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61화 (61/175)

61화 김사범, 2020시즌(vs 블레이크 스넬, 그리고…)

“파울!”

“후아!”

내가 서 있는 대기타석까지 이삭이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18구? 19구? 스넬이 이번 이닝에 몇 개의 공을 던진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이삭은 온 힘을 다하고 있다.

자신의 기록과 팀의 승리를 위해서.

후웅!

“스트라이크! 아웃!”

“하아……. 후.”

원바운드 성으로 떨어지는 파워 커브에 삼진을 당한 이삭이 타석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분한 마음을 담은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타석이었다는 증거다.

“잘 봤다.”

“……그럼 한 방 날려 줘.”

당연하지. 반드시. 무조건.

[아, 이삭 선수가 블레이크 스넬 선수에게 정말 끈질기게 달라붙은 타석이었습니다.]

[4회가 시작하고 이삭 선수에게만 21개의 공을 던졌습니다. 타자가 타석에서 집중력을 소모하듯, 투수도 마찬가지거든요? 지금 블레이크 스넬 선수가 느끼는 부담은 더 클 거예요.]

타석에 들어서며 마운드를 쳐다봤다.

거친 호흡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는 투수의 모습.

내게는 그 모습이 도망치다 지쳐 헐떡이는 초식동물의 모습으로 보였다.

“볼!”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초구 몸쪽 깊은 패스트볼. 골랐다.

2구도 역시 몸쪽으로 오는 체인지업. 아쉽게도 배트가 따라 나갔다.

3구는 바깥쪽 멀리 빠지는 패스트볼.

4구째, 횡 무브먼트가 심한 슬라이더가 존 바깥쪽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주한 2-2의 카운트.

내 경험상, 이렇게 다양한 구종을 던지는 투수들은 마지막을 위해 송곳니를 숨기고 있는 경우가 많다.

[2-2에서 제5구째, 던집니다!]

지금까지 던지지 않은 공은 커브. 직전에 이삭을 돌려세운 공이다.

머리를 모두 비우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느리면 커브. 빠르면 패스트볼.

‘빠르다!’

마침 회전의 방향이 정반대인 구질이라 구분하기는 쉬웠다. 물론 패스트볼이 아닐 가능성도 있지만…….

따아악!

[김사범 선수의 배트가 이 공을 강하게 때립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에 한 장면으로 남을 타구가 멀리 뻗어 나갑니다! 그리고! 좌측 담장을 가볍게 넘겼습니다!]

[맞는 순간 모든 사람이 홈런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잘 맞은 타구였어요. 와, 타구 속도가 나왔는데, 무려 130마일이네요. 하하. 그저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본인의 40-40 기록 달성을 위한 축포인 셈이군요! 메이저리그 역사상 4명밖에 이루지 못한 기록에 김사범 선수의 이름이 새겨졌습니다!]

[루키 시즌에 40-40이라, 지금 도루 기록이 56개인가요? 맞네요. 이렇게 되면 50-50도 꿈은 아니겠어요. 아직 시즌이 한 달이 넘게 남았거든요?]

예상하던 대로, 패스트볼이 존 상단을 향해 날아왔다. 완벽한 타격을 위해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임팩트 순간, 내 배트엔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단지 커다란 타구음과 관중들의 함성만 들렸을 뿐.

40-40

홈런 단 한 개가 추가됐을 뿐이지만 단숨에 격이 올라 버린 내 기록.

흥분인지, 앞으로 내게 쏟아질 관심에 대한 긴장인지. 오늘따라 홈플레이트에서 1루까지가 참 멀게 느껴졌다.

“지금 실컷 말해 둬야겠어. 잘했어 루키. 대단해.”

타석에 들어설 준비를 하는 미기가 그라운드를 돌아 덕아웃으로 향하는 내게 말했다.

루키. 그래. 나는 참 대단한 루키다.

그리고 덕아웃에 발을 딛자마자 날아오는 주먹과 시끄러운 괴성.

우드드드드.

“우와아아아악!! 괴물, 아니 헐크, 아니 뭐야, 이 빌어먹을 핵폭탄 같은 놈아!!”

“말도 안 돼, 아니 할 줄 알고 있었긴 한데 이게 지금 나오는 게 말이 되는 거야?”

“내가 힘을 빼놔서 그런 거야! 나한테 고마워해!! 지금 바로!!”

“타구가 안 보였어. 저기 좌익수하고 투수 봐봐, 지금 왜 1점이 올라갔는지, 붐이 왜 베이스를 돌아서 덕아웃으로 들어갔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을걸?”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냥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대책 없이 내뱉고 있다.

“그만! 붐! 나가서 팬들에게 인사하는 게 어때?”

타이밍 좋게 론이 날 부르지 않았더라면 고막이 터지거나 몸 어디가 부러져서 60일 DL에 올라갔을 수도 있다.

커튼콜.

나는 재빨리 덕아웃에서 뛰쳐나가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동양식으로.

그러자 다시 터져 나오는 환호.

짜릿한 경험이었다.

“베이스 온 볼스!”

덕아웃이 슬슬 진정될 때쯤, 우리의 정신적 지주이자 디트로이트의 베테랑 야구선수 미기는 흔들리는 스넬의 제구를 놓치지 않고 볼넷을 얻어냈다.

[다음 타자는 4번 크리스틴 스튜어트 선수입니다. 최근에 트리플A에서 다시 콜업 되면서 좋은 활약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이너 옵션이 없었는데도 마이너행을 받아들였던 스튜어트 선수인데요, 다시 콜업 된 이후에 7경기에서 3할 대의 타율과 3홈런으로 아주 좋은 활약을 해 주고 있습니다.]

[저번 타석에서 삼진을 당하긴 했습니다만, 끝까지 스윙을 줄이지 않고 풀스윙을 가져갔던 게 기억에 남는군요.]

[인터뷰 자료를 보니 예전엔 너무 많은 공을 보고, 다 치려고 했었답니다. 그러다 보니 슬럼프에 빠졌고요. 마이너에서 그런 부분들을 수정해서 올라온 게 좋은 활약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스튜어트가 한번 쳐줘야 하는데…….”

“그러게. 슬라이더 하나만 노리고 나간다던데.”

내 혼잣말에 옆에 있던 이삭이 대답했다.

“슬라이더? 왜?”

“몰라. 어차피 타석에서 보고 고르기엔 힘들다고 생각한 거겠지. 오늘 슬라이더 구사 비율도 좀 높다고 하더라고.”

“흠. 워낙 무브먼트가 더러운 공이라…….”

[블레이크 스넬 선수, 다시 페이스를 되찾는 것 같습니다. 패스트 볼을 두개 연속으로 던져 2스트라이크를 먼저 뺏어 냈습니다.]

[이제 타자는 머리가 복잡할 거예요. 낮으면 커브나 체인지업. 멀면 슬라이더. 그렇다고 지켜보면 루킹 삼진을 당할 가능성도 있고요.]

[투수가 굉장히 유리한 카운트, 2-0에서 제3구를 던집니다!]

어느새 다가온 케이시가 내 말에 의견을 보탰다.

“나도 슬라이더보다는 다른 걸 노려야 한다고 생각해. 만약 내가 스튜어트를 상대한다면 지금 여기서 체인지업을 하나 던져서…….”

빠악!

“어……. 간다!”

순식간에 덕아웃에 있던 모두가 타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홈런입니다! 스넬 선수의 체인지업을 받아쳐 투런 홈런을 만들어낸 스튜어트 선수!]

[아, 공이 좀 몰렸네요. 스튜어트 선수도 아주 잘 받아쳤습니다.]

미기와 스튜어트가 돌아오고, 또다시 광란의 현장이 된 덕아웃이 진정된 뒤에 스튜어트에게 물어봤다.

“이삭한테는 슬라이더만 노리고 나간다고 했다면서요?”

“그랬지.”

“근데 어떻게 체인지업을 친 거예요?”

“타석에서 생각해 보니까 우타자한테는 슬라이더를 결정구로 잘 안 던진다는 게 생각나서. 마지막에 노리던 걸 바꿨지.”

“아, 아까 체인지업 던지기 전에요?”

“아니. 투구동작 시작했을 때 생각났어.”

그게 하필 그때 생각난 것도 어이가 없고, 그걸 또 바로 바꿔서 홈런을 친 것도 어이가 없다.

“커브가 맞아 나가니까 패스트볼 위주로 카운트를 잡고 체인지업으로 마무리하는 패턴으로 바꿨던 거 같은데……. 하필 바꾸자마자 맞아 나겠네.”

케이시의 말을 들으니 조금 안타깝다. 하필 그때 투구 패턴을 바꿔선…….

덕분에 우리는 점수를 냈지만.

그리고 한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

[그린 선수 경기의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아냅니다! 3:1의 스코어로 디트로이트가 4연전 첫 경기를 잡아냅니다!]

우린 와일드카드를 향한 레이스를 시작했다.

* * *

경기가 끝난 뒤, 라커룸은 평소보다 2배가 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4회 사붐 선수의 홈런 직전에 끈질긴 승부를 보여 주셨는데요. 어떤 상황이었나요?”

“일단 팀이 3이닝 동안 공략하지 못한 투수였기 때문에…….”

제법 여유로운 표정으로 기자들을 상대하는 이삭의 주위에도.

“햄스트링 부상으로 이탈하신 뒤에 팀이 침체기에 빠졌는데요. 그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다른 것보다는 붐이 집중적인 견제를 받으며…….”

정말로 여유롭게 친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미기의 주위에도.

“8회, 투아웃까지 잡고 나서 홈런을 허용하셨는데, 실투, 맞죠?”

“……일단 실투가 맞습니다. 근데 그건 제가 잘못 던진 게 아니라…….”

오늘 경기 유일한 실점을 기록한 폴리에게조차 3명 이상의 기자가 붙어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입니다! 오늘 드디어 40-40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하셨는데, 39홈런에서 머무르는 기간 동안 어떤 기분이셨죠?”

“시즌 초 홈런 경쟁에 불을 붙이는 발언 뒤로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어느새 라이벌들이 턱밑까지 추격해 왔습니다. 기분이 어떠신가요?”

“현재 인터넷상에선 40-40을 기록한 선수 중 약물 전적이 있는 배리 본즈 선수와 알렉스 로드리게스 선수를 제외하고 알폰소 소리아노 선수와 사범 킴 선수의 기록만 인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퍼져나가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다른 선수들에게 붙은 기자보다 더 많은 수의 기자가 내 주변에 몰려있다.

“잠깐, 잠깐만요. 일단 라커룸에서 나가서 인터뷰를 진행하겠습니다. 너무 혼잡해서 다른 선수들에게 피해가 가겠네요.”

결국, 내가 라커룸에서 나와야 했다.

“일단, 저에게도 40-40은 의미 있는 기록입니다. 특히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첫 시즌에 이런 기록을 남겨서 더 기분이 좋네요.”

“39홈런에서 머무르는…….”

아까 그 기자다.

“아하하, 아까 제대로 들었습니다. 음, 당연히 초조하고 걱정됐지만, 어느 순간 이후에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던 것 같아요. 어차피 시즌은 많이 남았고. 절 상대하는, 제가 홈런을 칠 수 있는 투수가 한 명은 있을 것 같았거든요.”

“제 질문에도 답해 주시죠! 약물 관련 기록의 말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기자는 아까부터 이상한 질문을 던져 댄다.

“그건 제가 대답할 문제가 아니군요. 여기 말고 사무국으로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 기록 보유자로서…….”

“그만. 그에 대한 질문은 더 받지 않겠습니다.”

세상 어디에나 이상한 기자들은 꼭 있다.

“그렇다면, 50-50은 어떻게 보시나요?”

누군가가 던진 질문에 갑자기 사방이 고요해졌다.

지금 이 질문의 대답으로 나라는 프로선수의 캐릭터가 정해질 수도 있다. 지금까지보다 더 신중하게 말을 골라야 한다.

“시즌이 끝나기까지 아직 40경기 가까이 남았습니다. 예전 오클랜드가 그랬듯,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일종의 기적이 일어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죠.”

“그 말은 50-50에 대한…….”

“예상 가능한 기록에 기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진 않겠습니다. 50개의 홈런이 가까워지면 전 60개를 향해 달릴 거고. 60개를 친다면 그다음엔 레코드를 향해 달릴 겁니다.”

내 말을 곱씹느라 잠시 조용해진 기자들에게 내가 생각한 마지막 한마디를 뱉었다.

“앞으로 제가 상대할 투수들이 루키인 저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붐!

나는 폭탄을 던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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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한 동양인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고 마중 나온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다.

“킴! 여기요!”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에 킴이라 불린 동양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이제 진짜 시작이네. 기다려라, 세계야!”

그는 모국어로 자신의 포부를 널리 알리며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뭐야? 영화 찍는 거야 설마?”

“미튜브나 이런데 올릴 거 찍는 거겠지. 만약 진짜 진심으로 내뱉은 거면 너무 소름 돋잖아…….”

자신의 말을 알아들은 몇몇 사람의 등에 소름을 남겨 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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