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김사범, 2021 포스트 시즌(우리의 전략은…)(3)
[요구조건은 그게 다야?]
[ㅇㅇ 아무튼 그때 도와주기만 하면 돼 - 웬수]
[뭐…… 어려운 건 아닌데.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만약을 위한 거니까. 아무튼 콜? - 웬수]
[ㅇㅇ 알겠음. 너 오늘 좀 착하다?]
[좋은 일에 초치고 싶지도 않거든. 저 언니 아니면 오빠 데려갈 사람도 없을텐데 뭐 - 웬수]
[말을 해도…….]
“사범아!”
“네, 네! 엄마.”
뭔가 계속 말을 하시고 있으셨는지, 날 보는 표정이 심상찮다.
“넌 엄마가 말을 하면…… 아니다. 오늘 많이 피곤해?”
“음…… 아뇨. 괜찮아요.”
“그럼 집에 들른 다음에 수리 좀 데려다줘. 콜택시 타고 집에 간다더라. 안 그래도 여기 치안이 안 좋다고 그러든데. 다 큰 여자 혼자 택시 태워 보내는 건 좀 그렇지 않니?”
물론이죠 어머니. 안 그래도 저도 그러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뇨아뇨아뇨,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사범 선수는 경기 준비도 해야 하고…….”
“아니 그래도 그건 아니지. 내가 그건 허용 못 해. 한국인 가족을 가이드하고 있으니까 한국 문화를 따라야지!”
그건 무슨……. 어머니……?
“그냥 편하게 생각해요. 그거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야구가 중요하긴 하지만 사람보다 중요한가? 아, 아니면 사범이 집에서 자고 가요. 집에는 내일 들르면 되지.”
아아…… 아버지……. 갈아입을 옷도 없을 텐데.
“그래요 언니, 나 아까 산 옷 빌려줄게요. 편한 옷도 있고, 자고 아침에 움직이면서 다시 갈아입어요. 나 오늘 친언니 생긴 거 같아서 너무 좋았단 말이야.”
“그래, 하별이 옷 잠깐 빌려 입으면 되겠네. 어때요?”
당연히 집에 가겠지. 수리는 겉은 한국인이어도 속은 미국인이니까. 프라이버시를 얼마나…….
“……그럴까요?”
중요시하지만. 자고 갈 거라고 믿었다.
* * *
스포츠에서는 때때로 각자의 입장이 교차하는 순간이 벌어진다.
바로 지금, 1루에 나가 있는 김사범과 마운드에서 땀을 닦고 있는 제임스 팩스턴처럼.
‘저 빌어먹을 자식이…….’
[오늘 3번째 출루를 기록하고 있는 김사범 선수입니다. 2회 말에는 두 번째 출루를 기록하자마자 견제를 뚫고 3루 도루까지 성공시키며 팀의 첫 득점을 올리기도 했죠.]
[제임스 팩스턴 선수가 사력을 다해 막아 보긴 했습니다만, 애초에 좌완투수치고 픽오프가 썩 좋지 않은 투수다 보니 쉽게 도루에 성공하는 모습입니다.]
제임스 팩스턴이 FA 시장에 나섰던 작년, 꽤 많은 팀이 리빌딩을 선언하며 허리띠를 졸라맨 덕분에 결국 양키스에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양키스가 ‘결국’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엔 큰 구단이지만…… 문제는 계약 조건.
2+1, 구단과 선수가 합의하에 옵션을 행사하면 최대 보장 금액은 3년 2500만 달러.
이런저런 옵션을 포함하면 3년 3300만 달러까지 올라가긴 하지만, 양키스는 영악하게도 소화 이닝과 경기에 많은 옵션을 몰아넣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건강한’ 제임스 팩스턴을 쓸 수 있다면 손해 보는 계약이 아니었으니까.
양키스에 오기 전, 시애틀에서는 1선발 대접을 받던 제임스 팩스턴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계약이었지만, 얼어붙은 시장 상황에서 로테이션을 자주 거르던 33세의 선발 투수에게 관심을 보이는 구단은 많지 않았다.
‘여기서 보여 줘야 한다.’
아쉽게도, 이번 시즌에도 좋은 구위와 함께 또다시 찾아온 부상으로 25경기밖에 나서지 못한 제임스 팩스턴은 포스트시즌에라도 강한 모습을 보여 주길 원했다.
졍규시즌에 조금 약점을 보이더라도, 단기전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면 시장에서 충분히 환영받는 선발이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 오늘 경기에서 다시 2번으로 출장한 이삭 페레데스 선수가 다시 한 번 볼넷을 얻어 냅니다!]
[5회 말이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 디트로이트의 테이블 세터가 얻어 낸 볼넷이 벌써 5개입니다. 투수 입장에서는 정말…… 끔찍하겠네요.]
조금씩 늙어 간 몸은 그의 의지에 적절하게 반응해 주지 못했고.
따아아악!
자신도 모르게 힘이 빠진 손아귀는 꽤 위력적이라는 평가를 받던 그의 패스트볼을 그저 그런 공으로 만들었다.
[홈런! 홈런입니다! 이번 시리즈, 홈에서 펼쳐지는 1, 2차전에서 미구엘 카브레라 선수의 배트가 폭발하는군요! 단번에 4점 차이로 앞서가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패스트볼이 몰렸어요. 양키스는 투수 교체를 심각하게 고려해 볼 때가 됐습니다.]
[하지만 뒤에 나올 불펜진이 제임스 팩스턴 선수보다 낫다는 보장이 없거든요.]
[그게 바로 지금 양키스가 직면한 문제입니다. 월드시리즈에 도전하고 싶다면 다음 시즌에는 꼭 노쇠한 불펜진을…….]
“수고했어.”
“……네.”
“오늘 경기에서 많은 공을 던지지 않았으니, 아마 5차전에서 기회가 있을 거야.”
제임스 팩스턴은 애런 분의 말을 듣고도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았다.
‘5차전? 하하하…….’
살짝 떨려오는 그의 왼손에서 느껴지는 어떤 ‘감’이 이번 시즌의 종료를 알리고 있었으니까.
* * *
[양키스와 디트로이트의 디비전 시리즈 2차전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9회 초, 마운드에는 아직도 케이시 마이즈 선수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서 있군요.]
[8이닝을 던지며 92개, 2실점을 했습니다. 9회에도 케이시 마이즈 선수를 올렸다는 건 디트로이트가 이 시리즈를 오래 끌고 갈 생각이 없다는 뜻이죠.]
[네, 그렇군요. 9회 초, 과연 양키스가 기적을 만들 수 있을까요?]
스프링캠프 때와 달리, 케이시와 페이스는 꽤 잘 맞는 친구가 됐다.
어떨 때는 시미즈보다 더 친근해 보일 정도로.
그리고 둘의 그런 관계는 사인을 나누는 장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끄덕.
페이스가 사인을 내고, 단번에 끄덕이는 케이시.
케이시가 이번 경기에서 사인을 받고 고개를 저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페이크 사인이 나오는 경우는 제외하곤.
“스트라이크!”
지금도 그렇다. 100개 가까이 던진 투수에게 몸쪽 패스트볼을 요구하는 포수도 대단하고, 그걸 이미 생각하고 들어와 완벽하게 제구해 낸 투수도 대단하다.
저런 공을 머리에 넣지 못하고 들어온 타자만 불쌍한 거지 뭐.
“스트라이크! 아웃!”
머리가 좋은 투수와 포수가 붙어 있으니 타자들의 배트는 그저 허공을 가르는 용도밖에는 안 된다.
야구라는 스포츠가 그렇듯, 타자보다는 투수가 훨씬 유리하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퇴근 시간이 다가왔음을 느꼈는지, 오늘의 구심도 점점 콜을 하는 액션이 커져간다.
따악!
“내가! 내가 처리할게!”
팔을 크게 휘저으며 헤이스와 이삭에게 크게 외쳤다.
퍽.
공중에 잠시 떠올랐던 공이 글러브에 들어오며 낸 약간의 소리.
그리고 잠시 후. 호랑이의 포효소리가 들렸다.
* * *
“디비전 시리즈에서 2연승을 거뒀습니다. 정규시즌의 기세를 포스트시즌에서도 똑같이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뭐죠?”
“좋은 선수들이 좋은 퍼포먼스를 보이는데 비결이 필요할까요? 비결이라 할 만한 건 없지만, 하나를 꼽자면 선수들의 헌신이겠죠.”
“헌신이요?”
“76홈런을 친 선수가 욕심을 버리고 차분하게 공을 골라 살아 나가고 있고, 그 선수가 만들어 낸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베테랑 선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게 자신의 위치에서 팀을 위해 헌신하는 플레이죠.”
“애런 분 감독이 자신의 완패를 인정하며 홈에서는 이렇게 쉽게 지지 않을 거라는 멘트를 남겼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하하하, 그럼 우리는 3차전에서 미기를 1번타자로 내보내죠. 그의 당황하는 얼굴을 보는 건 꽤 재미있거든요.”
[뉴욕 양키스, 디비전 시리즈 1, 2차전 패배. 리버스 스윕 가능성은? 역대 포스트시즌에서 단 7번밖에 나오지 않은 기록.]
[루이스 세베리노. 3차전 등판 예정.]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붐 ‘볼넷도 나름 매력 있는 기록’, 완전한 1번타자로서의 각성?]
[뉴에라, MLB와 협력하여 2021 디비전 시리즈 한정판 발매, 사실상 뉴욕 양키스 vs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를 노린 디자인.]
[JAY Z, 한정판 뉴욕 양키스 뉴에라 10,000개 주문, 양키스 구단에 기증.]
[뉴욕 양키스 ‘3차전에 입장하는 팬들에게 선착순으로 나눠 줄 것.’]
[디트로이트, 3차전 선발 뷰 버로우즈 예고. 디트로이트식 오프너?]
* * *
2차전을 마치고, 구단은 선수들을 위해 오늘 하루는 푹 쉰 뒤 내일 오전 중에 뉴욕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푹 쉬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그렇게 도루 많이 하면 힘들지 않아? 부상 위험도 높고.”
“그렇긴 한데…… 이번 시리즈 컨셉이거든. 앞으로 한두 경기만 더 뛰면 되니까.”
“컨셉?”
거의 모든 불이 꺼진 한적한 주택가.
은은한 달빛을 의지하며 수리와 산책을 하면서.
“나를 거르기만 해서는 답이 없다는 사실을 더 강하게 알려줘야지. 어쨌든 팀에게 있어서는 내가 득점을 하는 것보다 타점을 올리는 게 나으니까.”
“음…… 그렇긴 한데, 그래도 거를 팀은 거르잖아?”
“챔피언십이나 월드시리즈에서 더 견제가 심해질 수도 있지만, 기회만 생기면 뛴다는 이미지는 내 뒤의 타자에게도 도움이 되잖아.”
“그렇지. 맞아.”
검은색 머리카락를 찰랑이며 끄덕이는 수리.
잡고 있던 손을 풀고 오른팔을 들었다.
내 품안으로 파고들어 오는 수리에게서 좋은 향기가 난다.
“우리 부모님은 어때? 괜찮아? 부담되지는 않고?”
“그럼, 두 분 다 좋은 분이시잖아. 하별이도 마찬가지고.”
“그렇긴 하지. 하별이는 빼고. 아무튼, 어쩌다가 가이드가 된 거야? 엊그제부터 물어보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었네.”
내 질문에 수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빠가 짐이 뭔가 부탁한 게 있다고 디트로이트로 가 보라고 하셨거든. 난 뭐, 자기 얼굴 보고 응원해 주라는 이야기인 줄 알고 신나서 왔는데……. 와 보니까 갑자기 가이드를 부탁한다고 하던데?”
“큭큭큭, 짐답네. 놀랐지?”
“약간? 근데 좋았어. 나도 자기 부모님 뵙고 싶었거든.”
이 달빛을 내 눈에 담아. 짐에게, 치얼스.
고마워요 짐.
“언제 말하지?”
“응?”
“우리 사귀고 있는 거. 슬슬 아닌 척하기도 힘들고…… 잘 숨기고 있긴 한데…….”
아냐. 그거 들켰어. 그것도 첫날에 바로.
그런데 사실, 숨길 이유는 없다. 첫날 이야기하지 못한 건 그냥 당황해서 말할 타이밍을 놓친 거고. 어제는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난 수리만 괜찮다면 바로 말해도 돼. 부담될까 봐 이야기 안 한 것뿐이니까. 겪어 봤겠지만…… 우리 부모님이 리액션이 장난이 아니거든.”
“난 괜찮아. 그게 더 편할 거 같기도 하고. 말 나온 김에 산책하고 들어가서 바로 말할까?”
오우…… 이게 바로 아메리카식 추진력?
아니면 누나의 패기인가?
“그래. 들어가자마자 말하자.”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이런 거 숨겨 봤자 좋은 꼴 못 본다.
잠시 후.
“알고 있어. 아들.”
“허허허, 우리 사범이가 다 컸네. 이런 이쁜 며느리도 데려오고 말이야.”
“뭐야? 이렇게 쉽게 말할 거면 왜 숨기라고 한 거야?”
음…….
이럴 거면 왜 다들 모른 척한 거야?
* * *
삼십 분 전, 김사범과 수리가 산책을 나간 집.
“쟤는 언제가지 숨기려고 하는 거지?”
“음?”
“아직도 모르겠어요? 쟤네 둘, 보통 관계가 아닌 것 같은데?”
- 어머니의 날카로운 촉(S)가 발동했습니다.
“그래? 난 모르겠던데.”
“몰랐겠지. 사범이가 당신을 닮은 거니까. 아무튼, 쟤네 둘 아마 사귀고 있을 거예요.”
씻고 나온 김하별이 부모님의 대화를 듣고 놀라 되물었다.
“어? 엄마 알고 있었어?”
“그럼. 내가 배 아파 낳은 아들 마음도 모르는 게 말이 되니? 애초에 행동이 달라졌는데. 수리 그 애도 티 나고.”
“무슨 티?”
“너는 낮선 사람 집에서 모르는 사람이 하루 자고 가란다고 바로 알겠다고 하는 사람 본 적 있니? 거기서 확신했지. 뭔가 있다고.”
“와…… 우리 엄마 장난 아니네?”
“내가 괜히 그 많은 드라마들을 보는 게 아니란다. 하별이 너도 알고 있었지?”
“알고는 있었는데, 비밀로 해 달라고 해서 비밀로 했지.”
“오빠한테 뭐 뜯어내고 그런 거 아니다. 나중에 다 돌아올걸?”
“엄마는, 나도 알아. 이번엔 선의로 도와준 거야. 수리 언니 같은 여자를 오빠가 어떻게 만나겠어?”
두 모녀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길한(52세)는 혼자 나직이 읊조렸다.
“정말 둘이 사귄다고? 그런 티가 하나도 안 났는데……. 사범이 그 녀석, 연기가 많이 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