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110화 (110/175)

110화 김사범, 2021 포스트 시즌(Dirty Bomb)(2)

“이제 왔니? 밥은 먹었고?”

“대충 먹고 왔어요. 엄마 아빠도 도착한 지 얼마 안 됐나 봐요?”

“네 아빠가 인터뷰 끝나고 같이 오자는 걸 말리느라 혼났지. 수리는 지금 씻고 있다. 아빠는 산책 나가셨고.”

“여기 와서까지 산책을 하시는 거 보면 참······.”

“네 아빠 취미가 사범이 네 경기 보는 거하고 산책밖에 없으니까. 뭐라도 차려 줄까?”

“좋죠. 너무 간단히 먹어서 나중에 배고플 거 같아요.”

어머니와의 대화가 끝나고, 구단에서 보내준 자료를 읽으려 태블릿을 켰다.

“오빠 왔어? 엄마, 나 잘게!”

“그래. 자라. 내일 가져갈 짐 싸는 거 까먹지 말고!”

“알겠어! 내일 경기장에서 바로 가는 거지? 공항으로?”

“응, 짐하고 몸만 들고 오라더라.”

나도 몰랐는데, 포스트시즌에는 선수들이 묵는 숙소에 가족들을 초대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같은 층을 쓰거나 같은 호실을 쓰는 건 지양한다곤 하지만······. 그래도 미국에 온 김에 내 경기를 무조건 다 보고 싶어 하시는 부모님을 모시고 휴스턴으로 갈 수 있게 됐다.

‘그나저나, 하별이 쟨 핸드폰을 손에서 떨어트려 놓질 않네. 쯧쯧.’

요새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스마트폰 중독이 그렇게 심하다던데. 문제다, 문제.

“왔어···요? 오늘 경기 재미있었어···요.”

아. 어색해. 괜히 더 어색해.

수리에게 슬쩍 다가가 작게 말했다.

“갑자기 말투가 왜 그래?”

“인터넷에서 봤는데, 한국의 어머니들은 자기 아들한테 말 놓는 거 싫어한다던데?”

“그래서 그러는 거야?”

“응······.”

“기다려 봐.”

“왜? 왜? 뭐하려고?”

주방으로 들어가 내가 먹을 밤참을 준비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사실 나하고 수리하고 말 놓고 지내고 있는데, 혹시 이런 거 별로야?”

“응? 아, 뭐 너네들이 사귀는 건데 뭐. 괜찮다. 엄마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다행이다. 우리 어머니는 그런 걸 신경 안 쓰는 타입이라.

“수리! 들었어? 말 놔도 돼! 우리 엄마는 그런 거 신경 안 쓴대.”

주방으로 들어오는 수리의 표정이······ 어······.

내가 뭘 잘못했나?

* * *

다음 날.

“붐,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래?”

“어, 있지. 근데 별건 아냐. 아니긴 한데.”

“그런 사람치고는 너무······. 폴리! 가서 사람들한테 붐이 다 죽어 간다고 말해!”

······이삭.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당장 오늘 선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먼저 아닐까?

그렇게 이삭을 보며 우리 팀에 1번 타자가 있어야 할지, 아니면 없어도 대체자가 있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라커룸에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붐이 다쳤다고?”

“어디야? 거의 죽어 간다며?”

“라커룸에서 쓰러진 거면 심한 거 아냐? 어? 멀쩡한데?”

“얼굴이 완전 구겨져 있잖아. 어디 많이 아픈가 본데? 일단 팀 닥터한테 갈까?”

내 얼굴이 구겨진 건 이 상황 때문이고.

내 앞에서 빙글대며 웃고 있는 이삭을 때릴까 말까 고민 중이고.

사람들을 불러오랬다고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다 끌고 온 폴리도······. 됐다. 론이 달려오지 않은 게 어디야.

“붐! 몸에 무슨 이상이 있나?”

아.

론도 왔다.

그렇게 소란이 끝나고. 론의 의지에 따라 팀 닥터에게 간단한 검사를 받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폴리에게 한 2만 달러 정도 벌금을 매기시는 게 좋겠는데요. 아니면 제가 팀을 나가겠습니다.”

“좋은 생각이네. 2만 달러에 2만 달러 더해서 총 4만 달러 정도면 되겠지?”

“그럼요. 이삭은 방출해 주세요. 저런 녀석이 메이저리그에 남아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네요.”

“좋군. 그럼 우리 팀은 유격수와 2루수를 합쳐 세컨-숏으로 운영하도록 하지.”

“자신 있습니다. 솔직히 이삭은 도움 되는 게 없어요.”

론에게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고, 이런저런 만담을 하며 라커룸으로 향했다.

“음······ 정말 문제없나?”

“그럼요. 그냥 표정이 굳어 있던 거뿐이에요.”

“알겠네.”

사실 수리가 오늘 아침까지 삐져서 나와 말도 안하는 거 때문에 그랬지만.

나는 경기장 밖의 일을 경기장 안까지 가져갈 정도로 프로의식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 경기, 어떻게 보십니까?]

[일단 휴스턴 입장에서는 어제와 같이 3번으로 출장한 김사범 선수를 막는 게 중요하겠죠. 디트로이트는 어제 2번 타순에서 크게 활약을 하지 못한 닉 카스테야노스 선수를 6번으로 내리고, 포수인 페이스 달턴 선수를 2번으로 출전시키는 강수를 뒀습니다. 최근 페이스 달턴 선수의 타격 성적이 괜찮기 때문에 이런 변화를 가져간 것으로 보입니다.]

[디트로이트와 휴스턴, 두 팀 다 비교적 어린 투수들을 선발로 내세웠는데요. 케이시 마이즈 선수가 시즌 16승 6패, 3.01의 방어율을 기록하고 있고, 포레스트 휘틀리 선수는 14승 9패, 3.4의 방어율을 기록했습니다. 기록만 봐서는 비슷하지만, 구위 면에선 휘틀리 선수가, 경기 운영와 이닝 소화능력에서는 마이즈 선수가 우세라고 볼 수 있겠네요.]

“플레이 볼!”

경기가 시작됐다.

타순이 조금 바뀐 우리와 달리 어제와 같은 라인업을 들고 온 휴스턴.

1번으로 나서는 카일 터커의 눈빛이 매섭다.

몸쪽 공에 약한 타자고, 어제도 몸쪽 공에 막혀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으니까······ 아마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나왔겠지.

“볼!”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은 녀석에게 케이시와 페이스가 준 선물. 몸쪽으로 공 한 개는 더 들어가는 깊은 패스트볼. 경고다. 더 이상 홈플레이트에 붙지 말라는 경고.

훤히 들어날 정도의 약점을 가지고 있지만 정규 시즌에서 3할 언저리를 기록한 타자라는 건, 가진 약점보다 강점이 더 대단하다는 소리와 같다.

아마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었다고 바깥쪽 공을 던지는 투수나, 몸쪽 공의 제구에 애를 먹는 투수를 상대로 볼넷을 뺏어 내고, 바깥쪽으로 오는 공을 쳐서 넘기는 방식으로 타석에 접근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케이시와 페이스가 그렇게 쉬운 상대는 아니지.’

“볼!”

오기를 부리며 홈플레이트에 더 달라붙는 녀석을 상대로 오히려 더 깊숙하게 공을 집어넣는다. 거의 유니폼에 스칠락 말락 하는 공.

놀라서 상체를 뒤로 젖히며 넘어진 녀석이 페이스에게 뭐라 말하는 것 같지만, 페이스는 아무런 반응 없이 오히려 구심에게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스트라이크!”

몸쪽 공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이렇게 된다.

몸쪽에서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 그리고 이렇게 판이 깔리면······.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저 배터리는 악마가 되지.

[아, 케이시 마이즈 선수, 2구 연속 몸쪽 스플리터를 던진 후 패스트볼을 몸쪽 낮은 코스에 집어넣었습니다.]

[과감한 몸쪽 승부입니다. 저만큼 몸쪽 공을 다룬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거든요.]

[저 공만 봐서는 올 시즌 케이시 마이즈 선수가 올린 승수가 너무 적다고 느껴지네요. 저런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면 20승은 따놓은 당상이거든요.]

알투베, 코레아, 브리그먼

휴스턴이 자랑하는 세 명의 타자가 볼넷 하나를 제외하곤 별다른 소득 없이 물러났다.

“굿 보이.”

“당연하지. 이제 손만 뻗으면 잡힐 거리에 내 꿈이 있다고.”

케이시의 꿈? 아, 월드시리즈.

“맞아. 내가 거기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이번 공격, 잘 보고 있어.”

소박한 꿈을 가진 친구를 위해 배트를 휘둘러야 할 시간이다.

[타석에 디트로이트의 1번 타자인 이삭 페레데스 선수가 들어섭니다.]

상대는 포심 패스트볼,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을 던지는 클래식한 타입의 투수.

문제는 구종 모두가 리그 평균 수준을 웃돈다는 거다.

특히 체인지업과 패스트볼 같은 경우에는 제구와 구속 모두 특급 수준이라고 평가되고 있고.

“이삭이 나가야 경기가 편한데 말이야.”

당연한 이야기.

미기의 팔자 좋은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슬그머니 일어나 타이밍을 잡기 시작했다.

“스트라이크!”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97마일. 하지만 시즌 중에 겪어 봤듯, 수치상의 구속보다 조금 더 뻗는 느낌의 패스트볼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 역시 체인지업이 기가 막힌 투수네요. 이삭 페레데스 선수도 핸드-아이 코디네이션, 그러니까 눈과 손의 협응력이 좋다는 평가를 받는 선수인데, 그런 이삭 선수에게 큰 헛스윙을 유도해 냈습니다.]

[좋은 투수네요.]

나는 대기타석으로 나서며 기억 속에 있는 투수의 공과 어제 받은 자료, 그리고 경기장에서 본 공들의 움직임을 되뇌었다.

“별다른 건 없어. 특별히 눈에 띄는 버릇도 없고.”

“흠.”

“폼이 깨끗해서 오른손은 잘 보이는 편이고.”

“오케이. 수고했다.”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이삭을 배웅하며 대기타석에서 타격자세를 잡았다.

그런 내 눈에 갑자기 보이는 관중석. 부모님과 하별이, 수리가 모여 앉아서 내 모습을 보고 있다.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기분.

돌아오기 전에는 부모님이 경기장에 오시는 게 그렇게 싫었었는데.

‘후우, 힘을 빼고. 집중, 집중하자.’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상대는 몇 년 후, 아니 지금도 한 팀의 프론트라이너를 맡기에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투수다.

“스트라이크!”

타석에 서 있는 페이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타격자세를 잡는다.

평정심이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온몸으로 보여 주는 녀석.

나도 그런 페이스의 얼굴을 보고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볼!”

[페이스 달턴 선수가 흘러나가는 슬러이더를 지켜보면서 카운트는 1-1이 됩니다.]

[떨어지는 움직임보다 흘러나가는 움직임이 큰 슬라이더에요. 이런 구종이 몸쪽으로 들어오면 타자들이 꼼짝 못하고 당하곤 합니다.]

[흔히 프론트도어라고 불리는 코스입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을 가진 공이 잘 채지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행잉 슬라이더로 변해 투수의 목줄을 잡고 흔들기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포레스트 휘틀리 선수도 슬라이더의 구사 비율을 크게 가져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따악!

타석에 들어설 때부터 패스트볼 하나만 노렸는지, 페이스는 살짝 높은 패스트볼을 결대로 받아쳐 안타를 만들어 냈다.

- Boom! Boom! Boom! Boom!

관중석의 팬들이 다리를 구르며 내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 * *

“조금 빠졌어요. 올라올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휴스턴의 포수인 맥스 스태시가 괜히 불퉁하게 이야기하는 포레스트 휘틀리의 엉덩이를 툭 치며 말했다.

“알아, 그냥 올라온 거야. 다음 타석이 누군진 알지?”

“모를 리가요. 여기 관중들이 모두 저 녀석 이름만 외치고 있는데.”

“어떡할 거야? 거를 거야? 벤치에서는 너의 판단에 맞기라고 하더군. 물론 기본은 어려운 공으로 거르는 거야.”

잠시 고민에 빠진 휘틀리.

“어차피 오늘 경기에서 4번은 만날 상대잖아요? 리스크가 적을 때 한번 시험해 보죠. 최대한 구석진 코스로 리드해 주세요.”

“좋아. 하지만 내가 판단했을 때 영 아니다 싶으면 확실하게 뺄 거야.”

“OK.”

곧 맥스 스태시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고, 구심 또한 자리를 잡았다.

‘바깥쪽 떨어지는 커브. 바운드 될 정도로 크게.’

휘틀리가 생각하기에, 스태시의 리드는 이 무대의 첫 공으로 던지기에는 너무나 소극적이었다.

‘패스트볼. 높게.’

다시 한 번 고개를 젓는 휘틀리.

그런 휘틀리를 보며 맥스 스태시는 5분 전으로 돌아가서 마운드의 저 녀석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OK? 내가 아는 OK와 저 녀석이 아는 OK가 다른 뜻인가?’

맥스의 생각에 휘틀리가 저러는 이유는 하나다. 말로는 팀을 위해 거른다고 하지만, 사실은 붙어 보고 싶다는 것.

‘바깥쪽 슬라이더?’

마침내 휘틀리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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