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김사범, 2021시즌(노리는 자 vs 노려지는 자)(1)
시즌이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난 오늘, 디트로이트는 24경기 16승 8패로 아메리칸리그 중부지구 1위를 달리고 있다.
한동안 중부지구 1위를 차지했던 클리블랜드는 최근 몇 년간 우승을 위해 도전하며 쌓인 연봉총액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이어세일과 함께 리빌딩을 선언했지만, 다른 구단의 지원 아닌 지원을 받아 13승으로 리그 2위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 뒤를 12승의 화이트삭스가 슬금슬금 치고 올라오고 있는 형국인데, 수리의 말이 이뤄진다면 이번 4월을 주목해야 할 것 같다.
“붐, 뭐해? 정장으로 안 갈아입어? 지금 안 갈아입으면 버스에서 갈아입어야 할걸?”
폴리의 말에 생각을 멈추고 얼른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잠시 후, 공항 활주로에 멈춘 버스에서 내려 오클랜드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니까, 케이시. 그 여자가 나한테 딱 와서 말하는 거야.”
“그만. 네 연애 같지도 않은 연애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딱히 정해져 있진 않지만, 항상 같은 자리에 앉은 선수들을 태운 비행기가 활주로를 향해 가는 사이에 폴리의 입이 케이시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래? 일단 이륙할 때까지만 들어 봐봐…….”
시선을 돌리자 눈을 감고 똥씹은 표정을 하고 있는 케이시가 보인다.
‘미안. 그러게 이겼어야지.’
아무리 먼 원정이라도 비행 내내 한시도 입을 쉬지 않고 떠드는 폴리를 담당하기 위해 공정하고 당당하게 내기를 했다.
가위바위보. 여기 말론 락 페이퍼 시저스.
슈우우웅.
잠깐의 떨림과 함께 항공기가 이륙하고, 폴리가 반응이 없는 케이시를 뒤로하고 다음 희생자를 고르고 있는 모습을 보다 눈을 감았다.
혹시 눈을 마주치면 폴리가 다가올까 봐 그런 건 아니다.
그리고 잠시 후.
결국 오지 않는 잠에 조심스레 눈을 뜨고 팀에서 나눠준 전력분석 자료와 부탁해서 얻어낸 페이스의 자료를 놓고 읽기 시작했다.
[김사범 - 24경기 11홈런, 0.353, 0.461, 0.791
이삭 페레데스 - 24경기 3홈런, 0.348, 0.456, 0.470
닉 카스테야노스 - 24경기 6홈런, 0.300, 0.370, 0.441
미구엘 카브레라 - 24경기 7홈런, 0.302, 0.353, 0.462
크리스틴 스튜어트 - 24경기 9홈런, 0.270, -.330, 0.599
페이스 달턴 - 22경기 4홈런, 0.290, 0.370, 0.415]
론이 본격적으로 승리를 위한 팀 운영을 하기 시작하면서 선수들의 성적이 눈에 띄게 상승했다.
론은 고정된 라인업을 유지하기보다 컨디션에 따라 타순의 변화를 주는 걸 선호하는데, 나를 제외하고 컨디션에 따라 3,4,5번 타순에 변화를 줬다.
다들 컨디션이 안 좋다면 이삭과 카스테야노스를 전진 배치시키면서 나를 3번에 놓고, 4번엔 미기를 놓았다.
물론 상대 투수의 손에 따라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경우는 있지만 우리 팀의 타자들이 좌우를 그다지 따지지 않는 스타일이다 보니 큰 차이는 없다.
예전 본즈의 주위 타순에서 우산효과를 받아 MVP까지 거머쥔 제프 켄트와 같이, 나를 중심으로 놓고 우산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조합을 고민하는 모양새다. 여기 페이스의 자료에도 나와 있듯.
그 와중에도 미기는 되도록이면 한 시리즈 안에선 타순을 고정시켜 베테랑을 배려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는 론이다.
“여기서 슬라이더를 던지는 게 아니라 슈트를 던졌으면…….”
“너무 결과론적인 이야기…….”
내 뒷자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하는 시미즈 루이. 3번의 등판에서 아직 첫 승을 신고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노 디시전 2경기, 1패니까 5선발치고는 괜찮은 내용인데. 방어율도 좋고.’
어차피 팀에서 5선발에게 원하는 건 큰 부분이 아니니까. 좀 더 마음을 편하게 먹고 던졌으면 좋겠다.
곧 첫 승을 거둘 수…….
“붐? 자?”
응, 졸려. 잘 거야.
* * *
김사범이 미국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 각 구단의 전력분석팀은 그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이봐, 그래서 저 녀석의 약점은 없는 거야?”
꽤 넓은 회의실,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프로젝터의 화면은 김사범의 타격 장면을 계속해서 재생하고 있었다.
“후. 우리가 손을 놓으면 안 돼. 약점이 없는 타자는 없어.”
상석에 앉은, 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여러 자료를 화면에 띄우기 시작했다.
히트존, 볼넷-삼진비, 코스, 그리고 구종별 타율, 장타율, 심지어 도루 성공률까지. 수많은 자료가 넘어가는 도중, 멍하니 바라보던 한 남자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모두의 생각을 입 밖으로 말했다.
“압도적이군, 정말로…….”
“그래. 압도적이지.”
팀장은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다 이내 다시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여기가 금연이 된 지 1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군. 후우.”
짜증스런 그의 말에 모두들 앞에 있는 자료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저…….”
구석진 자리, 심지어 테이블이 아닌 벽면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젊은 남성이 손을 들며 발언권을 요구했다.
“그래, 누구지?”
“저는 이번에 인턴십으로…….”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래 인턴 누구 군. 좋은 의견 있나?”
통통한 몸, 약간 소심해 보이는 인상의 인턴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제가 약점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오, 그래. 나를 포함한 여기 앉아 있는 멍청이보다 훨씬 낫군, 말해 보게.”
“그…… 오프스피드 피치를 이용해야 합니다.”
“뭐?”
팀장이 자신의 앞에 있는 노트북을 몇 번 클릭하자 체인지업 등의 구종에 대한 김사범의 데이터가 화면에 출력됐다.
“잘 치잖아? 체인지업을 상대로 한 타율도 3할 5푼이 넘는데?”
“하지만 저번 시즌에 그가 가장 많은 삼진을 당한 구종이 체인지업입니다.”
“흠…… 계속해 보게.”
“저번 시즌, 킴의 총 삼진 개수는 25개입니다. 그중 루킹 삼진을 제외하면 19개, 그중 12개가 체인지업이었습니다.”
“음…….”
팀장이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누군가가 반론을 펼쳤다.
“그 자료로 체인지업에 약하다고 하기엔 표본이 너무 적지 않나?”
“저번 시즌의 25개는 역대 20위권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보통 삼진을 잘 당하지 않는 선수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커리어 후반까지 자신의 삼진 페이스를 유지하는 편이죠.”
그의 말을 듣던 팀장이 인턴을 보며 재촉했다.
“계속해 봐.”
그의 재촉에 자신감을 얻은 듯, 인턴의 말투에 점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수비 측면에서 보면, 아, 어차피 이제 메이저리그에서 한 시즌, 마이너까지 포함해도 두 시즌을 뛴 선수라 UZR 등의 비교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올드스쿨로 돌아갔습니다.”
“올드스쿨?”
“직접 봤죠. 찾아다니며 물어봤고요.”
“후, 그래서.”
“보통 현장에서는 킴의 반사신경이 엄청난 타입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베테랑과 같은 타구 판단능력으로 정확히 타구를 예측해서 첫 발을 내딛는 능력을 높게 사고 있었죠. 그리고 나머지는 운동능력이죠.”
살짝 겉도는 이야기에 팀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타격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Z-Swing, 그리고 O-Swing 비율을 보면 존에서 나가는 공을 거의 완벽하게 골라냅니다. 특히 지난 시즌 전반기에는 거의 완벽할 정도죠.”
“킴이 선구안이 좋은 건 다들 알아.”
“여기서 제가 주목한건 크게는 오프스피드 피치, 작게는 체인지업입니다. 결과적으로 존 안이든, 밖이든 컨택을 해내는 비율은 그대로였지만 타 구종에 비해 의미 있을 정도로 O-Swing, 그러니까 존 밖으로 향하는 공에 스윙할 확률이 높았습니다.”
인턴의 말에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음…… 이건 이용할 가치가 있겠어.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나?”
가만히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던 인턴이 다시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체인지업을 예로 들었지만, 슬로 커브 같은 구질도 효과가 있을 겁니다. 음…… 이건 데이터가 아닌 제 의견입니다만, 선구안은 뛰어나지만 순간적인 반응은 리그 탑 클래스의 툴을 가진 선수들보다 떨어져서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겁니다.”
“음?”
“스윙 아웃을 당한 체인지업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전 다저스의 류가 던졌던 체인지업 같은 낙차가 크고 변화가 늦게 이루어지는 공이었죠.”
“그냥 쩌는 체인지업을 말하는 거군.”
누군가의 말에 잠시 웃음이 번졌다.
같이 웃던 인턴이 큼큼대며 목소리를 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결국 무브먼트가 중요하겠죠. 오프스피드라고 했지만 결국 타이밍을 흐트러트리는 게 첫 번째 목적이라 그렇게 말한 거고, 그 뒤엔 공의 낙차가 중요합니다. 애매하면 커트만 당할 뿐이죠.”
짝! 짝! 짝!
팀장이 과장된 박수를 치며 말했다.
“좋아. 아주 아마추어 같은 분석이었어. 하지만 분석해 볼 가치는 충분할 것 같군. 그럼 이 아마추어 같은 분석을 좀 더 프로답게 만들어 보자고. 생크?”
“네.”
“저 인턴과 함께 다시 한 번 만들어 봐. 스텝마다 보고하고.”
“네, 알겠습니다.”
그 후에도 몇몇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린 팀장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 인턴에게 맡겨 놓고 가만있진 않겠지? 뭐든 좋으니 찾아내면 보고해. 내가 약속하건데 쓸 만한 걸 잡아내면 일주일 동안 집에서 핸드폰을 꺼놓고 지낼 수 있도록 해 주지.”
잠시 정적이 흐르는 회의실.
“뭐해? 움직여!”
팀장의 외침에 그제야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 * *
오클랜드, 리키 핸더슨 필드.
“볼!”
반쯤 나가던 배트를 다시 회수했다.
‘이상하네. 어제부터 체인지업이 많이 들어오는 기분이야.’
어제 선발로 나왔던 헤수스 루자르도야 메이저리그 데뷔 2년 차에 체인지업 구종가치에서 5위권 안에 드는 선수라 그렇다 쳐도, 오늘 선발로 나온 AJ 퍽은 좋게 쳐 줘도 평범 아래에서 노는 체인지업을 던지는 투수다.
‘뭔가 분석되고 있는 건 분명한데.’
“타석에 들어오지.”
심판의 말에 타석에 다시 들어섰다.
[AJ 퍽 선수, 변화구 승부를 이어갑니다.]
[왼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속구와 예리한 슬라이더가 강점인 선수인데 오늘 김사범 선수에게는 조금 다른 볼 배합을 가져가네요.]
[말씀드리는 순간, AJ 퍽 선수의 슬라이더를 김사범 선수가 받아쳤습니다!]
[2루까지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는 코스네요.]
[김사범 선수, 속도를 줄이지 않습니다! 2루를 밟은 뒤에도 맹렬하게 3루를 향해 달려갑니다! 3루에서! 세이프!]
[김사범 선수의 장점은 수도 없이 많이 있지만, 바로 이런 폭발적인 스피드도 큰 장점 중 하나입니다. 장타력이 있는 타자 중 주루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 타자는 드물거든요.]
[그래서 메이저리그에서도 5툴 플레이어를 높게 쳐주지 않습니까?)
[하하, 조금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고정관념을 깬 구단이 김사범 선수가 상대하고 있는 오클랜드죠. 빌리 빈 단장 부임 이후…….]
따악!
어제와 오늘 3번으로 출장한 미기의 우익수 앞 안타에 여유롭게 홈으로 들어갔다.
덕아웃 안, 냉장고 안의 음료수를 마시며 장비를 풀까 말까 고민 중인 페이스에게 다가가 물었다.
“페이스, 날 상대로 리드한다면 어떻게 승부할 거야?”
다리의 프로텍터를 풀다 잠시 고민에 빠진 페이스.
그 순간, 옆에서 케이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쪽 존 근처에서 노는 변형 패스트볼 위주로 던지다가, 카운트가 불리해지면 브레이킹 볼로 상대하고, 유리하면 오프스피드 볼을 던지겠지.”
음…….
케이시의 말을 듣던 페이스도 의견을 보탰다.
“좀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일단 결정구로는 떨어지는 공을 던질 거 같은데. 페드로의 체인지업이면 베스트겠네.”
그건 내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먹히는 공이잖아.
“내가 오프스피드 피치에 약한가?”
“글쎄, 우리 팀 타자들의 기록은 분석하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최근에 나한테 체인지업으로 승부하는 투수들이 늘었어. 별생각 없이 타석에 들어서는 내가 느낄 정도면 꽤 높은 비율일 거 같은데.”
“그럴 수도 있겠네. 시간 나면 한번 찾아보지.”
그 말을 남기고 페이스는 자신의 헬멧과 배트를 챙기려 일어섰다.
잠깐.
“페이스?”
“언제일지는 몰라. 하지만 늦지 않게…….”
“아니 그거 말고, 프로텍터 벗고 가야지.”
“아.”
그렇게 페이스를 무사히 대기타석으로 보내고, 케이시와 잡담을 하며 생각했다.
‘구단 전력분석실에도 자료를 요청해야겠군. 이건 잘하면 써먹을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