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83화 (83/175)

83화 김사범, 2021시즌(미신과 행운 사이)(1)

야구를 하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스스로 세웠던 루틴이 경기 전까지 차근차근 무너져 내리는 날?

그리고 그런 날은 대개 좋지 못한 결과를 낳는다.

“으드드드드드!”

아침부터 그랬다. 일어나서 시원하게 기지개를 핀 후, 어김없이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며 노트북을 켰다.

‘어? 왜 와이파이가 안 잡히지?’

어제까지만 해도 잘 잡히던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는다.

“죄송합니다. 오늘 근처 회선이 공사를 해서 잠시 호텔 인터넷이 끊겼습니다. 두 시간쯤 걸린다고 하네요.”

“네, 알겠습니다.”

보통 이런 일이 있으면 호텔 측에서 먼저 공지를 하겠지만, 늦게 복귀하는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진 않은 것 같다.

‘시간이 좀 뜨는데?’

뭐, 나 같은 경우는 경기 전 루틴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라 다행이다.

‘시간이 뜨면? 운동이지.’

간단히 얼굴만 씻고 호텔 지하에 있는 트레이닝 룸으로 향했다.

약 100여 평에 공간 안에 쫙 깔려 있는 운동기구들.

내가 뉴욕 원정 숙소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홈구장보다 더 좋은 환경의 트레이닝 룸!

프리웨이트를 주로 하기 때문에 기구의 종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지만, 그래도 남자, 거기다 운동선수라면 무조건 이 장소를 좋아할 거다.

흡!

쿠우웅!

시즌에 들어서면 자잘한 부위보다 큰 근육과 코어 위주로 운동을 하는 내게 플레이트가 많은 이곳은 천국이다.

‘이제 380kg인가?’

오늘은 시리즈의 중간 경기인 만큼 몸에 부담이 가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저중량 고반복 위주의 프로그램을 수행하려 한다.

후욱!

흐으으읍.

후욱!

그리고,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사고는 일어난다.

“열……둘!”

출렁이는 바벨의 진동을 느끼면서 스쿼트랙에 바를 걸쳐놓는 순간, 불길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끼이이!

나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스쿼트랙의 앞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스쿼트랙의 랙 부분, 그러니까 바를 걸쳐 놓는 부위 한쪽이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이제 무슨 상황이지?’

소리를 듣고 누군가 호텔 측에 연락했는지, 헐레벌떡 뛰어 내려오는 직원들이 보인다.

“괜찮으십니까?”

“혹시 다치신 곳은?”

“병원에 바로, 아니 일단 먼저 팀에 연락하겠습니다.”

벙쪄 있는 내 모습을 보고 경악한 얼굴로 다가와 말을 쏟아 내는 직원들.

이 사람들 입장에서는 지금 지옥에 와 있는 기분일 거다. 수천만 달러를 받는 선수가 자신의 호텔에 투숙하는 동안 관리 소홀로 부상을 당했을 수도 있으니.

“괜찮습니다. 잘 피했거든요. 일단 구단 측엔 제가 말하겠습니다.”

이 사람들 입장은 입장이고, 따질 건 따져야지.

‘농담으로 허리를 접는다 말한 적은 많았는데……. 내가 접힐 뻔했네.’

다시 한 번 되돌아봐도 아찔한 순간이다.

그렇게 아침 운동을 스킵하고, 론의 닦달에 근처 병원에서 간단한 검사를 한 뒤 도착한 양키 스타디움, 다행히 아무런 문제가 없어 경기 전 연습에 바로 합류할 수 있었다.

“헤이, 붐. 큰일날 뻔했다며?”

“어, 정말 척추가 접힐 뻔했어.”

“그러니까 시즌 중엔 고중량으로 운동하지 말라니까. 다치면 너만 손해라고.”

“그래서 저중량 고반복으로 했어.”

“뭐?”

페이스가 한참 배팅을 하고 있는 케이지 뒤에서 폴리와 수다를 떨고 있을 때,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조심해!”

이거 뭐야. 뭐 데스티네이션 그런 거야?

아침부터 겪었던 여러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나는 또다시 본능적으로 폴리를 밀고 나도 뒤쪽으로 몸을 던졌다.

펑!

우리가 있던 곳으로 날아온 공.

“미안! 손에서 공이 빠졌어!”

아니 얼마나 세게 던졌으면…….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라앉히며, 내가 목숨을 구해 준 폴리를 향해 다가가자 보이는 풍경.

“어…… 폴리? 괜찮아?”

10m쯤 떨어진 곳에 처박힌 폴리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 * *

그리고 경기 전.

론이 돌아왔다.

어젠 출전 정지를 당했다고 정말 호텔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오더라.

‘저게 메이저리그에서 감독으로 20년 이상 굴러먹은 사람의 패기인가?’

그리고 론은 다시 라커룸에서 입을 열었다.

“이번 게임은 중요해. 서로 한 대씩 주고받았으니 이제 남은 건 마지막 종이 울릴 때까지 상대방을 두드리는 거잖아?”

“Yes, boss.”

미기가 장난식으로 시작한 대답이 이틀 만에 자리잡아 버린걸 보면, 다들 이 호칭이 맘에 든거같다. 뭐, 여기선 상사를 보스라 부르는게 이상한게 아니라고 했던가?

“일단 공평하게 서로 주먹으로 싸우다가, 안 된다 싶으면 물어뜯어 버리자고.”

“Whooooa!”

이건 또 뭐야.

막 외국 전쟁 영화 이런데서 나오는 소리 아냐?

그렇게, 내 불안은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미기. 저번에 했던 이야기 기억나죠? 나 진짜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어…… 그래. 내가 오늘 론에게 말해 볼게.”

루틴은 루틴대로 망가지고, 나쁜 징크스가 팀을 덮치기까지 했으니, 경기 꼴이 제대로 될 리가 있나.

덕분에 선발로 나선 풀머는 아주 신나게 얻어맞고 있다.

[아, 마이클 풀머 선수의 공이 오늘따라 심하게 날리고 있습니다.]

[전혀 제구가 안 되고 있어요. 거기다가 양키스 타자들이 정말 지독하게 물어뜯고 있습니다. 마치 월드시리즈를 보는 느낌이에요.]

2와 2/3이닝 5실점.

풀머가 강판되기 전까지 남긴 기록이다.

결과론적인 관점이지만, 이렇게 되면 론의 인터뷰가 양키스 덕아웃에 잠들어 있던 뭔가를 깨운 게 분명하다.

자기들 딴엔 억울하다는 거겠지.

양키스 감독도 선수들의 그런 마음을 자극했을 거고.

‘결국, 이번 시리즈는 기세 싸움이란 거네.’

야구는 한 시즌에 162경기를 치루는, 굉장히 긴 스포츠다.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지만, 이렇게 연패를 할 것 같은 느낌이 풍기는 경기라면?

답은 허슬이다. 그리고 약간의 치사함.

그리고 난, 허슬이란 분야의 전문가다.

[뷰 버로우즈 선수, 급하게 몸을 풀고 올라왔습니다.]

[저번 시즌까지 선발로 뛰었던 선수입니다. 현재는 불펜에서 롱릴리프 보직으로 메이저리그에 남아 있습니다.]

[공격적인 투구가 장점인 선수인데요, 오늘도 아마 공격적인 투구를 보여 줄 것 같습니다.]

공격적인 투구 패턴을 가진 선수들의 장점은 빠른 투구 템포를 가진다는 거다. 거기다가 존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모습이 더해지면?

‘구위만 좋다면, 수비하기가 아주 편하지.’

[김사범 선수가 몸을 날려 공을 잡아냈습니다!]

[어김없이 대단한 수비를 보여 주네요. 방금 타구도 2-유간을 빠져나가는 타구라고 봤었거든요? 그걸 독수리가 낚아채듯 공중에서 낚아 채 버렸습니다.]

[하하, 제가 김사범 선수의 경기를 계속 중계하고 있는데, 다른 경기를 중계하다 보면 아주 식은땀이 다 납니다.]

[10년 이상 야구경기를 캐스터로서 중계해 오셨잖아요?]

[방금 전 타구 같은 안타성 타구에 자동적으로 유격수가 잡을 수 있다는 뉘앙스로 말해 버리거든요.]

[아하하하.]

[그러다 한참을 못 미치는 글러브에 급하게 말을 정정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아, 저도 인터넷에서 시리즈를 본 것 같습니다.]

[이게 다 김사범 선수 때문입니다.]

[큽, 큼. 팀이 지고 있는 가운데 김사범 선수의 호수비가 빛나고 있습니다.]

5회, 1아웃 주자 1루.

1루 주자가 도루를 시도했다.

“세이프!”

“크악!”

이삭이 재빨리 커버를 들어가 봤지만, 빈말로도 빠르다고 할 수 없는 버로우즈의 투구 폼 덕분에 주자는 2루에 공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얼굴을 잡고 구르고 있지만.

“헤이, 괜찮아? 여기 팀 닥터!”

이삭은 그런 녀석을 먼저 나서서 걱정하고 있었다.

‘네가 했잖아. 이 치사한 놈아.’

백업을 위해 들어가고 있던 나는 분명히 봤다.

2루 근처에서 원바운드된 공을 잡는 척하면서 슬그머니 내려간 무릎을.

그 동작 자체가 너무 교묘해서 알아차린 사람은 없는 것 같지만, 햇수로 거의 3년간 호흡을 맞춰온 나는 알 수 있다.

‘저 녀셕이 일부러 주자의 머리가 올 만한 곳에 무릎을 가져대 댄 거라는 데에 100달러.’

아주 치사하고, 비겁한 플레이였다.

그래서 너무 신난다.

그 이후, 코피가 나는 코를 응급처치하고 2루에 되돌아온 주자는 결국 홈을 밟지 못했다.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길.

“일부러 한 거지?”

“뭘?”

“아까 그거.”

“내가 하나 충고하는데, 말하지 않으면 범죄가 아냐.”

“크크큭.”

이제 경기는 6회 초, 5점 차이.

한 방, 아니 두 방이면 단숨에 역전할 수 있다.

급하게 올라온 버로우즈가 잘 막고 있을 때, 저기 마운드에 서 있는 로아시아가라는 투수를 공략해야 한다.

“로아이시가야.”

“뭐?”

“방금 중얼거렸잖아, 저 투수 이름. 로아이시가라고.”

“그게 그건데 뭐.”

뜬금없이 내개 태클을 건 페이스를 응징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저 투수를 잡는 게 더 먼저니까.

* * *

조나단 로아이시가.

98마일에 달하는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 주 무기는 플러스급 평가를 받는 체인지업과 커브.

지닌 구종과 구속, 그리고 컨트롤만 따지면 어느 구단에 가도 상위 로테이션에 합류할 수 있는 투수다. 하지만.

‘180cm의 투수치고 작은 키가 문제지.’

그 때문일까, 풀로 한 시즌을 치른 적이 없는, 전형적인 유리 몸 투수다.

물론 양키스 로테이션의 한 축을 맡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건강할 때의 폼은 훌륭하지만.

“저 투수, 맛이 가기 시작했어. 아까부터 던지는 팔이 조금씩 내려오고 있던데?”

“패스트볼하고 체인지업은 아직 잘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커브를 던질 땐 팔이 높아.”

“체력이 떨어질수록 급속도로 약해지는 스타일이네.”

6이닝을 소화하면서 투구 수는 80개, 우리 타자들이 조급해하는 틈을 타서 투구 수 관리를 꽤 잘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우리에게 하나씩 약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헤이스, 할 수 있지?”

“물론이죠, 미기.”

“그래. 일단 붐에게 연결해 봐, 붐이 못하면 내가 나서서 처리해 주지.”

이 양반이……. 괜히 말해 놓고 부끄러우니까 또 저런다.

6회 초의 시작을 알리는 타자는 9번, 키브라이언 헤이스.

내 덕분에 이삭과 함께 수비에서 꿀을 빨고 있는 양봉업자 1호.

[1-3의 카운트, 지난 타석과 다르게 침착하게 공을 골라내고 있는 키브라이언 헤이스 선수입니다.]

[엄청난 활약을 보여 주는 선수는 아니지만, 매 시즌 2할 8푼 이상의 타율과 10개 내외의 홈런, 그리고 견실한 수비를 보여 주고 있는 선수입니다.]

“볼! 베이스 온 볼스!”

그리고 그 양봉업자가 성공적으로 1루에 안착했다.

이윽고 타석에 들어서는 양봉업자 2호.

양봉업자 2호는 그래도 꽤 믿을 만하다. 메이저에서 반올림하면 3시즌을 뛰면서 통산 타율이 3할이 넘어가는 녀석이니까.

[이삭 페레데스 선수, 초구를 때려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쳐 냈습니다!]

[김사범 선수 앞에 주자가 2명이 쌓였네요. 어제 경기에서도 홈런을 기록한 김사범 선수입니다. 양키스가 이 경기를 가져가고 싶다면 지금 여기서 투수 교체를 해야 해요.]

아쉽게도, 지쳐서 허덕이는 투수를 상대로 꿀을 빠는 건 양봉업자 1, 2호가 마지막이었다.

시무룩한 얼굴로 공을 넘겨주고 마운드를 떠나는 로아시아…… 아니 로시아이…… 녀석.

[양키스가 잭 브리튼을 마운드에 올립니다.]

양키스는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라운드에 땅꾼을 풀었다.

펑!

“워후, 90마일이 넘는 싱커는 법적으로 금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타석에서 물러서서 연습투구를 하는 잭 브리튼의 공을 보며 괜히 한마디를 날려 줬다.

“야구장 안에선 사람을 패도 무죄야 애송아.”

역시, 첫 경기 때 낚은 걸 아직까지 가슴에 담아 뒀는지 날카롭게 반응하는 게리 산체스.

‘싱커볼 비율이 90퍼센트, 나머지 10퍼센트는 커브라. 쉽네.’

그냥 외야로 공을 띄울 거다.

좀 세게 어퍼로 치면 적어도 3루 주자는 들어오겠지.

내게는 별다르게 머리를 쓸 필요가 없는 이런 유형이 오히려 편하다.

‘바뀐 투수의 초구를 노리는 건 타자의 특권이지.’

땅볼? 병살? 병살 걱정을 하면서 타석에 들어서면, 타자는 타격 못한다.

빠아악!

[김사범 선수, 브리튼 선수의 싱커를 받아 쳤습니다! 타구가 아주 높게! 높게! 떠올랐습니다.]

[아, 이건 너무 타구가 높아요. 그래도 김사범 선수의 파워라면 외야까지는 공이 갈 것 같습니다.]

[아직도 상승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중계 카메라에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타구 발사각도가…… 65도네요.]

[웬만한 타자라면 절대 내야를 벗어나지 못할 타구네요. 이 타구가 외야 근처라도 가는 건 김사범 선수…… 어어?]

[우익수 애런 저지 선수가 다급하게 동료를 바라봅니다, 이거, 공을 놓친 거 같은데요?]

[애런 힉스 선수가 다급하게 저지 선수의 뒤편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공은…… 야속하게도 저지 선수의 글러브를 외면했습니다!]

주자들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나? 타자는 배트를 내려놓는 순간 주자가 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지.

“슬라이딩! 슬라이딩!!”

2루를 지나쳐서 3루 주루 코치를 바라보자 양 손을 아래로 깔며 연신 슬라이딩을 외치는 모습이 보인다.

“세이프!”

[기록이 어떻게 될까요? 아, 나왔습니다! 김사범 선수의 2타점 3루타!]

[아마 타구가 생각 이상으로 너무 높게 뜬 나머지 저지 선수가 시야에서 놓친 것 같아요. 양키스로서는 아쉬운 수비입니다.]

오늘 아침부터 더럽게 재수가 없다 했다.

지금 이렇게 행운을 주려고 온 세상이 날 거부했었구나.

[노아웃, 주자는 3루! 김사범 선수의 적시타로 이제 스코어는 5-2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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