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김사범, 2020시즌(포스트시즌과 뉴욕)(1)
시간은 누가 뭐라고 해도 흘러갔고, 끔찍했던 9월 초의 기억은 점점 흐려져 갔다. 하지만 아메리칸리그의 순위표는 시간이 지날수록 혼란에 빠지고 있었다.
시즌이 15경기가 남은 시점. 그야말로 한 경기라도 삐끗하면 포스트시즌 진출이 어려워질 정도의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일단 아메리칸리그 중부지구부터 살펴보면, 선두인 클리블랜드와 우리 팀의 승차가 2경기다. 한번의 맞대결이 남아 있기 때문에 두 팀 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처지다.
동부지구의 선두 다툼을 하고 있는 보스턴과 양키스는 한 경기 차로, 양키스가 앞서 있다.
하지만 만약 시즌이 끝날 때 승률이 동률이 된다면, 디비전 시리즈 진출 팀과 와일드카드 1위 팀을 결정하기 위해 단판 승부를 벌일지도 모른다.
그다음이 와일드카드 2위 다툼인데, 탬파베이와 우리가 1경기 차, 에인절스와 탬파베이가 2경기 차이가 난다.
“우리 경기 일정이 어떻게 되지?”
조용히 좌석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내게 옆자리의 폴리가 말을 걸었다.
“이번 주에 클리블랜드, 미네소타.”
“아니 다음 주 일정.”
“양키스, 볼티모어.”
“그래 맞아. 그랬었지.”
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공을 던지는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드디어 클리블랜드와 맞대결이네.”
“그렇지.”
“치열할 거 같아.”
“그렇겠지? 그래도 어쩌겠어. 여기까지 왔는데.”
그리고 다음 주, 우리가 양키스와 붙는 동안 클리블랜드는 보스턴과 3연전을 펼친다. 이건 뭐, 리그 토너먼트도 아니고 양 지구의 1, 2위가 서로의 목줄을 잡고 싸우게 생겼다.
물론 최고의 시나리오는 우리가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스윕을 하는 거다. 그렇게 되면 자력으로 디비전 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니까.
탬파베이의 대진이 화이트삭스-토론토로 이어지기 때문에, 디비전 시리즈 직행이 아니라면 사실상 와일드카드 2위는 어렵다고 봐야한다. 화이트삭스가 고춧가루를 뿌리기에는 시즌 초반부터 너무 확실한 탱킹 노선을 달리며 최다패 기록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까.
이번 주가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한 분수령이 될 거 같다.
* * *
디트로이트 시, 건설 현장.
시끄러운 소음이 가득한 현장에서 두 노동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니 그러니까 타이거즈가 지금 잘하고 있다는 거야?”
“그렇다니까? 이번 주 경기 결과에 따라 포스트시즌에도 나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
우드드드드!
“뭐라고?”
“지금 타이거즈가 존나 중요한 순간이라고!”
“그래! 점심 먹으러 가자!”
뭔가 이상한 대화지만, 두 남자는 자연스럽게 같이 점심을 먹으러 현장을 떠났다.
그리고 잠시 후.
“후, 언제까지 이런 빵 쪼가리나 먹어야 하는지. 햄버거가 아니면 고기 맛을 못 봐.”
“그래도 다행이지. 예전이었으면 집에서 빈둥대다 아내에게 쫓겨나듯 나와 있었을 시간인데.”
“요즘 들어 확실히 일거리가 많아지긴 했어. 이번에 새로운 기차역도 짓는다고 하고.”
“뭐, 뭐가 됐든 일거리만 많으면 됐지. 아, 아까 타이거즈가 잘하고 있다고 했나?”
“아! 내가 몇 번을 말해! 이번 주 경기가 중요하다니까!”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남자.
“아, 알겠어. 알잖아, 나 귀 안 좋은 거.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데? 나 하키나 풋볼 말고는 잘 안 보는 거 알잖아.”
“지금 클리블랜드하고 두 게임, 탬파베이하고 에인절스하고는 앞뒤로 한 게임 차이야.”
“그럼 와일드카드로 나갈 수도 있는 거네?”
“지켜봐야지. 오늘부터 클리블랜드하고 홈경기인데 보러 가려고.”
“허허허, 야구라면 질색을 하더니.”
“그거야 맨날 지니까 그런 거지. 원래 난 야구를 좋아했어.”
* * *
그날 저녁, 코메리카 파크.
경기 전, 평소와 다르게 론이 라커룸에 선수들을 불러모았다.
“인디언스의 머리 깃털에 불이 붙었나 보군, 우리를 상대하려고 로테이션 조정까지 하다니.”
“클루버 말이죠?”
“그래, 뭐. 우리가 무서울 만하지. 그렇지 않나?”
“그렇긴 하죠.”
“인디언스가 자랑할 만한 게 클루버밖에 없으니, 이해해 주자고. 근데…… 클루버도 우리에게 한 번 깨지지 않았나? 맞지? 붐?”
“우리가 박살 냈죠.”
“그래, 우리가 박살 냈지. 그리고 오늘도 박살내 주자고.”
그리고 네 시간 후.
역시 사람은 하던 대로 해야 한다. 괜히 큰 경기를 앞두고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하니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아, 김사범 선수, 이번 타석에서도 걸어 나갑니다.]
[철저하게 고의사구로 김사범 선수를 거르고 있어요. 심지어 방금 전에는 1루에 이삭 선수가 나가 있었는데도 내보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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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가 3:1의 스코어로 승리를 거머쥡니다. 이로써 승패 차이는 3경기로 벌어집니다.]
그리고 다음 날, 론도 민망했는지 이번엔 특별한 일 없이 경기를 준비했다.
[케이시 선수, 오늘도 완벽한 투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같은 팀 내 김사범 선수만 아니었어도 ROY를 노려볼 수 있는 성적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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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 말. 김사범 선수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습니다. 대즈 카메론 선수의 안타에 이은 이삭 선수의 볼넷으로 무사 1, 2루입니다.]
내가 본즈도 아니고 이 상황에서 거르진 않겠지.
[김사범 선수의 타구, 가운데 담장을 향해 나아갑니다! 끝내기 홈런! 김사범 선수의 시즌 두번째 끝내기 홈런이자 시즌 46번째 홈런을 기록합니다!]
[낮은 직구를 제대로 퍼 올려서 홈런을 만들어 냅니다. 이 홈런으로 지구 1위의 가능성을 지키면서 꿈의 경지, 50-50까지 홈런 단 4개만 남겨 두고 있네요. 대단합니다. 정말 대단해요.]
후. 50-50도, 지구 우승도 좋지만 조금만. 조금만 쉬고 싶다.
다음 날 이어진 3차전에서도 연장 11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안 그래도 헐떡이면서 무리해서 도루는 왜 한 거야?”
“답답해서. 충분히 칠 수 있는 공인데 자꾸 그냥 나가라고 하잖아.”
“그렇다고 나가자마자 2루, 3루 도루를 한 거야? 그러다 부상당하면 팀에 더 손해야.”
이삭의 잔소리를 뒷등으로 들으며, 원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 *
미네소타와의 원정 4연전은 3승 1패로 끝났다. 마지막 경기에서 그린의 블론 세이브만 아니었어도 시리즈 스윕을 노릴 수 있었는데. 아쉬운 마무리였다.
같은 시기에 클리블랜드가 에인절스 전에서 2승 2패를 기록하면서 승패 차이는 없어졌지만. 그만큼 다음 양키스 원정이 중요해졌다.
딸깍.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
너무 피곤해서일까. 잠이 잘 오지 않아 비행기 안의 TV를 틀었다.
[아메리칸리그의 순위다툼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시즌 종료까지 일주일 남은 지금. 중부지구와 동부지구의 승자는 아직 안개 속에 싸여 있는데요, 내일부터 펼쳐지는 디트로이트-양키스 전과 클리블랜드-보스턴 전에…….]
삑.
[내가 숨 쉬는 동안, 너만을 사랑하겠어.]
[나도. 세상이 끝나는…….]
딸깍.
결국 TV 시청도 포기했다.
아, 스트레스.
다음 날.
양키스와의 4연전을 시작하는 더블헤더 1차전.
“붐!”
말 안 해도…… 알아!
아슬아슬한 타이밍. 몸을 일으켜 정확한 송구를 하기보다 빠른 송구를 택했다.
[김사범 선수, 3-유간 깊은 타구를 잡아냅니다! 공을 2루로! 아웃! 그리고 다시 1루! 아웃입니다! 디트로이트와 양키스의 더블헤더 1차전은 디트로이트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1루심의 아웃 선언이 들리자마자 그라운드에 몸을 던졌다. 아 힘들어.
그렇게 누워 눈만 데룩데룩 돌리고 있자니 양키스 불펜 쪽에서 익숙한 모습의 동양인이 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이삭, 나 좀 일으켜 줘!”
“크큭, 다음 경기까지 누워 있지 왜?”
“지금 안 일어나면 무지 피곤할 거 같아서. 시즌 끝자락에 두드러기나 소름으로 결장하긴 싫어.”
“뭔 소리야?”
설명할 시간이 없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삭의 손을 잡고 일어나 재빠르게 덕아웃으로 향했다.
잠시 후.
“보충제 먹고 힘이 나겠어? 밥이라도 먹어야지.”
이삭 넌 좋겠다. 무언갈 씹어 넘길 체력이 남아 있어서.
“이삭 말이 맞아. 이럴 때일수록 억지로라도 먹어야지.”
미기도 부럽네요. 난 글렀어요.
지금 내 몸 상태는 자동차로 따지면 주유등이 반짝거리는 상태다. 언제 멈출지 모른다.
그렇게 잠시간의 휴식을 마친 뒤 더블헤더 2차전이 펼쳐졌다.
* * *
[뉴욕 양키스와 디트로이트의 시즌 5차전, 더블헤더 두 번째 경기로 찾아뵙고 있습니다.]
[아하하, 앉아서 해설만 하는 저희도 이렇게 지치는데 실제로 경기를 뛰는 선수들은 얼마나 힘들까요?]
[어느 선수는 온몸에 있는 수분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라고 하더군요.]
[양키스는 1차전 다나카 선수에 이어 2차전 선발로 J.A 햅 선수를 내세웠습니다.]
[왼손 선발 투수로 포심과 싱커, 슬라이더를 주로 구사하는 선수입니다.]
[디트로이트는 멧 보이드 선수에 이어 뷰 버로우즈 선수를 내세웠습니다.]
[여러모로 볼거리가 많은 경기에요. 지구 우승이 달린 경기도 하지만 김사범 선수와 스탠튼 선수의 홈런 레이스, 얼마 전 콜업 되어 불펜에서 대기하고 있는 김병헌 선수와 김사범 선수의 맞대결 성사 여부도 걸려 있죠.]
[1차전에서는 아쉽게도 성사되지 않았죠. 과연 이번 경기에서는 어떻게 될지 궁금합니다.]
“플레이 볼!”
많은 것이 걸린 경기가 시작됐다.
1회 초, 이삭이 삼진을 당하고 돌아온 나의 타석. 나는 타격 자세를 잡기도 전에 1루로 향했다.
“낮에도 보고, 저녁에도 보고. 애인보다 널 더 자주 보는 거 같아.”
양키스의 1루수인 루크 보이트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러게요.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으면 좋겠네요.”
론의 도루 자제 지침으로 인해 리드는 짧게 유지하고 있다.
“스트라이크! 아웃!”
미기의 삼진.
“아웃!”
이어진 카스테야노스의 내야 땅볼로 이닝이 종료됐다.
이닝 종료 후, 덕아웃.
“아, 제구가 날리길 바랐는데.”
평소에도 기복이 심하기로 유명한 투수다 보니 팀 차원에서 기다린다는 생각으로 이닝을 시작했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잘 긁히는 날인 것 같다.
“그나저나, 결국 저 타선을 가지고 나왔네.”
“그러게. 1번 저지에 2번 스탠튼이라니.”
그라운드로 향하는 내 귀에 케이시와 폴리의 대화가 들렸다. 어느새 전광판에 떠 있는 저지의 얼굴. 1회 선두타자부터 백투백 홈런을 노리는 전략인가? 저쪽도 화끈한데?
“스트라이크!”
하지만 시즌을 거치며 더욱 용감해진 버로우즈의 막무가내식 스트라이크 공략에는 그 대단하고 화끈한 양키스의 타자들도 당황한 것 같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 애런 저지가 삼구 삼진을 당했다. 맙소사.
삼진 후, 내야에 공이 도는 동안 갑자기 날 보며 씩 웃는 버로우즈.
뭐지?
갑자기 심판이 1루를 가리킨다.
여기서 고의사구라고?
[아, 스탠튼 선수가 1루로 걸어 나갑니다. 전혀 예상 못한 것 같죠?]
[고의사구 지시인 만큼 벤치에서 사인이 나온 거 같은데요. 이건 일종의 항의일 수도 있습니다.]
[항의요?]
[홈런왕 경쟁을 하고 있는 두 선수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자는 거죠. 마침 홈런 개수도 46개로 동일하거든요? 김사범 선수의 다음 타석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루에 나와서 멀뚱히 서 있는 스탠튼을 보니 괜히 웃음이 난다. 방금 전, 버로우즈가 웃을 때까지도 나는 이런 상황이 될지 몰랐다.
‘팀이 판을 깔아 줬는데, 결과로 보여 줘야지.’
따악!
양키스의 중견수, 애런 힉스가 친 타구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아웃!”
“아웃!”
당연히, 그 타구는 두 개의 아웃 카운트로 바뀌었다.
[두 팀 모두 1회를 무사히 잘 넘겼습니다. 이제 승부는 2회로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