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47화 (47/175)

47화 김사범, 2020시즌(vs LA 에인절스)(1)

미기와의 저녁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운전을 하던 이삭이 말했다.

“모레 경기가 에인절스네.”

에인절스라. 드디어 보겠군.

“어, 트라웃이 디트로이트에 강림하시지!”

약간 정신을 놓은 폴리가 대답했다.

시대의 상징. 이미 명전을 예약한 선수, 그 외 수많은 별명, 아니 칭호를 달고 있는 그가 온다.

워, 투수들 입장에서는 좀 떨리겠는데.

“좀 떨리나 봐? 하긴, 투수들에겐 두려운 존재지.”

“거를 거야. 칼같이.”

“난 아닌 척하면서 걸러야지.”

합리적인 투수와 합리적인 척하는 투수의 대답이다. 합리적이지 않은 투수가 내게 묻는다.

“근데 붐, 너도 떨리지 않아?”

“뭐가? 내가 왜 떨려?”

“트라웃인데?”

“내가 뭐? 그냥 신기하지, 트라웃이잖아. 슈퍼스타.”

내 반응이 답답한지 가슴을 치며 말하는 폴리

“아니, 아오. 지금 언론에서 너랑 트라웃을 엄청 비교하잖아. 신경 안 쓰여?”

어? 나랑 트라웃을?

“그래? 난 여기 언론은 잘 안 보니까. 그래서, 어떻게 비교하는데?”

“똑같지, 20살 때 스탯 늘어놓고 비교하고, 올해 스탯 늘어놓고 비교하고. 결론은 항상 몇 년 더 지나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트라웃이 우위다, 이러면서 끝나지.”

“흠, 맞는 말이네.”

“뭐야? 인정하는 거야? 재미없게?”

차의 창문을 열어 바람을 느낀다. 조금 후덥지근한 공기가 얼굴을 스친다.

“……까지는.”

“뭐?”

바람소리 때문에 내 말이 안 들렸는지 폴리가 몸을 기울여 내게 다시 묻는다.

“지금까지는 맞는다고.”

* * *

다음 날.

“오랜만이에요, 사범.”

“웬일이에요, 짐?”

평소와 같은 루틴으로 운동을 하러 가려는 때에 짐이 방문했다.

“오늘 경기 없는 날 아니에요?”

“그렇긴 하죠. 뭐 집에 있어 봤자 할 것도 없어서 나가서 운동이라도 하려고 했죠.”

“역시, 변하지 않는 모습이 멋져요. 그런 의미에서 이거 받아요.”

손에 든 상자를 내게 건네는 짐. 뭐지?

“뭐예요?”

“열어 봐요.”

몇 겹으로 감싸여 있는 포장지를 풀어내니 마침내 알맹이가 보인다.

얼핏 보기엔 평범한 손목시계다. 가죽 스트랩, 거기에 디지털도 아닌 아날로그.

“시계?”

“남자의 품격이죠. 앞으로 차고 다녀요.”

“전 시계 안 차는데요? 경기할 때는 어차피 못 차고”

“그래도 차고 다니는 게 좋을 거예요. 그 조건으로 받은 시계거든요.”

“그럼 돌려주면 되겠네요. 예전에 몇 번 시도했었는데 거슬린다고 해야 하나? 신경이 쓰여서…….”

“그거 하나에 2천만 원짜리예요.”

음? 내가 잘못 들었나?

“2천만 원?”

“네, 2천만 원. 아주 비싼 모델은 아닌데 뭐, 괜찮은 시계예요. 사실 그 이상의 시계는 본인의 능력으로 사는 게 더 멋있죠.”

갑자기 시계 한쪽에 적혀 있는 브랜드가 보였다. 아, 여기네. 그거구나.

“음, 몇 번 보긴 봤는데, 이런 시계를 차 보는 건 처음인데.”

“방금 전에 돌려주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죠. 2천만 원짜린지 몰랐으니까요. 하하. 야구를 잘하니까 이런 기회도 있네요.”

“그렇죠. 야구만 잘하면 돼요. 이런 것들은 부수적인 거니까. 이번 시즌이 끝나면 면허도 따요. 멋진 차도 몰아야죠.”

멋진 차, 멋진 시계. 뭔가 실감이 안 난다. 아직 고액 연봉자가 아니라 그런가.

“멋진 차는 나중에 연봉 조정하고 몰아야죠.”

“그럴까요? 흠. 아마 그 전에 몰 수 있을 텐데. 아무튼 일단 면허는 따 놔요. 오늘처럼 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오늘 다른 일정 없죠?”

“뭐 운동하는 거 빼곤…….”

“잘됐네. 운동 하고 나서 사진 좀 찍읍시다.”

“네?”

갑자기 웬 사진?

“요즘은 예전처럼 팬레터를 날리는 시대가 아니에요. SNS가 그런 로맨스를 잡아먹었죠. 사범이 개인적으로 하는 건 좀 힘들 테니 오피셜 계정이라도 만들어서 관리하려고요.”

“아, SNS.”

“관심 있어요?”

“퍼거슨 경이 말하길, SNS는…….”

“그만. 어차피 사범이 하는 게 아니라 우리 회사의 인생 낭비 전문가들이 할 거예요. 괜찮죠?”

“뭐, 귀찮지만 않으면 상관없어요.”

어차피 내가 아니라 전문가들이 하는 거니까.

술은 마시지 않아서 그럴 일은 없지만 술보다 더 무서운 새벽에 취하면 또 어떨지 모른다.

“좋아요. 온 목적이 거의 끝나가네요. 혹시 뭐 부탁할 거 없어요?”

“음…… 차량하고 운전기사?”

“크큭, 언제쯤 요청하나 했는데. 좋아요. 바로 내일부터 대기시킬게요. 오전에만 있으면 되겠죠?”

“그렇죠. 어차피 홈경기가 끝날 때는 이삭하고 같이 오면 되니까.”

“그리고 또?”

“음…… 오늘 운동하고 난 다음에 먹을 맛있는 점심?”

“콜.”

운동을 위해 파크로 향하는 차 안, 운전을 하던 짐이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아시안 게임, 자신 있어요?”

“네?”

“이번 올림픽을 내줬어요. 대신 아시안 게임을 얻었죠. 이걸 원했죠?”

“뭐, 네. 아무래도 이번 올림픽은 느낌이 안 좋거든요.”

우리나라는 3, 4위 결정전에서 도미니카에 패해 결국 메달을 따지 못한다.

물론 일본에서 개최된 올림픽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일정 논란과 판정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주요 원인은 지나치게 젊은 선수들로 구성된 선수단이었다.

뉴스에서 보니 엔트리가 좀 달라지긴 한 거 같은데……. 잘 모르겠다. 아직 김병헌이 두각을 나타내지도 않았고.

“사범도 참 대단한 거 같아요.”

“뭐가요?”

“보통 2년 후 일을 이야기하면 모른다고 답하지 않아요?”

“음, 뭐.”

“목표 의식이 확고한 거죠. 좋은 모습이에요. 하지만.”

“하지만?”

“본인이 생각한 길하고 다른 길로 흘러갈 수도 있어요. 보통 사범 같은 타입은 그럴 때 당황하더라고요.”

“생각하는 거하고 완전 다른 상황이 되면 좀 당황하긴 하겠죠?”

“하하, 그렇죠. 그럴 땐 적극적으로 주변에게 도움을 청해요. 사범도 알게 모르게 그런 도움을 주고 있으니까. 오케이?”

“오케이. 알겠어요.”

* * *

“세잎!”

[디트로이트가 챌린지를 요청합니다. 아, 트라웃 선수의 폭발적인 스피드도 대단하지만 김사범 선수의 송구도 대단했어요.]

[트라웃 선수가 정말 대단한 게, 우타자지만 웬만한 좌타자만큼 1루에 도착하는 시간이 짧아요. 그래서 덩치에 비해 생각보다 내야안타가 굉장히 많은 선수거든요?]

[그런 트라웃 선수가 친 깊은 땅볼을 건져내 어마어마한 송구로 챌린지까지 이끌어낸 김사범 선수도 대단합니다.]

[사실 김사범 선수는 타격에 대한 재능 때문에 수비 능력이 가려져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시즌이 끝나 봐야 알겠지만, 수비 WAR도 메이저리그 유격수 상위에 랭크되어 있거든요?]

[아,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아웃!”

[결과가 뒤집혔습니다. 심판의 아웃 선언으로 이닝이 끝납니다.]

챌린지는 항상 조마조마하다. 나야 늘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붐! 난 3루 관중석에서 플래시를 터트린 줄 았어! 하얀 게 반짝하더니 미트에 공이 들어 있었다니까?”

“거의 비슷한 타이밍이어서 반반 봤는데, 좀 더 빨랐나 보네. 어깨가 무슨…… 외야수 했으면 타자들이 다음 베이스는 꿈도 못 꿨겠는데?”

“이 정도 송구면 투수를 해야지. 그나저나 트라웃은 붐한테 벌써 안타 2개째 도둑맞았네. 1회 라이너 하나, 방금 전 내야안타 하나.”

덕아웃에 들어오자마자 호들갑을 떠는 동료들. 사실 조금 운이 따라 준 송구였다.

송구를 위해 글러브의 공을 잡자마자 바로 그립이 잡혔으니까.

“그만 띄워, 평범한 수비였잖아? 유격수가 하는 일이 공 잡고 아웃시키는 건데 뭐. 다들 이 정도는 하잖아?”

갑자기 뭔가 싸해지는 분위기.

“역시. 봤지?”

“아, 설마 했는데 진짜 이런 반응일 줄이야.”

그새 뭔 작당모의를 한 건지 이삭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은 채 나머지 동료들을 바라본다.

순간 단장이 이 녀석들을 다 팔아 버리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진중한 동료들로 덕아웃을 채워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성숙한 선수라…….’

불현듯 오늘 경기 전 잠깐 만난 정말 성숙한 선수가 생각났다.

“안녕하세요, 오타니 쇼헤이입니다.”

경기 전 연습이 끝나고 덕아웃으로 돌아가기 전, 누군가 날 찾아왔다.

큰 키, 서글서글한 인상. 그보다 인상적인 건 일본인답지 않은 영어발음이었다.

“안녕하세요. 김사범입니다.”

“알아요.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유망주, 아니 유격수를 모르면 안 되죠.”

“하하, 별말씀을요. 한국에 있을 때 기사로 많이 접했습니다. 막상 이렇게 보니까 되게 신기하네요.”

평범한 길을 거부한 선수다. 왠지 이도류의 오타니 쇼헤이라고 불러야 할 거 같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경기, 나오시죠?”

“네, 나가죠. 오, 아니 쇼헤이 씨, 음. 어떻게 불러야 하나요? 일본에서는 바로 이름을 부르는 게 실례인거 맞죠?”

프로 생활 중 일본진출을 했다 돌아온 선배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처음에는 이런 문화 차이 때문에 오해를 사기도 했단다. 이런 문화를 뭐라더라. 나마스떼라고 하던가.

“하하, 그렇긴 한데 괜찮아요. 우리 둘 다 타국에 나와 있는데요. 이름으로 편하게 불러 주세요.”

“아 네, 저도 편하게 붐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오타니 씨도 오늘 나오시죠? 지명타자?”

“네. 그럴 것 같네요. 오늘 경기 끝나고 일정이 있으신가요?”

“아뇨, 없습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경기 끝나고 식사 어때요?”

“좋죠. 제가 경기 후에 따로 연락할게요.”

“알겠습니다. 좋은 경기가 되길.”

“좋은 경기가 되길.”

메이저리그 첫해에 정말로 투타 양쪽에서 괜찮은 성적을 올린 오타니는 아쉽게도 2019시즌을 앞두고 팔꿈치 수술로 인해 투수를 포기했다.

아마 다음 시즌부터 다시 이도류로 돌아간 오타니는 곧 베이브루스 이후 메이저에서 처음으로 10승-10홈런을 달성했던 거로 기억한다.

하지만 훈훈했던 한-일 메이저리거 간의 기류와 다르게, 경기는 원사이드 게임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스트라이크!”

7회에 이미 9점 차이로 점수가 벌어져 버린 상황. 옆에서 봐도 에인절스의 덕아웃 분위기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타석엔 이삭이 타격 자세를 잡고 있다. 요즘 공이 안 맞는다고 투덜거리더니 오늘 경기에선 3타수 2안타로 제법 공이 맞아 나간다.

따악!

에인절스 투수의 4구째, 잘 맞은 공이 왼쪽 담장을 향해 뻗어나간다. 솔로 홈런.

문제는 이삭이 그때까지 멍하게 타석에 서 있었다는 것.

“이삭!”

누군가의 외침에 그제야 상황파악이 됐는지 전력질주를 하는 이삭.

홈플레이트 앞에 서 있던 포수와 몇 마디를 주고받긴 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덕아웃에 들어올 수 있었다.

카스테야노스가 타석에 들어서고, 나는 장비를 챙겨 대기타석으로 나섰다.

그렇게 무난히 진행될 것 같았던 경기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급격하게 변했다.

“악!”

[아, 카스테야노스 선수, 옆구리에 정확하게 맞았거든요? 심지어 95마일짜리 포심이에요. 많이 아플 겁니다. 이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네요.]

[맞춘 것 자체는 실수일 수도 있습니다만, 일단 공 자체는 위협구였던 것 같아요. 아, 디트로이트 선수들이 덕아웃에서 뛰쳐나옵니다!]

“저 새끼들 일부러 맞춘 거야!”

누군가가 덕아웃에서 외쳤다. 아. 설마?

터덕, 쿵. 다다다다

누군가 덕아웃 난간을 뛰어넘어 투수에게 달려간다. 안 봐도 누군지 알 수 있다.

아, 폴리. 넌 왜 덕아웃에 있냐. 불펜에 있어야지.

“나가!”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해 그라운드를 향해 뛰어나갔다.

투수를 향해 뛰어나가는 도중, 반대편 에인절스 벤치에서도 우리를 향해 뛰어나오는 선수들이 보였다.

군계일학, 추풍낙엽, 낭중지추?

벤치클리어링 상황에서 폴리는 마치 적토마를 탄 여포와 같았다.

위협구를 던진 투수를 잡아서 던진 폴리는 하나둘씩 도착한 에인절스 선수들도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결국 4명에게 둘러싸여서 옴짝달싹 못할 때까지 3명의 피해자를 만든 폴리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그 상태에서도 울부짖었다.

그러게 아무리 화가 나고 놀림 받은 거 같아도 변화구 같은 걸로 맞추지, 패스트볼로 사람을 맞춰서 이런 상황을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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