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105화 (105/175)

105화 김사범, 2021 포스트 시즌(우리의 전략은…)

샴페인.

거품.

미친 듯이 뛰어다니던 미친 소.

누군가의 눈물.

아멘.

론의 에미넴 성대모사(론이 말하고 나서야 알았지만.).

수줍은 얼굴로 폴리를 제압하는 시미즈.

케이시와 구석에서 야구이야기를 하는 페이스.

그리고. 그 모든 걸 지켜보며 오랜만에 악마의 피에 흠뻑 젖은 나.

뭔가 꿈같은 이틀이 지났다.

그리고 이제 다시 배트를 들어야 할 시간이다.

우우우웅-

“네, 엄마. 이제 타요?”

[아니, 이미 탔지. 퍼스트 클래스라는데 처음 타 봐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좌석에 이상한 게 막 달려 있고. 침대도 된다는데?]

“그냥 편하게 오시면 되요. 도착할 때쯤 나가 있을 테니까.”

[그래, 알았다. 아들 덕분에 호강하네.]

[엄마! 여기 이거 봐! 샤워실도 있어!]

[이 기지배야! 여기 우리만 있냐!]

“크크큭, 하별이 관리 잘하시고요. 보니까 완전 흥분했네.”

[그러게 말이다. 제 아빠 닮아서 아무튼…… 20년 키워 온 나도 힘든데 누가 쟬 데려갈는지…….]

“요즘은 혼자 사는 여자도 흔한데요 뭐. 혼자 살라고 해요. 걜 누군가에게 맞기는 건 그 사람에게 너무 큰 잘못을 저지르는 거니까.”

[너는 오빠라는 게 말을 해도! 아무튼, 끊어라. 곧 출발한댄다.]

“네 엄마. 아빠도 옆에서 TV만 살펴보지 말고 아들한테 아는 척 좀 해 달라고 전해 주세요.”

[네 아빠가 듣겠니?]

구단에서 부모님과 하별이를 초청했다.

그것도 퍼스트 클래스 좌석까지 끊어 주면서.

‘구단의 이런 뇌물은 항상 옳지. 암.’

물론 받아 본 경험은 거의 없지만.

아니 여기 와서야 처음 받아 봤지만…… 이야기는 많이 들어 봤다.

FA 얼마 안 남은 선배들 부모님 댁에 막 신상 가전제품 들이밀고, 홍삼 보내고. 뭐 그런 거.

[두 팀은 모두 장점이 극명한 팀입니다. 보스턴은 몇 년 전부터 지적받았던 선발이 올 시즌 완전히 무너지면서 불펜의 힘으로 버텨 왔고, 양키스는 시즌 시작 전 물음표였던 선발진의 유망주가 급속도로 성장한 대신 노쇠한 불펜이 문제점으로 지적받았죠.]

음소거를 푼 TV에서 해설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팀 모두 타선이 강하지만, 저는 보스턴 레드삭스가 조금 더 강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양키스도 쉽진 않죠. 1번부터 9번까지 한 방이 있는 타자들이니까요.]

[하하하, 두 해설위원분들의 말씀대로라면 굉장히 흥미로운 경기가 될 것 같네요. 아, 양키스는 이번에 꽤 재미있는 퍼포먼스를 보여 줬죠?]

[아무래도 미국은 자신의 출신 지역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땅이 넓어서일까요? 아무튼, 뉴욕을 상징하는 제이지라는 가수와 디트로이트 출신인 에미넴이라는 가수가 Detriot vs Newyork이라는 음원을 발매했죠.]

[음악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현지에서도 꽤 화제가 된 느낌이에요. 어제 TV에서 본 MLB 포스트시즌 광고에서도 나오던데요?]

[이런 엔터테인먼트적인 측면은 KBO, 한국 프로야구가 메이저리그에게 배워야 하는 점입니다. 보세요, 그 노래 한 곡으로 디트로이트와 양키스 팬들이 불타올랐고, 보스턴은 가운데서 자기들을 무시한다고 또 불타올랐잖아요. 이게 다 홍보로 이어지는 겁니다. 스토리가 있으니까요.]

[하하하, 이제 그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 짓고, 경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양키스 홈에서 펼쳐지는 경기. 양키스의 선발투수는 루이스 세베리노…….]

* * *

경기는 팽팽하게 진행됐다. 정말로.

양키스의 세베리노와 레드삭스의 크리스 셰일은 포스트시즌 모드를 가동하면서 양 팀의 타자들을 그야말로 순식간에 쓸어 넘겼다.

[7회 말, 투아웃 3루의 위기! 타석에는 지안카를로 스탠튼 선수가 나왔습니다.]

[삼진 아웃! 높은 패스트볼에 배트를 힘차게 돌려 봤지만 닿지 못했습니다! 현재까지 탈삼진 9개를 기록하고 있는 크리스 셰일!]

애초에 양키 스타디움에서 보스턴과 양키스가 붙은 결정전인데. 쉬운 경기일 리가 없지.

‘쉽게 졌다간…… 씁쓸함을 느끼기도 전에 자기 팀 팬들에게 죽을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 TV에서 보이는 경기장 곳곳엔 무장한 경찰들이 보였다.

무장 경찰이 저렇게 서 있다는 건, 사복을 입고 잠복중인 경찰은 훨씬 더 많다는 이야기일 거고.

사실, 조금 이해가 안 된다. 아무리 격한 싸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곤 해도, 무장한 경찰들까지 불러와야 했을까?

‘선수들이나 선량한 시민들은 저런 모습을 보면서 더 걱정될 거 같은데.’

[8회 말! 맷 반즈, 결국 스탠튼에게 2루타를 맞고 맙니다! 그사이 애런 힉스와 애런 저지가 홈으로…… 들어왔습니다! 스코어는 2:0!]

응. 아냐.

양키스 구단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거다.

이곳에서 2년 가까이 있었으면서 아직도 문화 차이를 느끼지 못한 김사범, 반성하자.

‘와…… 저걸 저렇게 이용해서……?’

무섭다. 비틀어지거나 자신을 잃을 정도로 큰 팬심은 때로는 아주 무서운 방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메리칸 리그 와일드카드 결정전 -

양키스 승, 2:1.]

내일모레, 우리는 양키스와 디비전 시리즈를 펼친다.

* * *

“우리 엄마, 못 본 새에 더 이뻐졌네?”

“얘는, 미국에서 살더니 너무 느끼해진 거 아냐? 빨리 한국 음식을 먹여야겠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어머니.

“아빠도 왔다.”

“비행기에서 한숨도 안 주무셨죠? 시차적응 하신다고?”

“어떻게 알았냐?”

“제가 아들인데, 딱 보면 알죠. 얼른 가요. 가서 푹 쉬시면 내일부터는 구단에서 붙여 준 가이드랑 관광하시면 되요.”

“그래, 가자.”

다크서클이 광대뼈와 턱을 지나 쇄골까지 내려오신 아버지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졸려하는 김하별, 그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향했다.

얼마 안 돼 도착한 집.

“오늘 너무 늦게 도착해서…… 딱히 가 볼 만한 데가 없어요. 저도 내일부턴 준비를 해야 해서…….”

내 말에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시는 부모님.

“괜찮다. 나도 다 알고 왔어. 세상천지에 바쁜 아들 괴롭힐 부모가 어디 있냐? 알아서 놀고 있을 테니까 넌 네 일이나 잘 해.”

그렇게 못다 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다 조금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띵동.

“누구세요?”

알람도 못 듣고 잠에 빠져 있었나 보다.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아직 시차적응을 하지 못한 어머니가 나보다 먼저 반응하셨다.

‘엄마, 여기 미국이라 한국어로 누구세요라고 해도 잘 못 알아…….’

“오늘 안내를 맡은 가이드입니다. 안녕하세요?”

어렴풋이 들려오는 목소리가…… 왠지 익숙하다.

철컥.

“어머! 이렇게 이쁜 아가씨가! 한국인이에요?”

“아뇨, 국적은 미국이에요. 어렸을 때 입양됐거든요. 반갑습니다! 수리 베이커라고 합니다!”

어?

수리가 왜 여기 있어?

* * *

[부탁할 게 있다기에 흔쾌히 콜을 한 건 나지만……. 이렇게 써먹다니, 짐. 너무하지 않아?]

“하하하. 베이커 씨가 먼저 말씀하셨잖습니까. 사범과 관련된 일은 언제든지,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그렇다고 이런…….]

철컥.

“제 고객이 가족에 대해 아무런 신경을 쓸 필요가 없도록, 최고의 가이드가 필요했거든요.”

[음…….]

“그런 조건에서 보면 최고의 가이드잖아요? 수리 양도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본 사범의 가족들은 유쾌하고 꽤 괜찮은 사람이거든요.”

[걱정은 무슨,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

콰앙!!

[아, 미안하네. 클레이사격 중이라. 아무튼, 정말로 걱정하진 않아. 무슨 일이라도 있겠나?]

콰앙!!

* * *

뭔가.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내가 씻고 나온 사이, 수리와 어머니, 그리고 하별이는 마치 자매와 엄마인 양 모여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사범이 팬이었다고?”

“네. 제가 좀 아파서 병원에 오래 있었는데, 사범ㅆ…… 선수가 봉사활동 겸 찾아왔어요. 그 후에 용기를 얻어 한국에 가서 수술해서 건강을 되찾았고요.”

조심해. 방금 그거 발음이 이상했어 수리. 정말로.

“우리 사범이가 큰일 했네, 큰일 했어. 내가 사범이를 키우면서 제일 뿌듯한 순간인 것 같아.”

아들이 한 생명을 구했다는 게 뿌듯하신지, 어머니는 수리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등을 쓸어내고 계셨다.

“언니, 근데 뭘 보고 우리 오빠 팬이 된 거예요?”

“응? 그건…….”

씻고 나와(당연히 옷은 입고 있었지만) 머리에 남은 물기를 털고 있는 나를 보는 수리의 눈빛이 심상찮다.

“멋있잖아. 계속 노력하고, 착하고.”

“응? TV로 그게 보여요?”

“어? 어…… 보였지. 기사도 나고. 아, 여기 디트로이트 근처에 큰 꽃 시장 있는데, 두 분 다 좋아하시죠?”

김하별이 날 보며 웃었어. 웃었다고!

“그럼, 꽃 안 좋아하는 여자 있니? 남편이 생일선물로 주는 꽃 아니면 언제나 좋지.”

“저는 생일선물로도 좋아요 언니.”

“그럼 우리 거기 가요! 어차피 사범 선수는 이제 경기장에 가야 하니까.”

“좋지!”

때마침 정원의 잔디에 물을 주시던(아버지의 로망이셨단다) 아버지가 들어와 세 여성들에게 말을 건넸다.

“찾아보니까 여기 자동차 박물관이 아주 근사하다던데, 사범이 올 때까지 거기…….”

늦었어요, 아버지.

* * *

지이이잉.

[난 입 다물고 있을게. 대신…… 알지? - 웬수]

분명 어렸을 땐 귀여웠다. ‘오빠, 오빠.’ 하면서 따라다니는 게 천사 같기도 했었지.

하지만 이젠…… 그저 취업난에 허덕이며 지상으로 나온 사탄일 뿐이다.

“붐, 뭘 그렇게 진지하게 보고 있어?”

“아, 아니에요. 그냥 조금, 목숨의 위협을 느껴서.”

“음?”

“농담이에요. 미기는 면담 끝났어요?”

“어 뭐, 나 정도 되는 베테랑이면 순식간에 끝나지. 론과 나는 오래 이야기를 나누기엔 너무 프로야.”

미기가 내 질문에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저도 곧 들어가는데. 운동은 여기까지?”

“오전에 모여서 전력분석도 다 했고, 운동을 하느니 차라리 쉬는 게 더 도움이 되는 편이지.”

“아 그렇겠네요. 저도 그럼 이 정도로만 하고 면담이 끝나면 곱게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사실 전혀 힘들지 않았다.

컨디션이야 뭐, 3일 정도 쉬니까 다시 돌아왔고. 그동안 나는 며칠 쉬었다고 감이 떨어질 정도로 허투루 훈련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냥, 지금은 빨리 가서 김하별과 딜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그것도 좋지. 너무 긴장하면서 몸을 혹사하는 것도 나쁜 거야. 차라리 집에 가서 편안하게 쉬려고 노력해 봐. 난 그럼.”

미기가 퇴근하고. 나는 곧 오늘따라 미친 듯이 뛰고 있는 미친 소와 미기, 쉴 새 없이 종이를 넘기며 토론하고 있는 케이스와 페이스를 지나 론의 감독실로 향했다.

달칵.

“론, 들어가도 되나요?”

“물론이지. 이제 슬슬 끝이 보이는군. 차라리 아까 전력분석 회의 때 다 할걸 그랬어.”

“하하하, 그러니까요. 무슨 일이에요?”

자신의 앞자리를 내주며 론이 말했다.

“뭐, 그냥. 컨디션 점검도 있고, 타순이나 포지션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 하는데…… 붐에겐 별 필요가 없겠군.”

“음…… 그렇긴 하죠. 컨디션은 좋아요. 어디 아프거나 걸리는 곳도 없고. 그저 내보내 주시만 하면 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는 론.

“그래서 말인데…… 아마 이번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1번으로 나설 거야. 시리즈 한정으로 그린라이트도 주어질 거고. 2번도 좋고 3번도 좋지만…… 코칭스태프에선 우리의 우위를 살리려면 이 전략이 옳다고 생각했네.”

아하.

“마구 휘저으란 말씀이시죠?”

“그렇지. 첫 경기에 나설 상대 선발은 아마 킴일걸세. 자네와 아는 사이라고?”

“네. 중학교 동창이죠.”

장난스럽게 웃으며 묻는 론.

“봐줘도 돼. 어차피 1패 정도야 뭐, 양키스 상대론 일도 아니잖은가?”

“음…… 그럴까요?”

나도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약속한 듯 같이 열린 우리 둘의 입.

“never.”

“never.”

병헌아. 다시 만나 반가워.

그리고……, 만나서 반가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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