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김사범, 2021시즌(기록은 영원하다)(2)
‘어차피 휴식인데, 편히 쉬자.’
시즌을 겪다 보면 이렇게 쉬어가는 날도 있어야 한다.
162경기를 모두 뛰고, 모든 경기에서 안타 혹은 출루, 홈런을 칠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풀시즌을 소화할 수 있는 체력을 보장할 수 없는 나로서는 쉴 때 푹 쉬는 게 팀을 위한 길이다.
“어, 사범 선수. 운동 안 하시나요?”
남는 시간에 가볍게 산책을 하고 돌아온 숙소, 로비에 있던 시미즈가 날 보며 물었다.
원래 항상 이 시간엔 트레이닝 룸에 있었으니까. 내가 거기 없다는게 신기했나 보다.
“오늘은 완전 휴식이에요. 재충전 시간이죠.”
가볍게 대답을 해 주고는 늦게 일어나는 선수들을 위해 호텔이 준비한 조식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이게 조식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생활 패턴을 가진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조식이라 써 있지만 메뉴는 굉장히 풍성하다. 스테이크부터 시작해서 각 나라별 음식까지. 저기 불고기도 있네.
먹을 양만큼 퍼와 자리에 앉자마자, 닉이 합류했다.
“붐, 무슨 일이야? 원래 아침은 더 일찍 먹지 않나? 그리고, 아침으로 세접시는 좀 과하지 않아?”
“아, 닉. 오늘은 좀 반항하고 싶은 날이라서요.”
“아, 그래서 일찍 일어나 조식을 늦게 먹는 거야? 아주 무서운 반항이네. 론이 보면 큰일 나니까 얼른 먹고 방에 들어가.”
“하하핫!”
하나둘씩 일어나 합류하는 동료들과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를 하다 보니, 정말 주기적으로 휴식을 요청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몸도 몸이지만, 신경도 이완이 필요하니까. 경기 생각은 경기가 시작하고 해야지.’
그렇게 점심을 먹고, 꽤 남는 시간 동안 웹서핑을 했다.
째깍. 째깍.
아, 야구 말고 시간을 보내려니 할 게 없다. 정말로.
‘그러고 보니, 햇수로 15년 가까이를 야구 말고 다른 취미를 가져본 적이 없네…….’
아, 슬픈 현실이여.
그렇게 한참을 미국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다가, 오랜만에 한국 포탈에 들어가 보니. 스포츠 섹션 메인 페이지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디트로이트 시내에 걸린 대한민국.]
뭐지?
[- 디트로이트 시의 옥외 간판에 김사범(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이 모델로 나서 화제다. 날로 변화하는 디트로이트를 응원하는 내용의 이 광고는 시 자체에서 공익광고 캠페인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으며, 디트로이트의 유명 스포츠 인사가 총 출동한…….]
아, 이건가? 트라웃과 짐이 말했던 그게?
맙소사…… 이건 너무…….
‘최곤데?’
미국에 넘어와서 하도 주목을 받다 보니, 스타의식 같은 게 생겼는지 생각보다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거부감보단 뿌듯함이 내 몸을 적시는게 느껴졌다.
‘내가 이 정도의 선수가 된건가? 시를 대표하는 스포츠인이 될 정도로?’
괜히 가슴이 벅차오른다.
지금까지 운동을 하면서, 이렇게 사랑받고, 주목받은 적이 없으니까.
빨리, 빨리 디트로이트로 돌아가 내 눈으로 그 광경을 직접 보고싶다.
* * *
늦은 밤, 에인절스와의 마지막 경기.
빨리 홈으로 가고 싶은 내 맘도 몰라 주고, 경기는 연장에 접어들었다.
“아후흐, 이젠 연장이라도 접어들면 몸이 버텨 주질 못하는군.”
미기의 앓는 소리가 오늘따라 가슴이 아픈데……?
론이 어제 저녁에 경기 후반에 내보낸다고 말했었지만, 타이밍이 아주 지랄 맞게 어긋나 버려 연장전에 돌입한 지금 이 순간까지 벤치만 데우는 처지다.
사실, 9회 초에 1사 만루 상황이라는 아주 완벽한 기회가 왔었지만……. 타석에 나서는 타자가 최근 페이스가 좋은 페이스라 한번 믿어 봤던 론은,
“아웃!”
“아웃!”
깔끔한 병살타로 물러선 페이스의 무표정한 얼굴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한숨만 쉴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플라이나, 삼진이기만 했어도 내가 나설 수 있었는데…….’
꽤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인터넷 전사들은 페이스를 욕하고 있을거다. 분명히.
‘론과 페이스는 오늘 9회 초에만 수명이 20년씩은 늘었겠네.’
그렇게 양 팀 불펜진의 호투로 10회, 11회, 12회가 지나자, 나도 슬슬 론의 근처에서 스윙 연습을 하며 대놓고 어필을 했다.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면서.
“이삭! 내 다리 봐봐, 장난 아니지? 어제 다쳤는데 벌써 다 나았다니까?”
“조용히 해. 너한테 대꾸할 힘도 없다.”
“그럼, 케이시?”
“어, 다 나았네. 우와.”
도움이 안 되는 놈들 같으니.
내가 이렇게 해도 눈을 딱 감고 날 쳐다보지도 않는 론을 보니, 어차피 늦은 거 정말로 하루를 통으로 쉬게 하려는 생각인 것 같다.
‘이렇게 되면 내일 아침에 피곤할 텐데……. 내 계획이…….’
개인적인 욕망과 나를 위한 론의 인내심 사이에서 수없이 갈팡질팡하던 내게 론이 말을 건건 12회 말의 위기를 넘기고 나서였다.
“붐, 사실 난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를 쉬게 하려고 했네. 결국 내 판단이 틀렸던 거 같지만……. 아무튼 이렇게 된 거 마침표를 찍어 주게.”
“당연하죠. 지금 전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고 싶어요.”
[아, 김사범 선수가 대타로 나섭니다.]
[오늘 경기 전 인터뷰에서 론 가든하이어 감독이 김사범 선수에게 휴식을 준다고 했었는데요, 불펜진의 소모가 더 이상 커지면 힘들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린 것 같습니다.]
[에인절스도 투수를 바꿨습니다. 마운드엔 그리핀 케닝이 올라옵니다.]
‘그리핀 캐닝이라…….’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는 것 보니 마이너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되는 투수 같다.
요즘 에인절스는 팀 내 유망주나 트리플A에 있는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다 쓰고 있으니까.
‘그 탬파베이와 양키스를 깨부수고 와서 리로딩 중인 팀에게 고전하다니. 이게 야구지.’
그리고 내 야구는…….
[홈런! 홈런입니다! 김사범 선수의 솔로 홈런! 긴 연장의 마침표를 찍을 때가 다가왔습니다! 시즌 33호!]
[경기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지만, 그래도 양팀 모두 힘든 시간이었어요. 아직 13회 말이 남았습니다만…… 에인절스의 타선을 보면 이 홈런이 결승 홈런이 될 가능성이 높겠네요.]
바로 이거다.
“스트라이크! 아웃!”
[디트로이트 타이거즈가 LA 에인절스를 상대로 신승을 거둡니다. 위닝시리즈를 가지고 홈으로 돌아가는 디트로이트! 기세가 아주 무섭습니다!]
* * *
생각보다 늘어진 경기에 선수들은 대충 물로만 몸을 씻어 낸 후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이럴 땐 양복 말고 편한 옷을 입으면 안 되나?’
나야 뭐, 마지막에 나가서 스윙 몇 번 하고 조깅 좀 한 게 전부지만, 오늘 경기를 풀로 뛴 이삭의 경우는 거의 기절하기 직전인데.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전용기 앞에 정차했고, 쥐 죽은 듯 고요한 전용기를 타고 디트로이트를 향해 떠났다.
그리고 다음 날.
난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새로 뽑은 차와 함께 둘러보는 디트로이트의 시내.
어딜 가도 내 얼굴이 보인다. 마음 같아선 차를 세운 다음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멈춰서 사진을 찍는 동안 내 붕붕이가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흐흐흐흐, 그래도. 참 좋다.
* * *
전날, 김사범이 자기도 모르게 곯아떨어진 전용기 안.
김사범을 제외한 거의 모든 팀원이 미기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붐은 아직 모르는 거 같지?”
“그런 거 같아요.”
“하루 걸러 하루 홈런을 치니 자기 기록을 모르지.”
“요즘은 매일 쳐.”
미기의 질문에 여기저기서 나오는 말들.
“조용, 이러다 깨겠어. 지금 홈런 개수가…… 33개? 맞나?”
“오늘까지 33개 맞을걸요?”
미기의 물음에 케이시가 대답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다들 알지? 어제 홈런까지 5경기 연속 홈런인거.”
“알죠. 메이저리그 기록이…….”
“8경기. 켄 그리피 주니어.”
“넌 일본에서 시작했으면서 그런 거도 알아?”
“넌 뇌가 있는데 왜 기억을 못하지?”
폴리의 순수한 농담에 순수한 질문으로 대답하는 페이스.
“조용, 조용. 싸우려면 저기 윙에 올라가서 싸우던지. 인디애나 존스…… 아, 모르겠군. 아무튼, 이제 슬슬 기자들이 몰려올 거야.”
“그렇겠죠.”
“붐이 이런 데에 신경을 쓸 녀석은 아니지만, 우리가 좀 도와주자고. 각자 아는 기자들에게 연락해서 입조심하라고 해.”
“어차피 라커룸이야 인가된 사람만 들어오니까 커버가 되는데, 다른 기자들은요?”
“내가 론을 통해 구단에 요청해 보지. 명분은…… 음…… 서프라이즈?”
“서프라이즈?”
미기가 생각 없이 뱉은 말에 다들 눈이 커졌다.
“잠깐, 붐이 따로 인터뷰를 잘 하는 편도 아니고, 팬들하고 기자들, 우리만 입 다물고 있으면…….”
“아침마다 노트북하고 있는 장면은 봤는데…….”
“내가 붐의 집에 가서 인터넷선을 끊어 놓을게.”
“그래, 폴리. 그건 너밖에 못하겠다.”
폴리의 과감한 해결방법 제시 이후에도 많은 동료들이 자발적으로 나섰다.
“구단 측엔 내가 말할게. 전광판에 이상한 헛짓거리 하지 말라고.”
크리스 아처.
“관중에게는…… 티켓에 장난질 어때? 구단 SNS하고.”
닉 카스테야노스.
“저도 올릴게요. 여기서 제가 제일 팔로워가 많지 않아요?”
또다시 폴리.
“그래 봤자 걸릴 것…….”
“닥쳐.”
그리고 케이시.
“아주 큰 규모의 서프라이즈네요…….”
시미즈의 멘트를 마지막으로, 서프라이즈라 쓰고 김사범 놀려 먹기라고 읽는 디트로이트 선수단의 작전이 시작됐다.
* * *
토론토와의 홈경기 전, 배팅 연습.
어느 날과 같이 페이스와 함께 가벼운 토스 배팅을 하고 있다.
“오, 오늘도 홈런을 치겠는데? 타구가 아주 좋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봐도 오늘 나는 컨디션이 괜찮았으니까.
‘근데 얘는 말투가 왜 이래?’
연기 못하는 연극배우를 보는듯한 페이스.
“쳐야지. 홈런.”
“그래. 또 쳐야지.”
“맞아, 칠 거라니까.”
“그래, 그래. 그래야만 해.”
대화가 왜 이래? 진짜 뭐가…….
“페이스! 오늘은 내가 붐하고 같은 케이지를 쓸게. 오늘 붐의 기를 좀 받아야겠어.”
“아까 치지 않았어요?”
“그렇긴 한데, 나도 오리엔탈의 신비를 느끼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도…….”
“다 말해 놨어. 걱정 마.”
뭐야, 도대체.
토론토와의 경기가 시작되고, 난 5회 말에 투런을 날렸다.
[김사범 선수의 시즌 34호 홈런입니다! 그리고 이 홈런으로 연속경기 홈런 기록을 6경기로 늘렸습니다!]
[메이저리그 기록까지 2개, 세계 기록까지 3개가 남았네요. 요즘 페이스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Let's get it boooooom!!!!
‘어? 또 달라졌다.’
이번엔 좀 임팩트를 강조한 스타일인가 보다.
한국처럼 응원단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맞추는 거지?
아무튼, 홈런을 날린 뒤 기분 좋게 덕아웃에 들어가자 동료들이 나보다 더 신나하며 세레머니를 나누고 있었다.
‘음. 요즘 반응들이 좀 색다른데? 묘하게 분위기가 난장판이야.’
저 모습을 보니…….
나도 더 색다른 퍼포먼스를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종 스코어 3:1로 홈팀인 디트로이트가 승리했습니다.]
[토론토는 게레로 주니어 선수의 9회 초 홈런이 아니었다면 영봉패를 했겠네요. 그래도 그 홈런 하나로 팀 분위기가 최악이 되는 걸 막았으니 다행입니다.]
그렇게 경기가 끝난 뒤, 오늘 홈런을 친 게레로 주니어와 저녁 약속을 잡으려고 전화하려는 순간, 갑자기 내 주변이 어두워졌다.
“뭐야?”
정면에서 작은 키를 뽐내며 말하는 이삭.
“요즘 너무 혼자 따로 노는 거 아냐? 오늘 같이 가자. 간만에 스테이크나 썰자고.”
“뭔 소리야? 우리 LA에서도…….”
“조용히 하고 따라와. 특별히 우리 엄마표 특제 스튜를 맛보여 줄 테니까.”
“아니 방금 전엔 스테이크라고…….”
그렇게, 나는 납치당했다. 이삭의 집으로.
“일본은 그런단 말야?”
“어, 그래서 답답했지.”
“그럴 만하네. 내가 고등학교 때는…….”
“진짜요……?”
어느새 6명이 된 저녁식사 멤버.
평소처럼 야구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 특히 수리 이야기가 많이 나온 저녁이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저녁이었다. 스튜도 최고였고.
“사범, 오늘 정말 잘했어. 난 놀랐어.”
오늘 아침부터 이상한 페이스만 빼고.
‘무리하더니 어디 아픈 거 아냐?’
내일 론에게 말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