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김사범, 2021시즌(노려지는 자 vs 노리는 자)(2)
[이제 경기는 6회, 중반부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현재 스코어는 2:0, 절대 안심할 수 없는 점수 차입니다.]
[디트로이트 입장에서는 이번 기회를 잘 살려야 합니다]
안타를 치고 나간 이삭이 도루에 성공해서 주자는 2루, 원아웃 상황.
타석에서 잠시 물러나 4회, 두 번째 타석을 떠올렸다.
* * *
크리스의 호투에 팀원 모두가 한껏 고무되었던 4회, 나는 첫 번째 타자로 타석에서 이닝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 뭔가 준비했으려나? 기대되는데?’
이런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 투수에게 공을 돌려주고 있는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준비됐어? 난 준비됐는데.”
묵묵부답. 첫 타석이랑 너무 다르다. 재미없게.
“더 할 거 있으면 해 봐도 되고. 아, 고의사구는 빼고.”
또 한마디를 던지고 녀석을 바라봤다.
마스크 사이로 보이는 찡그린 얼굴.
‘내가 이상한 건가? 기분 좋은데?’
그렇게 연습투구가 끝나고, 바로 이닝이 시작됐다.
[1회에 허니웰 선수가 자랑하던 스크류볼을 바로 받아쳐 홈런으로 만든 김사범 선수입니다.]
[거르기도 힘든 상황인 게, 김사범 선수의 통산 도루 성공률이 90%에 가까워요. 아웃 카운트가 없는 상황에서 내보내기엔 껄끄럽거든요?]
[내보내면 90퍼센트 확률로 2루에 가는 주자를 상대하는 것보단 차라리 상대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요. 적어도 60퍼센트 이상의 확률로 아웃 카운트를 늘릴 수 있으니까요.]
[그렇긴 합니다만……. 나머지 40퍼센트가 대부분 장타라는 게 문제입니다. 아주 까다로운 선수가 됐어요, 김사범 선수.]
포수와 투수만의 시간, 사인 교환이 끝나고 허니웰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스트라이크!”
와우, 아까 첫 타석에서 던진 그 커브가 그대로 들어왔다.
이런 커브가 경기 내내 들어온다면 정말로 위력적일 것 같다. 칠 순 있겠지만 쳐도 큰 재미를 못 볼 거 같고.
‘낮은 커브 다음엔 뭐…… 정석으로 가려나?’
2구, 정말 정석적으로 공이 왔다.
따아악!
손맛은 좋았는데…….
[3루심이 파울을 선언합니다. 폴대를 살짝 빗나가는 파울이었습니다.]
[높은 패스트볼이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던 거 같습니다. 아쉬운 점은 스크류볼과 커브를 상대하면서 약간 타이밍에 혼란이 있었던 거 같아요. 타이밍이 조금 빨랐습니다.]
요즘 들어 각광받는 정석적인 패턴이다. 낮은 변화구 뒤에 하이 패스트볼. 위아래 시야 차이를 이용할 수도 있고, 요새 모두가 즐겨 사용하고 있는 어퍼 스윙이 하이 패스트볼에 조금 약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고.
‘정신 차리고, 멍하게 치지 말자.’
마음을 가다듬는다.
카운트는 2-0, 전성기 때의 그 무서운 트라웃조차 1할 타자로 만드는 마법의 숫자다.
[투수, 3구를 던집니다!]
펑.
“스트라이크! 아웃!”
어?
뭐지? 저번 공은 실투였었나?
정말 어? 하는 사이에 바깥쪽 존으로 공이 말려 들어왔다.
‘커브라고 생각했는데…….’
[삼진! 허니웰 선수, 김사범 선수에게 삼진을 뺏어 냅니다!]
[우와, 방금 공은 정말 누가 와도 당할 수밖에 없겠네요. 존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걸로 보였는데, 갑자기 휘어서 보더라인에 걸렸습니다. 우투수가 우타자를 상대할 때는 잘 안 쓰는 단어입니다만, 그야말로 뒷문을 기가 막히게 열고 들어갔네요.]
자존심이 상한다.
그렇게 돌아온 덕아웃은 내가 홈런을 쳤을 때처럼 축제 분위기다.
아니, 이 사람들이?
“워! 홈런보다 보기 힘들다던 붐의 루킹 삼진 아냐?”
미기, 그만해요.
“난 진짜 이제 더 필요한 게 없어. 내 경기에서 삼진까지 당해 주다니. 고마워 붐.”
아처 당신도. 투구에나 집중하라고.
애써 날 놀리는 말들을 무시하고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가져와 자리에 앉아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김사범 선수…… 삼진 개수…… 컨디션이 좀…….”
“데이터상으로 그런 공에…… 데이터가 중요한 게 이런 통계적인…….”
그만. 내 뒤에서 속삭이면서 대화하지 마.
“페이스, 그리고 시미즈. 다 들려요.”
“헙, 죄송합니다…….”
“큼.”
남은 타석에 또 삼진이라도 당하면 파티라도 열어 줄 기세다.
‘억지로라도 삼진을 좀 당해야 하나?’
“멍청이, 저런 똥볼에 삼진이나 당하다니.”
“폴리, 넌 불펜으로 빨리 꺼져. 곧 5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폴리에게 이런 소리를 듣다니. 후우.
떠억!
[크리스틴 스튜어트 선수의 타구가 높이 떠 갑니다! 이 타구가 오른쪽 담장을! 살짝 넘겼습니다! 단숨에 2:0을 만드는 디트로이트!]
* * *
그리고 6회 말, 4회 스튜어트의 홈런으로 2:0의 스코어를 만든 뒤, 마침내 내게 기회가 돌아왔다.
스튜어트의 홈런 이후, 치욕과 오욕의 2이닝을 견뎌 낸 내게 드디어 타석이 돌아온 거다.
‘투구 수가 90개가 넘었는데……. 1루가 비었다고 날 거르는 건 아니겠지?’
저번 시즌, 레코드를 세우면서 날 상대해 주지 않는 투수들 때문에 타석에 들어서면 습관적으로 상대 벤치의 눈치를 보게 됐다.
‘고개 끄덕이는 거 보니 거르진 않네.’
“흐압!”
[허니웰 선수, 초구 던집니다!]
“볼!”
[몸쪽으로 바짝 붙은 스크류볼이네요. 김사범 선수를 상대로 과감한 볼 배합을 가져갑니다.]
[김사범 선수는 눈이 좋기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처음 본 투수의 공도 첫 타석에서 제대로 정타를 만드는 경우가 많은 선수죠. 탬파베이의 배터리도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다른 볼 배합을 가져가는 거 같습니다.]
처음 투수의 손에서 떠난 공의 궤적을 봤을 땐, 가운데로 몰린 커브인 줄 알았다.
‘3타석 연속 커브라고?’
배트를 내려고 하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싸한 느낌.
‘그럴 리가!’
스윙을 포기하고 몸을 살짝 뒤로 빼는 순간, 공은 내 몸이 있던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과감한 구종 선택. 몸에 맞을 뻔했지만 그런 사실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다.
저번 타석에서도 느꼈지만, 제대로 구사된 허니웰의 스크류볼은 중간지점까지는 커브와 구별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던진 두 번째 공,
“볼.”
“네?”
“낮았어.”
한참을 들고 있던 팔을 내리며 의문을 표하는 포수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구심.
정말 낮았다.
‘근데 왜 이놈이나 저놈이나 인상을 쓰고 있는 거야?’
공을 던지는 포수도, 받는 투수도 당연히 스트라이크라 생각했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메이저리그에 떠오르는 선구안의 상징, 컴퓨터 선구안, 스트라이크 존의 왕인 내 심기가 굉장히 불편해졌다.
그리고 3구째, 드디어 왔다.
내가 두들겨 팰 공이.
[김사범 선수, 높은 패스트 볼에 강하게 스윙했습니다! 좌측 담장을! 이건 볼 필요도 없겠네요. 담장을 아주 가볍게 넘어 관중석 상단에 떨어집니다!]
[높은 공을 작정한 듯 퍼 올렸어요. 말하고 보니 표현이 굉장히 이상한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네요. 예전 양주혁 위원의 만세타법을 보는 거 같기도 하고요.]
[와. 듣고 보니 그렇게 보이기도 하네요?]
[첫 타석에서는 낮은 변화구를 때려서 홈런, 그리고 이번 타석에서는 높은 패스트볼을 때려서 홈런을 만들어 냈습니다. 대단하네요. 대단한 타자입니다 김사범 선수.]
투런 홈런. 4:0.
홈플레이트를 밟고 나서야 속이 좀 풀리는 게 느껴졌다.
흥분이 가라앉고, 돌아갔던 눈이 돌아오니까 좀 미안하기도 하다. 그래도 열심히 해보겠다는 녀석을 막 놀리고.
‘포수가 입 좀 더럽게 놀릴 수도 있지, 참.’
다음 타석에선 착하게 대해 줄 거다.
진짜로.
그리고 전광판의 0의 행진이 8개가 됐을 때, 내 시야엔 모든 루가 가득 찬 풍경이 보였다.
‘이상하네, 난 이런 걸 바라지 않았는데…….’
* * *
경기가 열리고 있는 코메리카 파크, 알의 사무실.
알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그렇게 진행하시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네. 위원님이 바라는 효과를 위해선…….”
수화기 안의 상대방을 설득하고 있는 알.
“제 생각대로 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제가 보장하죠.”
그렇게 통화가 끊기고, 옆에 있던 비서가 알에게 물었다.
“정말 그렇게 진행하실 겁니까? 그 인간, 속 좁기로 유명한 인사입니다.”
“자기가 어쩔 건가. 내가 이 구단의 대표로 그렇게 정한 건데.”
“그렇긴 합니다만…….”
“이제 우린 붐이 오늘 경기, 아니 앞으로 펼쳐질 모든 경기에서 잘해 주길 바라면 돼.”
“이미 그러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이 시선을 돌려 경기장의 바깥, 도시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지금보다 더. 그래야 이 도시 곳곳에 자기의 얼굴이 걸려도 창피하지 않을 거니까.”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사무실을 나가려던 비서가 뭔가 궁금한 게 있는지 다시 알을 바라보며 물었다.
“단장님, 그런데…….”
“뭔가?”
“붐의 트레이드, 왜 진행하지 않으신 겁니까? 제안들도 다 좋았고, 이렇게 시즌이 진행될수록 천문학적인 연봉을 줘야 할 텐데요.”
비서의 말에 웃으며 대꾸하는 알.
“여기가 데이터를 무기 삼고, 선수의 약점을 방패 삼아 싸우는 필드긴 한데…….”
“한데?”
“어떨 때는 감이 이성을 잡아먹을 필요도 있거든. 내 감이 그를 팔지 말라고 외치고 있어. 그리고 데이터상으로도 지금 이제 막 비상하고 있는데 파는 건 웃기지 않나?”
“지금 보여 주는 모습이 최대치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걱정 마, 지금 보여 주는 모습이 최대여도 그네들이 준다고 한 쭉정이들보단 나으니까. 이제 나가 보게.”
알의 말에 사무실을 나가며 비서가 중얼거렸다.
“쭉정이급은 아니었는데…….”
* * *
같은 시각, 짐의 사무실.
“아, 그래? 그렇군.”
[아쉽지 않아?]
“아쉽지 않냐고? 아쉽지. 그래도 뭐, 내 고객이 원하는 거니까.”
[하하, 시대의 로맨티스트군. 너답지 않아.]
“돈은 이미 충분하니까, 그리고 이대로 진행해도 충분히 많은 돈을 벌 수 있어.”
[고객의 뜻이 완강한가 보지?]
“뭐, 설득하려면 설득할 수 있겠지. 근데 그런 필요가 있겠어? 지금 이 건도 이용하기에 따라 충분히 좋은 총알이 될 수 있을 텐데.”
[네 고객 멘탈에 안 좋을 수도 있어.]
“미리 말해 줄 거야. 사실 미리 말해 주지 않아도 사범은 이 정도로 흔들릴 멘탈이 아니지만.”
[하하, 사랑에 빠진 초등학생을 보는 것 같군.]
“끊어. 내가 전화 줄 테니 준비하고 있고.”
[그래.]
통화가 끝난 뒤, 짐은 리모컨을 들어 사무실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TV를 켰다.
그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접속하는 야구 커뮤니티.
[8회 말, 만루의 상황에 붐이 나왔습니다. 레이스로서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네요.]
딸깍.
: 만루에 붐이 나왔어.
: 거를까?
: 설마, 본즈도 아닌데?
: 본즈급이지.
: 하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멍청아.
올라가는 채팅창을 보며 짐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내 생각엔 그 이상인데……?”
따아아악!
그리고 그와 동시에 TV에서 울려 퍼지는 웅장한 타구음.
“거 봐, 내 말이 맞잖아.”
[호오오오오오옴런! 붐의 타구가 높이 솟아올라 코메리카 파크의 담장을 넘어갑니다!]
[디트로이트 소속 선수가 한경기에서 3홈런을 친건 2016시즌 빅터 마르티네즈 이후로 5년 만입니다. 그리고 디트로이트 구단 역사상 최연소 3홈런 기록자이기도 하네요.]
* * *
-LET'S GET IT! BOOM!!
-BOOM!!
-BOOM!!
내 홈런과 함께 당연한 듯 코메리카 파크에 울려 퍼지는 내 등장곡.
‘평소와 조금 다른 느낌인데?’
뛰면서 관중석을 바라보니, 관중들이 BOOM! 부분을 서로 마주 보면서 번갈아 가며 외치고 있었다.
‘재미있긴 한데…… 멀리서 보면 싸우는 거 같은데?’
뭐. 팬들이 즐거우면 됐지.
내 앞에서 먼저 뛰던 주자들의 호위 아닌 호위를 받으며 들어간 덕아웃.
날 보고 있는, 장난기 넘치는 시선들을 보니 갑자기 나도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그래서 외쳤다.
“BO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