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57화 (57/175)

57화 김사범, 2020시즌(올스타)

홈런 더비가 끝난 뒤.

“괜찮아요? 많이 아프죠?”

“내가 한국어 배울 때 많이 들어 본 어조인데, 나 놀리는 거 맞죠, 사범?”

“크하핫, 들켰네요. 아이싱 안 해도 되겠어요?”

내가 90개가 넘는 홈런을 치는 동안 짐은 100개가 넘는 공을 던졌다.

처음에는 가볍게 배팅볼 던지듯 공을 뿌리던 짐도 나중엔 흥이 올랐는지 폼도 제법 커져 있었다.

“후, 내일 하루 오른팔이 없다고 생각하면 되겠죠. 휴가까지 냈으니 괜찮을 거예요.”

“그래도, 기분 좋았죠? 올스타전 마운드.”

돌아오기 전, 나도 올스타전에 딱 한 번 나간 적이 있다.

지금 짐이 그렇듯 홈런 더비, 아니 홈런 레이스의 배팅볼 투수로.

난 아직도 날 배팅볼 투수로 지명하던 선배와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다.

“야, 올스타전 할 때 쉬지? 와서 공 좀 던져라.”

“네?”

“어차피 또 운동한다고 몸 혹사시킬 거 아냐, 너도 이제 8년 차야. 몸 생각해야지. 차라리 그럴 바엔 홈런 레이스 때 나한테 공이나 좀 던져 줘.”

“……왜요?”

“그냥, 야구선수 하면서 맛이라도 봐야지. 나중에 추억거리라도 될 수 있게. 그리고 혹시 아냐? 내가 엄청난 신기록을 세워서 영상에 영원히 남게 될지.”

내 야구인생에 대한 위로인 듯, 아닌 듯한 말. 두어 시간을 고민하던 나도 계속 들들볶던 선배의 등쌀에 결국 그 자리를 수락했었다.

그리고 우린 2개의 기록으로 꼴지를 기록했고.

“기분 좋았어요. 그렇게 지독하게 홈런을 맞으면서 환호를 듣는 것도 신선했고. 아마 투수 출신이었으면 안 그랬겠죠?”

똑같다. 나도 홈런 레이스 후 선배와 가진 술자리에서 저렇게 말했었다.

“죽이죠? 원한다면 내년에도 또 세워 줄게요.”

“놉. 네버.”

단호한 짐의 말과 함께 우린 식당으로 향했다.

* * *

다음 날.

악마의 피 과다섭취와 전날 무리한 투구로 인해 왼팔 하나만 제 기능을 하고 있는 짐을 버려 두고 다저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경기 전 덕아웃.

“긴장 좀 했네? 가만있는 글러브 계속 만지작대는 거 보니까?”

“붐, 너도 마찬가지야. 스파이크 끈 세 번째 다시 묶고 있어.”

“난 긴장한 게 아니라 새로 묶은 끈의 대칭이 안 맞아서 조정한 거야.”

케이시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보니 어느새 경기시간이 거의 다 됐다.

“붐! 3번이지?”

“아, 트라웃. 잘 부탁해요.”

“응? 뭘?”

“솔로 홈런보단 주자가 있는 상태에서 날리는 게 낫잖아요?”

“아, 내가 2번이니까? 하하, 아마 솔로 홈런만 치게 될 텐데?”

“컨디션 별로예요?”

“아니, 내가 먼저 칠 거거든.”

뻔뻔한 양반이네, 전반기 홈런 30개도 못 넘긴 똑딱이면서.

“음, 안심할게요. 믿음이 생기네요.”

“뭐? 흐핫, 그래, 이 정도 배짱은 있어야 ROY를 받을 수 있지.”

“ROY? 신인왕이요?”

“그래. 사실상 거의 확정 아냐? 다른 경쟁자들이 아쉽겠어. 다들 평년이었으면 수상할 가능성이 충분한데, 붐 때문에 아예 꿈을 접어야 하잖아?”

쓰악. 쓰악.

글러브를 손질하며 트라웃의 말을 듣던 케이시의 손놀림이 격해진다.

“아, 뭐. 여기 케이시도 있고, 또 다른 투수 루키도 있던 거 같은데.”

“있지. 공 좋더라고. 그래도…… 솔직하게 말해 봐 붐. 재미없게 왜 갑자기 겸손이야?”

“겸손한 거 아닌데요. 그냥 있다는 거죠. ROY 주변에.”

어차피 내가 받을 상인데 뭐.

* * *

예전 TV 광고 중에 지구의 축구대표팀과 외계인이 맞붙는 광고가 있었다.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 본 그 광고는 어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구 대표팀이라니. 축구로 외계인과 싸워서 지구를 지키다니!

물론 그 광고의 주인공이 꽤 잘생긴 선수라 더 그럴싸해 보였겠지만. 아무튼, 지금 그 광고가 현실이 되어 내 앞에 펼쳐져 있다.

[3회 말, 원아웃 주자 만루에서 마차도 선수의 타석입니다.]

[샌디에이고로 팀을 옮긴 뒤 수비면 수비, 타격이면 타격 둘 다 한층 업그레이드됐다고 평가받는 마차도 선수입니다. 조심해야 해요.]

딱!

느린 타구, 하지만 내야를 빠져나가기엔 충분한 코스다. 내가 아니었다면.

2루 베이스 위에서 한 번 튕긴 공이 내 글러브 속으로 들어온다. 그때 내 귀에 들리는 소리.

“여기!”

기울어진 몸을 세우기도 전에 글러브로 공을 토스한다.

“아웃!”

펑!

“아웃!”

2루심과 1루심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아웃 콜을 크게 외친다.

[아, 처음 호흡을 맞춰 보는 사이가 맞나요? 디트로이트의 김사범 선수와 휴스턴의 호세 알투베 선수, 기가 막힌 플레이로 더블플레이에 성공합니다!]

[안타성 타구를 따라가 건져 올린 김사범 선수가 지체하지 않고 글러브 토스로 알투베 선수에게 건네줬죠? 그걸 또 글러브로 잡는 게 아니라 맨손으로 잡아서 바로 1루에 뿌렸습니다. 대단한 수비입니다. 이게 올스타전의 묘미죠!]

“나이스 수비, 붐.”

“알투베도요. 콜이 없었으면 한 박자 늦었을 거예요.”

“이 정도야 뭐, 내 범위까지 커버해 주는데 당연한 거지.”

이삭의 수비가 뒤쳐진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지만, 경험에서 나오는 노련함이 아쉽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덕아웃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선수들이 보인다. 자신의 구단에서 비치해 놓지 않은 해바라기씨라며 한 웅큼 입에 집어넣고 껍질을 한가득 뱉는 선수도 있고.

“붐! 선두타자지? 한 방 날려! 그래야 상대 투수가 쫄아서 나도 좀 치지!”

텐션이 끝도 모르게 올라가 신난 스탠튼 같은 선수도 있다.

“당연하죠. 홈런 아니면 삼진. 그게 내 이번 올스타전 모토예요.”

나처럼 냉철하게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에 한발자국씩 다가가는 선수는 없는 것 같지만.

[김사범 선수, 4회 첫 타석에 들어섭니다. 저번 타석에서는 아주 시원한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죠?]

[사실 김사범 선수의 홈런은 큰 스윙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확하게 맞춰서 넘긴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스윙인데요, 이번 올스타전에선 아주 맘먹고 돌리고 있어요. 스윙 소리가 외야까지 들릴 것 같습니다.]

후우웅!

[말씀하신 순간, 변화구에 크게 헛스윙하는 김사범 선수입니다]

[공을 돌려받는 투수 얼굴이 굳었어요. 타자가 이렇게 카운트 상관없이 풀스윙을 하면 투수들은 자연스럽게 몸이 굳어지거든요. 홈런을 맞는 걸 좋아하는 선수는 없으니까요.]

방금 스윙으로 떡밥은 다 던진 것 같은데, 이제 지켜볼 시간인가?

“볼!”

[연속 3구째 볼입니다. 갑자기 김사범 선수가 배트를 내지 않습니다.]

[배트를 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투수가 최대한 구석으로 공을 찌르고 있어요. 전 타석과 이번 타석 처음의 스윙이 아직 뇌리에 박혀있다는 거거든요? 과연 다음 공은 무슨 공을 던질지 궁금합니다.]

승패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올스타전, 많은 광중들 앞에서 볼넷을 주고 싶은 투수가 있을까? 그것도 한 끗발 날리는 투수가?

4구째, 존을 향해서 패스트볼이 날아왔다.

“흐아압!”

빠악!

아, 그렇다고 월드시리즈처럼 던지는 건 반칙이지.

[김사범 선수의 타구가 높게 뜹니다! 아마 외야에서 잡힐 것 같은데요? 뒤로 물러나 있던 스탈링 마르테 선수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납니다. 어? 어어?]

[어느새 워닝트랙에 도달한 마르테 선수, 뒷걸음질 쳐 보지만, 등이 펜스에 닿습니다!]

[와, 지금 화면에 타구 발사각도가 나오고 있는데요, 47도입니다. 야구 전문가들이 분석한 이상적인 타구 발사각도를 보통 30도 정도로 보거든요? 수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45도에 가까울수록 멀리 나가는 게 맞지만, 공의 회전이라든지 타구 속도 때문에 수학적 접근과는 조금 거리가 있죠.]

[아, 그렇다면 지금 김사범 선수의 홈런은 정말 보기 힘든 홈런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요?]

[그렇죠. 50도에 가까운 타구 발사각도로 이런 대형 타구를 만든다는 건, 정말 김사범 선수의 힘이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네요. 정말 대단한 힘입니다.]

원래 목표는 총알 같은 타구로 순식간에 홈런을 만들어 내는 거였다. 뭐, 그래도 홈런은 홈런이니까.

특별한 세레머니는 하지 않았지만 평소보다 조금 느리게 베이스를 돌았다.

3루에 거의 다다르자 누군가 손바닥을 내민다. 익숙하게 내 손바닥을 마주 치고 얼굴을 보자 낮선 얼굴이 보인다. 응?

[하하, 내셔널리그 올스타 팀의 3루수인 놀란 아레나도 선수가 김사범 선수와 하이파이브를 하네요.]

[올스타전이니까요. 멋진 홈런을 보여 준 루키에게 건네는 인사 같은 느낌이군요.]

[아메리칸리그 올스타 팀의 주루 코치가 머리 위로 손을 들어 관중들의 박수를 유도합니다.]

짝짝짝짝!

올스타전, 참 재미있다. 앞으로도 계속 나오고 싶을 정도로.

* * *

한국, 서울.

야구 유니폼을 입은 김태연이 경기장 구석에서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그래서, 사범이가 올스타전 MVP 먹었냐?]

“몰라, 나도 보다가 경기장 왔지. 궁금하면 검색해 봐.”

[그래야겠네. 아씨, 직접 봤어야 하는데. 기사로 읽으면 현장감이 없잖아. 누구 본 사람 없나? 왜 미국은 야구를 점심에 하냐?]

김태연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낄낄대며 대꾸했다.

“너도 점심에 하잖아. 안 그래? 2군?”

[너 다음에 보면 죽여 버린다. 아무튼 김씨 성 가진 태연이란 이름은 그냥 옆에 두고 심심할 때마다 때려야 해.]

“뭐라고? 2군 선수가 하는 이야기라 안 들리는데?”

[아 씨……. 후, 됐고. 곧 소집이지?]

“모레부터 소집이지.”

[잘해라. 한국 망신시키지 말고.]

“어차피 후보야. 망신시키고 싶어도 못시킨다.”

[그건 그래. TV에 안 잡히게 덕아웃에 잘 숨어 있고. 얼굴만 나와도 나라 망신이니까.]

“너만 할까?”

[밥 나왔다. 끊는다.]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통화, 김태연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 화면을 두드렸다.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아메리칸리그 승리. 김사범은 아쉽게도 아치워드상(MVP) 놓쳐.

- 해마다 메이저리그의 별들이 격돌하는 올스타전. 올해에도 각 리그에서 뽑힌 최고의 선수들이 연장 승부를 펼쳤다.

4회 김사범의 솔로 홈런으로 시작된 홈런 퍼레이드는 9회 내셔널리그, 애틀랜타 소속의 아지 알비스의 동점 쓰리런으로 극에 달했다. 이어진 연장전에서 트라웃의 볼넷, 김사범의 안타에 이은 지안카를로 스탠튼의 홈런으로 다시 3점 차이로 벌린 아메리칸리그 대표팀은 실점 없이 10회 말을 넘겨 승리를 거뒀다.

5타석 3타수 2안타 1홈런 2볼넷을 기록한 김사범은 성공적으로 올스타전 데뷔를 치렀다…….]

김사범에 대한 기사를 보던 김태연이 자신도 모르게 읊조렸다.

“같이 시작했는데 누구는 메이저리그 올스타고, 누구는 1군 후보, 누구는 2군. 참 세상 불공평하네.”

자신이 내뱉은 말에 자신이 더 놀라는 김태연. 곧 머리를 몇 번 흔들더니 라커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대표팀은 내가 먼저 뽑혔으니까. 나중에 자랑할 거리는 있네, 하핫!”

같은 시각, 펜실베니아 주 무직(Moosic).

[자기 또 사범 씨 기사 보지?]

김병헌의 노트북 화면 안, 메신저가 깜빡거리고 있다.

잠시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던 김병헌은 메시지를 보자마자 재빨리 키보드를 두드렸다.

[아냐,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잖아.]

[또 한 번 그래 봐, 내가 어떻게든 휴가 내고 날아가서 머리털 다 뽑아 버릴 테니까.]

[그러다가 대머리 되면 책임질 거야?]

[책임질 거니까 뽑아 놓지. 근데 진짜 이제 아무렇지 않아?]

“그럴 리가, 짜증 나 죽겠지.”

입으로 내뱉은 말과 다르게 손가락은 현란하게 키보드를 누비고 있었다.

[어제 에이전트가 말해 줬거든. 아마 9월엔 콜업 될 거 같다고. 그럼 이제 곧 상대할 수 있는 거잖아?]

[진짜? 진짜야?]

[응, 진짜야.]

[축하해! 이럴 때가 아닌데, 나 어차피 내일 아침 스케줄 끝나면 이틀 정도 시간 비는데, 내가 갈까? 축하 파티 해야지!]

[이틀이면 왔다 갔다 하는 게 더 힘들잖아. 내가 시즌 끝나고 갈게!]

[정말 다행이다, 트리플A에서 그렇게 잘 던지는데 콜업을 안 해 줘서 속상했었잖아.]

[어차피 확장 로스터 때 올라가는 건데 뭐, 그래도 이번에 올라가서 잘 던지면 내년 개막 로스터에 들 수도 있으니까. 힘내야지.]

[이번에 들어오면 어디 가지? 내가 좋은 데……·]

어느새 메신저는 뒷전으로 밀어 놓고 동영상 파일에 집중하고 있는 김병헌.

[2020 season : sa beom Kim]

뭔가를 계속 적어 가며 동영상을 보던 김병헌이 동영상에서 홈런을 치고 있는 김사범을 향해 말했다.

“기다려라. 이번엔 내가 꼭 이길 테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