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90화 (90/175)

90화 김사범, 2021시즌(더, 조금 더)(2)

“사범 씨,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뇨. 그냥 조금…….”

올스타전 다음 날, 난 디트로이트의 한적한 교외에서 수리와 데이트를 하고 있다.

“미구엘 씨 때문이죠?”

“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갑자기 그런 곳에서 은퇴선언이라니.

돌아오기 전에도 대단한 은퇴식을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의 미기는 대단한 은퇴를 해도 된다. 승승장구를 하고 있는 팀에 있어서 그는 그 정도 위치니까.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이러다간 아무것도 못하겠어요.”

싸늘해진 수리의 표정.

‘큰일 났다.’

“수리. 미안해요. 이제 집중할 자신 있어요.”

“이제까지는…….”

“이제까지는 집중 못 한 게 사실이지만. 이제부터 난 수리에게만 집중할 거예요. 반드시!”

여자는 다 똑같다.

말꼬리를 잡고 화를 쌓고, 쌓다가 팡 터트리지. 그러니까 먼저 칼같이 사과하는 게 정답이다.

어떻게 아냐고?

‘야구 하는 남자끼리 모인 집단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야구, 술, 여자 말고 다른 게 있겠어?’

가끔 골프 이야기도 나왔지만, 뭐.

“그래요?”

수리의 표정이 다시 돌아왔다.

다행히 다년간의 시청각, 아니 청각 교육으로 연마된 내 우뇌가 맞는 답을 내놓은 것 같다. 장하다, 내 우뇌야.

“아쉽네요. 전 이제 돌아갈 건데. 다음 기회엔 꼭! 집중하세요.”

어…….

저렇게 냉담하게 돌아설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우뇌야, 정답을 알고 있다면 내게 말해 줘.

잠시 후.

겨우 화가 풀린 수리가 내 앞에서 생글대며 웃고 있다.

“야구 생각하는 것도 좋고, 다른 생각, 아니 다른 생각을 거의 안 한다는 거 아니까…… 그러니까 혼자 생각만 하지 말고 나와 같이 나눠요.”

“네…….”

그동안의 간접경험이 쓸모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까 소원 들어주기로 했죠?”

“음…….”

질러 놓고 보니까 좀 무서운데.

“원래 큰 소원 하나를 빌까 했는데…… 특별히 작은 거 두 개로 나눠서 빌어 줄게요.”

다행이다. 큰 게 아니라 작은 거 두 개라니.

……어?

“좋죠? 일단 첫 번째 소원은, 말 놓자 우리. 존댓말로 이야기하기엔 우리가 너무 젊잖아.”

“네…… 아니, 그래.”

내 속은 30대 중반 아저씬데?

“그리고 두 번째는…….”

“두 번째는?”

나도 모르게 수리의 말을 따라하고 있다.

“나, 사범의 친구들 보고 싶어.”

“친구? 내 친구들은 지금 한국에…….”

“아니, 팀 동료들. 내일 홈경기라 다들 디트로이트에 있지?”

“어…… 그건 좀……. 약속이 있을 수도 있고…….”

사실 오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폴리에게 전화가 왔다. 이삭네 집에서 하루 종일 뒹굴거릴 건데 오겠냐고.

“괜찮아. 일단 전화해 보자.”

아, 이게 누나의 추진력인가.

“일단 알겠어……요 누나.”

“누나는 빼고.”

넵. 제가 주책 맞았습니다.

* * *

지옥, 아니, 이삭의 집.

“딱 인터넷선을 끊고 나오는데 불이 켜져서 깜짝 놀랐죠. 원래 안 하던 욕을 속으로 중얼거리기까지 했다니까요.”

내가 누군가 인터넷선을 끊은 걸 어떻게 알았을까?

왜긴, 자기가 끊어 놓고 놀라서 소리 낸 어떤 멍청이 때문이지.

“아하하하, 그 정도까지 했어요? 노력이 정말 엄청났네요?”

“그러고 보니 수리는 어떻게 붐과 만난 거예요? 저 자식은 수리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다물고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폴리의 질문에 수리의 입이 우리의 만남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하, 그러니까 팬과의 시간?”

케이시가 내 쪽을 보며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뭐. 왜.

“보기에 좋군요. 둘이 잘 어울리기도 하고.”

“어머, 케이시가 보기에도 그래요?”

“붐에게 좀 과분한 상대긴 하지만, 야구를 잘하니까 봐줘야죠.”

내게 보여 준 시니컬한 모습은 어디 갔는지, 제법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주는 케이시.

그 모습에 다시 수리가 이것저것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시즌에 유독 WHIP이 낮은 것 같은데…… 특별히 다른 이유라도 있어요?”

“네? 아니, 음. 그게 시즌 초부터…….”

그렇지. 케이시 같은 야덕에겐 저런 주제가 잘 먹히지.

내가 언제 끼어들어야 할지 잘 몰라 어버버하고 있는 사이, 수리는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이 자리의 대화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꽤 많이 이뻐 보였다.

그렇게 제법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우리는 늦은 밤이 되기 전에 자리를 파했다.

“아쉽네요. 내일 경기 때문에…….”

“괜찮아요.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있겠죠.”

그렇게 동료들의 배웅이 끝나고, 수리에게 말했다.

“잠깐 기다릴래요? 아니, 기다릴래? 차 가져올게.”

폴리와 케이시가 주차 공간을 다 차지하고 있어서 제법 먼 거리에 차를 주차해 놨다.

이 동네가 주차에 좀 예민한 동네라.

“아냐, 같이 가자.”

달이 밝은 날, 우리는 같이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분위기에 취해 아무 말도 없이 걷다 보니, 그것이 갑자기 내게 닥쳐왔다.

갑자기 따듯해지는 내 오른팔.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들리는 수리의 목소리.

“오늘 재미있었지?”

“어? 응…….”

반사적으로 마주친 수리의 눈 안에서 환하게 뜬 달이 보였다.

“걱정하던 건, 괜찮아졌어?”

아.

미기의 갑작스런 발표가 끝나고, 왠지 모르게 뒤숭숭하고, 복잡했던 마음이 평온해진 걸 느꼈다.

‘언제부터였지?’

수리가 화낸 순간부터?

아니면…… 말을 놓은 순간?

아까 이삭의 특제 스튜를 먹었을 때부터인가?

“그럼 이걸 위해서?”

내 말에 수리가 큰 눈을 샐쭉하게 뜨며 대꾸했다.

“당연한 거 아냐? 나는…… 둘만 있고 싶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 안의 어떤 게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 * *

다음 날, 보스턴과의 홈경기.

“붐,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봐?”

“아, 닉. 아뇨, 그냥 뭐, 야구를 하고 싶었으니까요. 이벤트 말고, 승부가 달려 있는 야구.”

야구 안에서의 승부도 이기고, 밖에서도 이기고.

어제의 나는 정말 승리의 화신이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울상이더니, 조금 서운해지려고 하는데?”

미기가 유니폼을 챙겨 입으며 내게 말했다.

“서운하긴요. 오늘 시간 있죠? 저하고 저녁 어때요?”

“워, 내가 그녀를 제치고 붐의 저녁 데이트 상대가 되다니. 역시 은퇴하길 잘했어. 늙은이가 되니까 이렇게 다들 챙겨 주잖아?”

“늙은이라고 하기엔 배트가 너무 매섭지 않아요? 아무튼, 콜?”

“콜, 좋지. 난 맥주, 붐은 주스.”

“그것도 좋죠.”

결국 내가 혼자 끙끙대며 아쉬움에 몸부림쳐 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오늘 저녁에는 미기와 깊은 이야기를 나눠 볼 거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가 시작되겠습니다.]

[리그에서 승률 1위를 달리고 있는 디트로이트와 지구 3위인 레드삭스와의 경기인데요, 레드삭스로서는 이제부터 한 경기도 쉽게 버리면 안됩니다.]

[탬파베이가 50승 42패로 동부지구 1위를 차지하고 있고, 양키스가 48승, 레드삭스가 45승입니다. 70경기가 남아 있기 때문에 포기하긴 이르죠.]

[보스턴은 오늘 선발투수로 프라이스를 예고했습니다. 올스타전에서 1이닝을 던진 셰일에게 하루 더 휴식을 주려는 생각 같군요.]

[이렇게 되면 로테이션 상 데이비드 프라이스 - 크리스 세일 - 브라이언 마타가 나오는데, 거의 총력전을 벌일 것 같죠?]

[팀의 1,2,3선발이 모두 출동하는 시리즈니까요. 디트로이트도 이에 맞서 크리스 아처 선수를 내보냅니다.]

“플레이 볼!”

마운드의 아처가 페이스와 사인을 나누고 있다. 페이스 같은 경우 수비 위치에 대한 사인을 곳곳에 숨겨 놓는 걸 선호하다 보니 야수들도 투수만큼 사인에 집중해야 한다.

‘무키 베츠라…….’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매년 2018년부터 매년 30홈런 이상을 기록하고 있는 타자.

‘그리고, 당겨치기 성애자.’

야구란 스포츠가 알고도 못 막는 부분이 꽤 많다보니, 이런 자신의 성향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무키 베츠는 그런 자신의 성향을 당당히 밝히고도 리그에서 탑급 성적을 내고 있는 선수 중 하나고.

페이스의 사인에 따라 수비 위치를 조금 더 3루방향으로 옮겼다. 우리 팀의 특징 중 하나인데, 내야 시프트가 거의 없거나 있더라도 작은 변화에 그친다는 거다.

그 이유?

내 수비 범위가 말도 안 될 정도로 넓으니까.

3루에서 2루 사이, 내야의 절반은 내 영역이다.

딱!

[무키 베츠, 초구부터 공을 강하게 때렸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중견수로 나선 대즈 카메론 선수에게 잡히고 마는군요.]

[경기 시작부터 초구에 스윙을 하는 건 조금 이른 감이 없지 않나 싶지만……. 이게 오늘 보스턴 타자들의 자세를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공이 오면 적극적으로 타격에 임하겠다는 거죠.]

적극적인 공격도 좋고, 자신감도 좋지만.

오늘 경기 선발인 크리스 아처는 그런 상대를 수도 없이 상대해 본 베테랑이다.

“아웃!!”

3번으로 나선 JD 마르티네즈를 외야 플라이로 돌려세운 아처가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힘과 힘의 대결에서 배트를 밀어 버린 게 아닌, 철저하게 타이밍을 뺏는 볼 배합으로 일궈 낸 3개의 뜬공.

그리고 덕아웃에 모두가 들어오자 미기의 입이 열렸다.

“투심은 버려, 첫 타석에서 단번에 칠 만큼 허술한 공이 아냐, 대신 커브나 슬라이더를 노리는 게 좋을 거야.”

“또?”

“저 녀석도 나이가 들었는지 슬슬 구속이 줄어들었으니까 좀 더 지켜보자고. 아, 몇 년 전부터 힘이 빠지면 투심이 존 상단으로 몰리니까 염두에 두고.”

올스타전, 그 발표 이후에 미기의 태도가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자신의 경험을 알려 주긴 했지만, 이렇게 덕아웃의 모두를 상대로 이야기한 적은 없다.

미기의 말을 염두에 두며 배트를 들고 대기타석으로 향했다.

‘타이밍은…… 영상과 별다른 점 없고, 오늘은 조금 팔이 낮은 거 같은데? 맞나?’

타자의 승부는 타석에서만 결정되는 게 아니다. 경기 내내 치열하게 그라운드를 관찰하며 얻어진 정보를 가지고 싸우는 거지.

‘오랜만에 2루수로 출장해서 그런지 그라운드 상태가 신경 쓰이나 보지? 이삭의 정성이 가득 들어간 그라운드인데 말야.’

2루수로 나선 무키 베츠가 쉴 새 없이 근처의 홈을 메꾸고 있다.

이런 사소한 치사함도 홈팀이 가질 수 있는 이점 중 하나다.

“스트라이크!”

[프라이스 선수의 투심이 이삭 선수의 바깥쪽 존을 파고들었습니다. 몸쪽 공인 줄 알고 휘둘렀던 배트가 허공을 가르는군요.]

[오늘따라 투심의 횡 무브먼트가 더 강렬하네요. 최근에 구속이 떨어지면서 싱커에 가까운 무브먼트가 보이던 프라이스의 투심인데요.]

역시. 대기타석이여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팔 각도가 낮아지면서 좀 더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투심을 던지고 있다.

따악!

“세잎!”

커터를 밀어 쳐 우익수 앞 안타를 치고 나간 이삭.

컨디션이 좋다는 게 여기까지 느껴졌다.

“헤이, 붐. 살살 하는 건 어때? 시즌 홈런 기록도 110개를 맞출 건 아니지?”

“그건 아니지.”

“그래. 내가 바깥쪽으로 하나 줄 테니까 안타 하나로 합의를 보자고. 오케이?”

포수 마스크 너머로 내게 농담을 건네는 로날도 에르난데스, 믿고 쓰는 탬파베이산 유망주다. 아니, 유망주였다.

2021시즌, 수비 실력은 출중했지만 2할대의 타격으로 보스턴 타선의 걸림돌이었던 크리스티안 바스케스를 방출하고 팜에 남아 있는 유망주를 바닥까지 긁어 데려왔는데, 생각보다 쏠쏠한 타격과 꽤 괜찮은 수비로 나름 괜찮은 활약을 하고 있다.

‘그래 봤자 이제 메이저 2년 차 애송이지만.’

나? 나는 애송이라기엔 너무 체급이 크고.

[김사범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프라이스 선수는 조금 신중하게 투구를 해야 합니다. 올 시즌 김사범 선수는 패스트볼 계열의 공에 굉장히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거든요? 거의 6할에 가까운 타율과 30개가 넘는 홈런을 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패스트볼 킬러네요.]

“볼!”

내 생각보다 투심의 궤적이 더 휘어나간다.

지켜보기로 했지만, 손에서 떠나는 순간 바깥쪽 꽉찬 스트라이크라고 생각했는데.

“헤이, 바깥쪽 볼을 줬는데 왜 안 치는 거야?”

“너무 바깥이야. 좀 더 안으로 넣어 줘야 치지.”

내 집중을 방해하려 쉴 새 없이 입을 나불대는 로날도.

“스트라이크!”

“이것도 안 칠 거야? 그럼 다른 걸 줄까?”

“볼!”

“오, 프라이스가 말하길 손에서 빠졌대. 다음 공은 확실히 존 안으로 들어올 거야.”

“볼!”

“혹시 기대한 건 아니지? 사실, 거르라는 지시를 받았거든. 프라이스는 싸우고 싶어서…….”

아. 진짜 짜증 나게 앵앵대네.

[프라이스 선수, 5구를 던집니다!]

슬라이더? 커터? 큰 차이는 없다.

둘 중 어느 공이든 존 안으로 들어오기만 한다면.

따아아악!

우와아아아아!

횡 무브먼트가 좋아지면 장점도, 단점도 있지만…….

[김사범 선수가 벼락같은 타구를 관중석 상단에 선사했습니다! 투런 홈런!]

지금 프라이스에겐 단점이 더 큰 거 같다.

배트를 내려놓고 1루를 향해 출발하며 로날도 에르난데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잘 봐 둬, 내가 품격 있는 플레이가 뭔지 보여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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