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95화 (95/175)

95화 김사범, 2021시즌(올드스쿨)(2)

“퇴장!”

[아, 김사범 선수가 퇴장을 당하고 맙니다! 1루에 있던 스탠튼 선수도 퇴장을 당하지만…… 이미 뛸 수 없는 상태였던 거 같군요.]

[시미즈 루이 선수와 제이슨 폴리 선수도 퇴장을 당합니다. 아. 이렇게 되면 남은 경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겠는데요?]

“FXuk! 먼저 시비를 건 쪽은 저 녀석들인데 왜 우리만 이렇게 퇴장당해야 해?”

음…… 그게…….

“폴리…… 사범 씨…… 미안해요…….”

아니 뭐, 미안해 안 해도 되는데. 당연한 거니까.

라커룸이 탄식과 분노로 가득 찼다.

이게 게임이었으면 분명 마왕이 소환됐겠지. 부정적인 감정이 이렇게 소용돌이치는데.

후회도 좋고, 분노도 좋지만 그게 어떤 지점을 넘어서면 독이 된다.

슬슬 내가 나서서 끊어 줘야지.

“폴리, 시미즈.”

“응?”

“네?”

내게 집중하는 녀석들.

“아까 마운드 앞에서 양키스 녀석들을 집어던지는데. 와. 기분 끝내주더라. 여기서 은퇴하고 유도나 레슬링 같은 걸 해볼까?”

“뭐?”

“이제야 내 적성을 찾은 것 같아. 사실 역도도 조금 끌렸는데 오늘 이 경험으로 그건 내 영혼을 채울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어. 내 길은 유도야. 혹은 레슬링.”

느닷없는 내 은퇴 선언에 어이없어 하는 둘.

하지만 난 론이 인정할 정도로 얼굴이 두꺼웠고, 이 정도의 반응으로는 내 드립을 막을 수 없다.

30년 인생의 짬밥은 너희가 무시할 만큼 호락호락한 게 아냐.

“진심이야?”

“음, 지금 바로 올림픽에 나가도 카렐린의 기록은 깰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누군데?”

“푸틴의 경호원…… 아냐. 아무튼, 너희 생각은 어때?”

내가 하는 말이 농담인지, 아닌지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둘을 보며 흐뭇해 하고 있다 보니 갑자기 라커룸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 찬성일세. 난 그의 선수 시절을 봤던 사람이지.”

론의 목소리와 함께.

“경기 중 아니었어요? 이렇게 들어와도 돼요?”

내 질문에 론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길 봐, 팀이 저렇게 달아올라 있는데 내가 무슨 소용이겠나? 아무튼, 곧 프런트 직원이 올 거야. 그때 사정 설명을 잘해 주게.”

“네.”

“예.”

“네…….”

생각보다 분위기가 어둡지 않다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론이 웃으며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덕아웃으로 향했다.

“카렐린 리프트를 배우고 가는 걸 추천해. 오늘 양키스 녀석들을 던져 대는 걸 보니 너무 힘에 의존하더군.”

카렐린 리프트?

론이 떠나고, 둘에게(정확히는 시미즈에게) 농담이었다는 걸 말하고 같이 경기를 지켜봤다.

[급작스럽게 올라온 것치곤 상대를 굉장히 잘 막고 있는 뷰 버로우즈 선수입니다.]

[버로우즈 선수의 공도 공이지만, 양키스 타선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네요. 주축 선수들이 대거 교체돼서일까요?]

[그라운드에 잔디가 깔려 있다고 해도 그 정도로 내동댕이쳐지면 몸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죠. 다시 생각해도 정말 어이없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렇지. 어이가 없었지.”

“뭐가?”

“끈덕지게 달라붙는 한 놈을 겨우 때려눕히고 주변을 둘러봤는데 아무도 없었어. 단 한 명도.”

“아, 그거?”

“분을 풀 상대를 찾아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보이는 건 빌어먹을 양키스의 감독밖에 없었다고.”

“그라도 때려눕히지 그랬어.”

내 말에 폴리와 시미즈가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건 너무 쓰레기 같지 않아?”

“그건 좀…….”

“뭐? 갑자기 내가 왜 쓰레기가 되는 거야?”

김병헌과 네가 과거, 아니 미래에 어떤 짓을 했는지 알면 넌 스스로 라커룸 쓰레기통으로 걸어 들어갈 거다. 이 쓰레기야.

* * *

[스탠튼, 4경기 출장 정지. 뉴욕 양키스는 바로 항소의지 밝혀.]

[붐, 6경기 출장 정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입장 ‘말도 안 된다. 붐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자신을 보호했을 뿐이다. 항소하겠다.’]

[시미즈 루이, 3000달러 벌금. 제이슨 폴리, 4경기 출장 정지.]

[1억 4천만 달러, 붐이 던지거나, 던지려 했던 선수들의 연봉 총합.]

[지안카를로 스탠튼 ‘이건 공정하지 않다. 난 그저 나를 위협하는 공에 맞서 싸웠을 뿐.’]

[붐, 입을 열다. ‘내 동료를 해치려 하는 사람들은 김사범 리프트가 뭔지 알게 될 것.’]

[양키스, 벤치 클리어링 후유증 심각, 애런 저지, 게리 산체스가 약한 뇌진탕 증세로 7일 DL행. 스탠튼은 이상 없어.]

[병헌 킴, ‘오늘 디트로이트 타자들은 모든 보호구를 다 차고 나와야 할 것. 포수장비를 차고 나와도 된다.’]

“이 자식은 이렇게 대놓고 말해도 되나? 양키스가 먼저 시작했잖아?”

“뭐라고?”

“아무것도 아냐.”

“그거 한국말이지? 내 욕한 거 아냐?”

기사를 읽다 나도 모르게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아냐, 그냥 어이없는 기사를 봐서.”

“뭔데? 봐봐.”

내 핸드폰을 뺏어 김병헌의 기사를 읽는 폴리.

“대책 없는 또라이구만? 이런 태도로 메이저리그에 올라왔다는 거야? 양키스는 뭐 선수 관리도 안 하나?”

어…… 이제 말하기도 지친다.

“다 작성됐습니다. 한번 읽어 보시죠.”

타이밍 좋게 들어온 프런트 직원은 우리가 어제 작성한 진술……서? 어감이 이상한데, 아무튼 어제 벤치 클리어링 상황에 대해 서술한 내용을 보여 줬다.

“네, 뭐. 맞네요.”

“저도요.”

중년에서 장년으로 넘어가는 듯한 직원은 우리가 사인한 종이를 들고 나가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늘도 양키스를 박살 내 주세요. 꼭.”

“당연하죠. 팀을 위해서.”

“팀을 위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팀의 프런트로 일하는 건가? 멋지네. 저것도 나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어.

살짝 감상에 빠진 채로 라커룸에 들어가니 미기가 혼자 남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붐, 왔어? 핸드릭스와 면담은 끝났나?”

“핸드릭스요?”

“지미 말이야. 네 사인을 받아 간 직원.”

“아, 이름이 지미 핸드릭스예요?”

“아니. 내가 지어 준 별명.”

맙소사. 센스하고는.

“직원이기 전에 우리 팀 팬인데,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응? 무슨 소리야?”

미기가 붙여 준 장난스런 별명이 그의 헌신을 폄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기만큼 오래 이 구단을 위해 일한 것 같은데.

“타이거즈를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일하는 사람에게…….”

“지미는 보스턴의 팬이야.”

음?

“보스턴의 팬이라고.”

아.

* * *

누군가에게 배신당한 충격을 뒤로하고, 론이 붙여 놓은 라인업을 살펴봤다.

[1. 이삭 페레데스(2B)

2. 닉 카스테야노스(RF)

3. 미구엘 카브레라(DH)

4. 사범 킴(SS)

5. 크리스틴 스튜어트(1B)

6. 페이스 달턴(C)

.

.

.]

와. 이건 정말…….

“올드스쿨이군.”

페이스가 내 옆에서 내 감상을 대신 말해 줬다.

“정말로. 10년 전이었으면 이게 당연했겠지.”

가장 좋은 타자를 2번, 혹은 3번으로.

만족하지 못한다고? 그럼 1번으로.

이게 요즘 메이저리그의 추세다. 더 강한 타자를 앞에 배치해서 더 많은 타석을 주는 것.

오프너라는 전략으로 투수의 보직조차 빠르게 변하고 있는 이 메이저리그에서 이런 올드스쿨 라인업을 보는 건 정말 드문 일이다.

“좋을 수도 있겠군. 적어도 미기나 스튜어트는 더욱 더 많은 기회를 받을 수 있으니. 너의 주력을 활용하기엔 조금 힘들겠지만.”

“그렇겠지.”

“음…… 아. 그것도 있겠는데? 적어도 이 타순에서는 네게 빈볼을 던질 수 없을 거야.”

그럴 수도 있다. 내가 1번 혹은 2번으로 나서게 되면, 내 앞의 한 타자만 신경 쓰면 되니까. 하지만 이런 타순이라면 내게 쉽게 보복구를 던질 순 없을 거다.

“아마 그럴걸? 물론 오늘 던지는 놈이 좀 정신 나간 놈이라 던질 수도 있고.”

“그런가?”

“그렇지.”

김병헌이라면 가능하다. 에고로 똘똘 뭉쳐 있는 녀석이라면 내 몸에 공을 맞춰 놓고,

‘나머지 타자들 삼진 3개 잡지 뭐.’

이렇게 생각할 가능성도 충분하니까.

뭐, 어떻게 됐든 결국 내가 이길 테지만.

경기 전.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본격적으로 연습에 들어가기 전에 러닝으로 몸을 풀고 있는 내게 김병헌이 다가왔다.

“왔냐?”

“왔다. 이 싸움꾼아.”

“개소리는. 그래서, 던질 거야?”

“당연하지. 그게 야구잖아?”

“잘 생각해. 저지도 없고 산체스도 없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지?”

“우리 팀 신경 쓰지 말고…….”

“아니, 그게 아니라 날 말릴 사람이 없다는 거야. 조심해라.”

내 말에 조금 벙찐 표정으로 굳어 버린 김병헌.

“엉덩이까진 봐줄게. 적당히 해라.”

기선제압 성공.

저 또라이가 어떻게 나올진 모르겠지만.

* * *

[오늘 경기는 정말 빅게임이네요. 한국인 메이저리거의 맞대결도 있지만, 어제 양키 스타디움에 흐른 기류가 아직 진정되지 않았거든요?]

[경기 전에도 양 팀이 곳곳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게 느껴졌습니다. 김병헌 선수 같은 경우 공개적으로 몸에 맞는 공을 조심하라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죠.]

[어제 벤치 클리어링 상황으로 2명의 주전 선수를 잃은 양키스이기 때문에, 더 이상 전력의 누수가 있으면 안 되는데요.]

[지금 시기의 DL이나 출장 정지는 정말 치명적이죠. 김병헌 선수가 현명하게 판단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김사범 선수도 마찬가지죠.]

[아무래도 김사범 선수보단…… 아닙니다. 경기 시작합니다.]

“플레이 볼!”

오랜만에 원정 경기에서 구심의 플레이 볼 소리를 덕아웃에서 듣는다.

‘플레이 볼. 야구를 즐기라는 뜻 아냐?’

오늘 경기도 즐기고 싶다. 재미있게.

퍼억!

내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김병헌의 초구가 이삭의 머리 바로 옆을 스쳐지나갔고, 이삭은 그 맹렬한 기세의 공을 견디지 못하고 배터박스에서 나뒹굴었다.

“저 자식이!”

“그만. 아직은 아냐.”

술렁이던 덕아웃이 미기의 한마디에 진정되기 시작했다.

“……볼.”

오늘 경기의 구심이 양키스의 백업 포수에게 몇 마디를 건넸다.

뭐, 조심하라는 소리겠지.

[김병헌 선수, 경기를 시작하는 초구를 이삭 페레데스 선수의 머리 근처로 던졌습니다.]

[이건 노골적인 경고예요. 홈플레이트에 바싹 붙어 타격을 하는 이삭 선수의 특성상 확실하게 맞출 생각은 아니었던 거 같지만…….]

[이렇게 되면 이삭 선수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지네요.]

초구로 기선을 제압할 생각이었다면, 김병헌이 사람을 아주 잘못 봤다.

저기 서 있는 이삭 페레데스, 내 친구는 아주 지독한 녀석이란 말이지.

독하지 않으면 그 어린 나이에 세상의 모든 똥덩어리들을 모아 놓은 마이너리그를 어떻게 견뎠겠어?

[아, 이삭 페레데스 선수. 웃으며 일어납니다.]

[하하, 그 전보다 홈플레이트에 더 바싹 붙네요.]

[주심이 이삭 페레데스 선수를 제지합니다. 너무 붙었단 이야기겠죠?]

그런 이삭의 모습에 씨익 웃으며 투구를 계속하는 김병헌.

“스트라이크!”

98마일짜리 패스트볼이 존을 파고들었다.

“스트라이크!”

95마일짜리 커터도 역시 존을 파고들었으며.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으로, 93마일 투심이 마치 반대 손 투수의 슬라이더 같은 무브먼트를 보여 주며 이삭을 덕아웃으로 돌려보냈다.

돌아온 이삭에게 몰리는 시선들.

“제길, 빌어먹게 죽여주는 공이에요. 쉽지 않겠어요.”

흠. 그래?

칠 만한 거 같은데.

“스트라이크! 아웃!”

[닉 카스테야노스 선수가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헛스윙을 했습니다!]

“아웃!”

[미구엘 카브레라 선수, 커터를 노려봤지만 우익수 정면으로 향했군요. 공수 교대입니다.]

어…… 아닌가?

사실, 이렇게 덕아웃과 대기타석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피부에 쉽게 와닿지 않는다. 그저 배트에 꽤 자부심이 있는 선수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 들어오니 그러려니 하는 거지.

언제나와 같이 글러브를 들고 수비에 나서는 내게 미기가 말했다.

“빨리 들어와. 네 친구 패러 가야지.”

음. 그건 좀…….

어감이 이상하지 않나?

미기의 말에 대꾸하며 그라운드로 향했다.

“그래야죠. 내 친구가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맞는 건 좀 그래요. 패더라도 내가 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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