그게 케이시를 직접 돕는 거니까요.”
“그렇지.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중요한 건?”
“내가 오랜만에 수비에 나선다는 거지.”
아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