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김사범, 시즌을 준비하려면?(2)
예전, LA다저스가 한국인들 사이에서 2번째 국민구단이 되었을 즈음, 그레인키와 AJ 엘리스라는 선수가 있었다.
익히 알려져 있듯 투수 중에서 데이터에 가장 관심이 있었던 그레인키와, 조금 늦은 나이에 메이저에 올라오며 마찬가지로 데이터에 조예가 깊었던 AJ 엘리스는 급속도로 친분을 쌓았다.
같은 팀에 취향이 맞은 두 야덕은 그레인키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여러 에피소드를 남기며 서로를 리스펙트하는 모습을 보여 줬었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기는…… 전쟁이다.
“투수는 가진 공 중 제일 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을 던지는 게 맞아. ERA든, FIP이든 관계없이 낮출 수 있는 게 삼진인데 왜 그걸 마다해야 하지?”
“그 말은 맞지만, 전통적인 방식이든, 오늘날의 세이버메트릭스의 영역이든 선발투수의 이닝 소화력은 중요한 요소지. 스플리터의 구위가 좋고, 삼진을 잡는 비율이 높은 건 인정하지만 조금 더 인플레이를 유도하는 게 더 나아. 수치상으로 나와 있지만, 이 팀은 수비가 괜찮은 편이니까.”
“탬파에서 시작한 오프너는? 예전에 투수에 중요했던 요소들이 갈수록…….”
내가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여기까지다. 지금처럼 순한 맛으로 시작된 야덕들의 대화는 내가 알지 못하는 마이너한 지표까지 들먹이면서 메이저리그 전체의 동향까지 가야 끝이 나곤 하니까.
‘내가 보기엔 뭐, 둘이 저렇게 신경 쓸 필요까지 있나 싶지만.’
어차피 예전처럼 볼 배합을 투수, 포수의 의견만으로 정하는 시기는 지났다.
둘이 비슷한 타입이니 스프링캠프가 진행되다 보면 슬X덩크의 강X호, 서X웅처럼 결국 하이파이브 하면서 서로를 인정하겠지.
“쉽게 안 끝날걸?”
“응?”
불펜 앞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내게 폴리가 와서 말했다.
“난 개인적으로 저 포수가 좋아. 페이스라고 했나? 머리 안 쓰고 던지라는 대로 던지면 편할 거 같거든.”
어…… 그럼 네가 피칭머신이랑 뭐가 다르니 이 미친 소야.
“근데 케이시 같은 경우는 나처럼 쉽고 간단하고 깔끔한 성격이 아니니까. 글쎄. 잘 풀릴까?”
간신히 불안한 마음을 속여 놨는데…….
그날 저녁.
쾅!
500ml 맥주잔이 커다란 소리와 함께 탁자에 부딪혔다.
‘아, 아까운 오렌지 주스. 저거 맛있는데. 직접 짠 거라 신선하기도 하고…….’
“후, 분이 안 풀리네. 온종일 이야기하다 보니 결국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어.”
“뭔 소리야?”
“나도 몰라. 결론은 비슷한데 접근 방식이 나와 완전히 달라.”
나와 케이시의 이야기를 듣던 폴리가 대꾸했다.
“그럼 됐네. 결론만 같으면 되는 거 아냐?”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이건 야구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라고. 결론이 같다고 과정이…….”
오랜만에 폴리와 같은 생각을 했다.
야덕들이란.
* * *
메이저리그의 스프링캠프는 투/포수조가 먼저 캠프를 시작하고 일주일 정도 지나면 야수조가 합류하는 시스템이다. 아무래도 투수들이 컨디션을 끌어올리는데 조금 시간이 걸리는 편이니 자연스럽게 정착된 시스템인데, 결론적으로 나는 캠프 합류 첫날 이후부터는 굉장히 한가한 시간을 보내게 됐다.
“붐, 또 웨이트 트레이닝 하러 가요?”
“아하하, 오전에 조금 부족하게 했더니…….”
“후, 뭐, 알아서 잘하니까 그냥 두는 거긴 하지만, 오버트레이닝은 항상 조심해야 해요.”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어차피 저는 보조도 못 받잖아요.”
아직 본격적인 야수들의 합류까지 시간이 남다 보니 결국 나는 웨이트 트레이닝 룸에서 살게 됐다. 지금처럼 체력 담당 트레이너의 간섭이 귀찮긴 하지만. 뭐, 작년에 성과를 보여 준 이후 많이 줄어들었다.
트레이닝 룸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을 때.
안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쿠웅!
‘오, 이 정도면 꽤 무게가 되는데? 내가 아는 투수, 포수 중에는 이 정도의 무게를 드는 사람이 없는데……. 초청선수인가? 아니면…… 혹시 페이스?’
바벨을 들고, 깔리고, 던지고를 제법 오래 했더니 이젠 바닥이 울리는 소리만으로 대충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새로운 고수의 등장에 설레는 마음을 품고 들어선 트레이닝 룸, 그곳엔 예상외의 사람이 있었다.
“안녕, 붐.”
운동을 옆에서 보조해 주던 트레이닝 코치, 알렉스가 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옆에서 호흡을 고르고 있던 시미즈 루이도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 뭐지?’
“안녕하세요.”
일단 나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제 불펜에서 봤을 땐 저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키도 작고, 몸도 여리여리해서 의아하긴 했지만…….’
조금 혼란스럽긴 했지만, 이제 내 몸은 내가 별 의식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루틴대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그렇게 스트레칭을 하며 거울로 운동하는 걸 보고 있다 보니, 저 시미즈 루이란 투수도 나처럼 바벨을 아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지.’
스트랩을 걸고 자세를 잡는 것만 봐도 느낌이 온다.
‘무게가…… 90, 180, 음…… 대충 450파운드 정도인가?’
200kg 정도 되는 무게를 쉽게 뽑아 올리는 시미즈.
‘저 무게를 저렇게 쉽게? 몸이 말랐는데 저 정도면…… 아.’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체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불펜에서는 유니폼을 헐렁하게 입고 있어서 몰랐는데, 하체가 정말 엄청나다.
“수고하셨습니다. 여기까지 하죠. 쿨다운 하시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스트레칭이 끝나고, 마침 운동이 끝난 시미즈 루이에게 말을 걸었다.
“와, 무게가 엄청나시네요?”
혹시 몰라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찾아 번역기를 켰다. 일본인들은 영어를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아니에요……, 보통이죠…….”
오, 꽤 정확한 발음의 대답이 들려왔다. 말소리는 조금 작지만.
“몸무게도 별로 안 나가시는 거 같은데, 이 정도 중량이면…….”
“고등학교 시절부터 페이스와 같이 했어요.”
“아, 어쩐지.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도 투수들이 이렇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전문적으로 하는 건 드물지 않나요?”
“그래서 코치들이 싫어했어요. 투수는 몸이 유연해야 해서 쓸데없는 근육이 붙으면 안 된다고……. 제 구속이 늘지 않는 게 그거 때문이라고 혼도 많이 났고…….”
투수든 타자든 하체는 반드시 튼튼해야 한다. 경기가 시작되고 공을 던지다 보면 결국 하체가 받쳐 줘야 릴리스가 유지되니까.
아직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제구력의 비밀을 조금 엿본 기분이다.
“저…… 그런데…….”
“아 네, 말씀하세요.”
“어떻게 그런 몸을 만드셨어요? 그렇게 큰데 효율적이지 않은 부분이 없는 거 같아요……. 저도 그렇지만 페이스도 신기하다고 그랬어요…….”
어……. 뭐지?
“나이는 저보다 어리시지만,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아…… 네…….”
일본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 시미즈.
사람의 눈빛이 반짝거릴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 * *
시간이 흐르고, 야수조 캠프에 합류했다.
“미기, 오랜만에요. 좋아 보이는데요?”
“그래? 이번엔 좀 빡세게 굴렀거든. 다행이네.”
베테랑임에도 비교적 빠른 페이스로 컨디션을 올려 합류한 미기와
“이삭, 이삭 맞지? 돼지나 공이 아니라?”
“닥쳐. 파워를 올리려고 몸을 키운 거야.”
“음, 내가 볼 땐 잘못 키운 거 같은데. 너 캠프 때 힘들겠다.”
아무리 봐도 체중조절 실패지만 벌크업을 한 거라고 우기는 이삭.
“스튜어트. 웬 미트예요?”
“아, 이번 캠프에서 1루 수비 연습도 같이 할 거야. 팀에서도 원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 스튜어트도 합류했다.
생각해 보면 1루 전향이 꽤 좋은 판단이 될 수도 있다. 스튜어트의 좌익수 수비는 좋은 말로도 괜찮다고 할 수 없으니까.
그 뒤로도 하나둘 선수들이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캠프가 시작됐다.
“붐, 너무 느긋한 거 아냐?”
“저번 시즌 마지막에 아주 뼈저리게 느낀 바가 있어서요. 이번 시즌은 조금 천천히 올리려고 해요.”
지금도 계속 훈련은 하고 있지만, 예전처럼 완벽하다고 생각할 정도로는 하지 않고 있다.
시범경기 중반쯤에 100%의 상태로 만드는 게 목표다.
‘항상 빠르게 몸을 만들어서 어필하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려서 힘들긴 하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25인 로스터 외, 그러니까 마이너리그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와, 이삭. 저 선수는 왜 트리플A에 있는 거지? 공 뻗어 나가는 게 장난 아닌데?”
“선구안에 문제가 있어서 그저 휘둘러 대기만 하니까. 특히 좌완투수 상대로는 더.”
어라? 이삭의 목소리가 아닌데.
“아, 페이스. 무슨 일로?”
“팀 동료가 팀 동료에게 다가가는 건데 무슨 일까지야.”
“뭐, 그렇긴 하지. 여기 케이지 쓰려고? 미기하고 같이 치긴 하는데……. 내가 양보해 줄까?”
“아냐. 미기에게 바꿔 달라고 말하고 왔어. 메이저리그 최상위권의 배팅이 궁금해서.”
와. 진짜 돌려서 말하는 게 하나도 없네.
사람 앞에서 막 최상위권이라고 그러면…….
“어……. 엄밀히 말하면 최상위권은 아닌데?”
“음?”
“1등이지. 기록상으로나, 뭐로 보나.”
“……시작하지.”
내 말을 무시하고 먼저 케이지로 들어가는 페이스.
따악!
따아악!
토스 배팅이지만 연습 구장의 담장을 연신 넘기는 타구. 힘 하나는 진짜인 거 같다.
“타구 괜찮은데? 페이스를 너무 빨리 올린 거 아냐?”
“내 이름이 페이스야. 페이스는 조절하는 데 익숙하지.”
음? 뭐지? 이거 그건가? 미국식 유머?
“어……. 하하…….”
나는 재빨리 케이지 안으로 들어갔다.
* * *
“스트라이크!”
“볼!”
시간이 지나고, 시범경기가 시작됐다. 아직 캠프 초중반이다 보니 꽤 많은 인원이 남아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첫 게임은 스플릿 게임으로 진행되었다.
딱!
“아웃!”
역시, 아직은 스윙을 할 때 신경을 써야 폼이 유지가 된다. 거의 몸에 붙긴 했는데……. 페이스를 늦추다 보니 조금 아쉬운 건 어쩔 수 없겠지.
내게 주어진 2이닝이 끝나고, 경기를 잠시 복기하고 있자 다른 구장으로 갔던 이삭이 돌아왔다.
“컨디션 어때?”
“네 말이 맞았어. 몸이 무거워 죽겠다.”
“네 어머니 음식 솜씨가 훌륭하긴 한가 보다. 몸이 그 정도로 불어서 오다니.”
“죽여주지. 너도 맛보면 헤어 나올 수 없을걸?”
마약 같은 걸 타시는 건가.
“아무튼, 저 둘, 괜찮은데?”
“누구?”
“일본.”
“아. 괜찮아?”
당연히 괜찮겠지.
“포수 쪽은 첫 타석 홈런, 투수는 1과 2/3이닝 퍼펙트.”
“오. 괜찮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저 둘은 진짜다.
그렇게 누구는 티격태격하고, 누구는 생각 없이 던져 대고, 누구는 겨우내 붙었던 살을 빼는 동안, 캠프는 별다른 이벤트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오늘까지는.
“이삭, 저 사람…… 그 사람 맞지?”
“맞을걸. 근데 왜 우리 유니폼을 입고 있지?”
“2020년이 계약 마지막 해였으니까. 디트로이트가 FA 협상에서 승자가 됐나 보군.”
이삭과 내가 대화를 하는 중간에 마치 케이시처럼 설명을 해 주는 페이스가 끼어들었다.
“아, 케, 아니 페이스.”
“의외긴 하네. 저번 시즌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그래도 컨텐더라고 보기엔 힘든 팀인데. 보통 선수 생활 마지막쯤엔 고향 팀이나 우승팀으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야.”
미래가 바뀌었다.
좋은 쪽으로.
* * *
디트로이트, 알의 사무실.
알이 앞에 앉아있는 선수에게 악수를 건넸다.
“잘해 보죠. 기대가 큽니다.”
“알고 있습니다.”
“계약서에 서명도 했고, 사진을 찍은 다음에 간단하게 인터뷰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좋죠.”
알이 맞잡은, 그의 커피색 손은 참 투박하고, 굳세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