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55화 (55/175)

55화 김사범, 2020시즌(왕이 될 남자)

서울, 한 스포츠 신문사.

[디트로이트의 약진, 그리고 김사범의 역대급 데뷔 시즌에 대하여.

- 2020시즌이 어느새 절반 가까이 진행됐다. 올스타 브레이크를 얼마 안 남긴 오늘, 디트로이트는 87경기 47승 40패로 같은 기간 50승 37패를 한 클리블랜드에 3게임 차 뒤진 지구 2위를 달리고 있다.

아메리칸리그 와일드카드 레이스에서(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탬파베이가 크게 앞서나가고 있는 이번 시즌, 두 팀의 경쟁이 나머지 한 자리에 큰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

디트로이트는 전반기 유망주들의 활약이 돋보였는데, 그중 가장 빛난 유망주는 바로 김사범이다. 거의 경기당 0,5개라는 믿을 수 없는 홈런 생산력으로 전반기 86경기에서 38개의 홈런을 만들어 냈는데, 이는 2002시즌 배리 본즈에 이은 역대 2위 페이스다. 도루 또한 30개를 기록하여 부상만 없다면 후반기에 40-40 달성이 아주 유력한 상황이다.

김사범은 이러한 성적을 바탕으로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 아메리칸리그 유격수 부분 1위를 차지하여 별들의 전쟁, 올스타에 나설 전망이다.

한편, 올스타전 하루 전에 진행되는 홈런 더비의 주장으로 아메리칸리그는 양키스의 지안카를로 스탠튼, 내셔널리그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브라이스 하퍼가 선정됐다.

2016년에 홈런 더비 신기록을 세운 후 계속해서 출전을 고사해 왔던 스탠튼과 2018년 챔피언 하퍼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연일 홍보에 여념이 없으며, 예상 출전 선수로는…….]

빠악!

남아 있는 사람이 몇 없는 사무실에 청명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아, 또 왜요! 일하고 있는 사람한테!”

“어쭈? 이젠 좀 개긴다? 너 또 김사범 기사 쓰지? 내가 전에 덕질은 집에 가서 하라고 안했냐?”

“지금 한국 출신 유격수 루키가 메이저리그를 다 깨부수고 있는데 뭔 덕질이에요? 본즈 이후 최고 페이스라니까요? 심지어 약물도 안 했는데!”

“약을 했는지 안 했는지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눈이 있으면 주변을 좀 둘러봐. 옆 동네에서 올림픽 한다고 다들 취재 나간 거 안 보여?”

후배 기자가 사무실을 둘러본다. 아무도 없이 휑뎅그래한 사무실.

“올림픽 야구는 이제 별 재미없잖아요. 그런 기사보다 이게…….”

“그만, 한마디만 더하면 또 뒤통수 날아간다.”

“후, 아니, 어디는 한국선수 올스타에 나간다고 취재원도 파견하고 난린데, 우리는 그런 거 안 한답니까?”

“말 잘했다. 아유, 이제 좀 똘망하니 싹수없는 게 덕질하기 전 신용준이네. 네가 가라.”

“네?”

“네가 가라고, 올스타전. LA에서 열리니까 류한준 선수 인터뷰도 따올 수 있으면……이 아니라 무조건 따오고. 콜?”

“콜.”

신용준이라 불린 후배 기자의 눈빛에 순식간에 존경이 가득 담겼다.

“티켓은 회사에서 줄 거다. 바로 확인해 봐.”

선배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디론가 달려가는 후배 기자. 선배 기자는 그 모습을 보며 어디론가 향했다.

“네, 한 명 보냈어요. 근데 우리 돈은 있어요? 옆 동네에서 취재한다고 바닥까지 긁어 간 거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가라고 하시니까. 아, 경유…… 24시간……, 뭐 알아서 하겠죠. 알겠습니다. 네, 네.”

속는 사람도, 속이는 사람도 만족스러운 이상한 거래가 끝났다.

* * *

디트로이트, 코메리카 파크.

온몸이 찌뿌둥하다. 숨어 있던 잔 근육들이 나도 여기 있었노라고 쉴 새 없이 자기주장을 하고 있다.

“붐, 괜찮아? 그러게 더블헤더 할 때는 론에게 말하고 좀 쉬라니까?”

마사지를 받았음에도 끙끙대는 내 모습을 보고 이삭이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낸다.

“아, 뭐. 괜찮지. 괜찮아야지.”

한 경기만 더 뛰면 올스타 브레이크다. 물론 나는 올스타전에 뛰지만, 그래도 오가며 쉬는 시간이 분명 있을 거다.

“원래 유리 몸이잖아. 아니 허약하다고 해야 하나?”

이삭의 옆에서 대뜸 팩트로 날 때리는 폴리.

“그렇긴 하지. 마이너 때도 시즌 후반에 좀 힘들어했지? 마지막에 기록 깬다고 쉬지도 못했을 땐 거의 좀비 같았다며?”

“멍하니 있다 타석 나가서 홈런 치고 들어와서 멍하니 있고. 뭐 그런 느낌이었어. 홈런 치는 기계 느낌?”

“그 기계 좋네. 나도 집에 한 대 들여 놔야겠어.”

지쳐서 널브러진 날 두고 자기들끼리 날 물고 뜯고 즐기면서 낄낄댄다. 하. 기품 있는 팀 동료가 너무 절실하다.

경기 전, 준비를 위해 그라운드로 나서는 나를 론이 붙잡았다.

“론, 무슨 일이예요?”

“오늘 붐은 쉬는 게 좋겠어.”

“네?”

“여기 코메리카 파크에 내 눈과 귀가 미치지 못하는 곳은 없지. 몸 상태가 별로라며?”

“그냥 좀 피곤한 거예요. 어디 아픈 것도 아니고.”

“그냥 좀 피곤한 상태로 운전하다가 골로 간 사람들을 여럿 봤어. 내가 아는 야구도 그만큼 위험한 스포츠거든.”

뜬금없는 운전 이야기는 뭘까. 좀 더 설득을 해 보려 했지만 론은 내게 시선을 주지 않고 바로 자리를 떠났다.

“붐. 론의 말이 맞아. 쉬어야 할 땐 쉬어야 해. 우린 마라톤을 하는 거야”

뒤에서 들었는지 내게 말을 거는 미기.

“우리 지금 순위 경쟁 중 아니에요?”

“하하, 아직 전반기 경기도 안 끝났어. 지금 이 시기에 순위를 말하기엔 아직 이르지.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푹 쉬라고. 저기 케이시 봐봐, 아주 늘어져라 쉬고 있잖아?”

우리 팀에서 감독 추천으로 나가는 투수는 케이시다. 케이시는 충분히 그럴 만한 퍼포먼스를 보여 줬다.

“후, 일단 알겠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기의 말인데 믿어야죠.”

“그래, 잘 생각했어.”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27시간이 된 느낌이다. 흠. 밀렸던 안부 전화나 해 볼까?

잠시 후.

“모리슨, 잘 지내요?”

[오, 킴. 웬일이에요? 먼저 전화를 다 주고?]

“아, 그럴 일이 좀 있죠. 엊그제 보내 준 파일 잘 받았어요. 역시 시즌이 진행되다 보니까 폼이 약간씩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신이 아닌 이상 어쩔 수 없죠. 몸은 항상 쉬운 길로 가려고 하니까. 아, 그러고 보니 스튜어트도 어제 연락했었는데.]

“그래요? 마이너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는 기분은 어떻대요?”

[트리플A는 그래도 좀 사람 같은 대우를 받아요, 킴. 새로운 폼이 좋다고 신나 있던데요? 훨씬 더 잘 보인대요. 스윙도 편하고.]

스튜어트는 결국 마이너로 강등됐다. 구단이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마이너 옵션. 그 소식을 조금 더 먼저 안 나는 마이너로 내려가기 전에 모리슨과 스튜어트를 연결해 줬다.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는데, 바로 타격 폼을 뜯어 고칠 줄이야. 그것도 시즌 중에.’

모리슨의 말로는 시즌이 진행되면서 자기도 모르게 생긴 몇 가지 끊김 동작들이 타격을 방해하면서 폼이 망가졌다는데, 자세한 건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그렇게 몇 가지를 수정한 폼으로 스튜어트가 트리플A를 폭격하고 있다는 거다. 아마 곧 다시 올라오겠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 경기가 시작됐다. 형편없이 무너진 경기 도중 론의 주변에서 계속 알짱댔지만, 론은 날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았다.

* * *

디트로이트, 단장실

“그래, 다들 좋은 생각 있나?”

“계약을 제의해야 할 거 같습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3년을 싸게 쓰려다가 더 큰 손해를 입을 수도 있지.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을 계약이야.”

알의 말에 단장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멍청한 짓일지도 모르지만, 본즈를 영입했다고 생각하자고. 40-40이 거의 확정된 선수야.”

“후, 정말 너무 잘해도 문제로군요. 도대체 얼마를 안겨 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실패했을 때 어떤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항상 하는 고민이지. 그리고 우리가 고민한 결과는 밖에서 보기엔 대게 바보 같아 보이기 마련이고.”

“일단 다 털어 보죠. 그래도 다행인 건 곧 연봉보조가 다 끝나고, 미기의 계약도 거의 끝나간다는 거예요. 바닥까지 긁어서 제시하면 듣는 척이라도 하겠죠.”

“그래. 그래도 안 되면 뭐, 6년 동안 저렴하게 데리고 있다 놔주자고. 그리고 어디 잠적이라도 하면 되겠지.”

알의 우스갯소리에 웃는 사람은 없었다.

* * *

뉴욕. 짐의 사무실.

위이이잉. 위이이잉.

“다음엔 아예 무음으로 해 놔야겠군. 후, 오래간만에 좀 쉬는 시간이었는데.”

짐은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전화를 들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사범. 지금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었어요.”

[그래요?]

“거의 잠이 들락 말락 하는 순간이었거든요.”

[아, 이제 저는 돈에는 이겼지만 잠에는 진 불쌍한 선수가 되는 건가요?]

“아뇨, 이겼어요. 다 깼거든요. 무슨 일 있어요?”

[일이 있죠. 그리고 짐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예요.]

짐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평소에 사건, 사고와 거리가 먼 그의 어린 계약자는 웬만한 일에는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흠, 일단 말해 봐요. 무슨 일이에요? 여자? 돈? 아니면 다른 쪽?”

[다른 쪽이에요. 아주 큰 문제죠.]

큰 문제. 김사범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짐에게 너무 낯설게 다가왔다.

“설마, 약물이에요? 아니, 도핑 테스트를 밥 먹듯이 받는 사람이 허튼짓하진 않았을 거고. 아니면 가족에 관련된 건가요? 한국은 치안이 괜찮은 나라일 텐데?”

[가족은 멀쩡해요. 당연히 약물도 아니고. 그것보다 더 큰 문제긴 한데, 짐이라면 해결해 줄 수 있을 거예요.]

“사범, 빨리 말해요. 지금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거면 즉시 해결해야 하니까.”

[외야수랬죠?]

“네?”

[대학교 때까지 외야수로 뛰었다고 했잖아요.]

“맞아요. 근데 그걸 왜……?”

[나 방금 아메리칸리그 홈런 더비 선수로 지명 당했어요. 팀원들은 푹 쉬어야 할 거 같고, 마땅한 배팅볼 투수가 없네요. 짐이 도와줘요.]

잠시 사무실에 정적이 흐른다.

[짐?]

“그러니까, 홈런 더비의 배팅볼 투수로 내가 나서 달라는 거예요? 사범?”

[그렇죠. 다른 선수들은 아버지나 은사님을 초청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알다시피 전 그것도 힘드니까요. 한참 고민하다가 짐이 생각나더라고요.]

“하하, 사범, 지금까지 에이전트가 거기에 나선 적은 없어요. 차라리 괜찮은 배팅볼러를 한 명 섭외해 볼게요.”

[아무도 나선 적 없으니까 제가 해 보려고요. 그동안 짐의 장난기에 당했던 것도 있고. 나중엔 사람들이 기대하기 시작하면 이런 것도 못해요.]

“후, 생각해 보죠. 일단 배팅볼러도 구해 볼게요.”

[음, 짐? 짐을 곤경에 빠트리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부담 없이 해도 돼요. 그냥 고객 한 명이 진상 부리는 거로 생각하면 맘이 편하지 않겠어요?]

“끊어요. 사범에게 장난친 과거의 나를 내 샷건으로 응징하러 가야 하거든요. 일단 머리를 좀 식히고 다시 전화할게요.”

[콜.]

전화를 끊은 뒤, 짐은 몸을 의자에 파묻었다.

“올스타? 홈런 더비? 하, 참…….”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다시 짐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 화면을 흘깃 본 짐은 몸을 일으켜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곧 전화가 끊기고, 마침내 원하던 물건을 찾은 짐이 핸드폰을 들었다.

찰칵.

그리고, 사진이 포함된 메시지가 뉴욕에서 어딘가를 향해 전송되었다.

* * *

드르륵.

짐을 챙기던 도중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핸드폰이 울렸다. 아마 짐의 징징거리는 문자겠지.

‘거절인가? 아, 재미있을 것 같은데.’

사실 내게 배팅볼러는 의미가 없다. 공을 존 안으로 넣을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떤 공이든 넘길 수 있으니까.

핸드폰을 확인하니 짐의 번호로 메시지와 사진 한 장이 와 있었다.

하얀 야구공을 쥔 검은 손.

그리고 짐의 메시지.

[콜, 어디 한번 전국적으로 망신당해 봅시다.]

아주 재미있는 올스타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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