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김사범, 그리고 만남
대한민국, 인천 국제공항.
꺄아아악!
“김사범이다!”
“사범 오빠! 여기 봐주세요!”
“김사범 선수, 2020 시즌 신인왕과 MVP 동시 수상이 유력하신데,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너무 섹시해요!”
“메이저리그 첫 시즌에 놀라운 활약을 보여 주셨는데요, 비결이 뭐죠?”
“투나잇의 세현 양이 SNS를 통해 공개적으로 관심을 표현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랑해요 김사범!”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뽑은 섹시한 운동선수 부문에서 3위에 뽑히셨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한국 프로야구에 대해서 평가 부탁드립니다!”
출국하기 전, 짐이 왜 선글라스를 건네줬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게이트를 통과하자마자 쏟아지는 플래시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이쪽으로 오시죠. 공식 인터뷰 자리를 준비해 놨습니다.”
짐이 미리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많이 당황했을 거다.
미국에서는 집과 구장, 가끔 이삭의 집을 오고가는 단조로운 생활을 해서 피부로 느낄 수 없었던 유명세를 한순간에 몰아서 받는 느낌이다.
공항 직원분들과 에이전시에서 파견 나온 직원의 안내로 인천공항 한구석에 위치한 인터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시다시피 김사범 선수는 긴 시즌을 끝내고 이제 막 귀국했습니다. 때문에 오랜 시간을 드리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드리고, 곧 보도자료를 배포하겠습니다.”
누군가의 진행으로 인터뷰가 시작됐다.
“붉은색 안경을 쓰신 기자분. 질문하시죠.”
“동성일보의 배성수 기자입니다. 일단, 50-50 달성을 축하드립니다. 미국 진출 후 마이너리그부터 메이저리그까지 줄곧 굉장한 성적을 내고 계시는데요, 혹시 어떤 비결이 있으신가요?”
비결이라…….
“리그 적응이 그 비결인 것 같습니다. 좋은 팀 동료가 미국생활 첫 해부터 스스럼없이 도움을 줬고, 그렇게 한국야구, 아니 고교야구와 다른 미국야구만의 문화를 이해하자 제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질문에 답변을 하면서 생각한 거지만, 이삭이 처음에 다가와 주지 않았다면 조금 다른 미국생활이 됐을 것 같다.
“보라색 셔츠를 입은 기자분, 네.”
“미라클스포츠의 김설임 기자입니다. 최근 연예계의 여성 스타분들이 이상형으로 김사범 선수를 지목하는 일이 잦아졌는데요, 혹시 개인적인 연락을 하는 분이 계신가요?”
그럴 리가.
“프라이버시 관련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오해를 막기 위해 답변 드리자면, 따로 연락하는 분은 없습니다. SNS도 에이전시 측에서 관리하는 계정이고, 제가 따로 SNS를 하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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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질문 받겠습니다. 빨간 넥타이를 맨 기자분?”
“큼, 한성일보의 배철진 기자입니다. 현재 메이저리그 골드글러브, 실버슬러거, 신인왕, MVP 등 모든 부분에서 유력한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데, 김사범 선수의 예상이 궁금합니다.”
“제 예상이라면……?”
“수상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아, 음…… 아직 후보조차 나오지 않은 시점에서 말하기엔 좀 이른 감이 있지만…….”
내가 공들여 쌓은 최고의 탑에 대해 겸손을 떨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제가 가져갈 겁니다. 전부.”
* * *
인터뷰가 끝난 뒤, 인천공항 내 VIP라운지에서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엄마! 보고 싶었어요!”
“얘는 얼굴이 또 반쪽이 됐네!”
진짜로 어머니는 나를 보실 때마다 저 멘트를 하실 생각이신 것 같다.
“아빠도 여기 있다.”
“알죠, 엄마한테 먼저 안 가면 엄마가 삐져서 그런 거예요. 잘 지내셨죠?”
“잘 지냈지. 가서 네 엄마나 더 안아 줘, 아까 인터뷰 때 언제 끝나냐고 나를 들들 볶아서 힘들었다.”
“하하, 그럴 거 같았어요. 저도 부모님 얼굴 보기 전에 기자들 얼굴부터 보니까 좀 서운하던데요.”
정말 별말이 아니지만 내 말을 들은 아버지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지셨다.
“그나저나, 하별이는 안 왔어요?”
“기자들 많다고, 자기 얼굴 찍혀서 기사라도 나면 인생 피곤해진단다.”
“그런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내 말에 옆에 계시던 어머니가 발끈해서 대꾸하셨다.
“얘는, 하별이 정도면 이쁘지.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엄마가 하별이 머리 모양 이쁘게 만들어 주려고 애기 때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
머리 모양이 중요한 게 아닐 텐데.
“알죠, 엄마 말이 다 옳아요. 우리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집에 가요. 엄마가 해준 밥 먹고 싶어요.”
“그래, 그러자. 엄마가 너 온다고 한 달 전부터 야단법석이었다.”
한 달 전에는 언제 귀국한다고 말도 안 했는데요.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족의 따뜻함을 안고 인천공항을 빠져나왔다.
* * *
서울의 한 병원.
병원에 몇 없는 VIP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여성이 옆의 남성에게 말을 걸었다.
“아빠. 연락해 봤어요?”
“짐이 붐, 아니 김사범 선수의 의견을 물어보고 연락 준다고 하더구나.”
“귀국하기 전에 꼭 한 번 만나고 싶은데…….”
“아마 만날 수 있을 거야. 걱정 말고 쉬고 있으렴.”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한 무리의 의사들이 병실에 들어왔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수리 베이커 양.”
“한국말로 하셔도 된다니까요.”
“그래도 아버님도 같이 들으셔야 하니까요. 우리가 한국말로 대화하면 소외감을 느끼시지 않겠어요?”
수리는 의사의 말에 옆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습관처럼 짓고 있는 표정이라 남들은 모르겠지만, 수리의 눈엔 약간 서운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맞아요. 아빠도 아셔야 하는 내용이니까요.”
“검사 결과가 나왔나요?”
수리의 아빠, 필이 의사에게 물었다.
“네, 나왔습니다. 검사 결과가 아주 좋아요. 흉부외과와 외과에서 아주 깔끔하게 수술을 마무리해 준 덕분에 내과에서 할 일이 별로 없을 정도입니다. 퇴원 날짜를 잡아도 될 것 같습니다.”
“하하…… 하하하. 다행이네요, 다행이야…….”
의사의 말을 들은 필이 복잡한 감정이 담긴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아직은 경과를 지켜볼 단계입니다. 조심하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말하던 의사가 아닌 다른 의사가 앞으로 나서며 필에게 말했다.
“환자분이 젊은 여성분이라 최대한 절개 부위를 작게 했지만, 수술 규모가 꽤 커서 보기에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신경 써서 봉합을 하긴 했지만…….”
가만히 듣고 있던 수리가 옷 위로 자신의 배에 있는 수술자국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곧 밝은 얼굴로 웃으며 말하는 수리.
“괜찮아요. 전 지금도 충분히 만족해요. 이런 상처자국도 좋아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되잖아요?”
“허허허. 맞습니다.”
그렇게 회진이 끝난 뒤, 조용한 병실에서 수리는 계속 수술 부위를 어루만졌다.
‘나중에 보기 흉하다고 하면 어쩌지? 그럴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미국에 가서 흉터 제거를 알아봐야 하나? 아니면 문신……?’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는 수리다.
* * *
띠리리.
펑!
“좋아요! 좀 더 시크하면서 강력한 표정으로!”
시크하면서 강력한 표정이 뭘까.
“방금 그 표정 좋았어요! 계속!”
내가 무슨 표정을 지은거지? 왜 좋다고 하는 거야?
“아! 좋아! 좋아요! 조금 쉬었다가 다시 촬영 하겠습니다. 영철 씨? 의상 바꿔줘요.”
이런 힘든 일을 모델들은 어떻게 하는 걸까. 새삼 대단함을 느낀다.
귀국하기 전, 짐이 내게 말한 것을 떠올렸다.
“이제는 PR을 해야 해요. 야구 실력은 충분히, 넘치도록 보여 줬으니 대중에게 사범을 노출해야 한다는 거죠. 분명 나중에 도움이 될 거예요.”
짐의 말엔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이제 막 올림픽이 끝났지만, 2년 뒤엔 아시안 게임이 열린다. 그 때 순조롭게 대표팀에 합류하려면 대중에게 어느 정도는 날 알려야 한다.
‘이해는 하지만, 조금 힘들긴 하네.’
그렇게 내가 동의를 하자마자 짐은 앉은 자리에서 스케줄로 가득 찬 계획표를 꺼내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설계를 당한 거다.
“사범 선수? 이 옷으로 갈아입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익숙하지 않은 화보촬영을 하게 된 거고.
“오케이! 수고하셨어요! 오늘 사진, 아주 느낌 좋아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슬슬 힘들다고 생각할 때쯤 사진작가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혹시나 누가 잡을까 재빠르게 내 옷으로 갈아입고 차로 향했다.
“촬영은 즐거우셨어요?”
“아뇨, 힘들었죠. 다시는 안 하고 싶을 정도로.”
“하하하, 이제는 익숙해지셔야 할 텐데요. 우리 회사가 자랑하는 부분이 이런 부분인데.”
내 에이전시인 락네이션은 선수 케어도 케어지만 선수의 상업적 가치를 상승시키고, 그걸 이용하기로 명성이 높은 회사다.
‘엔터테이너 쪽에서 시작한 회사라 그런가, 역시 이런 쪽으로는 체계적이네.’
내 오프시즌 스케줄을 전담하는 매니저도 붙여 줬다.
“이제 저녁식사 때까진 다른 스케줄이 없네요. 집에 들렀다 가실 건가요?”
“아뇨, 시간도 애매한데 잠깐 차에서 쉬다가 가죠 뭐.”
짐이 비밀 선물이라며 표시해 둔 스케줄. 만나면 분명 좋아할 거라면서 누굴 만나는지도 말해 주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해서일까, 피곤함에 잠시 잠에 들었던 것 같다.
“김사범 선수? 일어나셔야 해요. 약속 시간이에요.”
체감으로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어느새 약속 시간이 됐다.
“최고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쪽에서 차량을 제공하기로 했어요.”
“아,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아니 모레 뵙겠습니다.”
“네, 김사범 선수도 고생하셨습니다.”
그렇게 매니저가 떠나가고, 나는 정체모를 높은 건물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도대체 누구지? 혹시 대표님 감독님? 아니면 야구계에서 좀 끗발 날리는 원로분이 계시나? 혹시 짐이 와 있는 거 아냐?’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나는 나름의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24층입니다.]
얼마 안 걸려 도착한 꼭대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조용한 레스토랑이 날 반겨 줬다.
“김사범 님이신가요?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주중이라고 해도 저녁시간인데 사람이 없다. 장사가 잘 안 되는 곳인가? 비싸 보이긴 한데.
순간 드라마에서나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조각처럼 잘생긴 남자, 아마 직책은 실장이나 본부장이겠지. 그런 남자가 사람이 없어 궁금해하는 나에게 이런 멘트를 날리는 거지.
‘제가 오늘 하루 빌렸습니다.’
으으, 생각만 했는데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직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자리에는 낮선 여성이 앉아 있었다.
‘누구지?’
요즘 여성 스타들 사이에서 내가 인기가 좀 있다던데, 설마 짐이 나를? 이게 뭐 그 유명한 물어물어 만나는 그건가?
여성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도 하지만, 은은한 조명 때문에 정확한 생김새를 알아볼 순 없었다.
‘고마워요, 짐.’
목소리를 가다듬고 인사를 건넸다. 일단 누군진 알아야 하잖아.
“큼, 안녕하세요. 김사범입니다. 혹시 누구……?”
내 목소리에 고개를 든 여…… 아니 그녀.
나는 짐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냈다.
‘짐이 가는 곳 꽃길만 있으라!’
* * *
서울의 유명 호텔, 스위트룸.
필이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정말 아가씨 혼자 나가셔도 괜찮을까요?”
비서로 보이는 사내가 한 질문에 필이 대답했다.
“수리도 이제 다 컸어. 남녀문제도 마찬가지고. 그런 부분까지 간섭하는 건 내 취향이 아냐.”
“그래도 아직 몸이…….”
“그래서 가게를 빌리고 전속 요리사까지 오라고 하지 않았나. 밑에는 의료진이 대기 중이기도 하고. 그만 걱정하게.”
필은 다시 책을 읽으며 테이블 위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향을 음미했다.
“저…….”
“뭔가?”
“한 시간 전부터 같은 페이지십니다. 방금 드신 건 제게 부탁하신 물이었고요. 그렇게 걱정되시면 가 보시는 게…….”
어리고 아픈 딸이 품 안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수 있는 아버지가 존재할리가.
세상의 모든 딸바보 아빠들이 슬퍼할 것만 같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