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53화 (53/175)

53화 김사범, 2020시즌(vs 저스틴 벌렌더)(2)

타석에 들어서서 언제나처럼 땅을 다진다. 준비 자세를 취하고 본 벌랜더는 굉장히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테랑의 품격이네.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있겠어. 벌렌더 형, 나 맘에 안 들죠?’

내가 맘에 들든 안 들든 벌렌더가 던진 공은 일정하고, 무섭게 스트라이크 존을 후벼 팠다.

이삭이 삼진을 당했던 슬라이더부터 시작해서, 패스트볼, 그리고 체인지업까지.

“스트라이크!”

“파울!”

“볼!”

“볼!”

“파울!”

타석에서 보니 생각보다 더 컴팩트한 폼이다. 짧게 나와서 길게 뻗는 느낌?

“볼!”

바깥쪽으로 들어오는 패스트볼을 간신히 골라냈다. 포수가 아쉬운 듯 미트를 거두지 않는다.

후. 이건 삼진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공이었다. 배트를 내밀지 않은 게 짜증 날 정도로.

“타석으로 들어오지.”

타석에서 벗어나 잠시 시간을 끌며 벌렌더의 공을 머리에 새기고 있자, 심판이 제지했다.

역시나 짜증스러운 표정의 벌렌더. 그가 공을 던진다.

따악!

‘잘 맞았…… 아.’

“아웃!”

[김사범 선수, 쳤습니다! 아!]

[잘 맞은 타구가 하필 벌렌더 선수 방향으로 갔네요. 저 정도의 타구 속도면 오히려 벌렌더 선수의 반응속도를 칭찬해 줘야 해요.]

[투구 후 1루 쪽으로 치우친 상태였는데, 바로 그 방향으로 강한 타구를 친 김사범 선수거든요? 아쉽네요.]

운도 좋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덕아웃으로 향하는 도중, 누군가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싸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자 타석의 타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벌렌더의 모습이 보인다. 진짜 마음에 안 드나?

“널 보니까 내가 다 창피하다. 빨리 앉아.”

“……넌 모르겠지만 여기 데크 서클 위치가 너무 애매해, 잘 안 보인다고.”

이삭의 냉정한 반응이 날 아프게 했다.

[아! 카브레라 선수가 큰 타구를 날립니다! 이 공은 어디로? 좌익수가 약간 뒤로 물러나 잡습니다. 이닝이 종료됩니다.]

“제길! 저 녀석, 이젠 약아지기까지 했어!”

“왜요?”

글러브를 끼고 수비를 위해 나가려고 할 때, 미기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귀중한 정보.

“예전엔 구위하고 로케이션으로 먹고살던 녀석이었는데, 이젠 머리도 써. 패스트볼이든 브레이킹볼이든 구속차도 주는 것 같고.”

안 그래도 위력적인 공을 가진 선수가 이젠 꾀까지 낸다? 위험하네, 위험해.

[휴스턴의 타순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번 2루수 호세 알투베, 2번 3루수 알렉스 브리그먼, 3번 중견수 조지 스프링어, 4번 유격수 카를로스 코레아, 5번 좌익수 마이클 브랜틀리, 6번 우익수 조쉬 레딕…….]

[이름만 들어도 화끈한 타선이네요. 그러고 보니 디트로이트와 비슷한 점도 있어요.]

[어떤 점이죠?]

[일단 팀 타선의 코어가 유격수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알투베 선수나 스프링어 선수를 빼놓고 말할 수 없지만, 나이를 고려한다면 카를로스 코레아 선수가 앞선 두 선수보다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아, 그렇군요. 이번 시즌부터 타선도 조금 바뀌었죠?]

[1번에 위치하던 스프링어 선수가 3번으로 출장하고 있습니다. 알투베 선수의 장타율이 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바뀐 부분이긴 한데, 관계자들이 혹평하는 스프링어 선수의 주루 능력도 타선의 변화에 한몫했죠.]

[자, 그런 어마어마한 타선을 상대하는 투수는 디트로이트의 루키 투수, 케이시 마이즈 선수입니다.]

케이시의 등이 오늘따라 좁아 보인다. 아니, 타석에 서 있는 타자가 커 보이는 건가?

이삭보다 살짝 커 보이는 작은 키. 하지만 매년 두 자릿수의 홈런을 쳐내는 선수, 호세 알투베.

후에 이삭이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아메리칸리그 최고 2루수의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지금 타석에서 보이는 모습으로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스트라이크!”

[케이시 선수, 대담하게 초구 패스트볼을 존 안으로 집어넣습니다.]

[신인답지 않은 담대한 투구예요.]

3구 만에 2스트라이크라는 유리한 고지에 선 케이시, 다시 본 케이시의 등은 아주아주 넓다.

“흐읍!”

따악!

우와아, 아아…….

[알투베 선수의 타구, 큽니다! 큽니다! 아, 파울라인 밖으로 떨어지는 타구.]

[방심하면 안 됩니다. 상대는 호세 알투베 선수예요.]

관중들의 함성이 순식간에 신음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아슬아슬한 타구.

무엇보다 중요한 건 케이시가 위닝샷으로 주로 던지는 스플리터가 첫 타석부터 공략당했다는 거다. 드디어 분석이 시작됐다.

[제6구! 공 높게 끕니다! 좌익수 크리스틴 스튜어트 선수, 정 위치에서 잡습니다. 원아웃.]

[2구째 스플리터를 쳤습니다! 3루수 잡아서! 아웃! 투아웃입니다.]

[알투베 선수에게 고전하긴 했지만 브리그먼 선수를 2구 만에 잘 잡았어요. 아주 경제적인 투구를 하는 케이시 선수입니다.]

[3번 스프링어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케이시의 스플리터를 노리고 들어오는 타자들. 조금 당황한 것 같던 케이시는 곧 그걸 역이용하기 시작했다.

[케이시 선수는 참 똑똑한 거 같아요.]

[무슨 말씀이시죠?]

[휴스턴의 선수들이 주 무기인 스플리터를 노리고 타석에 들어서는 것 같으니 바로 존 상단을 패스트볼로 공략하고 있어요. 이러면 타자들은 오도 가도 못하거든요?]

[스프링어, 쳤습니다! 좌익수 쪽 뜬공. 아!]

[놓쳤어요, 지금 시야에서 타구를 놓친 것 같습니다!]

[좌익수 뒤에 떨어지는 타구! 중견수 대즈 카메론 선수가 잡아서 내야에! 2루에서 세잎입니다.]

덕아웃으로 향하던 케이시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웃!”

그리고 4번 코레아의 유격수 땅볼로 이닝이 종료됐다. 하지만 케이시는 코레아를 상대로 풀카운트 상황까지 던져야 했다.

10구 내외로 끝낼 수 있었던 좋은 상황이 아쉬운 실책 한 번으로 별로인 상황으로 바뀐 거다.

“케이시, 오늘 공 좋은데? 2회부터는 휴스턴 녀석들이 스치지도 못하겠어.”

어설픈 폴리의 위로가 케이시에게 닿지 못했는지, 아무 말 없이 오른팔에 수건을 두르고 자리에 앉는 케이시.

그때 덕아웃에 들어온 좌익수 스튜어트가 케이시의 어깨를 살짝 치고 지나간다. 나름의 사과표시인 것 같다.

[디트로이트의 4번 타자, 카스테야노스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2번에서 4번으로 타순을 이동했죠? 매 시즌 20홈런 이상을 기대할 수 있는 선수입니다.]

“아웃!”

[3루수 땅볼로 물러나는 카스테야노스 선수. 아쉽습니다. 벌렌더 선수의 슬라이더에 디트로이트 선수들이 좋은 반응을 하지 못하네요. 다음 타석은 5번 타자 크리스틴 스튜어트 선수입니다.]

건장한 체격, 느린 발. 하지만 스튜어트는 강한 타구를 날릴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실제로 타격 연습 때는 미기보다 담장을 넘기는 공이 더 많을 정도니까. 나는 뭐, 못 넘기는 타구가 넘기는 타구보다 적지만.

하지만 문제는 실제 타석에서의 스윙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2스트라이크 이후에 특유의 호쾌한 스윙이 아닌 어정쩡한 스윙을 하는 습관. 그게 문제다.

“제길!”

덕아웃으로 들어오며 작게 욕을 내뱉는 스튜어트. 본인도 느끼고 있을 거다. 주어진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이삭, 스튜어트하고 친해?”

“나름? 내가 처음 메이저에 왔을 때 이것저것 친절하게 알려 줬었어.”

“흠…….”

“너무 조급해 보이지? 요즘은 통 말도 안 하고 혼자 구석에 있어서……, 아쉽네.”

돌이켜 보면 덕아웃에서 항상 즐겁게 분위기를 띄우던 사람이었는데. 홈런을 축하할 때나, 장난을 칠 때도.

후, 문제점을 알 것도 같은데……. 조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예민한 문제라……. 에라, 일단 저지르고 보자.

“스튜어트, 왜 거기 그렇게 있어요?”

“어, 붐. 무슨 일이야?”

“아니 뭐, 그냥 긴장한 거 같아서요.”

잠시 나를 바라보던 스튜어트가 이내 입을 열었다.

“하하, 루키에게 들킬 정도로 내가 조급해 보였나 보네.”

“음, 그렇다기보단…….”

“공이 잘 안 맞아. 그래서 마음이 좀 급해졌네.”

내가 모든 팀원의 기록을 외우진 않아 잘 모르지만, 시즌 초반에 장타를 곧잘 때려내던 모습에 비하면 페이스가 떨어지긴 한 거 같다.

“음, 뭐라고 해 줄 말이 없네요. 힘내요. 그래도 우리 팀의 주전 좌익수잖아요.”

“그래, 그렇지.”

나도 돌아오기 전에는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었으니 조언을 해주고 싶긴 하지만, 문제는 제대로 된 조언을 할 수 없다는 거다.

스킬 하나 때문에.

자리로 돌아와 스튜어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봤다. 음…… 미기?

“미기, 스튜어트가 많이 의기소침하던데요.”

“알아, 나도 눈이 있는데. 근데 붐, 이런 건 혼자 이겨 내야 해. 누가 떠먹여 줘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역시. 칼같이 돌아오는 대답. 사실 뭐, 루키 주제에 이렇게 오지랖 부리는 게 정상은 아니다. 하지만…….

스튜어트가 연습 때 보여 주는 죽여주는 타구와 부드러운 타격 폼이 계속 머리에서 맴돈다. 그리고 그런 실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에 없다는 사실도.

[경기가 투수전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3회가 지났을 뿐이지만 양 팀 투수들 모두 괜찮은 투구 내용을 보여 주고 있거든요?]

[벌렌더 선수는 항상 그랬듯 강한 구위와 정교한 제구로 많은 삼진을 잡아내고 있죠? 케이시 선수는 매 이닝 주자를 내보내고 있습니다만, 좋은 타이밍에 내야 땅볼을 유도하면서 막아 내고 있습니다. 두 투수가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습니다.]

[네, 그렇군요. 이제 경기는 초반을 넘어 중반으로 향해갑니다. 4회 초 디트로이트의 공격은 김사범 선수부터 시작합니다.]

“볼!”

바깥쪽 패스트볼. 이미 50개 가까운 공을 던졌음에도 경기 초반의 공과 다른 점이 없다. 보통 투수들은 이 정도 던지면 구위가 살아나거나, 죽거나 하는데.

“스트라이크!”

프론트 도어를 열어젖히며 아래쪽 존에 꽂히는 슬라이더.

이런 공을 1회부터 9회까지 꾸준히 던질 수 있다니, 구위와 제구력도 대단하지만, 경기 내외적 꾸준함이 벌렌더의 최고 장점인 것 같다.

“스트라이크, 투!”

다시 바깥쪽 존을 걸치고 들어가는 패스트볼. 음……. 1회의 그 공하고 비슷한 코스였던 거 같은데…….

벌렌더는 무표정한 얼굴로 4구를 던졌다.

‘몸쪽, 깊다!’

“스트라이크! 아웃!”

다음 공은 뭘, 응?

분명 깊었다. 적어도 공 반 개는.

너무 황당해서 잠시 구심을 쳐다보자, 단호한 얼굴을 하고 턱짓으로 덕아웃을 가리킨다.

갑자기 넓어진 존. 그걸 고려해도 이건…….

[아, 삼진을 당하는 김사범 선수, 아쉽습니다.]

[방금 공은 좀 깊었던 것 같은데요? 김사범 선수도 당황했는지 구심을 잠시 바라보다 덕아웃으로 돌아갑니다.]

[자신의 존이 확고한 김사범 선수인데요. 실제로 40경기 가까이 진행된 경기 중 대부분을 출전하면서 삼진이 10개밖에 안 되거든요?]

[다시 한 번 봐도 존에서 벗어난 것 같은 볼인데요. 공 끝의 변화가 심하지 않은 벌렌더 선수인데…….]

덕아웃의 내 자리로 가는 나를 누군가 잡는다.

“붐, 잘 참았어. 또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내가 나서지.”

“……고마워요, 론.”

자리에 앉아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며 열을 식혔다.

이렇게 존이 오락가락하는 심판이 제일 짜증 난다. 잠깐, 잠깐만.

‘이거 1회 그 볼에 대한 보상판정 아냐?’

아니라면 지금까지 별다른 잡음이 없었던 존이 갑자기 넓어질 이유가 없다.

루키와 베테랑, 자신의 존이 순간 흔들렸음을 인지한 구심이 누구 편을 들어줄지는 명백하니까.

비록 내가 1회에 이득을 봤더라도, 기분이 더러운 건 더러운 거다. 호구 잡힌 기분이잖아.

오늘, 남은 경기의 컨셉을 정했다.

개진상 루키, 본 적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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