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99화 (99/175)

99화 김사범, 2021 시즌(폭탄 돌리기)(2)

“오랜만이네요, 붐. 드디어 금지가 풀렸나 보죠?”

“슬슬 배트를 잡아야죠. 원정기간 동안 계속 쉬고 있다 중요한 복귀전에서 헛스윙만 붕붕 해대면 안 되잖아요?”

“하하, 그렇긴 하죠. 붐의 복귀일에는 절 못 볼 거예요. 휴가를 내고 외야석에 앉아 있을 테니까.”

“하하, 휴가를 하루 투자한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수고하세요, 아인.”

홈경기 때 라커룸을 담당하는 클러비인 아인과의 대화가 끝나고, 트레이닝 룸을 향해 걸으며 굳은 몸을 살살 풀기 시작했다.

‘끄응, 정말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하니까 몸이 좀…….’

사실 운동선수에게 있어 훈련은 관성이며, 재능이다.

특출난 재능을 가진 선수가 훈련을 통해 좋은 성적을 얻게 되고, 더 좋은 성적을 위해 훈련에 집중하면 그 선수는 역사에 이름이 올라가는 선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똑같은 재능을 가진 선수가 어느 시점에서 만족해서 발전을 위한 훈련을 하지 않다 보면…… 아마 선수 생활이 끝날 때의 위상은 많이 낮아지게 되겠지.

훈련 이후, 성공에 대한 중독. 힘든 몸을 이끌고 기어코 한 번의 스윙이라도 더 하도록 만드는 자기최면과 의지.

다른 건 몰라도, 나는 그 부문에 대한 재능이 있는 편이다. 적어도 회의감과 실망감에 사로잡혀 게으른 생활을 하진 않았으니까.

후웅!

훙!

오랜만에 잡은 배트가 반가우면서도 낯설다.

“훅!”

“후욱!”

이틀 만에 잡은 바벨도 어째 조금 무거워진 것 같고.

힘이 넘치던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지쳐 갔고, 내가 목표로 한 어느 순간이 올 때까지 난 내게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 * *

[내일이면 드디어 김사범 선수의 출전 정지가 풀리는 날이군요.]

[그리고 타이거즈의 기나긴 원정이 끝나는 날입니다. 그간 붐 없이도 좋은 모습을 보여 주던 타선이 오늘 경기에서는 조금 아쉬운 모습을 보여 주는군요.]

[전체적으로 잔루가 많은 모습입니다.]

[레이스 입장에서도 승리가 절실한 상황이다 보니 더 치기 어려운 것 같아요. 7회 초인 지금 이미 5번째 투수가 나왔습니다.]

[그야말로 총력전이네요. 3회 말에 두 점을 낸 뒤 사력을 다해 타이거즈의 타선을 막고 있는 탬파베이입니다.]

“빌어먹을, 붐이 없으니 타선이 힘을 못 쓰잖아?”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다며?”

“그건 그때고! 지금 저기에 붐이 있었으면 적어도 세 타석은 나왔을 거고, 그럼 2:3으로 앞서나가고 있었을 거라고!”

“홈런 세 방으로?”

“당연하지.”

어…… 제가 그렇게 매 타석 홈런을 치진 못하는데요…….

두툼한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들고 오던 주인이 그 소리를 듣고는 나를 향해 윙크했다.

“저 멍청이들 말은 무시해요. 술 먹고 TV 보며 욕하는 게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인 녀석들이니까.”

“아뇨, 괜찮아요. 그나저나 이렇게 넓은 자리를 제가 혼자 차지해서…….”

“그럼 저기 밖에 앉을래요? 만약 그런다면 제 생각엔 그 스테이크를 다 먹는 데 2년은 걸릴 것 같은데.”

“어차피 모자도 쓰고 왔고, 선글라스도 썼으니 잘 못 알아보지 않을까요?”

내 말에 갑자기 빵 터지는 주인.

“파하하, 디트로이트에 그 정도 덩치를 가진 동양인이 또 있을 것 같아요?”

“음…….”

여기 미국이 개인 프라이버시를 굉장히 존중하는 팬 문화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아마 내가 불편해서 버티지 못할 거 같긴 하다.

“그러네요. 고마워요.”

“별말씀을. 정 고마우면 나중에 유니폼에 사인 좀 부탁할게요.”

“얼마든지.”

그렇게, 홀의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없는 사각지대에서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던 나는 예상치 못한 암초에 걸리고 말았다.

[대즈 카메론! 쳤습니다! 우측 담장을 아주 여유롭게 넘어가는 큰 홈런이군요.]

[타이거즈의 하위타선이 큰일을 냈습니다. 스코어를 1회 초로 되돌려 놓는 투런 홈런!]

“좋아! 이거야!”

“내가 아까 말했지? 붐이 없어도 잘할 수 있다고!”

“언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붐을 데려오라고 소리치던 건 누구지?”

카메론의 홈런이 터지자마자, 우울함마저 감돌던 홀의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술울 마시고, 환호하고. 누군가 들어오면 또 그 사람을 보면서 환호하고, 중계 카메라가 누군갈 비추면 또 환호하고.

아주 열정적으로 디트로이트를 응원하고 있는 사람들.

음…… 경기를 동점까지 끌고 온 건 참 좋은데…….

‘이렇게 되면 내가 나갈 수가…….’

지금 나가면 아마 술 취한 백인들 30명 정도에게 둘러싸여 평생 야구공에 사인만 해 줘야 할지도…….

* * *

“낄낄낄, 진짜 그랬단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빵 터진 폴리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뭘 어떻게 돼, 경기를 뛴 건 내가 아니라 너흰데. 13회 말까지 꼼짝없이 거기에 갇혀 있었지.”

정말 외롭고 긴 시간이었다.

중간에 모든 걸 내려놓고 나가려고 했지만…… 갈수록 커지는 팬들의 목소리에 차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살자고 팬들을 던질 순 없으니까…….’

“대단하네, 나라면 그냥 일어나서 다 무시하고 나갔을 거야.”

“나도 너같이 백인이었으면 그냥 나갔을 거야. 제길. 케이시 너도 알잖아?”

“넌 사인 요청하는 팬들에게 거절하는 법부터 배워야 해. 자꾸 그렇게 사인을 마구 해 주니까 다들 너만 보면 좀비처럼 몰려들잖아? 코메리카 파크 안에서면 몰라도 밖에선 적당히 물릴 줄도 알아야지.”

“아, 몰라. 아무튼. 다들 컨디션은 어때? 내가 없어서 무리하느라 힘들진 않았고?”

내 말에 다들 표졍이 변했다.

케이시와 폴리, 이삭은 물론이고 조용하던 페이스와 시미즈까지.

“아주 좋지. 언제나 그랬듯.”

“나도 너만큼 푹 쉬었어. 팀 입장에서는 내가 없는 기간이 네가 없는 기간보다 더 힘들었을 테지만.”

“4경기 동안 내가 출루하지 못한 타석은 5번뿐이야. 뒤에 누가 없으니 아주 좋던데?”

“흠. 좋다. 타격 사이클도 올라오고 있고.”

“저도…… 좋아요…….”

아주 내 말이 끝나자마자 개떼같이 덤벼드는구만.

“그래? 오늘은 내가 다 부술 생각이라 이야기한 건데. 혹시 피곤한 사람 있으면 말해. 내가 론에게 대신 전해 줄게.”

아무리 그래도 타이거즈하면 붐이지.

미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말했고.

“……과연 그게 네 말대로 될 진 모르겠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즈의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경기에 드디어 김사범 선수가 복귀했습니다. 현재 홈런 개수가 71개, 새로운 기록을 세우기까지 3개가 남은 상황이네요.]

[디트로이트의 잔여 경기는 19경기인데, 그중 홈경기가 12경기입니다. 이런 점도 기록을 세우기에 아주 좋은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김사범 선수의 컨디션도 중요하지만, 결국 상대 투수, 상대 팀이 상대를 해주냐의 문제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디트로이트로 원정을 오는 팀들은 굉장히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죠.]

“볼!”

경기 전, 페이스가 찾아와 한 이야기대로 오늘 아처의 컨디션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스트라이크 존을 공략하는 아처가 경기 시작하자마자 볼을 던지다니.

‘이런 적이 있었나?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시즌 후반기에 힘이 빠지는 건 당연한 거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아처는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경기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베테랑이란 거다.

딱!

짧은 바운드로 마치 물수제비처럼 내게 다가오는 타구. 나는 망설이지 않고 타구를 향해 뛰쳐나갔다.

펑!

“아웃!”

[김사범 선수가 복귀 첫 아웃카운트를 잡아냈습니다. 뛰어난 타격 실력 때문에 가려져 있지만, 김사범 선수의 수비도 굉장하지 않습니까?]

[객관적인 수치로 봐도, 이번 시즌 실책이 단 한 개입니다. 그것도 안타성 타구를 끝까지 쫓아가다 놓친 공이거든요. 현재 모든 메이저리그 유격수 선수 중 최고의 수비율을 보여 주고 있기도 하죠.]

[수비 기록 자체가 오랜 출전시간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평가 절하되는 경향이 있다는 게 아쉽네요.]

[하하, 김사범 선수가 커리어를 끝낼 때에는 인정받을 수 있을 겁니다.]

“좋아! 잘했어 아처!”

“보통이죠.”

덕아웃에서 언제나처럼 우리를 맞이하는 미기.

미기의 말처럼 아처는 안타를 하나 맞긴 했지만 두 개의 땅볼과 한 개의 외야 플라이로 나름 깔끔하게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 붐! 붐! 붐! 붐! 붐! 붐!

“뭐야, 이번 타석은 내 차례라고. 왜 붐을 외치는 거야?”

장비를 차며 타석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이삭이 팬들의 ‘붐’콜을 듣고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너도 71홈런을 치면 이런 콜을 받게 될걸? 그거 쉬운 거 아냐? 붐이 치는 거 보니까 쉬워 보이던데.”

폴리. 아니야. 힘들어.

그리고 그런 소리 하면…….

“커리어 50세이브도 올리지 못한 떨거지 2년 차 투수가 할 말은 아닌데? 20승-20세이브나 올리고 말해, 이 미친 소야.”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애 울겠다. 그만하고 나가자.”

아까부터 심판이 우릴 매섭게 바라보고 있거든.

따악!

[이삭 페레데스 선수, 샘 핸지스 투수의 초구 패스트볼을 받아쳤습니다. 중견수 앞에 뚝 떨어지는 안타!]

[어떻게 보면 요즘 김사범 선수보다 더 뜨거운 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탬파베이 원정에서 4경기 19타석 11타수 6안타, 8개의 볼넷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발만 조금 더 빨랐어도 정말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는 1번 타자가 됐을 거다. 주루 센스가 좋아서 많이 티가 나진 않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니까.

‘샘 핸지스라…… 들어 보지 못한 투순데. 패스트볼이 좋고…… 커터에 커브를 던진다고 했지?’

오랜 기간 이어진 무리한 윈나우 모드 때문에 클리블랜드 팜은 거의 사막화됐다. 이번 시즌 전에 주전 대부분을 트레이드하며 새로운 마이너리거들을 수급하긴 했지만…….

‘어차피 리빌딩을 시작하는 시즌에 올릴 정도의 투수라면…… 클리블랜드가 별로 기대하지 않는 투수겠지. 그럼 일단 패스트볼을 한번 보고…….’

“네?”

[아, 심판이 1루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고의사구인가요?]

[네, 맞습니다. 김사범 선수가 타석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클리블랜드 벤치에서 사인이 나왔네요.]

-우우우우우우우!

[디트로이트 팬들의 분노 섞인 야유가 코메리카 파크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미 언질을 받은 듯, 팬들의 욕설 섞인 야유에도 미동조차 없는 투수.

그리고…….

3회 말에도.

[아, 김사범 선수의 타석에서 또다시 고의사구가 나왔습니다!]

5회 말에도.

[아, 또다시 고의사구네요. 화가 난 관중들이 그라운드에 쓰레기들을 투척하네요! 클리블랜드는 김사범 선수와 상대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7회 말에도, 9회 말에도.

내 뒤의 미기와 스튜어트, 페이스에게 적시타를 맞으면서도 끝내 클리블랜드는 나와 상대하지 않았다.

경기 후.

“이삭.”

“왜?”

“4경기에서 5번 빼고 출루했다고 했지?”

“……그렇지.”

“내 생각인데, 나는 네 경기 전 타석 출루도 가능할 거 같은데.”

“……음.”

* * *

[무서워서? 아니면, 승리를 위해? 어떤 이유로도 설명되지 않는 인디언즈의 고의사구.]

[인디언즈의 테리 프랑코나 감독, 기자의 질문에 대답을 거부하다.]

[타이거즈의 론 가든하이어, 클리블랜드를 향해 비겁한 겁쟁이들이라며 비난.]

[인디언즈의 팬 포럼, 격렬한 토론. 하지만 대부분의 팬은 팀의 판단에 실망한 듯.]

[인디언즈가 5회 말, 2·3루에서 고의사구를 해야 했던 이유.]

[배리 본즈, ‘난 그 모든 것을 이겨 내고 이 자리를 차지했다. 디트로이트의 99번은 그러지 못할 것.’]

“좋아. 우리도 이제 상대를 존중할 필요가 없어졌군.”

론의 목소리가 라커룸에 울려 퍼졌다.

“앞으로 남은 3경기 동안, 비겁한 겁쟁이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나쁜 짓’을 보여 주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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