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김사범, 2020시즌의 끝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의 한 호텔.
[그래서, 내가 소개해 준 곳에서 밥은 잘 먹었어요?]
“먹기야 먹었죠. 맛은 있던데요.”
[다행이네요. 결과에 너무 상심하지 마요. 시즌도 아직 4경기가 남았고, 사범의 선수생활은 이제 시작이니까.]
짐의 위로가 왠지 씁쓸하게 들렸다.
“상심하진 않았는데. 아쉽긴 하네요.”
양키스와의 더블헤더 후, 우리는 거짓말처럼 2경기를 헌납했다.
6차전은 다시 나를 거르기 시작한 양키스에게 당연하다는 듯 완패를 했고, 7차전은 중요한 순간에 하루를 쉬고 나온 김병헌에게 공격의 맥이 끊겼다.
[저도 아쉽긴 하네요. 설마 클리블랜드가 보스턴을 스윕하다니.]
“정말, 아무도 예상 못 했을 거예요.”
첫경기에서 1:0 완봉승을 거둔 클리블랜드는 기세를 몰아 2차전도 타격전 끝에 승리를 했고, 마지막 경기에선 코니 클루버를 앞세워 보스턴을 와일드카드로 쓸어내렸다.
[마지막 경기 보니까 수비 때 계속 스트레칭 동작을 하던데, 몸조심해요. 항상.]
“어…… 알았어요 짐. 고마워요.”
전화를 끊자마자 갑자기 어떤 히어로물의 명대사가 생각났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이걸 마지막에 딱 말했어야 하는데. 크으.
자리에 누워 지금 우리 팀이 처한 상황을 생각해 봤다.
와일드카드 1위는 거의 보스턴이 확정됐고. 2위 자리는 탬파베이가 3경기 차이로 앞서나가고 있다.
여러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단순하게 생각 해보면 남은 4경기 중 2경기 이상 지면 와일드카드가 좌절되고, 3경기를 지게 되면 지구 우승조차 좌절된다.
‘우승보다 와일드카드 결정이 먼저 되다니. 웃기네.’
[야, 나 결혼한다. 1월에.]
혼자 경기를 복기하다 보니 갑자기 김병헌이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한 말이 떠올랐다.
[결혼한다고.]
결혼이라니. 그 김병헌이.
[결혼…….]
부…… 아니, 후우.
* * *
볼티모어. 오리올 파크.
평소의 원정 루틴대로 운동을 하고 라커룸에 들어와 라인업을 본 나는 당황했다.
1. 2B, Issac Paredes
2. RF, Nic, Castellanos
3. LH, Kristen Stewart
4. SS, Sabeom Kim
5. DH, Miguel Cabrer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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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오늘 타순이 이상한데요? 평소와 좀 다른데…….”
“오늘 아침에 바꿨네. 이번 4연전은 그 라인업으로 갈 거야.”
이건 뭔가, 한 15년 전쯤 메이저리그 라인업 느낌인데.
“경기가 시작되면 알게 될거야.”
론의 말대로,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이 라인업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됐다.
“베이스 온 볼스!”
1번 이삭부터 시작된 끈질긴 승부는 카스테야노스를 거쳐 스튜어트까지 계속됐다.
비록 카스테야노스가 외야 플라이로 아웃됐지만, 1사 주자 1, 2루의 밥상이 내 앞에 차려졌다.
[1회초부터 디트로이트가 아주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경기 전 라인업을 보고 조금 의아했었는데, 이런 의미였군요. 이렇게 되면 볼티모어가 김사범 선수를 거를 수 없겠네요.]
그냥 웃음만 나온다. 가슴에서 뭔가 간질간질한 느낌이 올라온다.
‘장외 홈런을 때리면 동판을 세워 주는 게 여기 맞나?’
팀원들이 나를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데, 내가 가만있을 순 없다.
따아악!
우와아아아!
[김사범 선수가 바깥쪽 직구를 밀었습니다! 이 타구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타구는 힘을 잃지 않고! 이곳 오리올 파크를 완전히 넘어갑니다! 장외 홈런! 자신의 49호 홈런을 장외 홈런으로 장식하는 김사범 선수!]
그렇게, 우리는 초반부터 볼티모어를 몰아쳐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클리블랜드, 시즌 말미에 뒷심을 발휘합니다! 놀라운 연승 행진입니다!]
클리블랜드도 승리를 거뒀다.
트래직 넘버는 2.
우리는 남은 경기를 모두 이겨야 한다.
다음 날.
[아, 또 김사범 선수 앞에서 공격의 흐름이 끊깁니다.]
[조금만 더 집중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시즌이 거의 끝나가는 지금, 우리들의 몸은 지쳤고 집중력은 한계를 보여 갔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붐! 나이스! 좋아!”
[이삭 선수가 홈으로 들어왔습니다! 김사범 선수의 2루타로 8회 초 스코어는 2:0!]
그래도 연패 기록을 적립해 가는 볼티모어가 상대라 어찌어찌 이길 수는 있었다.
경기 후, 라커룸.
“붐, 오늘 탬파베이가 승리하면서 와일드카드 진출이 좌절됐는데, 기분이 어떤가요?”
어떠긴 어때, 더럽지.
“솔직히 기분이 좋진 않네요. 하지만 아직 지구 우승에 대한 가능성이 있잖아요?”
“클리블랜드도 오늘 승리했으므로 디트로이트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가능성은 타이 브레이커뿐입니다. 만약 타이 브레이커가 열리게 된다면, 자신 있으신가요?”
“물론입니다. 언제나 말했지만, 절 피하지 않는다면 전 어떤 투수든지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볼티모어와의 3번째 경기.
우우우-
[0:0의 스코어에서 경기는 9회 초, 투아웃입니다. 타석엔 김사범 선수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관중들의 야유가 점점 심해지고 있네요. 이건 김사범 선수에게 하는 야유가 아니라 볼티모어 구단에게 하는 야유 같아요. 지금까지 3번의 타석 모두 볼넷으로 걸어나갔거든요?]
[고의사구 선언만 안 했을 뿐이지 고의사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볼!”
우우우우우-
[이젠 볼티모어 팬들 중 일부도 같이 야유를 하는 모습이네요.]
타석에서 야유를 듣는게 처음은 아니지만, 기분 좋은 야유는 처음인 것 같다.
[투수가 두 번째 공을 던집니다.]
후웅!
“스트라이크!”
[김사범 선수가 크게 노려 쳐봤지만, 흘러나가는 공에 헛스윙을 합니다.]
존 정중앙을 향해 오는 공이라고 생각해서 크게 스윙을 해 봤지만, 흘러나가는 공이었다.
‘후, 큰 스윙을 할 필요 없다. 최단거리로. 확실한 타격을.’
[전투속행이 발동합니다.]
타석에서 나와 체크스윙을 하는 순간, 이제는 조금 어색한 시스템의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오늘 아침에 팔이 좀 뻐근한 것 같더라니. 그 쪽인가?’
이젠 정말 이번 시즌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집중하자.
우와와아아아!!
몇분 뒤, 나는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박수와 함성을 받으며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아,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이건 정말…….]
[대한민국에서 온 만 20세의 청년이 메이저리그의 역사, 그것도 아무도 밟아 본 적 없는 전인미답의 기록에 자신의 한 발을 내딛었습니다.]
[50-50, 올 시즌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인 김사범 선수에게 경기장에 있는 모두가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크흠. 큼. 모두가 김사범 선수의 커튼콜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하, 김사범 선수가 나올 때까지 그치지 않을 기세군요.]
[우리의 김사범 선수는…… 음? 뭘 하고 있는 거죠?]
[아하하, 두번째 무관심 퍼포먼스네요. 팀원들이 아주 정숙하게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어요.]
조금 설레는 기분으로 들어온 덕아웃은…… 고요했다.
어디 보자. 내가 뭘 해야 하지?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보다 보니 음료수가 가득 든 냉장고가 보였다.
최대한 여유롭게. 당황하지 않은 척. 그게 핵심이다.
[음? 김사범 선수가 음료수를 꺼내 자신의 머리에 직접 붓고 있습니다! 하하하,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으니 스스로 축하를 하는건가요?]
내 행동을 보고 덕아웃은 정말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몇초나 지났을까, 주변에서 쏟아지는 폭풍 같은 축하의 말과 함께 정신없이 덕아웃 밖으로 나섰다.
그라운드의 모든 곳, 정말로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날 위해 박수를 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은 내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다.
* * *
경기 후, 라커룸.
인터뷰에 몰린 어마어마한 수의 기자들에게 추후 공식적인 인터뷰 자리를 만들겠다고 약속하면서 돌려보내고, 모두가 모여 아직 끝나지 않은 클리블랜드의 경기를 시청했다.
[이 타구가 중견수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갑니다! 이로써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결정이 미뤄졌던 아메리칸리그 중부지구, 디비전 시리즈의 한 자리를 클리블랜드가 차지합니다!]
우리는. 2020 시즌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달아올라 뜨겁던 심장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내 가슴 한구석에선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과 설렘이 고개를 들고 있다.
그렇게 지금 내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도중, 갑자기 주변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붐!! 아까도 말했지만, 난 네가 성공할 줄 알았어!”
뭐지? 이 분위기는? 방금 전까지 조용했던 거 같은데.
“내 눈으로 50-50을 보다니! 이 괴물 자식! 내가 이 자식을 이기려면 뭘 해야 하는 거야? 선발로 10승하고 마무리로 10세이브를 하면 비슷한가?”
“그건 지금 나도 가능할 거 같은데. 한 시즌 400K 정도 해야 할걸?”
심지어 폴리와 케이시조차 뭔가 들떠 있는 것 같다.
“스튜어트에게 소개시켜 준 타격 인스트럭터, 나도 소개시켜 줄 수 있나?”
카스테야노스마저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조금 얼이 빠져 있는 내게 미기가 와서 물었다.
“붐, 좋은 날 왜 그런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어?”
“어…… 음…… 잘 모르겠어요.”
“이상해?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는데 분위기가 이런 게?”
“솔직히 말하자면요.”
미기가 내 옆에 앉아 어깨에 손을 두르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저번 시즌만 해도 지구 우승은 커녕 100패를 면하기 급급한 팀이었어. 그런 팀이 루키 몇 명의 활약으로 지구 1위를 바라보게 됐지. 루키들의 활약으로 말이야.”
“……네”
“주위를 둘러봐. 우리 팀은 젊어, 다들 가능성이 남아 있지. 나나 닉 말고는 이렇다 할 나이든 선수가 없어. 우린 당장 다음 시즌에도 성장할 거고, 구단도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활발하게 움직일 거야.”
음…….
“왜냐고? 우리가 가능성이 있는, 아니 가능성이 높은 팀인 걸 이번 시즌에 모두에게 보여 줬으니까. 지금 여기 있는 멤버들이 더욱더 가치가 높아지기 전에 승부수를 띄울걸? 내 경험상. 확실해.”
메이저리그 구단의 흐름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지금 이렇게 널 축하하며 속으로 삭이고 있지만, 다들 분해. 그건 분명하지. 지는 걸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여기 있을 수 없으니까. 그래도 다들 웃고, 즐기려 노력하는 거야. 즐기기 좋은 핑곗거리도 여기 있잖아?”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손이 날 라커룸 가운데로 밀쳤다.
“그러니 오늘은 너의 실력으로 이룬 역사적인 기록에 대해 순수하게 기뻐해. 아니, 무조건 기뻐해.”
미기의 말에 내 안에서 한껏 당겨져 있던 줄이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전투속행이 해제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온몸에 힘이 풀린 채로 라커룸 바닥에 주저앉았다.
* * *
다음 날, 나는 온몸을 감싸고 있는 탈력감을 애써 무시하며 아침부터 인터뷰를 해야 했다. 론과 함께.
“메이저리그, 아니 전 세계 야구에서 처음으로 나온 50-50에 모든 야구 팬들이 흥분해 있습니다. 기분이 어떠신가요?”
“저 혼자만의 기록이 아닙니다. 팀 전체가 서로를 위해 노력하고…….”
“어제 밤, 인터넷은 붐 선수의 이야기로 엄청나게 핫(hot) 했습니다. 메이저리그의 위대한 선수들 중, 영향을 받은 선수가 있나요?”
“음, 한 10년 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습니다.”
“어째서입니까?”
“그 시절, 제가 좋아하던 선수들이…… 아시죠?”
“아, 하하. 알겠습니다.”
그래도 공식 인터뷰여서 그런지 이상한 질문이 날라오진 않았다.
‘그나저나. 정말 난리는 난리였나 보네.’
놀란 동료들이 난리를 피워서 그 늦은 밤에 병원에서 검사까지 받느라 ‘눈팅’을 못 했다.
뭐, 한숨 자고 나서 확인한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 메신저를 보면 대충 어땠는지 느낌이 온다.
“론, 이번 볼티모어 전에서 타순이 변경됐는데, 어떤 의미였나요?”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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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질문을 받겠습니다.”
이 짓도 한 시간째 하고 있으니 지친다.
하지마 여기 모여 있는 기자들은 전혀 지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발언권을 얻기 위해 손을 들고 있다.
‘팔 안 아픈가? 한 시간 내내 들고 있는 사람도 있던데.’
“저기 회색 셔츠를 입은 남성 기자분.”
“오늘 볼티모어와의 시즌 최종전에 출전하지 않으신다고 했는데, 혹시 부상이…….”
내가 마이크를 잡으려고 하자 론이 먼저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저 시즌을 치루는 동안 피로가 쌓여서 그런 겁니다. 붐의 기록과 덩치를 보면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붐은 이번이 첫 풀타임 시즌인 루키니까요. 알게 모르게 무리를 했나 봅니다.”
그렇게 공식 인터뷰가 끝났지만, 나는 그 뒤에도 계속 어떤 스포츠의 누구와 인터뷰를 해야 했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까지, 계속. 아침부터.
하아.
[2020 시즌의 최종전이 종료됐습니다. 마지막을 승리로 장식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는 디트로이트! 이 팀이 내년에 어떤 팀이 될지, 캐스터 이전에 야구 팬으로서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