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김사범, 2020시즌(포스트시즌과 뉴욕)(3)
돌아오기 전, 그러니까 LA 다저스 시절 김병헌은 구속, 구위도 특급 투수다웠지만 그 이상으로 머리를 쓰며 피칭을 하는 녀석이었다.
뛰어난 구위의 공을 평균 이상의 제구력으로 타자들이 싫어하는, 혹은 예상하지 못하는 코스로 찌르며 그야말로 삼진을 수확하는 투수.
‘근데 지금 저 투구는 뭐지?’
[아! 김병헌 선수! 대단합니다! 대즈 카메론 선수를 상대로 순식간에 삼진을 잡아냈습니다!]
[다른 구종 없이 패스트볼 단 하나로만 상대했음에도 카메론 선수의 배트가 스치지도 못했습니다. 구속이 100마일을 넘나들고 있어요.]
마지막 맞대결에서 내가 충동적으로 한 조언을 받아들였는지 거의 정통 오버핸드로 던지던 폼에서 낮은 쓰리쿼터까지 폼이 변해 있었다.
‘저 정도까지 낮추라는 건 아니었는데…….’
커쇼와 동급, 그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던 수직 방향 무브먼트는 거의 없어졌지만, 그 대신에 아주 더러운 테일링이 생겼다.
수비를 준비하는 내게 미기가 말했다.
“붐이 말한 것 중 맞는 게 하나도 없네.”
“그러게요. 저도 못 본 지 좀 오래돼서…….”
메이저리그를 폭격하던 그 모습이 완전히 성장한 게 아니었다니. 하하.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김병헌의 공이 아니라 당장 다음 이닝의 수비다.
[3회 말, 뉴욕 양키스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타순은 8번부터 시작하지만 절대 방심하면 안 됩니다.]
[1번부터 9번까지 모두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선수들입니다. 조심해야 해요. 타순도 한 바퀴를 돌아서 곧 저지 선수도 타석에 들어오거든요?]
내 자리로 가는 도중 버로우즈에게 말했다.
“버로우즈.”
“왜?”
“날 믿고 던져요.”
좀 힘들긴 하지만, 적어도 내 쪽으로 오는 공을 놓치지 않을 자신은 있다.
내 말에 씨익 웃는 버로우즈가 내 말에 대답했다.
“난 항상 그랬어.”
어…… 좀 감동인데?
잠시 후.
‘감동이고 자시고, 내가 잡을 수 있는 공을 줘야지…….’
지금 마운드 위엔 이닝 시작 전 내게 미소를 보이던 버로우즈가 아닌,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연신 로진백만 만지고 있는 버로우즈가 서 있다.
2루타, 그 후 안타. 다행히 주자는 3루에서 멈췄다.
노아웃 주자 1, 3루, 저지가 타석에 들어섰다.
“버로우즈, 나만 믿고 던져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런 응원밖엔 없다.
하지만.
따악!
[애런 저지 선수의 타구가 오른쪽 담장을 향해 날아갑니다! 애런 저지 선수의 쓰리런 홈런!]
[존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투구는 물론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이렇게 가운데로 몰리면 답이 없죠.]
후.
맘 같아선 정말 관중석까지 달려가서 잡고 싶다.
[저지 선수의 홈런으로 스코어는 3:4, 한 점 차이가 됩니다!]
다음 타자는 스탠튼. 그래도 루가 비어 있으니까 유인구 위주로 승부를 하면…….
따아악!
[스탠튼 선수의 배트도 불을 뿜습니다! 솔로 홈런! 순식간에 동점을 만드는 뉴욕 양키스입니다!]
이번 이닝 투구로 봤을 때, 아무래도 버로우즈는 유인구를 던지는 법을 까먹은 것 같다.
[투수가 몸쪽 높은 직구를 던졌는데, 예상했다는 듯 강하게 스윙해서 담장을 넘겼습니다. 이렇게 되면 또다시 김사범 선수와 동률을 이루게 되네요. 경기와 별개로 홈런왕 경쟁도 참 흥미진진합니다.]
스탠튼의 홈런 타구 이후, 코치가 마운드를 방문하면서 어떻게든 이닝을 종료할 수 있었다.
그것도 이삭과 내가 몸을 날리면서 겨우겨우.
그리고 시작된 5회 초.
김병헌이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아웃!”
[등판하고 10구만에 첫 변화구를 던지는 김병헌 선수입니다. 슬라이더인가요?]
[구속을 보면 슬라이더라기보다는 커터인 거 같아요. 느린 화면으로 보면 포심 패스트볼처럼 가다 끝에서 툭 꺾입니다. 구속도 97마일까지 나오는데……. 허허, 이걸 어떻게 치나요?]
과거에도, 지금도 커터는 여전하다. 아니 구속이 늘어서 그런지 더 위력적인 것 같다.
딱!
“아웃!”
[이번엔 투심입니다. 아니 싱커인가요?]
[무브먼트를 보면 싱커에 가깝지만…… 투심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사실 투심과 싱커는 기록원들 사이에서도 구분하기 쉽지 않은 구종이거든요? 자세한 건 경기가 끝난 후 김병헌 선수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게 좋겠어요.]
커터, 포심, 투심. 그리고 예전부터 주로 던졌던 체인지업.
예전과 달리, 김병헌은 진짜배기 파워피처로 노선을 잡은 것 같다.
물론 불펜으로 등판해서 전력투구를 하는 면도 없진 않겠지만…….
‘이젠 정말 마운드의 폭군이 됐네.’
빨리 상대해 보고 싶다.
* * *
2차전이 시작하기 전, 양키스의 관중석.
“릴페퍼! 엄마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형아, 저기로 가서 보면 안 돼?”
엄마 아빠가 맛있는 걸 사러 가자 귀엽지만 귀찮은 동생이 떼를 쓰고 있다.
“안 돼. 엄마가 가만히 있으랬어.”
엄마가 동생을 잘 돌보고 있으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저지의 사인을 받아 준다고 했다. 그것도 내 유니폼에!
“그래두…….”
“안 돼. 우리 같이 눈감고 숫자세기 하자.”
내 동생 릴페퍼는 아직 10까지밖에 셀 줄 모른다. 나는 100까지 셀 수 있는데.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프린스! 릴페퍼! 얌전히 앉아 있었네? 저기 아빠한테 가 봐! 프린스가 좋아하는 저지가 저기 있대!”
32까지 세자 엄마가 돌아왔다. 저지?
“우와아!”
“우와아아아!”
내가 하는 걸 모두 따라 하려고 하는 동생의 손을 잡고 저기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는 아빠에게 뛰어갔다.
“저지, 여긴 내 아들인데. 혹시 사인해 줄 수 있어요?”
“아, 물론이죠. 잠깐만요.”
동생과 내가 도착하자 아빠가 저지에게 말해 줬다. 우와!
“저지! 진짜 좋아해요!”
“나두! 나두! 지자 조아해요!”
“하하, 나도 꼬마 팬들을 좋아한단다. 내가 시간이 없어서. 사인만 해 주고 가도 될까?”
“네!”
아빠가 날 들어서 저지가 내 등에 사인하는 걸 도와줬다. 내 등에 저지가 쓱싹거리면서 사인을 하고 있다. 맙소사!
“아빠! 나도!”
저지가 내 유니폼에 사인을 해 주고 나서 릴페퍼도 손을 들었지만 저지는 어디론가 떠나갔다.
“나도! 나도! 나도 받을 거야!”
“저지는 다른 급한 일이 있대, 어…… 잠깐만!”
아빠는 릴페퍼가 울면 엄청 바빠진다.
“저기…… 킴? 혹시 내 아들에게 사인 좀 해 줄 수 있어요?”
“물론이죠.”
킴이라고 불리는 선수가 릴페퍼의 등에 사인을 해 줬다.
“저지! 저지!”
하지만 릴페퍼는 계속 운다. 나처럼 저지의 사인을 받고 싶은 것 같다. 나는 저지 사인 있는데. 헤헤.
킴이라는 선수는 릴페퍼가 우니까 엄청 허둥지둥했다. 하나도 안 멋지다.
“하하, 미안해요. 애들이 아직 어려서.”
“괜찮아요.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저 되게 잘 던지거든요.”
아빠와 킴? 이라는 선수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훌쩍이는 릴페퍼를 데리고 엄마에게 갔다.
엄마가 사온 치즈 스테이크하고 핫도그를 먹으면서 조금 기다리니까 경기가 시작했다.
“엄마, 저 선수 누구야?”
“저기 저 선수? 디트로이트의 킴이라는 선수야.”
킴? 킴은 아까 우리 팀이었는데. 저기에 서 있는 킴은 엄청 덩치가 커서 헐크 같다.
따아악!
헐크가 홈런을 쳤다. 그리고 그 뒤에 뚱뚱한 타자도. 오늘은 우리 팀이 지고 있다.
“아빠, 언제 이겨요?”
“하하, 조금 기다려 보자. 아직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지금 우리가 이기고 있어!”
릴페퍼는 아직 야구를 잘 몰라서 지금처럼 막 우긴다. 나는 야구 잘 아는데.
“아빠! 투수가 바뀌는 거 맞죠?”
지금처럼 저 아저씨가 공을 들고 나오면 투수가 바뀐다.
“그런 것 같은데? 나오는 투수가…… 어? 아까 그 선수네. 킴이야.”
멋없는 선수가 나왔다. 재미없어.
펑!
“오!”
아빠가 오! 하고 소리 질렀다. 기분 좋을 때 내는 소리다.
“잘 던지는 거예요?”
“그런 것 같은데?”
“엄청 세게 던져요?”
“응, 채프먼처럼 던지는 거 같아”
채프먼은 우리 팀에서 제일 세게 던지는 투순데. 우와.
재미없는 수비가 끝났다. 아까 그 킴이란 선수가 아웃을 잡았다.
“이번에 저지 나오죠?”
“응, 저지는 나올 거 같아.”
“저지! 저지! 저지!”
릴페퍼가 아는 단어가 나왔나 보다. 옆에서 자꾸 저지를 외쳐서 조금 창피하다.
우와와!
사람들이 막 일어선다. 저지하고 스탠튼이 홈런을 쳤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수들이다.
“아빠! 나 화장실!”
스탠튼이 홈런을 치고 나서, 릴페퍼가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나도 가고 싶다.
“저도!”
아빠와 함께 화장실을 다녀왔다. 릴페퍼가 손을 씻다가 장난을 쳐서 머리가 다 젖어서 아빠가 막 이리저리 움직였다.
“엄마! 어떻게 됐어요?”
“양키스가 이기고 있어. 지금은 수비하고 있고.”
그라운드를 보니 아까 그 헐크 같은 타자가 배트를 들고 있다. 큰 화면에 스트라이크 표시가 2개, 볼 표시가 1개다.
따악!
엄청 큰 소리가 났다.
“으아아악!”
아빠도 엄청 큰 소리를 질렀다. 아 시끄러워.
“끼아아악!”
릴페퍼도 옆에서 신나서 따라 소리 질렀다.
“후, 파울이네. 위험했어.”
파울은 3개가 돼도 아웃되지 않는 거다. 에헴.
“다음 공은 오프스피드 피치를 했으면 좋겠는데, 빠른 공에 너무 강한 타자야.”
아빠의 말이 맞다. 오프스피치를 해야 한다.
투수가 공을 던졌다.
헐크 같은 타자의 배트가 중간에 멈췄다.
“아웃!”
우와! 저 선수가 헐크를 무찔렀어!
“우와아아아!”
“끼아아아악!”
아빠하고 릴페퍼가 막 사람들처럼 일어나서 소리 지른다. 나도 일어나서 같이 소리 질렀다.
“와, 오랜만에 좋은 투수가 나왔어. 붐을 삼진으로 잡아내다니.”
엄마 품에 안겨서 계속 소리를 지르는 릴페퍼의 등에 있는 사인이 조금 멋지게 보였다.
* * *
완전히 당했다.
분명 체인지업을 던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패스트볼을 던질 때와 거의 완벽하게 똑같은 폼에 배트가 나가 버렸다.
스윙을 시작하고서도 오지 않는 공에 배트를 멈춰 봤지만, 주심이 스윙 판정을 내렸다.
‘내가 볼 땐 안 돌았는데…… 흠.’
“붐이 삼진 당하는 거 오랜만에 보는 거 같은데?”
“그러게, 딱 떠오르지가 않아.”
덕아웃에 들어서자 팀 동료들의 이야기가 들렸다. 나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뭐.
일단 한번 봐준다. 메이저 첫 홈경기, 팬들에게 첫 인사를 하는 자린데 나한테 뚜들겨 맞으면 억울하잖아.
[김병헌 선수, 7회를 마무리하고 내려갑니다. 3과 1/3 이닝 무실점, 이 정도 성적이면 선발로 등판해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것 같죠?]
[맞습니다. 볼넷 없이 4K, 안타 하나가 아쉽네요.]
아쉽다. 다음 이닝에는 봐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겁나서 피하기는.
그렇게 김병헌이 내려가고 8회, 경기는 이제 본격적인 불펜 싸움으로 접어들었다.
양키스에선 잭 브리튼, 우리는 그린.
둘 다 이번 시즌 정상급 성적을 보여 주는 투수들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양키스엔 내가 없고 디트로이트엔 내가 있다는 거.
[김사범 선수의 타구, 또다시 담장을 넘습니다! 시즌 48호 홈런! 전설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섭니다!]
[김병헌 선수를 상대로 잠시 쉬어 가던 김사범 선수의 배트가 이번 경기 두 번째 불을 뿜네요. 양키스 입장에서는 참 아쉬운 승부였습니다.]
지금처럼.
[애런 저지, 외야 플라이로 아웃됩니다. 그린 선수, 매 선수마다 풀카운트 승부를 펼쳤지만 8회를 막아 내는 데 성공합니다.]
[꾸역꾸역이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하겠네요.]
그리고 마지막 9회에는 폴리가 마운드에 올랐다.
“분명 초구부터 힘 빡 넣고 던질걸.”
덕아웃에서 나가기 전, 케이시가 예언을 했다.
퍼어엉!
슬쩍 고개를 돌려 구속을 확인해 보니, 역시. 100마일이 찍혀 있다.
‘너네 원래 동료였어. 그것도 친한.’
옛 동료끼리 의식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웃기긴 했다.
“아웃!”
결국 선두타자로 나온 스탠튼을 하이 패스트볼로 삼진을 잡아낸 폴리.
그럼 뭐, 이제 끝났지.
[디트로이트가 5:4의 스코어로 승리를 거머쥡니다! 양키스를 상대로 2연승! 김사범 선수는 두 개의 홈런을 기록하여 시즌 홈런 기록을 48개로 늘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