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김사범, 2020시즌(특별한 팬미팅)
짐의 사무실.
서류를 검토하던 짐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려댄다.
귀찮은듯 핸드폰 화면을 보지도 않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눌러 전화를 받는 짐.
“네, 짐입니다.”
[짐? 오랜만이야? 잘 지내나?]
“오, JG! 오랜만이에요. 저야 잘 지내죠. JG는 어때요?”
[나야 뭐 낚시나 하면서 한가하게 지내고 있지. 뭐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
“말씀하세요. JG의 일이라면 얼마든지.”
[혹시 지금 맡고 있는 선수 중에 킴이라고 있나?]
“킴이요? 혹시 사범 말하는 거예요?”
[오, 맞아. 사붐. 자네가 담당하고 있는 거 맞지?]
“그렇긴 한데…… 이 일에서 손 뗀 거 아니었어요?”
[허허, 그런 용무가 아니야.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알아봐 달라고 해서 말이야. 내가 야구판 발 넓은 거 하나로 먹고살았잖아?]
갑자기 짐의 표정이 익살맞게 변했다.
“결국 전 JG의 인맥자랑용으로 이용된 거네요? 끊을게요.”
[헤이, 짐! 장난인 거 다 알아. 잠깐만 들어봐 봐!]
뚝.
전화를 끊은 짐은 핸드폰을 보며 속으로 시간을 세기 시작했다.
‘3, 2, 1. 지금.’
띠리리리링.
“네, 짐입니다.”
[정말 이러기야? 지금 복수하는 거 맞지?]
“저한테 이런 스킬을 알려 준 건 JG예요, 하핫. 장난은 이쯤 하고, 무슨 일로 사범을 찾는 거예요?”
[크흠, 많이 늘었네. 아무튼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면, 그 지인에게 아픈 딸이 있어. 어릴 때 입양한 딸인데 몸이 아주 안 좋아. 아파.]
“아…….”
[근데 요즘 킴에게 빠져 있다는 거 같더라고. 곧 수술이 계획돼 있는데 수술하기 전에 많이 불안한가 봐. 혹시 도움을 줄 수 없느냐고 물어보더라고.]
“흠…… 병원이 어디에요?”
[텍사스.]
“일단 물어봐야 할거 같은데……. 일단 알겠어요 JG, 제가 물어보고 연락 드릴 게요.”
[좋아. 기다리지.]
“하하, JG가 은퇴해서야 기다리게 만들어 보네요. 최대한 빨리 연락할게요.”
전화를 끊은 짐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둡, 두두, 좋은 흥흥 인상, 봉사활동!”
* * *
고요한 호텔 룸, 전화기가 울렸다.
[사범, 잘 지냈어요?]
“누가 섹시 어쩌구 하기 전에는 좋았죠. 그리고 지금은 최악이고요.”
[하하하, 그거 내가 한 거 아니라니까요? 우리 전담 인생 낭비 팀이 한 거예요. 오해하지 마요.]
“그 팀의 보스가 누군데요?”
[저요.]
우드득.
후, 심호흡. 심호흡.
“후, 짐. 전 정말 짐을 좋아해요. 지금 앞에 있다면 아주 강하게 안아 주고 싶을 만큼.”
[나도 그래요. 와이프와 아이들에겐 졌지만 돈보단 위니까 상심하지 마요.]
“본론.”
[푸하하핫, 아, 후. 진지하게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봉사활동 생각 있어요?]
“봉사활동? 시즌 중이잖아요?”
[큰 건 아니고, 사범의 빅 빅 팬이 수술을 앞두고 있나 봐요. 간단한 거 말고 큰 거. 마침 이번 원정이 텍사스잖아요?]
“그렇긴 하죠.”
[병원이 텍사스예요. 가자마자 다음 날 아침에 들리면 될 거 같은데, 어때요?]
음…… 큰 수술을 앞두고 있는 팬이라…….
“좋죠. 좋은데, 알다시피 여기 분위기가 좀…….”
[아, 이번에 볼티모어한테 3연패 했죠? 저번 시즌에는 밥 먹듯이 하던 건데?]
“그 말 여기 와서 해 봐요. 재미있겠네. 내 스트레스도 풀리고.”
[농담이에요. 팀에는 이미 말해 놨어요. 어차피 아침이라 상관없잖아요? 사범이 예민한 성격도 아니고.]
“후, 알겠어요.”
이번 시리즈 내내 고의사구와 간간이 단타만 치며 만족해야 했던 나다. 물론 내보낼 때마다 뛰어서 20-20을 달성했지만.
[경기 보니까 답답하겠더라고요. 팬하고 만나면서 서로 힐링도 좀 하고 그래요. 힘을 북돋아 주러 가는 거지만 또 모르잖아요. 팬에게 힘을 얻게 될지.]
“알겠어요. 그렇게 하죠.”
다음 날, 텍사스의 한 병원.
“안녕하세요. 필 베이커입니다.”
“안녕하세요. 사범 킴입니다.”
병실에 들어가기 전, 팬의 아버지와 잠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제 딸의 이름은 수리입니다. 수리 베이커.”
“아 네, 수리라. 이쁜 이름이네요.”
“그렇죠. 입양하기 전 이름인데 어감이 좋아 계속 썼습니다. 아이에게 그 편이 더 좋기도 하구요.”
“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수리의 경우, 희귀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제 쓸 수 있는 치료법에도 한계가 왔어요. 유일한 방법은 장기이식인데…….”
솔직히 돌아오기 전에도, 돌아온 후에도 주변 사람이 병원과 관련된 적이 없어 크게 와닿지는 않는다. 하지만 필의 표정이 그의 심정을 그대로 알려주고 있다.
“워낙 예후가 좋지 않은 병이라 그것도 힘들더군요. 그러던 와중 한국에서 치료할 수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다행이죠.”
“제가 겪어 본 적이 없어 어떤 심정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로요.”
“네, 다행이죠. 마지막 문제가 있다면 수리를 한국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그런데…… 수리가 많이 약해져 있어요. 그래서 어렵게 부탁드린 겁니다. 요즘 딸아이의 주된 관심사거든요.”
“아 네,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요. 그럼 제가 들어가서 할 일은……?”
“그냥, 그냥 이야기를 나눠 주시면 됩니다. 그걸로 충분해요.”
수리의 병실 앞,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병실에 노크를 했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정말 작은, 자세히 듣지 않으면 듣지 못할 수도 있는 목소리.
혹시나 놀랄까 천천히 문을 열고 병실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수리…… 양?”
음, 선입견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됐다.
막연하게 입양아라고 알려 준 짐 때문에 어렸을 적 드라마에서 보던 어린아이를 생각했는데, 막상 문을 열고 들어온 병실에는 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녀가 누워 있었다.
“어? 어? 킴? 진짜예요?”
“네, 진짜예요. 진짜 김사범 맞습니다.”
야위지 않았을 때도 꽤 커다랬을 거 같은 눈이 더 커져서 나를 바라본다. 뭔가 가슴이 찌릿하다.
“와, 우리 아빠 대단하네요. 정말 킴을 모셔 올 줄이야. 죄송해요, 우리 아빠가 제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셔서.”
“아니에요, 저도 흔쾌히 오겠다고 했어요. 저, 앉아도 될까요?”
“그럼요! 잠시만요!”
얇은 팔뚝에 뭐 이리도 꽂아 놓은 게 많은지. 앉을 자리를 만들어 준다고 살짝 움직이는 사이에도 다라라락 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아니에요, 그냥 누워 계시면 돼요. 여기 앉으면 되죠?”
“네!”
큰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본다. 크흠, 경기 전 사인할 때는 이런 눈빛도 별거 아닌 느낌이었는데. 선망 어린 눈빛이라는 게 참,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느낌이다.
“큼, 음…… 사실 저도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음, 디트로이트 팬이세요?”
“아뇨? 전 많이 이기는 팀을 좋아하는 편이라서요. 보통 시즌마다 달라지긴 하는데 5년 전부터 디트로이트는 좋아한 적이 없어요.”
“아…….”
뭐지?
“정확히 말하자면 김사범 선수의 팬이에요. 솔직히 김사범 선수를 안 지 몇 주 안 됐긴 한데, 나온 경기는 다 찾아봤어요. 마이너리그 경기도.”
“아…… 야구 좋아하시나 봐요?”
“아빠가 많이 좋아하세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인생에 야구하고 저밖에 없는 분이니까요.”
아, 어렵다. 툭툭 던져지는 말들이 쉽게 받아칠 수 없는 말들이다. 차라리 25명의 폴리 상대로 벤치클리어링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유감이에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젠 별로 안 아파요. 대신 몸이 좀 아프긴 한데, 이것도 적응돼서 뭐…….”
주제를 바꾸자. 바꿔야 산다.
“그러고 보니 곧 치료를 위해 한국으로 간다고 하던데, 다행이네요. 꼭 완치될 거예요.”
“아빠가 말했어요?”
이것도 아닌가? 아니 그나저나 내가 말할 때마다 눈빛이…….
“아, 네. 아무래도 저도 대략적인 상황을 알아야 대화가 가능할 테니까요. 제가 물어봤어요.”
“흠, 아닌 거 같긴 하지만 일단 믿을게요. 음…… 저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네, 그럼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지 눈을 감은 수리가 곧 눈을 뜨고 내게 물었다.
“김사범 선수는 인터뷰 때마다 항상 확신하잖아요? 더 나은 선수가 될 거라고. 그게 궁금해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지.”
천천히 질문을 곱씹었다. 대답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쉽게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 머리로 생각한 표현을 입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전 삼 년 전까지 의미 없는 삶을 살았어요. 야구는 정말 못했고, 뱃속에는 그런 자신에 대한 질책과 남들을 향한 질투가 가득했죠.”
그땐 그랬다. 독기가 없으면 버티지 못하고 야구에 붙어 있을 수 없는 삶.
“하루하루를 그냥 버텼어요. 그러다, 정말 기적이 나타났죠. 단순히, 그냥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꿈꾸듯 게임을 하다가 잠을 자고 일어나니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어요. 갑자기 날 둘러싼 모든 게 바뀐 기분? 그래도 곧 달라진 상황에 적응하려 노력했죠. 어쩌면 습관이었을 거예요.”
눈을 뜨고 수리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야구를 잘하게 됐다는 것보다 이제 내 능력으로 내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는 거였어요. 나도 남들과 같은 출발선에 설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수리는 그저 내 눈을 바라보고 있다.
“같은 출발선이라면, 그리고 같은 출발선에 서기 위해 쉴 새 없이 노력하던 의지만 있다면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건 쉬워요. 정말로.”
수리가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저도 다른 사람과 같은 출발선에 설 수 있을까요?”
“그럼요. 지금 수리의 상황이라면…… 용기, 용기를 내는 게 수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이겠네요.”
“용기요?”
“목숨이 달려 있지 않은 야구도 멋진 플레이를 하기 위해서 실패를 극복할 용기가 필요해요. 하물며 수리를 구속하는 저 바늘들을 빼내는 일인데, 당연히 더 큰 용기가 필요하겠죠.”
그리고 방 안은 침묵만 남았다.
* * *
사범이 떠나간 병실.
멍하니 앉아 있던 수리가 입을 열었다.
“아빠.”
“응?”
“나, 한국 갈게요.”
“그래?”
진심으로 기뻐하는 필.
“나보다 어린 사람도 꿈을 위해 노력하고 용기 내는데, 나는 뭘 했나 싶어요. 걱정만 해서 달라질 것도 없는데.”
“그래, 잘 생각했어. 당장 내일이라도, 아니 일단 컨디션부터 관리하자. 잠깐만, 잠깐만 나갔다 올게!”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필.
혼자 남은 수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 * *
병원에서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
나는 짐에게 전화를 걸었다.
“짐, 끝났어요. 돌아가는 중이에요.”
[어때요, 괜찮았어요?]
“음, 그건 제가 결정하는 게 아니니까요. 정신없이 말한 건 기억나는데 그게 도움이 됐을지는 모르겠네요.”
[사범은 솔직한 사람이니까, 괜찮을 거예요.]
“솔직히 그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공감이 되진 않았어요. 주변에 그런 분이 없다 보니…….”
[그럼 다행이죠. 응? 아이요?]
“네. 전 짐의 말만 듣고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고등학생 같던데요?”
[하하하, 고등학생이요?]
“네, 아니에요?”
[제가 듣기론 20대 초반이라고 알고 있는데……. 아마 사범보다 나이가 많을걸요?]
아니 그 모습이 나보다 누나라고? 아니, 엄밀히 말하면 누나는 아니지만…… 아…….
[하하하, 재미있네요. 아무튼.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있다면 응할 거죠?]
아니 누나가 맞는 건가? 일단 누나는 맞는데, 누나가 아니니까 좀 혼란스러운데?
[사범?]
“네?”
[다음에도 또 이런 기회가 있으면 응할 생각 있냐고요.]
별로 오래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다음번엔 꼭 간단한 신상명세라도 보내 줘요. 그럼 응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