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김사범, 2021 시즌(M.M.M)(2)
‘보자. 살풀이 한번 시원하게 해야 하는데…….’
헤이스가 퇴장당하고, 대즈는 괜찮다며 경기를 뛰겠다는 의사를 보였지만 예방 차원에서 교체 후 지정 병원으로 향했다.
캔자스시티는 선발로 나와 공을 던지던 크리스 부빅은 2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강판당한 상황.
‘지금이 2회 말이고, 투아웃 주자 1,2루. 한명만 더 나가면…….’
2사 주자 만루. 날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오는 거다.
그리고.
“베이스 온 볼스!”
[아, 마운드의 헤수스 다일로마 선수, 급하게 올라와서인지 영점이 전혀 잡혀있지 않네요. 스트레이트 볼넷을 주고 말았습니다.]
[다음 타자는 요즘 1번으로 출장하고 있는 김사범 선수인데요, 벤치 클리어링까지 벌어지면서 감정이 상한 상태인데……. 거르진 않을 겁니다. 애초에 2아웃 만루 상태에서 거르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지만요.]
[이미 타자 일순이 이뤄졌고, 김사범 선수가 세 번째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굿판이 차려졌다.
“안녕? 지금 내 기분상 홈런을 쳐야 할 것 같은데. 좋게 말할 때 가운데로 공을 던져 줬으면 좋겠네.”
내 말을 들은 M.J. 멜렌데즈가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홈런? 내가 장담하는데 넌 배트에 공을 스치지도 못할 거야.”
“그건 그럴 수도 있겠네. 존에 들어오지 않으면 배트를 내지 않는다는 주의라.”
“너…….”
멜렌데즈와 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구심이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경고했다.
“그만. 더 하고 싶으면 말해. 둘 다 나란히 퇴장시켜 줄 테니까.”
뭐. 벤치 클리어링이 나온 후에는 심판의 신경도 날카로워지기 마련이니까.
[여기서 승부를 봐야 합니다. 이미 8점 차이로 벌어져 있는데 여기서 더 실점을 한다면 그나마 있던 1%의 가능성도 떨어지게 될 겁니다.]
주자 만루, 급하게 나온 투수. 바로 전 타석에서의 스트레이트 볼넷.
투수가 베테랑이라면 볼넷을 줄 각오를 하면서 유인구로 범타를 유도하려 시도를 할 수도 있지만, 저기 마운드에 서있는 투수는 이제 막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새파란 루키다.
퍼엉!
“볼!”
제법 좋은 구위의 직구. 하지만 제법 좋다 정도지 메이저리그급이라고 하기엔 좀…….
‘그래도 공이 덜 뜨긴 하네. 일부러 힘을 좀 뺀 건가?’
슬쩍 시선을 돌려 전광판의 구속을 확인해 보니 97마일까지 나왔던 공이 94마일 정도로 뚝 떨어져 있었다.
긴장했거나, 억지로 몸에 힘을 빼서 제구를 잡으려고 한 거거나.
뭐가 됐든, 내게는 이득이다.
“스트라이크!”
두 번째 공, 6구 만에 들어온 스트라이크다. 슬라이더로 보이는 구종이었는데…… 칠걸 그랬나?
아니다. 조금 더,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팬들의 원한이 조금 더 쌓이고, 저 투수가 슬슬 자신감을 찾아갈 만한 시점까지.
[아, 이번 공을 놓친 건 좀 아쉽네요. 슬라이더가 제대로 채지지 않으면서 행잉 슬라이더로 거의 한가운데 들어갔거든요?]
[그래도 용기 있게 존 안으로 집어넣은 공이었습니다.]
틱!
“스트라이크!”
퍼엉.
“볼!”
바깥으로 나가는 슬라이더를 슬쩍 건드려 봤지만 파울, 그리고 이어지는 패스트볼은 존 위쪽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실투라기보단 노린 공. 투수의 제구가 슬슬 잡혀 간다는 이야기다.
“몰렸네? 홈런은 언제 나오지?”
“음…….”
내 맘대로 안 된다는 듯 살짝 신음 한번 내주고.
이제 슬슬 이 배터리의 머릿속이 ‘하지만, 해볼 만했다.’로 물들 때가 됐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먹고 던진 공은 보통…….
따아아악!
빠지거나, 몰리거나 둘 중 하나지. 투수가 강철 멘탈이 아니라면.
[넘어갑니다! 갑니다! 갑니다! 74호! 이건…… 우와! 압도적입니다. 압도적인 타구예요! 코메리카 파크에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가 승리를 거둘 때에만 울리는 소린데, 아. 디트로이트 구단도 화가 많이 났나 보네요. 이건 우리가 이 승리했다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나는, 타구가 담장을 넘어갈 때까지 타석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타구가 담장을 넘어갔을 때.
들고 있던 배트를 멍하니 서 있는 멜렌데즈에게 들려 주며 말했다.
“말했잖아. 친다고. 그건 팔아서 술값으로 써. 선물이야.”
그리고 시작된 산책.
1루에서 2루로 향하며 윗을 바라봤지만, 그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땅을 고르고 있어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빨리 와!”
“평소엔 미친놈처럼 뛰어다니더니 왜 이렇게 늦어?”
“이 귀여운 놈!”
“헤이스가 저기 위에서 기뻐하고 있을 거다!”
“대즈도 아마 병원에서 TV로 보고 신나서 뛰고 있을걸?”
'헤이스는 왜 갑자기 죽인거야? 다들 정신줄 놨구만.'
3루를 거쳐 홈으로 시선을 옮기자, 마치 끝내기 홈런을 날린 것 마냥 플레이트 주변에 모여 있는 동료들이 보였다.
‘멋있는 멘트, 멋있는 멘트…….’
누군가의 입에서 입으로 계속해서 전해질 기념비적인 멘트다. 최대한 멋있게, 죽이는 말을 해야 한다.
[김사범 선수가 3루를 돌아 홈을…… 밟았습니다!]
“……다녀와, 악!!”
멘트는 개뿔. 흥분한 동료들에게 사로잡혀 덕아웃으로 실려 갔다.
이 사람들이 그래도 최소한의 정신머리는 남아있었네. 그 와중에 플레이트가 아닌 덕아웃으로 데려가 세레머니를 이어 갈 정도면.
‘근데 이럴 거면 왜 나와서 기다린 거야?’
* * *
[이제 경기는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8회 초. 스코어는 15:0입니다.]
[지난 두 타석에서는 캔자스시티 벤치 쪽에서 고의사구 지시가 내려왔었죠?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할 것 같습니다.]
[2회에 이미 사이클링 히트에서 안타 하나를 남겨 놓은 김사범 선수인데……. 만약 이번에도 고의사구를 지시한다면 캔자스시티 선수단은 홈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만큼 경기장의 분위기는 아주 험악합니다.]
- XXX야! 똑바로 승부하라고!
- 그따위로 경기할 거면 왜 여기 온 거냐!
- 또 한 번 그딴 지시를 내리면 네 혓바닥을…….
오우. 역시 공장이 많은 도시라 그런지 밀링머신이니 프레스니 전문 용어들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헤이, 멜. 그냥 하나 줘. 조용히 안타만 치고 나갈게.”
“……꺼져.”
8회 말, 투아웃 상황에서 나온 거지만……. 딱히 부담감은 들지 않는다.
‘여기서 날 거르면…… 또 한 바퀴 돌려 줄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들 만큼 캔자스시티 투수들은 우리 타자들을 상대로 아웃카운트를 잡는 걸 힘들어 하고 있다.
“난 아직 해야 할 게 많아. 한 이닝에 만루 홈런 두 개도 쳐 봐야 하고, 사이클링 홈런도 못 해봤거든. 그거에 비하면 이건 별거 아니니까…….”
“그만.”
넵.
타석에 들어서서 상대 투수를 노려봤다.
지시가 내려오진 않았는지, 그저 축 늘어트린 오른손을 달달달 떨고 있는 어린 투수.
“볼!”
이크.
내가 너무 노려봐서 그런지 존에서 꽤 많이 벗어난 공이 왔다.
‘착한 표정, 착한 표정.’
홈런을 74개를 때렸지만, 그래도 사이클링 히트는 욕심이 나는 기록이니까.
따아악!
[타구가 큽니다! 넘어가나요? 넘어가나요?]
[넘어가면 안 됩니다! 아니, 넘어…… 후.]
[펜스를 강하게 때린 타구가 달려오던 우익수 키를 넘어 그라운드 안으로 다시 들어왔습니다! 백업을 위해 오던 중견수가 급히 잡아서!]
[아. 김사범 선수가 1루에서 멈췄네요. 하하, 방금 전 상황은 정말…… 홈런이길 바라야 하는지, 아니길 바라야 하는지 헷갈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게요. 공이 내야로 돌아 왔습니다. 약간 힘이 빠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김사범 선수가 오늘! 캔자스시티 전에서 커리어 첫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홈런 기록보다…… 아니 이건 아니네요. 아무튼 상당히 이뤄 내기 힘든 기록입니다. 2019시즌 4월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오지 않은 기록이기도 하죠. 바로 그 힘든 기록의 273번째 자리를 김사범 선수가 차지했습니다.]
“잘했어. 무리해서 뛸 이유는 없었으니까.”
1루에서 내 장비를 받아 주던 주루 코치님이 내게 말했다.
“음…… 그건 그렇죠?”
말을 하며 덕아웃에 사인을 보냈다.
뛴다고.
론이 한숨을 푹 내쉬는 거 같긴 했지만…….
헤이스가 성불하기엔 조금 모자란 거 같으니까.
* * *
경기 후, 인터뷰 룸.
기자와 론이 오늘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러니까, 그 도루가 일종의 시위였다는 말씀이신가요?”
“붐에게 확인해 본 결과, 배트플립을 맘에 안 들어 하던 투수가 본인은 삼진을 잡고 세레머니를 하는 게 이상했다더군요.”
“그래서……?”
“언젠가 그가 제게 한 말이 있죠. Manner maketh man. 그는 친절하고 관대한 편이지만, 자신이 정한 선을 넘으면 참지 않죠.”
타다다다닥.
“요즘 들어 그의 배트플립이 상대 팀에게 눈엣가시 같은 행동으로 비춰지는 건 알고 있나요?”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 론은 질문을 한 기자의 이름을 외우며 답변했다.
“메이저리그는 변하고 있습니다. 나 같은 늙은이들이 보는 스포츠가 되지 않기 위해 커미셔너를 포함해 여러 전문가들이 노력하고 있죠.”
꿀꺽.
목이 탔는지, 론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 말은, 현장에 있는 우리도 더 이상 낡은 관습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디트로이트가 이번 시즌 배트플립을 했다는 이유로 보복구를 던진 적이 있는지 되물어보고 싶군요.”
“그 말씀은…….”
“우리는 우리를 대상으로 하는 세레머니에 상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오늘 상대한 어떤 팀처럼 Double Standard가 아니라면.”
짝!
론이 손뼉을 치며 말을 이었다.
“이 논란은 이제 끝냅시다. 제 입장은 보복구가 없었다면 8회에 있었던 붐의 도루는 없었을 거라는 겁니다.”
* * *
[큭큭큭, 오랜만에 경기를 보면서 크게 웃었어요. 사범이 계획한 거죠?]
“그럼요. 이런 걸 지시할 감독이 있겠어요?”
[좋아요. 음, 말하기 조금 그런 주제지만.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대부분의 동양인들은 이런 상황에서 너무 얌전하게 대응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다 보면 언제나 이런 상황에서 손해를 보죠.]
“……듣고 있어요. 계속해요 짐.”
[그러지 말았으면 해요. 오늘처럼. 지금의 사범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선수니까.]
지금의 나는?
“만약 데뷔 첫 시즌 첫 경기였다면?”
[프하하하, 말해 뭐해요? 남은 타석에서 머리로 홈런을 쳤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엔 사범을 무시하는 사람이 적어졌겠지만.]
“오케이. 알아들었어요. 요즘 뭐하면서 살아요? 통 연락이 없던데.”
[뭐, 세상에서, 아니 에이전트 세계에서 제일 맘 편하게 고객의 경기를 보면서 업무를 준비하고 있죠.]
음…… 나라도 그럴 것 같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도핑 테스트 관련해서 사무국 측에 계속 압박을 넣고 있기도 하고.
“재계약 어때요? 내가 볼 땐 에이전트 수수료가 너무 비싼 거 같은데?”
[그거야 뭐, 얼마든지 깎아 줄 수 있죠. 대신 종신계약 하는 거죠? 위약금은 2억 달러 정도?]
“……내가 졌어요. 내일부터 바쁠 예정이니까 연락하지 마요. 다른 에이전트를 알아봐야 하니까.”
[푸하하핫! 그러지 마요. 사범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그래요?”
[오늘 인터뷰 보니까 그거 좋아하는 거 같던데. M.M.M]
“Manner Maketh Man?”
[그래요 그거. 나도 아주 좋아하는 말이에요. 물론 난 조금 다르게 쓰지만.]
“뭔데요?”
[Much, too Much Money. 기대해도 좋아요. 사범을 이 구역의 최고로 만들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