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78화 (78/175)

78화 김사범, 2021시즌(빨간 목에 진주 목걸이)

3홈런, 내 의지가 아닌 음료수 샤워, 라커룸에서의 인터뷰를 끝내고 쓰러져 잔 다음 날.

이제는 내 집처럼 익숙한 코메리카 파크의 웨이트 트레이닝 룸에서 운동하다 보니 어제의 피로를 날리고 있다 보니 몸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우우우웅.

내 팔뚝에 장착된 밴드에서 울리는 진동.

그리고 귀에서 울리는 여성의 목소리.

- 짐 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웨어러블? 이게 편하긴 하네 확실히.’

처음에 짐이 보내 줬을 땐 이게 뭔지도 몰랐다. 후에 무슨 유명한 회사의 시제품이라는 걸 들어서 알았지.

덕아웃에서는 못 쓰지만, 이렇게 개인 운동을 할 땐 꽤 편한 것 같다.

‘집중을 흐트러트리니까 불편한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다시 팔뚝이 울렸다.

-짐 님에게서…….

“네, 짐.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다급하게 전화를 해요?”

[내가 나쁜 소식 가지고 연락하는 거 봤어요?]

“음…….”

[고민하지 마요. 없으니까. 아무튼, 곧 기사 하나가 뜰 거 같아서 미리 말해 주려고 전화했어요.]

“기사요?”

[뭐, 그냥 추측성 기사인데, 워낙 사범이 핫해서 꽤 그럴듯하게 들릴 수도 있어서요.]

“내용이 뭔데요?”

뭐지? 짐이 이렇게 전화할 정도면 꽤 큰 기사일 텐데.

바로 그때, 트레이닝 룸의 문이 열리며 이삭이 등장했다.

“붐! 너 트레이드 돼?”

무슨 소리야. 아, 이건가?

이삭에게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하고 통화를 이어 갔다.

“트레이드 기사인가 봐요?”

[알고 있었어요?]

“아뇨, 방금 알았네요. 누가 말해 줘서.”

[하하, 사실 나도 들었어요. 다른 구단들 중에 사범을 노리는 구단이 꽤 있어요. 아니, 사실 몇몇 구단 말고는 다 노리고 있죠.]

“하?”

[흔들리지 말라고요. 아, 디트로이트에 남아 있고 싶다는 마음, 안 바뀌었죠?]

“그쵸.”

[그럼 됐어요.]

이제야 본 궤도에 올라서 쏘아져 나갈 일만 남은 구단에서 굳이 나갈 필요가 있을까?

오랜만에 통화하는 짐에게 괜히 장난을 치고 싶어 한마디를 덧붙였다.

“에이전트가 무능력해서 연봉으로 60만 달러를 받았을 땐 조금 옮기고 싶긴 했는데…….”

[하하하, 서비스 타임 2년 차에 에이전트가 무슨 소용이에요.]

“크리스 브라이언트…….”

[오, 그건 생각 못 했네요. 아무튼, 신경 쓰지 말고 야구만 해요. 이런 어른의 비즈니스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누가 보면 자선사업가인 줄 알겠는데요? 내가 수수료를 얼마 내더라…….”

[끊을게요. 내가 준 기기들은 평소에 잘 차고 다니고, 그게 다 비즈니스예요.]

“알겠어요.”

짐과의 농담이 끝나고 멀뚱히 서 있는 이삭에게 말했다.

“나 안 가.”

내 말에 쿨하게 대답하는 이삭.

“그래? 그럴 거 같더라. 나 옷 갈아입고 온다.”

뭐야. 생각보다 반응이 약한데? 이래서 밀당이 필요한 건가?

잠시 정신 나간 생각을 하다 보니 몸이 식어 가는 게 느껴졌다.

“됐다, 내가 수리한테도 안 하는 밀당을 해서 뭐해?”

이젠 나도 모르게 혼잣말도 한다. 수리를 만난 이후로 뭔가 내가 내가 아닌 것…….

“수리가 누군데?”

“헙.”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니 케이시가 서 있었다.

‘얘는 언제부터 여기 있던 거야?’

“수리는……, 음……, 소중한…….”

“소중한?”

눈만 돌려가며 주변을 살펴봤다.

때마침 눈에 들어오는 길고 굵은 그것.

“바벨?”

“바벨? 바벨에 이름도 붙여?”

“아하하, 내가 좀 이런 데에 그런 게 있어. 밀고 당기기를 바벨 아니면 뭐랑 하겠어?”

“그래, 알겠다.”

성공했나?

성공은 개뿔. 나라도 안 믿겠구만.

* * *

갑자기 툭 튀어나온 케이시가 선물해 준, 짙고 깊은 자기혐오를 떨쳐 내고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쿠웅!

‘후. 플레이트가 좀 모자라는군. 이 이상 꽂으려면 주문 제작을 해야 할 텐데.’

이젠 정식 규격의 운동기구로는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돼 버렸다.

‘상태창.’

·

·

스탯

힘 : 999+(현재 적용 : 988)

·

·

·]

오랜만에 켜 본 상태창에 나와 있는 내 힘 스탯은 거의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젠 스킬도 안 생기고……, 아니 그것보다, 도대체 이건 뭐지?’

돌아온 뒤, 상태창을 처음 마주하며 해야 했을 고민이지만, 그 당시엔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타이밍을 놓쳤다.

‘그리고 이게 내 눈앞에 떠 있으면 뭐랄까, 이 세상이 진짜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드니까.’

누가, 아니 어떤 존재가 날 이 상태창과 함께 과거로 보낸 걸까?

신은 정말 존재하는 건가?

그게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데.

회색 콘크리트로 가로막혀 있는 트레이닝 룸의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하다, 지금, 이 순간에 할 필요가 없는 고민임을 깨달았다.

‘차라리 스탯에 대해서 고민하는 게 더 생산적이겠군.’

예전, 발렌 사가에서는 998에서 999를 찍었을 때 체감상 100단위가 바뀔 때보다 더 큰 성장폭을 보였다.

‘지금도 그럴까?’

그럼 여기서 얼마나 더 강해지는 거지?

그 시점에 내 몸이 버텨 줄 수 있을까?

이건 외줄타기다. 보호장구가 없는 외줄타기.

한 발만 잘못 내딛어도, 혹은 실수로 밑을 바라보기만 해도 떨어지는 외줄타기.

하지만 난 이제 내 몸을 다루는 데에는 프로다. 가끔 미튜브에 올라오는, 고층 빌딩 사이를 줄 하나, 장대 하나에 의지해서 건너가는 사람들처럼.

* * *

-LET'S GET IT BOOM!

[김사범 선수, 자신의 17호 홈런을 쏘아 올립니다!]

[탬파베이로서는 답답하겠네요. 오프너라는 전략의 장점이 강한 구위를 가진 투수로 상대팀의 가장 강한 타선인 1, 2, 3번을 잡고 들어가는 건데요. 이렇게 1회부터 홈런을 맞으면 전략을 사용한 의미가 없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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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사범 선수, 타구를 잡아 2루로 송구합니다! 2루에서 아웃! 1루에서도…… 아웃입니다!]

[1회 말, 김사범 선수의 홈런으로 만든 점수를 잘 지켜내면서 1:0으로 승리하는 디트로이트입니다. 승리 투수는 케이시 선수, 세이브는 폴리 선수입니다.]

경기가 끝난 뒤, 늦은 밤.

“무슨 고민 있어요?”

“네? 아뇨. 그런 거 없어요.”

수리가 디트로이트로 왔다.

“있는 거 같은데?”

짖궂은 얼굴을 한 수리가 큰 눈으로 날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음, 그냥 좀.”

“그냥 좀?”

“지금 이게 꿈 같아서요.”

“꿈이요?”

“가ㄲ…….”

나도 모르게 갑갑했었는지, 내 이야기를 무심코 뱉으려다 보니 수리의 빨개진 얼굴이 보였다.

“저도요…….”

음?

지금 방금, 내가 엄청 잘한 거 같은데.

띠리리리리.

아.

하필 이때.

경기가 끝나고 답답해서 벗어 놓은 웨어러블 기기가 절실한 순간이다.

‘짐, 다시는 짐의 말을 의심하지 않을게요. 꼭.’

짧은 간증의 시간을 마친 뒤, 전화기를 살펴보니 케이시다.

‘뭐지?’

무시하고 싶지만, 평소에 중요한 용건이 아니면 잘 전화를 하지 않는 케이시라 신경이 쓰였다.

“저…… 잠시 전화 좀…….”

“네…….”

나와서 전화를 받자, 핸드폰 너머 들리는 케이시의 목소리.

“붐, 뭐해?”

“밥 먹지.”

“아, 수리랑?”

“……뭔 소리야? 수리는 바벨이라니까.”

“오케이. 알겠어.”

“그게 전화한 목적이야?”

“그렇긴 한데, 내일 이야기하자.”

전화를 끊고, 다시 식당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머니에 있는 목걸이를 꺼내 다시 한 번 살펴봤다.

저번 원정 때 숙소로 삼은 호텔 근처에서 눈에 띄어 산 목걸이.

사실 아까부터 계속 타이밍만 보고 있었다.

‘그래.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주겠어?’

문을 열고 내가 앉았던 자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통화는 다 끝나셨어요? 마침 후식이 나와서…….”

“선물이 있어요.”

“네?”

이미 스윙은 시작됐다. 이젠 멈추지 못한다.

내 자리에서 몇 걸음 더 옮겨 수리의 등 뒤로 향했다.

이젠 목까지 빨개진 수리.

그 빨간 목에 내가 산 진주 목걸이를 걸어 줬다.

그렇게, 뭔가 빨갛고 분홍색 기류가 흐른 저녁이 끝났다.

* * *

같은 시각, 디트로이트의 다른 장소.

어두컴컴한 테이블을 건장한 남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중 누군가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맞네, 수리는 여자인 게 확실해.”

그 말에 조금 침착한 목소리의 그림자가 대꾸했다.

“당연한 거지. 그렇게 티가 나는데, 그런데 왜 숨기는 거지?”

“글쎄…….”

“못생겼나?”

“내가 사귈 거도 아닌데 그게 왜 중요하지?”

“아니면 나이가 엄청 많거나 적을 수도…….”

“많은 건 모르겠지만 붐의 나이를 생각하면…….”

딱! 딱! 딱!

잠시 시끄러워진 자리를 누군가가 테이블을 치며 진정시켰다.

“내 경험상, 동양인은 이성 교제를 숨기려는 경향이 있더군.”

“시미즈, 맞아?”

작은 그림자의 머리가 끄덕여졌다.

“이해가 안 되는군, 신기해 참…….”

“일단 뭐, 알리고 싶지 않아 하니 모르는 척해 주자고.”

“그러지. 일단 먹자.”

사범이 빨간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걸어주고 있을 때 일어난 대화였다.

* * *

다음 날, 탬파베이와의 마지막 경기이자 디트로이트가 한 달에 한 번 오픈하는 BP데이.

경기 전, 배팅 연습을 구경하고, 자신이 원하는 선수의 사인을 받기 위해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붐! 여기요! 여기도 해 주세요!”

“잠시만요, 여기 이분 먼저…….”

정신없이 사인해 주고 있다 보니, 어느새 미기와 크리스가 옆에 와 있었다.

“역시, 붐은 여자 팬들이 대부분이네.”

“그러게.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미기도요? 흠, 아닐 거 같은데.”

“붐처럼 섹시스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디트로이트에서는 꽤 잘나갔었는데?”

두 아저씨의 만담을 일일이 대꾸하기엔 내 사인을 원하는 팬들이 너무 많았다.

날 보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찾아온 팬들에게 최대한 많은 사인을 해주고 싶어 빠르게 손을 놀리고 있다 보니, 뭔가 익숙한 손이 보였다.

‘설마?’

깜짝 놀라 손의 주인을 바라보자, 그 곳엔 수리가 서 있었다.

“수리?”

“반갑지 않은가 봐요? 반응이 별론데?”

“어……, 너무 반가운데,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내 걱정에 수리는 맑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 이제 튼튼해요.”

튼튼한 건 수리가 아니라 저 옆에 양복 입은 아저씨 같은데…….

“오늘 좀 덥죠?”

뜬금없이 덥다고 말하며 머리를 걷어 올리는 수리.

그곳엔 내가 선물해 준 진주 목걸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덥네요, 되게. 하핫.”

최고의 팬이 오늘 내 경기를 지켜볼 예정이다.

그렇게 배팅 연습이 끝나고, 경기 시작 전.

미기와 크리스 주위에 많은 선수가 모여 있었다.

“오늘 붐의 여자친구가 왔다니까? 내가 봤어.”

“나도”

“어때요? 이뻐요?”

“동양인이던데, 어려. 붐보다 더 어린 거 같아.”

“크아아악!”

지금까지 잘 숨겨 왔는데…….

‘잠깐, 근데 왜 숨겼지?’

누가 뭐라 할 것도 아니고, 숨길 이유가 없는데 왜 숨긴 거지?

음, 뭔가 돌아오기 전에 두 명, 세 명씩 다리를 걸치며 쉬쉬했던 선배들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건가?

‘나는 숨길 필요가 없지.’

나는 몸을 돌려 팀원들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여자친구는 아니고, 그 근처야.”

덕아웃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첫 번째로 입을 여는 이삭.

“맞네, 여자친구. 됐다.”

조금 전의 소란이 무색하게 각자가 자신이 할 일을 하려 흩어지는 팀원들.

뭔가 낚인 기분이다.

“경기에나 집중해. 네 피앙세가 왔잖아?”

너 때문에 집중을 못하는 거야, 케이시.

[디트로이트와 탬파베이의 시즌 6차전, 그리고 3연전의 마지막 경기가 시작됩니다.]

[디트로이트의 오늘 경기 선발은 시미즈 루이 선수입니다. 저번 로테이션을 건너뛰면서 휴식일이 길어졌기 때문에 중간에 등판시키는 것 같군요.]

[빡빡한 일정으로 유명한 메이저리그지만 시즌 초반에는 비교적 한가한 시점이 있으니까요. 시미즈 루이 선수가 시즌 첫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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