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김사범, 2021시즌(더, 조금 더)(3)
야구선수로서 품격 있는 플레이가 뭘까?
최선을 다한, 몸을 날리는 수비?
아니면 수십 개의 공을 커트한 뒤 결국 쳐내는 안타?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플레이를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해내는 것?
사람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내게 품격이란 승리다.
내가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승리.
‘우리가 여기서 양복 입고 왈츠를 추는 모습을 보려고 저 많은 팬들이 경기장을 찾은 건 아닐 테니까.’
그런 입장에서, 3회 초가 끝나고 은근하게 잔디와 흙의 경계선에 장난질을 치고 있는 이삭은 아주 품격 있는 플레이어다.
“가자. 흙장난 하지 말고.”
“어, 보였어?”
“뭐하는 거야?”
“뭐긴, 나중에 보고 놀라지나 마.”
“무슨 곰덪이라도 놓은 거야?”
“곰덪? 그것도 좋은데. 이삭의 함정이라고 불러.”
아아. 경기 중 상대 2루수를 위해서 이런 짓, 아니 이런…… 품격 있는 행위까지 하다니.
역시, 이삭은 대단하다 아직도 배울 점이 많아.
“이삭.”
“왜?”
“넌 내가 아는 멕시칸 중에서 제일 왈츠를 잘 출 거 같은 사람이야.”
“뭔 개소리야?”
“그러게.”
5회, 그라운드를 전체적으로 정비하는 시간이 오기 전에 저 함정이 빛을 발하길 바라본다.
* * *
프라이스는 역시 프라이스였다.
내게 뜻하지 않은 홈런을 맞고 머리에 열이 올랐는지 미기, 닉, 스튜어트를 연속 범타로 처리하며 다시 분위기를 가져가는 데 성공했으니까.
뭐, 이제 곧 내가 다시 한번 초를 칠거지만.
“팔스윙이 전반기보다 확실히 낮아요.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일단 다들 염두에 두고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2회 초가 끝나고 잠시 짬을 내서 예전 영상을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느낀 것처럼 팔이 내려와 있었다.
“다들 들었지? 최대한 오래 보면서 뭐가 달라졌는지 살펴보자고.”
오늘따라 계속 선수가 아닌 코치 같은 멘트를 날리는 미기.
아처의 호투 덕분에 빠르게 2회 초를 마친 우리는 다시 공격의 고삐를 쥐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좌익수 플라이.
체인지업에 삼진.
존에서 크게 휘어져 나가는 슬라이더에 배트를 멈췄지만, 스윙 인정으로 인한 삼진.
아까도 말했지만, 프라이스는 프라이스였다.
그렇게 내 홈런을 제외하고 서로가 서로의 선발투수를 공략하지 못하던 2회가 끝나고, 3회.
게임이 이상한 방향, 아니 내가 예상했던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피해!”
터엉!
덕아웃으로 향한 야구공이 뒤편에 있는 이온음료 통을 맞췄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튼튼한 놈으로 비치해 놨는지 통에는 전혀 이상이 없다. 떨어지며 밸브가 눌렸는지 안에 있는 음료수는 다 쏟아졌지만.
“다들 괜찮지?”
공에 직접 맞은 것도 아니고, 갑자기 코치가 유난을 떤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운동선수들은 생각보다 굉장히 연약한 생명체다.
‘로션 통 발로 받다 뼈가 부러지고, 개한테 프리즈비 던져주다 인대 끊어지고, 소파에 앉아 있다 햄스트링 도지고.’
이 연약한 새끼고양이 같은 선수들을 160경기 동안 끌고 가려면, 이런 돌발상황에서 혹시라도 모를 부상을 입지 않았는지 살펴보는 게 당연한 거다.
“어…… 코치님?”
“스튜어트? 뭔가 몸에 이상이 있나?”
스튜어트? 설마?
모두의 주목을 받던 스튜어트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코치에게 대답했다.
“게토레이가 없으면 제가 안타를 못 치는데요…….”
가엾은 새끼고양이, 먹을 맘마가 없어 풀이 죽었구나?
“휴, 다행이네. 어쩐지 스튜어트가 요즘 저 통 앞에서 살던 게 그런 이유였군. 아, 붐, 혹시 아까 무슨 상황인지 봤어?”
“어, 봤지.”
“뭔데? 왜 갑자기 공이 펌블된 거야?”
외야수인 대즈는 잘 모를 거다.
3회 초가 끝나고, 땅을 고르는 척 발로 몇 번 바닥을 문대는 척하면서 짧은 순간 힘을 줘 홈을 파던 이삭의 순발력을.
그리고 마지막 바운드에서 그 ‘이삭의 함정’에 맞은 공은 베츠의 왼쪽 방향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고, 다급해진 베츠는 맨손으로 그 공을 잡아 1루에 송구했다. 분명 글러브가 더 가까이 있었음에도.
“그냥 뭐, 그라운드에 뭔가 있었나 보지. 자주 있는 일이잖아?”
[무키 베츠 선수의 실책으로 상황이 재미있어졌네요. 평범한 2루수 땅볼이 덕아웃으로 들어가면서 인정 2루타가 됐습니다.]
[9번으로 나선 키브라이언 헤이스 선수가 상대 실책 덕에 2루에 도달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다음 타선이 오늘 1회에 좋은 활약을 보인 이삭 선수와 김사범 선수죠?]
[디트로이트로서는 기세를 몰아 점수를 따내고 싶어 할 거고, 보스턴으로서는 꼭 막아 내야겠네요.]
“볼!”
[아, 3구 연속 볼입니다. 프라이스 선수가 이렇게 흔들릴 선수가 아닌데요.]
무조건 휘둘러야 한다. 나라면 분명 그랬을 거다. 에이스란 이름이 붙었던 투수들은 공통적으로 볼넷을 증오하니까.
프라이스는 이번에 무조건 존 안으로 공을 넣을 거다.
“스트라이크!”
거……어?
뭔가 본 거 같은데?
내가 본걸 이삭도 봤는지 확인하기 위해 타석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삭이 나를 보고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봤네, 봤어.’
따악!
그리고 5구, 이삭은 좌익수 앞 짧은 안타를 치며 1루에 나섰다.
“타임, 잠시만요.”
내가 타석에 들어서자, 말 많은 포수가 마운드로 올라갔다.
‘쟤는 프라이스한테도 말이 많을까? 아니 그것보다 2년 차 포수가 마운드에 올라가서 할 수 있는 게 있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로날도가 다시 포수 마스크를 쓰고 앉자, 프라이스는 깊은 심호흡을 하며 숨을 돌렸다.
준비가 끝난 투수와 사인을 나누며 내게 말을 거는 로날도.
“디트로이트는 항상 이렇게 이기나?”
“틀렸어. 디트로이트는 항상 이기지. 루키.”
“나도 작년에…….”
“나는 작년에 데뷔해서 레코드를 벌써 수십 개를 갈아치웠는데, 너는?”
으드득.
꼭 이런 캐릭터들이 자기 할 말 없으면 이 갈면서 두고 보자 그러더라.
그사이 사인 교환이 끝났는지, 프라이스가 초구를 던졌다.
내 눈앞으로.
“……볼, 조심해. 얼굴로 공이 향하면 바로 퇴장이야.”
구심의 경고가 바로 나올 정도의, 명백한 위협구였다.
“와우, 프라이스가 열 좀 받았나 보네?”
“왜, 겁나?”
말을 뱉으며 방금 전보다 더 홈플레이트에 붙어 섰다.
“아니, 근데 너. 그 말 오 분 뒤면 후회할걸?”
“그럴 리가.”
“아까도 그러다가 한 대 맞았던 거 같은데, 기억력이 안 좋나 봐?”
“이 새끼가…….”
또 열 받았다.
상대하기 참 쉽네.
그런데 어떡하냐. 너희 투수 포심 던질 때마다 자기가 그거 던질거라고 광고하면서 던지는데.
“파울!”
[아, 김사범 선수, 7구째 슬라이더도 커트해 냅니다.]
[4구 연속으로 파울이죠? 타이밍이 안 맞는 것 같진 않는데요. 한 구질을 노리면서 다른 공들을 커트해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드러낸 투수를 상대할 땐, 두 개만 기억하면 된다.
첫째. 고르고.
둘째. 커트하고.
그러다가 지금처럼 팔이 높게 올라오면…….
빠아악!
보이는대로. 있는 힘껏 공을 때리는거다.
- Let's Get it BoomBoomBoom!!
천천히 조깅하듯 베이스를 밟아가면서 로날도에게 어떤 멘트를 날릴지 고민하다 클래식한 게 역시 제일 멋있을 것 같아서 그걸로 결정했다.
홈플레이트를 밟자마자 녀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Welcome to MLB.”
이를 갈다 못해 턱근육이 흉하게 튀어나온 녀석을 뒤로한 채 덕아웃으로 향하는 길.
좌측에 헤이스, 우측에 이삭을 거느리고 거만한 표정으로 들어가니 폴리와 시미즈가 어설픈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뭐야?
“경례!”
척!
음…… 내 점수는…… 병장?
마주 경례를 하고 동료들의 축하를 받은 뒤, 폴리에게 물었다.
“폴리, 옆에 시미즈는 뭔 죄야?”
“영화를 같이 본 죄지.”
“뭐?”
“밴드 오브 브라더스.”
아. 어쩐지. 단순하긴.
연타석 홈런도 쳤고, 기분도 좀 나아졌다.
미기와는 저녁 약속을 잡았고, 거슬리던 애송이 포수 녀석도 밟아 놨다.
상쾌한 기분, 이 기분이라면 3연타석 홈런도 가능할 것 같다. 저 단순한 녀석이 계속 홈플레이트에 앉아 있으면 4홈런도 가능할 거 같기도 하고?
“페이스, 지금 저 표정의 붐을 잘 봐 둬.”
케이시의 목소린데?
“저 표정이 예전에 내가 말했던 붐이 이상한 생각할 때 짓는 표정이야. 저 표정을 지었을 땐 주변에 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 좋지.”
“음.”
다 들린다, 케이시.
* * *
[프라이스, 올스타 브레이크 후 첫 경기에서 시즌 최다실점. 5와 1/3이닝 8실점.]
[디트로이트의 붐, 5타석 4타수 4안타 3홈런으로 쾌조의 타격감 보여.]
[홈런 더비 후 슬럼프는 어디로? 김사범의 활약으로 재조명된 홈런 더비.]
“봐봐, 오늘 난 스포츠 기사 중 절반은 네 기사야.”
“한두 번인가요? 이젠 익숙해요.”
“하하, 거만하긴.”
“자신감이죠.”
미기와 함께 찾은 단골 식당, 가벼운 잡담을 하며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들어 점점 더 주목받고 있네. 부담감은 없지?”
“아직까지는요. 그냥 내가 할 거 하는 건데요.”
“그래. 프로 선수는 할 걸 하면 알아서 주목받게 돼있지. 그걸 명심해.”
미기가 오늘 처음 선보인 ‘모두의 멘토’ 모드.
인상 안 좋은 사람이 저렇게 선하게 말하면 안 어울리는데, 본인은 알고 있나 몰라.
곧 주문했던 음식이 나오고, 우리는 잠시 모든 걸 잊고 먹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경기가 끝난 뒤, 한참을 고민하다 생각해낸 첫 마디를 꺼냈다.
“미기, 많이 지쳤어요?”
맥주를 먹다 내 말을 듣고 잠시 멈춰 버린 미기.
“……그래. 많이 지쳤지. 아니 정확히는 다 타 버렸어. 몸도, 마음도.”
“야구에?”
“왜 아니겠어? 18년이야. 내가 메이저에서 뛴 기간이. 물론 지금도 홈런을 때리고, 안타를 때리면 항상 즐겁지. 그런데 이 빌어먹을 스포츠는 아무리 잘해도 세 번 중 두 번은 실패하는 스포츠잖아?”
그렇지. 그런 스포츠지.
“하지만 이제 내 몸은 닳고 닳아버려서 루키 시절처럼 몇 백 번의 스윙을 하고 개운하게 경기에 들어갈 수 없어. 밤에는 통증 때문에 편히 잠들 수도 없지. 좋은 성적? 내년에는? 한 경기에서 네 번의 타석, 많아 봐야 20번의 스윙을 하는데도 경기 후반엔 몸이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데?”
내용은 진지했지만, 미기는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이번 시즌이 마지막이야. 내가 미기로서 존재할 수 있는 마지막 시즌. 내년도 그 후년도 하고자 하면 가능하겠지만…… 그땐 미기가 아닌 그저 늙은 베테랑만 있을 뿐이겠지.”
“하지만, 아쉽지 않아요? 이 팀은 적어도 2~3년은 쭉 이런 상승세를 탈 거고. 어쩌면 같은 횟수로 우승을 할 수도 있는데?”
“Don't put new wine into old bottle. man.”
새 술은 새 부대에. 좋지, 좋은 말이지.
“내게는 화려한 은퇴를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래도 디트로이트를 이만큼 이끌어 왔잖아? 이젠 바통을 넘겨줄 때가 된 거지.”
미기의 마음은 은퇴한다는 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거 같다.
‘사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만…….’
“그나저나, 네 애인에 대한 소문이 팀 내에 자자하던데. 그렇게 이쁘다며?”
웃으며 슬쩍 화제를 돌리는 미기에게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디트로이트 최고의 타자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여자죠.”
* * *
미기와의 식사가 끝나고. 나는 집에 들어왔다.
[예상했던 대로네. 어떻게 보면 미기의 지금 성적은 신인 타자의 플루크 시즌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었거든.]
“플루크 시즌?”
[왜, 데뷔한 지 얼마 안 되는 타자들이 갑자기 엄청난 성적을 찍는 경우 있잖아.]
“그건 나도 알지. 근데 왜 갑자기 그런 예를 든 거야?”
[별다른 세부지표의 변화 없이 갑자기 스탯이 이렇게 뛰어오른 걸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걸? 에이징 커브를 제대로…… 아, 아니다. 더 좋은 말이 생각났어!]
“뭔데?”
[음…… 그게…….]
“제발, 빨리 말해 줘, 수리.”
[내 남자친구의 뒤에서 우산효과를 제대로 받아서?]
“아하하하, 그건 아닐 거야.”
[글쎄, 그건 나중에 알게 되겠지. 아무튼, 기분은 어때?]
기분이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는데도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면, 이젠 받아들여야 한다.
“대관식을 앞둔 왕이 된 느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