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김사범, 2021 포스트 시즌(Dirty Bomb)(4)
모든 스포츠, 명경기에는 스토리가 있다.
무시하던 팀원과 무시받던 팀원이 마지막 1초를 남기고 환상적인 팀플레이로 골을 넣은 뒤 하이파이브를 한다던지, 최고라 칭해지는 팀을 상대로 3번 슈팅해서 3번 골을 넣는다든지.
라이벌 상대로 부상을 입어 하얀 양말이 빨갛게 물들 정도인데도 끝까지 공을 던져 승리를 따낸다든지.
꼭 그렇게 극적인 상황이 펼쳐지지 않더라도, 야구란 스포츠는 경기에 뛰는 선수들의 스토리가 꽤 자주 맞붙곤 한다.
예를 들어,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2연승을 거둔 팀의 괴물 같은 운동능력을 가진 유격수가 컨디션이 너무 좋은 나머지, 2루 베이스 위로 날아가는 타구를 몸을 날려 건드리는데 성공하고.
타악!
하필 글러브에 맞은 공이 주자 2루 상황에서 초인적인 육감으로 먼저 타구를 향해 달려오던 중견수의 옆으로 빠지기도 한다.
“닉! 이삭!”
외야의 잔디에 떨어진 공이 기묘한 회전으로 인해 2루수가 가기에도, 우익수가 달려오기에도 먼 애매한 곳에 떨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보통 이런 스토리의 엉킴을 우린 ‘기적’이라 표현한다.
[아! 5회 말, 원아웃 주자 2루에서 묘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김사범 선수가 완전히 날아올라 캐치를 시도했지만, 이 타구가 글러브에 맞고 굴절되어 애매한 곳에 떨어졌습니다. 그사이에 카일 터커 선수는 전속력으로 달려 홈에 들어왔습니다.]
[타자주자를 1루에 묶은 게 다행일 정도에요.]
[시리즈 내내 빈공에 시달린 휴스턴으로서는 하늘이 도운, 기적적인 득점이네요.]
[이렇게 되면 두 번째 투수로 올라온 마이클 풀머 선수로서는 더 초조해지겠어요. 마침 벌렌더 선수가…….]
“마이클, 미안해요.”
내가 컨디션이 조금만 안 좋았어도. 아니면 중견수인 대즈가 뭔가에 홀린 듯 빠르게 대시하지 않았다면 이뤄지지 않을 실점이었다.
“괜찮아. 그걸 건드린 거 자체가 대단한 일이지.”
우리는 모두 그걸 안다. 적어도 여기서 뛰는 선수들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마이클 풀머 선수가 또다시 볼넷을 내줍니다. 원아웃 만루. 타석에는 알렉스 브리그먼 선수가 들어섭니다.]
투수가 기계가 아닌 사람인 이상, 아주 약간의 실금이 이런 상황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타임.”
페이스가 심판에게 양해를 구하고 마운드를 향해 걸어왔다.
자연스럽게 마운드 근처로 모두 모인 내야진.
“원아웃이니까 병살을 노리면 됩니다.”
“음…….”
당연한 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것도 페이스의 능력이다.
“당겨치기에 능한 타자니까 시프트를 강하게 걸고 어떻게든 땅볼로 유도하죠. 오늘 붐의 컨디션이 좋으니 충분히 잡을 수 있습니다.”
“……무조건.”
무조건 잡을 거다.
“후, 좋아. 알겠어. 지금 내가 할 일은 그거니까. 사인 내고 바로 미트를 가져다 대면 돼. 믿을 테니까.”
마이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페이스.
그리고 모두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집중. 집중하자.’
최고의 집중력이 필요한 순간이다.
“볼!”
[2-2, 마이클 풀머 선수와 알렉스 브리그먼 선수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승부를 펼치고 있습니다.]
8구째, 몰린 카운트에서도 쉴 새 없이 공을 커트해 내는 브리그먼이 마침내 2-2라는 스코어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떠억!
9구, 가운데서 살짝 밑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받아친 공이 내 쪽으로 날아왔다.
‘애매해!’
지면에서 30cm 정도의 높이로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타구. 빠르게 대시한다면 노바운드로 처리가 가능하다.
고민은 잠깐. 내 몸이 나도 모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탁!
펑!
“아웃!”
“아웃!”
[아, 병살입니다! 병살이에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휴스턴 타자들이 그저 멍하니 심판만 바라보네요!]
[휴스턴의 AJ 힌치 감독이 그라운드로 뛰쳐나옵니다. 이게 어떻게 병살이냐는 거죠.]
[느린 그림으로 보시죠. 아! 김사범 선수가 공을 바로 잡은 게 아니라 바운드 후에 건져 올렸군요!]
[순간적으로 속도를 늦췄죠. 그리고 타구를 바로 잡은 줄 알고 귀루하던 휴스턴의 타자들을 상대로 여유롭게 병살을 잡아냅니다.]
[플라이 타구가 아닌 라이너성 타구였으므로 당연히 인필드 플라이는 선언되지 않았고, 고의낙구가 아닌 숏바운드로 잡은 것이므로 룰을 위반하지 않았습니다.]
[심판진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네, 아웃이 맞군요.]
[휴스턴 벤치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챌린지를 요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걸 증명하죠. 하지만 이렇게 병살로 이닝이 바로 끝나게 되면 분위기가 넘어갈 수도 있거든요.]
[아. 그렇죠.]
[현재 저스틴 벌렌더 선수가 5이닝 퍼펙트를 기록하고 있다 보니까 이렇게 기세를 넘기고 싶지 않다는 의미죠.]
[김사범 선수의 센스 있는 플레이로 쓰리아웃, 경기는 6회 초로 넘어갑니다.]
“미친 거 아냐?”
“난 갑자기 2루로 던지길래 뭔가 했다니까?”
“그러게. 완전히 세잎 타이밍이었는데.”
“뭐야? 뭐야? 붐이 뭐한 거야?”
“뭐했지. 아주 좋은 뭐를.”
팀원들의 칭송을 들으며 덕아웃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즐겁다.
그리고 덕아웃 앞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던 선발투수가 글러브로 엉덩이를 툭 쳐 주면 두 배로 즐겁고.
‘이제 저 늙은 괴물을 잡아야 할 시간인데…….’
오늘 경기, 쉽진 않을 것 같다.
* * *
7회 초.
이삭이 타석에 들어섰다.
“스트라이크!”
퍼펙트게임.
한 경기에서 투수가 보여 줄 수 있는 기록 중 최고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런 투수를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굴욕적인 기록이기도 하고.
‘그렇게 기록을 신경 쓰다 보면 저런 스윙이 나오는 거지.’
스윙을 하는 듯, 안 하는 듯 엉거주춤한 자세와 흔들리는 동공. 이삭답지 않다.
“미기. 이삭이 덕아웃으로 돌아오면 한 대 때려 주세요.”
내 부탁을 들은 미기가 날 보며 말했다.
“당연하지. 저건 한 대만 맞아서 될 문제가 아닌데.”
“스트라이크!”
고개를 저으며 타석 밖으로 나가는 이삭.
홈경기, 퍼펙트 피칭 중인 명전 입성이 확실한 베테랑 투수를 상대하면서 제일 힘든 게 저거다.
태평양처럼 넓은 스트라이크 존.
“헤이, 이삭!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스윙하면 붐이 네 척추를 다 뽑아 버린다는데?”
옆에서 미기가 이삭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용케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잠시 나와 미기를 번갈아 보는 녀석.
난 부정하지 않았다.
“파울!”
[아, 9구째 패스트볼을 커트한 이삭 페레데스 선수입니다. 볼카운트는 다시 2-3!]
[2구만에 투 스트라이크로 몰린 뒤로 벌써 7구째입니다. 벌렌더 선수 입장에선 짜증이 나겠죠.]
[흥분으로 본인의 기록을 망치진 않을 겁니다. 베테랑 선수니까요.]
역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이지.
“Where drums beat, laws are silent.”
오늘 미기와 호흡이 좋은데?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나저나 벌렌더는 나이가 몇인데 지치질 않네요.”
“그 나이가 몇인 놈과 내가 같은 나이지.”
“……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Where drums beat…….”
으윽!
“뭐야?”
“이삭이 맞았어!”
황급히 고개를 돌려 그라운드를 보니 이삭이 허벅지 부분을 잡고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폴리 잡았어?”
“불펜으로 간 지 오래야. 아마 거기서 잘 잡고 있겠지.”
불펜을 비춰 주는 모니터를 보니 폴리는 한참 몸을 풀고 있었다.
‘고의일 리가 없지. 스스로 퍼펙트게임을 망치는 투수가 있을 리가.’
[아, 허벅지 뒷부분에 맞은 것 같죠?]
[커브로 보이는데…… 많이 아픈가 봅니다.]
[음…… 저 부위는…….]
[아, 네. 일어나네요. 절뚝거리면서 1루를 향해 걸어가는 이삭 페레데스 선수입니다.]
저놈 저거 인성질 하는 거 보소.
경기 막판에 힛 바이 피치로 퍼펙트 놓친 거도 아까운데 그 타자가 웃으면서 1루로 가는 걸 보는 투수의 맘은 어떨까?
‘그것도 15살 넘게 차이 나는 녀석이…….’
모르긴 몰라도 아주 화났을 거다.
타석으로 나가는 페이스에게 애도를.
따아악!
정정한다.
페이스에게 얻어맞은 벌렌더에게 애도를.
분명 하늘에서 땅까지 추락한 기분이겠지.
커리어 첫 퍼펙트게임을 질척이는 인성 더러운 멕시칸에게 뺏기자마자 일본에서 온 쓸데없이 진지한 아메리칸에게 안타라니…….
그리고 곧 동방의 작은 반도에서 온 덩치 크고 홈런 잘 치게 생긴 코리안에게…….
“스트라이크!”
음.
좌절이나 분노, 절망 이런 거 안 하나?
[페이스 달턴 선수가 초구를 노려 안타를 치고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김사범 선수에게 굉장히 공격적인 초구를 던진 저스틴 벌렌더 선수입니다.]
[대단하네요. 이젠 정말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무사 1, 2루 상태기 때문에 김사범 선수를 거르지도 못해요.]
[벌렌더 선수는 거를 생각조차 안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리그 최정상급 선발투수로 거의 십여 년을 버텨 온 선수니까요.]
방금 전 공을 쳤어야 했다.
‘아니, 치지 말았어야 했나?’
누가 잘 제구된 97마일짜리 몸쪽 패스트볼을 치는 게 쉽냐고 물어본다면 내가 아는 모든 부정적인 표현을 담아 한마디 해 줄 테지만…….
분노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고 있는 벌렌더의 다음 공이 그것보다 쉽다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2구.
똑같은 몸쪽 코스. 패스트볼.
‘한 번 본 이상……!’
3타석, 타이밍도 잡았고 눈에 공도 익었다.
이 정도 공을 담장 밖으로 넘기는 건 일도…….
후우우웅!
“스트라이크!”
[아, 과감한 몸쪽 승부입니다. 체인지업이라는 구종의 특성상 만약 읽혔다면 바로 장타일 가능성이 높았는데…….]
[김사범 선수도 작심하고 노린 듯 휘둘렀지만, 아쉽게도 이번엔 벌렌더 선수의 승리네요.]
속았다.
역시 대단하다.
저스틴 벌렌더. 저스틴이라는 이름을 가질 만한 사람. 케이트 업튼을 사로잡은 마성의 남자.
타석에서 나와 장갑을 고쳐 끼며 슬쩍 바라본 벌렌더의 뒤에서 이삭이 날 바라보며 뭔가를 하고 있었다.
‘너.’
손가락 하나를 들어 날 가리키는 이삭.
‘못 치면.’
방금 전 큰 헛스윙을 따라하는 녀석.
‘척추를…….’
뒤돌아서…… 여기까지.
이 시대 진정한 로맨티스트, 터프가이 저스틴 벌렌더와 비교되는 옹졸한 녀석 같으니.
[2-0의 카운트, 투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카운트에서 저스틴 벌렌더 선수가 3구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 * *
땀이 난다.
경기 후반에 땀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오늘처럼 비 오듯이 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제길, 저 녀석이 달라붙지만 않았어도.’
디트로이트의 1번, 이삭이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이 끈질기게 달라붙다 볼넷으로 나간 뒤부터 내 몸의 뭔가가 빠르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2번으로 나선 무표정한 포수에게 던진 초구도 마찬가지. 평소 컨디션이었다면 손에서 미끄러질 이유가 없는 공이었다.
그리고 마주한 디트로이트의 3번. 붐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별명을 가진 놈.
‘절대 방심하면 안 돼.’
디트로이트를 상대로 한 저번 등판 때, 빌어먹을 커트를 해대다 홈런을 치며 베이스를 돌던 녀석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니까.
‘초구는 몸쪽 패스트볼.’
최근 아내와 같이 시작한 요가의 명상법을 떠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스트라이크!”
내가 봐도 좋은 코스, 좋은 공이다.
타자의 몸쪽을 파고드는 독사 같은 공.
‘바깥쪽 슬라이더?’
너무 뻔하지.
‘존 아래로 떨어지는 커브.’
커브로는 배트를 끌어내기 힘들 거 같은데.
오른손을 들어 직접 사인을 냈다.
‘몸쪽, 낮게 떨어지는 체인지업.’
몰리지만 않는다면 꽤 좋은 공이 될 거다.
패스트볼이 눈에 아른거리는 저 녀석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도 있고.
후우우웅!
“스트라이크!”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거의 바운드될 정도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헛도는 배트.
‘몸쪽 높은 공, 좀 떨어트린 다음에 바깥쪽으로.’
‘OK.’
일단 이 녀석을 덕아웃으로 돌려보내자. 그러고 나서 미기를 병살로 잡으면 위기를 끝낼 수 있다.
거의 평생을 해 왔던 그 동작 그대로.
오른발로 내 체중을 실었다.
자연스럽게 내딛는 왼발.
글러브에서 나온 오른손은 간결하고 빠르게.
그리고 검지와 중지에 신경을…….
‘응?’
정말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다.
팔뚝에 맺힌 땀방울이 그새 흘러내렸는지, 중지에서 느껴진 아주 약간의 이질감.
그리고…….
따아아악!
[김사범 선수의 타구가 왼쪽 담장을 향해 갑니다!]
[좀 낮습니다. 이거 몰라요. 최선을 다해 뛰어야 합니다.]
[휘어 나가면 안 됩니다! 그대로! 그대로!]
투웅!
그럴 일은 없겠지만, 폴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