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김사범, 2020시즌(vs 저스틴 벌렌더)(1)
나는 병원에서 바로 경기가 열리는 텍사스의 글로브 라이프 필드로 합류했다.
“붐, 왔어? 병원에 갔다 왔다며?”
라커룸에 들어서자 나를 반갑게 맞아 주는 동료들. 뭔가 이상한데.
“여자야? 여자지? 입이 귀에 걸린 게 여자 맞는 거 같은데?”
어디서 음메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표정 보니까 여자는 아니야. 붐, 아이들 맞지? 붐의 성격상 여자나 남자가 아니라 아이들한테 방문할 확률이 높다니까?”
케이시의 하나도 안 맞는 프로파일링, 간만에 들어보는군.
“아이들도 여자 아니면 남자야, 케이시. 내 생각엔 여자가 맞는 거 같아.”
조용히 케이시에게 한마디 하는 이삭까지. 내가 볼 땐 이거 오늘 저녁 내기 같은데.
“여자가 아니면 벌써 폴리 척추가 반대로 접혔을걸? 아니면 옆으로 접혔거나.”
“오, 그거 일리 있네. 앞으로 붐에게 추궁할 일이 생기면 폴리를 데려와야겠어.”
아니 좀…….
“뭐야? 내 이야기야? 뭔데?”
하아, 머리야.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장비를 챙겨 나온 덕아웃, 하지만 찰거머리처럼 들러붙는 화상들을 떼어 내진 못했다.
“아니 그래서 누구냐니까?”
“그만해라, 나 텍사스 덕아웃 쪽으로 가 볼거야. 우르르 몰려가다간 패싸움 날지도 모르니까 좀 떨어지지? 특히 폴리 너.”
내가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집착하는 폴리를 떼어 놓으려 시도할 때, 케이시가 뭔가 생각난 듯 내게 물었다.
“텍사스? 아, 추하고 아는 사이야?”
“알지는 못하고, 같은 나라에서 왔지. 대선배야.”
“아하, 어쩐지. 이름이 뭔가 비슷한 스타일이었어. 근데 텍사스 덕아웃엔 왜?”
“우리나라는 후배가 선배한테 먼저 가서 인사하는 게 예의거든. 경기 중엔 신경 쓰지 않지만.”
“그러니까 왜 가냐고. 추는 어제 부상으로 30일 DL에 올라갔어.”
“어?”
어쩐지. 보통 그 지역의 선배들이 후배들이 오면 어떻게든 번호를 알아내서 연락한다고 하던데…….
“몰랐어. 흠, 그럼 갈 필요가 없네?”
“그렇지.”
큰 부상이 아니어야 할텐데.
경기가 끝나고 짐에게 물어봐서 찾아갈까 생각도 해 봤지만, 너무 오버하는 거 같다.
“그럼 이제 대답해 줄거야?”
아, 폴리를 30일 DL에 올려서 보내면 되겠구나. 어차피 텍사스에서 제일 큰 병원에 있을 테니까.
* * *
오늘도 경기 전에 폴리와 러닝을 하면서 충분히 몸을 풀어서 그런지 경기가 잘 풀렸다.
역시 텍사스는 남자의 팀이다. 적어도 볼티모어처럼 내가 들어서면 자동으로 일어나는 포수는 없으니까. 덕분에 3경기 동안 2개의 홈런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아 행복해. 홈런은 늘 짜릿해.
아주 훌륭한 구장과 남자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텍사스를 떠나는 게 아까웠다. 추신서 선배님이 선택한 이유가 있는 팀이다,
그리고 일주일 뒤, 장기 원정 투어를 끝내고 오랜만에 지친 몸을 내 집 침대에 뉘였다.
그때,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표시되는 발신자. 번호가 좀 이상한데? 스팸인가? 아, 해외전화.
“김사범입니다.”
[너는 엄마가 전화할 때 아니면 전화도 안 하지?]
큰일 났다. 엄마가 토라지셨다.
“아니에요, 안 그래도 저도 지금 막 씻고 엄마한테 전화하려던 참이었어요. 역시 모자지간이라 그런가? 맘이 잘 맞네. 날 알아주는 사람은 우리 엄마밖에 없어.”
[시끄러워, 내가 바보니? 됐고, 몸은 어때? 아픈 덴 없고?]
“저야 건강하죠. 엄마랑 아빠는요?”
[우리도 건강해. 엊그제는 둘이 건강검진도 받고 왔어. 풀코스로.]
다행이다. 슬슬 건강에 신경 쓰실 때가 되셨지. 뭐 별다른 이상은 없으시겠지만.
“오, 잘하셨어요. 결과는 나왔어요?”
[아직, 1주일 정도 걸린다더라.]
“엄마가 먼저 가서 아빠 술 못 드시게 겁 좀 주라고 부탁해 봐요.”
[네 아빠 건강검진 한다고 한 달 전부터 술을 입에도 안 댔어. 소용없을걸?]
“역시 우리 아빠. 대단하셔.”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나고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성공만 쫒다보면 내 주변 사람을 잊게 된다. 멍청한 사람이 되지 말자, 김사범.
생각난 김에 한공고 단톡방이나 한번…….
[한공고] 999+
아냐. 여긴 나중에 가자. 지금은 아닌 거 같아.
* * *
다음 날 경기 전, 라커룸.
2018년부터 지금까지, 메이저리그는 탱킹 열풍이 불고 있다.
“미기, 근데 정확히 탱킹이 무슨 뜻이에요?”
“도박에서 일부러 돈을 잃어 주는 거야. 호구들을 낚을 때 쓰는 거지.”
바로 이 탱킹의 원조격이 지금부터 우리가 상대할 휴스턴이다.
“그래도 성공했네요, 탱킹을 시작한 이후에 두 번이나 우승했잖아요?”
“우승했지, 근데 휴스턴의 선수들이 순수하게 기뻐했을까? 아니 기뻐하긴 했을 텐데…… 다음 날엔 그저 그랬을 거 같아.”
“왜요?”
“거기 단장이 아주 쓰레기거든. 아니 인간적으로 따지면 쓰레기지만…… 기계 같아.”
“기계요?”
“그래, 궁금하면 한번 찾아보든가.”
미기가 웜업을 위해 자리를 비웠다. 쓰레기라……. 폭군 같은 느낌인가?
경기 전이지만 치솟는 호기심에 결국 핸드폰을 꺼내 검색해 봤다.
‘휴스턴 에스트로스 단장’
순간 인터넷에 펼쳐지는 욕과 칭찬의 향연. 한 사람이 이 정도로 욕과 칭찬을 같이 먹을 수 있다니. 이 사람도 야구의 신인가?
“붐, 나가자!”
“어, 어! 가자.”
이삭의 부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기심에 한두 페이지를 읽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지난 거 같다.
제프 러나우? 흠, 무서운 사람이네 이 사람.
“이삭, 근데 오늘 선발 말인데, 뭐 소스 없어?”
“아아, 없어. 나도 처음 상대해 봐.”
“미기한테 물어봐야 하나? 그래도 같은 팀 동료였으니까 좀 알지 않을까?”
뭐, 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지. 투수가 친정팀에게 호구 잡히거나, 아니면 친정팀이 투수에게 호구 잡히거나.”
이삭의 말에 자동으로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구단 전력분석 자료의 첫 페이지가 갑자기 떠오른다. 디트로이트와의 상대전적.
“호구 잡혔네.”
“우리가 호구네.”
이삭과 나는 동시에 말하며 피식 웃었다.
덕아웃, 항상 일찍 몸을 풀고 덕아웃에 앉아 있던 미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라운드를 둘러보자 휴스턴의 불펜 근처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폴리, 오늘 케이시 컨디션 어때?”
“응? 뭐 괜찮은 거 같던데? 계속 중얼거리는 걸로 봐서는 약간 긴장한 거 같은데 뭐, 상대가 상대잖아.”
벌써 세 번째 빅매치인데, 뭐 적응했겠지.
아닌가? 투수 생각은 좀 다른가? 옆에 멍하니 앉아 있는 폴리에게 물어봤다.
“가만 보면 케이시의 상대는 항상 이러는 거 같네. 로테이션 조정 한번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래도 신인인데.”
“그렇긴 하지. 근데 뭐, 잘 던지잖아. 투수가 투수를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타자를 상대하는 거지.
“그리고 어차피 지금처럼 에이스면 오히려 더 안정될걸?”
아, 어차피 사람들이 질 거라고 예상하니까?
“뭐, 일단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가 전력이 딸리긴 하니까. 사람들이 대부분 진다고 예상하긴 하지, 근데…….”
“뭔 소리야? 그게 아니라, 에이스들은 사범 너하고 끝까지 싸우는 경우가 많잖아. 그럼 네가 한 점은 내줄 테니까. 뭐 좀 집중해서 두어 점만 주면 적어도 패배는 하지 않을 거 아냐.”
와, 씨. 나 소름 돋았어. 폴리가 이런 말을 할 줄 알았나? 진짜 똑똑해진 건가?
“……라고 말하더라고, 케이시가. 오늘 저녁은 뭐 먹을까? 휴스턴은 처음 와 보는데. 어디 맛있는 데 없나? 미기한테 물어볼까?”
그럼 그렇지.
폴리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천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몸을 데우기 위해 시작한 러닝은 덕아웃에서 시작해서 외야를 돌아 휴스턴의 덕아웃으로 향했다.
“붐! 이리 와 봐!”
가야죠. 사실 나도 보고 싶었거든요.
“미기, 왜요?”
“인사해, 여기 오늘 선발인 벌렌더.”
“안녕하세요. 사범 킴입니다.”
나도 모르게 악수를 위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난 경기 전에 악수는 안 해. 저스틴 벌렌더다.”
칼 같네. 단호하기가 아주 칼 같아.
“왜 또 예민하게 굴어? 어디 아프지?”
“아니라니까. 나 간다.”
인사하자마자 다시 불펜으로 들어가는 벌렌더. 뭐, 사실 경기 선발 투수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거라곤 생각도 안했다.
그렇게 다시 디트로이트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길, 미기에게 물었다.
“미기, 벌렌더는 어때요?”
“벌렌더? 음, 그냥 잘 던져. 다른 투수들하고 똑같아.”
“네? 벌렌더가요?”
“구위 자체는 케이시도 벌렌더하고 비슷할 것 같은데?”
“음…….”
“근데 계속 잘 던져.”
“계속?”
“경기 초반에 느꼈던 감정이 후반까지 이어지지. 계속. 마운드에서 내려올 때까지.”
그건 알죠. 한국에선 별명도 있는데요.
금강벌괴.
* * *
“플레이 볼!”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심판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목소리가 들릴 때쯤이면 항상 덕아웃에 있었는데……. 지금은 대기타석에 나와 있다.
타석에는 이삭, 대기타석은 나, 그리고 덕아웃에서 준비하고 있는 미기.
텍사스 전엔 좀 덜했지만, 요즘 내게 집중되는 투수들의 견제를 막기 위해 타순조정을 한 결과다.
2번 타자 김사범.
메이저리그에서 제일 잘 친다 하는 선수들이 포진해 있는 타순이지만. 사실 나는 2번보다 4번이 더 좋다.
어릴 때부터 꿈꿔 온, 남자의 로망이니까
“스트라이크!”
짧은 스트라이드, 하지만 강한 팔 스윙. 어떻게 보면 설렁설렁 던지는 것 같은 폼에서 95마일의 강속구가 뿌려졌다.
음, 3번을 칠 땐 덕아웃에서 공을 볼 기회가 많았는데, 바로 대기타석으로 나오니 타이밍 잡기가 힘들다.
“파울!”
대기타석 위치가 좀 멀어서 그런가?
발로 슬쩍 밀어 보니 대기타석을 표시하는 둥근 깔개가 움직인다.
“볼!”
조금만 더 가면 잘 보일 거 같은데?
[3구는 볼입니다. 공을 차분하게 고르는 이삭 페레데스 선수! 카운트는 1-2 입니다.]
[이삭 선수가 공을 오래 봐야 합니다. 그 정보가 후속 타자들에게 다 전달이 되거든요?]
[공을 오래 지켜보는 건 예전부터 1번타자의 덕목이었죠.]
[1-2에서 4구!]
“파울!”
[또다시 커트해 냅니다. 아, 벌렌더 선수 방금 공은 97마일이 나왔습니다. 37살의 투수가 97마일을 뿌리는 게 쉬운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보통 메이저리그에선 에이징 커브라고 하는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선수의 육체적, 야구적 스탯이 하락하는 걸 의미하거든요? 그런데 그 에이징 커브가 너무 완만해요. 선수 본인이 원한다면 40살까지는 당연하고 45살까지도 던질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이삭 선수, 타석을 벗어나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이제 5구째! 어? 벌렌더 선수가 투구판에서 발을 빼고 심판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는데요?]
[포수 뒤쪽을 가리키면서 이야기하는 걸로 봐선 레이저나 관중의 투구 방해 때문인 거 같죠? 가끔 이런 경우가 있어요.]
“너무 가까이 왔어, 다시 뒤로 가게.”
[아, 김사범 선수에게 뭐라고 말하는 거 같은데요? 아, 아아. 김사범 선수가 대기타석을 자꾸 타석 쪽으로 옮겼나 봅니다.]
[마침 영상이 나오네요. 하하, 한번 공을 던질 때마다 조금씩 들어오는 게 느껴지네요. 이건 벌렌더 선수가 항의할 만한데요?]
[규칙상으론 문제가 없는 건가요?]
[규칙에는 따로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비 팀의 항의가 있다면 심판의 재량으로 수정요구는 할 수 있겠죠.]
[하하, 김사범 선수의 좀 더 잘 치고 싶은 욕심이 낳은 해프닝이었습니다.]
아, 큰일 났다. 벌써부터 폴리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내가 팀원들의 놀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다. 영광스럽고 우아하게 다이아몬드를 돌아서 복귀하는 것.
집중하자, 김사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