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김사범, 2021시즌(M.M.M)(1)
투수가 공을 던지고, 친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타자가 투수의 공을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은 0.3초 내외.
타자는 그 짧은 시간 안에 투수가 던지는 공의 구종 중 하나를 선택하고, 코스를 구별하고. 스윙을 시작해야 방망이에 공을 맞힐 수 있다.
그 와중에 자신에게 알맞은 타격 메커니즘을 유지하는 건 당연한 말이고.
공에 맞췄다고 해서 그 공이 무조건 안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사실 투수나 타자나 일단 배트에 공이 맞은 이후엔 BABIP에게 기도하는 거다.
그리고, 우리의 위대하신 BABIP은 가끔 그의 신도에게 은총을 내려주신다. 바로 지금처럼.
[아! 마티아스 선수! 김사범 선수의 타구를 펜스에서 건져 냈습니다!]
[첫 타석에서 홀가분하게 기록을 경신할 수 있었는데요, 아쉽게도 우익수인 세울리 마티아스 선수가 펜스를 밟고 점프해 공을 잡아냈습니다.]
[이건 경기 후 하이라이트에 나올 만큼 대단한 수비였습니다. 수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는 선수가 아닌데……. 대단하단 말밖에 나오지 않는군요.]
“후우.”
벤치에 몸을 기대며 앉자 미기가 내게 말을 걸었다.
“붐, 아쉽겠어?”
“조금요. 부담이 되는 건 아닌데 그래도 좀…… 홀가분하게 한 방 때리고 시작하고 싶었는데.”
“어쩐지. 흘러나가는 슬라이더를 억지로 때린 거 맞지?”
“네. 생각보다 슬라이더 무브가 별로예요. 오늘 컨디션이 별로인 건진 모르겠지만.”
“첫 풀 시즌이니 체력이 달리겠지. 곧 퍼지겠군. 좋은 소식이야.”
미기와 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자, 오늘 경기 선발로 나선 타자들이 슬슬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들 한 방씩 쳐 줘요. 투수가 홈런 맞는 거에 대해 무감각해지게. 그래야 내게 좋은 공이 오지.”
“좋아. 두 개 쳐도 되지?”
“그럼요. 스튜어트는 많이 먹으니까. 게토레이 한 잔 드려요?”
“좋지.”
우리가 매 경기마다 외치는 말들처럼 게임이 진행되었으면 참 좋겠지만…….
세상 일, 특히 야구는 생각처럼 진행되는 경우를 찾기 힘든 편이다.
“아웃!”
[아, 닉 카스테야노스 선수의 좋은 타구가 2루수인 윗 메이필드 선수의 호수비에 막혔습니다.]
[오늘 디트로이트 타자들은 참 답답하겠어요. 4회 말, 지금까지 안타가 하나도 없습니다. 잘 맞은 타구가 야수 정면으로 가거나 호수비에 가로막히고 있는 상황입니다.]
[브래디 싱어 선수, 수비의 도움을 받으며 3과 2/3이닝 퍼펙트로 디트로이트 타선을 완전히 틀어막고 있습니다.]
“제길!”
닉이 배트를 신경질적으로 꽂아 넣으며 짜증을 냈다.
“별다른 건 없죠?”
“없어. 칠 만한 패스트볼하고 슬라이더야. 체인지업은 안 보여 주는군.”
“슬라이더가 밋밋한 대신 조금 빠르게 들어오는 것 같아요. 공도 늦게 뻗어 오고.”
“디셉션이 아주 짜증나. 왼발이 땅에 닿은 다음 한참 있다 공이 뻗어 나오는 느낌이야.”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긴 한데……. 오히려 그래서 타이밍이 조금씩 안 맞는 거 아닐까?”
끊임없는 정보의 교환. 사실 저번 이닝에도, 저저번 이닝에도 이런 정보교환이 이루어졌지만…… 크게 소용은 없었다.
공에 손을 대지 못해서 당하는 게 아니라 손을 댔는데도 당하고 있는 거니까.
“스크라이크!”
‘그러다 보니 저렇게 투수의 기세도 살아났고.’
뭐. 흔한 일이다.
시즌을 진행하면서 몇 번이나 겪었던 일이기도 하고.
이런 상황에서 제일 효과적인 해결책은, 누군가 우연이라도 안타를 때려내는 거다. 그럼 막힌 둑이 터져 나가는 것처럼 뻥 하고 뚫리곤 하니까.
따아아악!
“오!”
타격음이 심상치 않은데?
- 우와아아!
“아웃!”
아. 또야? 저 외야수 수비 별로라며?
* * *
“오늘 패배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오늘 타선이 전체적으로 침묵했는데, 얼마 남지 않은 포스트시즌에서…….”
홈경기를 치르면서 내 기록 때문에 경기 후 덕아웃이 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자, 팀 차원에서 인터뷰 시간을 따로 마련해 줬다.
보통 론과 나, 그리고 그냥 경기의 MVP급 활약을 한 선수 셋이 인터뷰에 나섰는데, 오늘은…… 나와 론 둘이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공이 둥글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스포츠는 야구입니다. 경기 중반 위기를 넘긴 캔자스시티와 브래디 싱어는 강했고, 우리는 그들을 공략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론의 말이 맞다. 내가 72홈런을 기록하고 있지만, 크게 보면 경기당 0.5개꼴로 치는 셈이다. 절반, 50%라는 확률이 어떤 스포츠보다 대우받는 스포츠가 바로 야구다.
“포스트시즌은…… 일단 따로 언급을 하진 않겠습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우리는 이런 경기 후에도 수없이 이겨 왔으며, 그만큼 저력이 있는 팀이라는 겁니다.”
찰칵, 찰칵.
타다다다닥.
론이 대답을 할 때마다 카메라 셔터와 기자들의 타이핑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처럼 ‘아쉬운’ 타구를 많이 날린 날은, 내가 할 말이 별로 없다. 뭐, 기자들이 이런 상황에서 할 질문이래 봤자…….
“붐, 오늘 경기 1회와 8회, 아주 아쉬운 타구가 나왔는데요, 기분이 어떠신가요? 역시 기록 경신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가요?”
답정너, 아니 답정질이네.
이런 질문을 하는 기자는 보통 내가 어떤 말을 하든 자기 맘대로 쓰는 경향이 있다.
“아쉬웠지만, 괜찮습니다. 아직 시즌은 13경기나 남았고…… 컨디션도 아주 좋습니다.”
“요즘 스윙이 커졌다는 전문가들의 평가가 있었는데, 기록 경신을 위해 무리해서 큰 스윙을…….”
것 봐, 바로 이어서 물고 늘어지잖아.
존중은 상대적인 거다. 날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가 존중을 해 줄 필요는 없지.
“시즌 73홈런을 친 타자의 스윙을 지적했다고요? 누구죠? 부디 제가 이름을 듣고 끄덕일 수 있는 전문가였으면 좋겠네요.”
“그…….”
“말을 못 하시는 걸 보니…… 됐습니다. 다음 분?”
보통 이런 자리에 출입이 허락된 기자는 홈팀에 우호적인 기자가 대부분이다.
물론 그 사이에 저런 사람이 껴 있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지적을 해 주면 알아서 기자들끼리 정리할 거다.
“그게 아니라…….”
“디트로이트스포츠 저널의 핸릭슨입니다. 팀 최다승리 기록을…….”
저렇게.
경기 후 인터뷰가 끝나고, 라커룸으로 돌아가는 길.
론이 내게 슬쩍 말을 걸었다.
“기자들에게 너무 공격적으로 대할 필요 없네. 그냥 무시하면 되는 일이야.”
물론 그게 제일 현명한 대처 방법이긴 하다. 이번 일로 아까 그 기자는 인터뷰에 출입을 허가받지 못하겠지만, 앞으로 나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를 쏟아 낼 테니까.
“어차피 제가 더 잘하면 제 말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어서 안달할 텐데요 뭐.”
“음…… 그건 그러네만…….”
내 말대로, 내가 만약 다음 시즌에 또다시 70홈런을 넘겨도 그 기자가 나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를 쓸 수 있을까?
아닐걸.
“매너가 남자를 만드는 거잖아요(Manners Maketh Man)?”
꽤 유명한 영화의 대사를 인용해서 말하자, 론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그래. 맞는 말이지. 알겠네. 그 기자는 내가 알아서 조치하도록 하지.”
“고마워요, 론.”
“별말씀을.”
그것 봐. 매너가 남자를 만드는 거 맞잖아.
* * *
다음 날, 캔자스시티와의 3차전.
따악!
-붐! 붐! 붐! 붐!
[김사범 선수가 큰 타구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타구는…… 펜스에 맞는군요! 30cm만 더 높았어도 충분히 홈런이 될 수 있는 타구였는데요!]
[하하하, 김사범 선수도 홈런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보기 화면에서도 나오지만, 타격을 하고 나서 배트를 던지며 조금 느리게 1루로 가다 급하게 속도를 올렸어요.]
[슬라이딩으로 2루에서 세잎 판정을 받은 김사범 선수입니다. 선두타자 2루타!]
“여기선 2루에만 들어가도 홈런으로 인정받나? 팬들 반응이 장난 아닌데?”
“아, 뭐. 거의 홈런이었으니까요.”
2루에서 공을 받아 내 몸을 슬쩍 터치한 윗 메리필드가 공을 던지며 내게 말을 걸었다.
“뭐, 기록을 앞두고 있으니 이해는 하지만, 배트플립은 좀 자제해야 할걸? 지금 마운드에 서 있는 녀석이 굉장히 싫어하거든”
“본능적으로 나오는 거라. 생각은 해볼게요.”
배트 플립에 자격이 있는 건 아니지만, 보통 큰 기록을 앞둔 타자들에게 조금 너그러워지는 건 사실이다.
첫 경기부터 타이기록을 세우고 화려하게 배트를 던진 내게 캔자스시티의 투수들이 보복구를 던지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일 거고.
“서로 존중하고 조심하자고. 매너 있게. 난 관중석에 던져지고 싶지 않아.”
“푸흐흐.”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갑자기 빵 터졌다. 그 포수 놈, 그걸 또 일러바쳤어?
일러바친 포수 녀석은 좀 얄밉지만, 메리필드는 좋은 사람인 거 같다. 서로를 죽이니 살리니 하는 그라운드에서 이렇게 나온다는 건 적어도 기본적인 매너는 가지고 있다는 뜻이지.
“베이스 온 볼스!”
“세잎!”
“세잎!”
잠시 후, 우리는 내 2루타에 이어 볼넷 - 2루타 - 2루타로 순식간에 앞서나갔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되고 나서 아웃 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한 채 벌써 3점을 준 상대 투수는 고장 난 라디오처럼 ‘F’가 들어가는 단어를 쉴 새 없이 반복하고 있었고.
‘이렇게만 가면 좋겠는데…….’
하지만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감을 느낀 캔자스시티의 투수 코치가 재빨리 마운드를 방문해서 몇 마디 말을 건네자 아쉽게도 고장 난 라디오는 다시 메이저리그 선발투수로 돌아왔다.
그리고 3연속 삼진으로 길었던 1회 말을 끝낸 투수는…….
“으라아아아!”
[크리스 부빅 선수가 키브라이언 헤이스 선수를 삼진으로 잡고 마운드에서 포효합니다.]
[이닝 초반에 굉장히 흔들렸던 걸 고려하면 3실점으로 막아 낸 걸 칭찬해 줘야 합니다. 대부분의 루키 투수들은 이런 상황을 이겨 내지 못하고 무너지는 경우가 많거든요.]
쟨 뭐야? 배트플립 싫어한다며?
“내로남불이네. 배트플립이나 삼진 세레머니나.”
“narrow now bull? 그게 뭐야?”
“그런 게 있어. 저런 투수들을 보고하는 말이지.
“속 좁은 소는 폴리잖아?”
아. 그 인간도 한 내로남불 하지.
* * *
경기 중반.
[김사범 선수, 쳤습니다! 애매한 곳으로 향하는 공인데요! 우익수가 앞으로…… 슬라이딩! 빠졌습니다! 완전히 빠졌어요!]
[시프트 때문에 중견수가 백업을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 이건 세울리 마티아스 선수의 판단실수예요. 3루까지 가겠는데요?]
“세잎!”
‘홈까지 노렸는데. 아깝네.’
1회 말을 재현하려는지, 이어진 이삭의 안타에 내가 홈을 밟고 들어오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마운드의 투수를 괴롭히는 우리 타자들.
안타, 안타, 볼넷, 볼넷. 그리고 이번엔 2루타.
마지막에 주자를 모두 불러들이는 아주 커다란 2루타를 날린 헤이스는 무시무시한 배트플…… 아니, 배트플립 따위가 아니라 ‘빠던’을 선보였다.
헤이스의 배트는 외야 플라이 빠던, 병살타 빠던, 내야안타 빠던 등등 빠던의 민족인 대한민국 프로야구에서 10년 이상 온갖 빠던을 봐 왔던 내가 보기에도 예술점수 10점, 기술점수 10점을 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3루 쪽 덕아웃으로 향했다.
‘아까 투수가 환호성을 지른 게 자존심이 많이 상했나 보네.’
이래서 그라운드 위에서는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삼진 잡고 환호성만 안 질렀어도 저런 아름다운 빠던을 보면서 자존심 상해 할 일도 없었을 텐데.
저쪽 투수 코치가 마운드를 다녀가고, 포수가 엉덩이를 치며 격려를 해 줬음에도 투수의 표정이…… 음…….
“붐, 준비해. 지금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
“폴리?”
퍽!
[투수의 공이 대즈 카메론 선수의 옆구리에 정확히 꽂혔습니다! 아, 이건…….]
“이 쓰레기 같은 새끼가!”
대즈가 옆구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2루에 있던 헤이스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마운드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투구를 마치고 몸을 세우는 투수의 등판을 주먹으로 내려찍었고,
“저 개자식들이!”
폴리는 뛰쳐나갔다.
바로 그때.
“붐, 우린 조금 있다 나가지.”
폴리와 함께 뛰쳐나가려고 했던 나를 잡는 미기와 닉.
“팀을 위해서야. 탬파베이에서 모두 찬성했지. 대즈도 이해해 줄 거고.”
‘저기…… 그 팀웍 때문에 다들 지금 뛰쳐나가고 있는 건데요?’
그리고 뭐, 퇴장 당하고, 다들 씩씩대고, 나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벙쪄 있는 상황에서 헤이스는 내게 이런 말을 남기고 덕아웃을 떠났다.
“붐, 내가 복수했어. 이제 네가 내 원한을 풀어 줄 차례야.”
아…….
누가 보면 내가 무당인 줄 알겠네.
그래도 풀어 주긴 해야지,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