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45화 (45/175)

45화 김사범, 2020시즌(디트로이트 루키 시티)(3)

[6회 말, 애리조나의 공격이 케이시 선수에게 또다시 막힙니다.]

[그래도 이번 공격은 꽤 의미 있었어요. 변화구를 아예 배제하고 패스트볼만 노려서 치는 전략이었던 것 같은데, 이게 효과적이었죠? 어느새 케이시 선수의 투구 수가 90개를 넘어섰습니다.]

[아, 5회 말까지 68개의 투구 수를 기록하던 케이시 선수였는데 아쉽네요. 이렇게 되면 감독으로서는 고민이 많겠어요.]

[그렇죠. 메이저리그가 투구 수 관리에 엄격한 편이긴 하지만, 어쩌면 평생 한 번일 수도 있는 기회니까요.]

덕아웃에 들어오자마자 수건을 뒤집어쓴 케이시. 꼭 기록 때문이 아니더라도 함부로 말을 걸 수 없는 분위기다.

“붐, 다음 타석이야. 준비해.”

투수전인 만큼 게임 진행도 빨라서 정신이 없다. 7회 초, 대기타석으로 향하며 전광판을 봤다. 0의 행진, 지금 이 타석이 마지막 타석일 수도 있다.

“볼!”

내 앞 타선인 카스테야노스의 시작이 좋다. 어쩌면 미기가 말한 대로 그레인키의 레퍼토리가 다 떨어졌을 수도 있고.

“스트라이크!”

“볼!”

카운트는 2-1, 승부를 걸어 볼 만한 타이밍인데…….

딱!

“파울!”

역시나. 몸쪽 낮은 곳으로 향하던 포심을 노려 친 카스테야노스. 하지만 배트가 조금 빨랐는지 마지막에 크게 휘어져 파울이 된다.

[아, 그레인키 선수도 많이 지쳤어요. 방금 파울타구가 된 포심은 86마일이 찍혔거든요? 2020시즌에 포심에 구속 차이를 주면서 재미를 보기는 했습니다만, 이 상황에서는 힘이 떨어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아요.]

[그렇군요. 7회 초, 그레인키 선수의 투구 수는 현재 82개입니다.]

2-2, 유리한 카운트를 만든 그레인키가 투수판을 밟기 전 로진백을 들어 몇 번 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주친 눈빛.

배트를 들고 있는 나를 보자 갑자기 씨익 웃는 크레인키. 그러다 곧 표정을 없애고 포수와 사인교환을 시작한다.

‘뭐지? 갑자기?’

길 가다 실수로 모르는 사람의 손을 잡은 것 같은 기분이다. 그것도 모르는 남자의 손을.

그리고 잠시 후.

“스트라이크! 아웃!”

그레인키는 2개의 공을 더 던져 카스테야노스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 * *

마운드 위, 그레인키는 모자를 벗어 땀을 닦았다.

‘이제 마지막 고비인가.’

그의 눈에 타석에서 자신의 오른발을 단단히 고정하는 타자가 보였다.

‘처음 분석자료를 봤을 땐 어이가 없었지.’

며칠 전에 구단 전력분석팀이 그에게 준 자료를 보던 그레인키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받은 전력분석 자료에는 메이저리그에 처음 올라온 루키가 낼 수 없는 수치가 적혀 있었으니까.

‘클래식 스탯, Wrc+, OPS+, Eqa도 리그 최상위권이군. 이 정도의 스탯이면 WAR가 대체…….’

리그에서 손꼽히는 세이버메트릭스 전문가인 그레인키는 복잡한 수치 속에서 김사범의 가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때부터 전력분석실에서 살다시피 한 그는 오늘 경기 직전에야 머릿속을 정리할 수 있었다.

‘단순하게. 공의 변화나 코스로 승리하기보다 최대한 타이밍을 뺏어야 한다.’

그렇게 그가 가진 노하우를 모두 털어 가며 앞선 두 타석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7회 초, 대기타석에서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이 보고 있는 김사범을 발견했을 때 그레인키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막지 못했다.

그리고 맞이한 김사범의 타석.

‘이제 밑천도 다 털렸는데, 뭘 해야 하나.’

그레인키는 비어있는 1루를 흘긋 봤다.

‘이제는 뭐……. 마침 비어있으니까.’

노련한 투수의 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 * *

김사범이 타석에 발을 깊게 박아 넣을 때, 디트로이트의 덕아웃에서 수건을 둘러쓰고 있던 한 남자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내 욕심대로 하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그가 던진 6이닝 동안 상대 팀의 타자들은 단 한 개의 안타도 치지 못했다.

데뷔전 노히터, 그 마법 같은 단어에 지금까지 힘든지 모르고 던졌지만, 스스로가 냉정하게 바라본 몸 상태는 지금이 물러날 시기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상체를 거의 완벽히 덮은 수건의 틈새로 누군가 보인다. 이삭 페레데스. 오늘도 몇 개인가의 안타성 타구를 걷어 내어 도움을 준 내야수. 그리고 제법 믿음직한 친구.

그의 성격상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얼굴을 덮고 있던 수건을 치운 뒤, 이삭의 옆에 가서 앉았다.

“어…… 케이시? 몸은 좀 어때? 좀 더 편히 쉬어도 돼, 노히, 아니 잘 던지……. 아니 이게 아니라, 데뷔전이니까. 다들 이해해 줄 거야.”

이삭의 말을 듣자마자 케이시의 입엔 미소가 걸린다.

“노히터라고 왜 말을 못 해. 지금이 경기 후반도 아니고.”

“아니 그게 좀…….”

평소엔 자신이 루키가 아니라며 거들먹대던 이삭도 메이저에서 처음 겪어 보는 상황 앞에선 영락없는 루키의 모습이다.

“이삭, 어떻게 해야 할까?”

“뭐가?”

“솔직히 지금 한계야. 슬슬 제구도 안 되고. 그래도 내가 마운드에서 버텨야 할까?”

“음…….”

신음을 내며 잠시 생각에 잠긴 이삭이 이내 고개를 들고 케이시에게 말했다.

“예전에 더블A에서 처음으로 같이 저녁을 먹었을 때, 기억나?”

“기억나지.”

“그때 목표가 월드시리즈라고 했지?”

“그렇지.”

“그럼, 그걸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되겠네.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니까. 지금 상태에서 더 던져서 노히터를 해도 좋고, 교체해 달라고 말해도 좋아. 지금 너는 너에게 팀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던졌으니까.”

“그런가?”

“그렇지. 어차피 결정은 네가 하는 거니까. 기록을 위해 끝까지 던진다고 해도 난 팀을 위해 공을 잡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팀을 위해 공을 잡을 거야.”

“팀이라. 알겠어. 론에게 말하고 와야겠네.”

이삭의 옆에서 몸을 일으킨 케이시가 한마디를 덧붙인다.

“사범에게 전해 줘, 다음 이닝부터는 바짝 긴장하라고. 아마 사범에게 공이 많이 갈 거야.”

빠아악!

이삭이 덕아웃 밖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케이시에게 말했다.

“음…… 직접 말해도 되겠는데?”

이삭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린 케이시의 눈에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베이스를 돌고 있는 김사범의 모습이 보였다.

* * *

[6구, 던집니다! 몸쪽 공을 때립니다! 이 공이 좌측 담장 밖으로! 밖으로!]

[휘어 나가면 안 돼요!]

텅.

[폴대를 때립니다! 김사범 선수의 솔로 홈런! 잭 그레인키 선수의 노히터를 깨는 오늘의 첫! 안타이자 홈런입니다!]

[아, 몸쪽 포심을 그대로 받아쳐 홈런으로 만들었어요! 심지어 공이 깊었거든요? 카운트가 몰린 상황에서 기가 막힌 타격이 나왔습니다.]

[그레인키 선수는 아쉬울 거 같습니다. 잘 던진 공이었거든요?]

[그렇습니다. 이걸 때려내면 투수로서는 뭐, 할 말이 없죠.]

베이스를 돌며 아직도 울리는 손을 살살 털어낸다. 그래도 손이 울린 덕분에 홈런을 치고 난 뒤 감정절제가 됐다.

그게 아니었으면 내 배트도 저기 담장 밖으로 넘어갔을 거다. 그리고 MLB.com 첫 페이지에 어메이징 배트플립이란 기사도 같이 올라갔겠지. 다음 날 내 머리엔 야구공이 박혀 있었을 거고.

덕아웃에 도착해서 한바탕 소란을 겪고 난 뒤, 내게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Let's get it BOOM! BOOM! BOOM!]

원정경기라 디트로이트 팬이 많이 없던 거로 기억하는데, 고맙게도 목이 터져라 날 응원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덕아웃 밖으로 돌려 환호하는 팬들에게 모자를 벗고 인사한다.

우와아아아아!

다시 끓어오르는 관중석의 분위기, 기분 좋은 함성과 함께 덕아웃으로 들어온 내게 이삭이 다가와 묻는다.

“붐, 어떻게 친 거야?”

“설명하자면 좀 긴데…….”

“해 봐, 어차피 저쪽이 투수 교체해서 시간 많아.”

“음, 일단 초구가 포심이었어. 바깥쪽 포심.”

특별한 것 없이 평범한 투구 폼으로 던진 포심이었다. 단지 스트라이크 존에서 공 반 개쯤 벗어났다는 것 빼고는.

“내가 잡은 존에서 분명 벗어난 공이었어.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분명히. 근데 스트라이크 콜이 들리더라고.”

저번 타석에서도 그레인키가 바깥쪽 존에 몇 번이나 공을 던졌기 때문에 거의 확실했다.

“그때 알았지. 존이 넓어진걸. 아마 그레인키도 알았을 거야.”

“벌써 노히터를 신경 쓴 건가? 구심이?”

“글쎄,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지.”

“그렇긴 한데…….”

“아무튼, 그 이후에 던진 2구도 바깥쪽. 존이 넓어졌는데 어디까지 넓어졌는지 모르니까 일단 참았지.”

정확히 초구를 던진 지점에서 공 3개만큼 아래로 던졌다. 보면서도 믿기 힘든 제구력.

“그렇게 카운트가 한번 몰리니까 어쩔 수 없더라고. 바깥쪽 슬라이더 커트하고, 떨어지는 공 커트하고.”

“아, 생각만 해도 짜증 나네.”

“어, 짜증 났어. 그렇게 5구째 커터? 맞나? 아무튼, 슬라이던지 커터인지를 커트하고 나니까 갑자기 느낌이 왔어.”

내가 투수였다면, 5구 연속으로 바깥쪽 공을 던진 뒤에 한 개쯤은 몸쪽으로 던지지 않을까?

“어차피 존도 넓어졌겠다, 몸쪽 깊게 넣어서 타자가 베이스에 못 붙게 하고 다시 바깥쪽을 던질 것 같더라고.”

“나라도 그랬을 거야.”

갑자기 케이시의 목소리가 들린다. 분위기는 다 잡았나?

“어? 멀쩡하네? 아무튼, 그래서 일부러 존에 좀 붙어서 서 있었어. 만약 바깥쪽 공이 또 오면 커트하고, 몸쪽으로 오면 무조건 칠 생각이었지.”

“아…….”

“그리고 몸쪽 포심이 왔고, 결과는 봤지?”

좌측 폴대를 맞추는 홈런.

노히터 브레이커 김사범.

“하, 결국 운이었네.”

이삭의 질투를 가볍게 무시하고, 다시 경기에 집중하려 할 때, 케이시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킴, 오늘 컨디션 어때?”

“죽이지. 너무 죽여서 상대 팀 투수를 죽여 버렸잖아.”

“그래? 다행이네.”

“왜?”

“내가 노히터까지 3이닝 남았잖아?”

“그렇지.”

“너한테 달렸어.”

얜 또 뭐라고 하는 거야.

“설명을 좀 길게 해봐.”

“여기 파크팩터, 모르지?”

“자료에 있던 거 같은데……. 기억은 안 나네.”

“꽤 높아. 그래서 맞춰 잡으려면 땅볼유도를 해야지.”

“그래?”

“바빠질 거야. 지금 론에게 안타든 뭐든 2루에 주자가 들어가면 바로 바꿔 달라고 말하고 오는 길이거든.”

“어…….”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내가 노히터를 할지, 완봉할지, 아니면 패배할지를 결정하는 건 이삭과 너라는 거야.”

뭐지, 이 부담감이 느껴지는 대화는.

“그러니까, 네가 이 경기에서 어떻게 될지는 내 손에 달려 있다?”

“그렇지. 그리고 만약 내가 승리를 하게 된다면, 난 죽이는 스테이크를 쏠 의향이 있어.”

“그건 좋네. 좋아. 딜.”

어차피 내 쪽으로 오는 공을 놓칠 생각은 없다.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을 하면 맛있는 고기가 생기는군. 이게 바로 개이득이라는 건가?’

[8회 말. 한 개 남은 아웃 카운트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이닝 두 번째 주자를 내보내는 케이시 선수.]

[이미 투구 수가 110개를 넘었어요. 개인 기록이 중요하긴 하지만 슬슬 교체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방금도 연속 타자 볼넷이었죠?]

[7회에 몸쪽 포심과 스플리터를 던져 땅볼유도를 통해 꽤 투구 수를 아꼈는데요, 아쉽네요. 이미 손의 악력이 다 떨어진 것 같아요.]

[말씀드리는 순간, 투수 교체입니다. 제이슨 폴리 선수가 달려 나오네요]

[요즘 디트로이트의 불펜진 중 제일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죠?]

[이렇게 되면 팀 노히터도 기대해 볼 만하네요. 케이시 선수로선 아쉽겠지만 이것도 경험이니까요. 한순간의 기록을 위해 몸을 상하게 하면 안 됩니다.]

[제이슨 폴리, 초구 던집니다! 아!]

신났네, 신났어.

그야말로 난폭하다는 표현이 딱 맞는 포심이 존을 통과했다.

전광판에 찍힌 숫자는 103마일, 이번 시즌 폴리의 최고구속이다.

잠시 후.

[9회 말, 마지막 타자는 애리조나의 포수 카슨 캘리 선수입니다.]

[폴리 선수가 8회 2사부터 나와서 아주 잘 던지고 있습니다. 팀 노히터까지 한 타자 남았네요.]

딱!

[캘리, 쳤습니다. 공은 2루수 방향으로! 2루수 이삭 페레데스 선수, 공을 잡고 1루에 던집니다.]

“아웃!”

[오늘 경기는 디트로이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팀 노히터를 달성하며 애리조나의 타자들을 아주 꽁공 묶었죠?]

[그렇습니다. 김사범 선수의 홈런도 대단했죠. 그러고 보니 승리투수, 마무리투수, 결승 타점을 모두 메이저리그 1년 차인 선수들이네요. 무서운 신인들입니다.]

[앞으로 디트로이트의 경기를 지켜볼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요. 이상으로 중계를 마칩니다.]

“케이시, 약속은 약속이다? 기대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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