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김사범, 2021 포스트 시즌(열망)(2)
[김사범 선수! 훌리오 유리아스 선수의 바깥쪽 패스트볼을 받아쳐 홈런을 만들어 냈습니다!]
[존 밖으로 확실히 빠지는 공인데, 이걸 받아치네요. 사실 이런 타격 접근방식은 지양되어야 할 방식입니다. 자칫 자신의 밸런스도 망가질 수도 있거든요.]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타자들이 타격 연습을 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는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입니다. 이런 공을 치는 연습을 수십 년 동안 하던 선수들이 갑자기 존 밖의 공을 노린다? 밸런스 흐트러지기 딱 좋죠.]
[한 타석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안 좋다는 이야기군요.]
[장기적이 아니라 바로 다음 타석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면 배드볼 히터라는 명칭이 생기지도 않았겠죠.]
“팀 동료인 멕시칸을 위해 멕시칸에게 홈런을 친 거야?”
“그렇지. 멕시칸들끼리 싸우는 걸 보는 것보다 그게 낫지 않겠어? 둘이 싸우면 멕시코에서 보는 시청자들이 슬퍼할 거 아냐.”
“역시. 붐 너는 멕시칸도 아닌데 어떻게 멕시칸의 마음을 그렇게 잘 아는 거야?”
“내가 멕시칸과 친하기 때문이지.”
가끔 이렇게 폴리와 마음이 맞을 때가 있다.
물론 평소엔 귀찮고 성가신 놈이지만…….
일종의 전략적 제휴?
“닥쳐. 둘 다.”
아아. 좋은 제휴였다.
폴리와 같이 한참을 더 이삭을 놀리다 보니 어느새 공격이 끝났다.
“슬라이더지?”
“아마도? 미기가 들어와 봐야 알겠지만.”
“86마일. 맞네. 낙차가 꽤 크네?”
“거의 슬러브라고 생각하고 들어가야 할 거 같은데?”
놀 땐 놀고. 일할 땐 일하고.
티격대면서도 유리아스에게 눈을 떼지 않은 이삭과 내가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는 모습을 보며 폴리가 말했다.
“언제나 상대를 때려 부술 생각만 가득한 야만적인 종족들 같으니.”
어. 네가 할 말은 아니야.
글러브를 들고 수비에 나설 준비를 하며 덕아웃으로 들어온 미기에게 물어봤다.
“마지막 공, 슬라이더죠?”
“음, 아마도?”
“어때요?”
“글쎄…… 그냥 뭐, 칠 만했어. 놓쳤지만.”
마치 갱년기에 돌입한 아버지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는 미기.
‘첫 타석에서 삼진을 당해서 그런가?’
슬쩍 팔을 뻗어 어깨를 주물러 주고 덕아웃을 떠났다.
* * *
덕아웃 밖 복도. 슬쩍 왼손을 주무르고 있는 미기에게 수비코치가 다가왔다.
“괜찮아?”
“아아. 괜찮죠.”
“그러게 왜 갑자기 수비 연습을 해선…….”
“뭐가 됐든 원정에 가면 1루라도 서야 하니까. 내가 없이는 붐이 제 실력을 내지 못하잖아요?”
미기의 말에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는 수비 코치.
“그건 그렇지만……. 일단 빠르게 치료하는 게 먼저야. 계속 이렇게 속일 수도 없잖아?”
“할 수만 있다면 해야죠. 당장 내일부터는 진통제를 좀 더 맞으면 되니까.”
“가벼운 부상을 키우는 좋은 습관이지.”
수비 코치의 말에 허허허 웃으며 대답하는 미기.
“당장 6일 뒤에 실직자 신세가 되는 운동선수에겐 상관없죠.”
“하……. 알겠어. 일단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어. 감독님을 제외하곤.”
“고마워요.”
“하지만 통증 때문에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하지 못한다면……. 알지?”
“물론이죠.”
생각보다 길어진 대화에 수비 코치는 헐레벌떡 덕아웃을 향해 뛰어갔다.
혼자 남은 미기의 입에서 나오는 한숨.
왼손을 주무르며 화장실로 향하는 그의 입에서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우승이라는 걸 쉽게 생각한 적은 없지…….”
* * *
내 홈런 이후 경기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Boom! Boom! Boom! Boom!
3회 말, 1루수 직선타로 물러나고 나서 맞이한 6회 말의 세 번째 타석.
아쉽게도 두 번째 타석에서는 ‘그’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스킬의 영향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보네.’
워낙 신기하고, 충격적인 경험이었기 때문에 욕심이 났다.
매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그런 상태가 유지된다면…… 난 정말 야구란 스포츠의 끝을 볼 수 있었을 것 같았으니까.
“베이스 온 볼스!”
원아웃.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당연하다는 듯 날 거르는 다저스. 오랜만에 겪는 자동 고의사구다.
보호장구를 벗으며 멀뚱히 서 있는 다저스의 포수, 키버트 루이스에게 말을 걸었다.
“내 뒤에 있는 미기가 무섭지도 않나 봐? 내가 걸어 나간 뒤에 미기는 미구엘-붐이 되는데.”
“어. 너보단 낫겠지. 그가 폭죽일지 폭탄일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보통 그러다가 후회하더라고. 아무튼, 잘 있어 허니.”
느끼한 목소리로 허니를 속삭이며 윙크를 날리자 실시간으로 썩어 들어가는 표정이 보였다.
‘짜증 좀 났으려나?’
이제 베이스에서 더 짜증을 유발하다보면 미기가 경쾌한 타구음과 함께 이 어린 포수의 멘탈을 터트려 주겠지.
아, 나는 투수의 멘탈을 터트릴 거고.
[아, 김사범 선수가 고의사구를 받았습니다.]
[다저스로서는 괜찮은 선택이죠. 미구엘 카브레라 선수가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6할대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오늘 경기에선 조금 부진했거든요.]
[하지만 미구엘 카브레라 선수는 이런 상황을 꽤 많이 겪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시즌 초반부터 김사범 선수 뒤에서 활약을 해 줬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아주 익숙할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좋은 성적의 비결이 있죠.]
[그게 뭔가요?]
베이스에서 작게 한 발, 두 발.
상대는 픽오프 하나만은 역대급이란 소리를 듣는 투수다.
왼손 투수이니 만큼, 투구 전 준비자세에서 느껴지는 긴장감.
지금 이 순간, 나는 숨죽이며 사냥감을 지켜보고 있는 포식자가 된 기분이다.
펑!
“세잎!”
사냥감이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본다.
제법 괜찮은 감과 예민한 오감을 가진 녀석이지만…… 애초에 우월한 피지컬을 믿고 녀석의 감각 밖에서 머무는 날 발견할 순 없다.
스악!
다시 한 번 발을 풀며 견제동작을 취하는 녀석.
예민하고, 겁이 많다.
타다닥!
그리고 초구, 난 큰 동작으로 2루를 향해 달리는 ‘척’을 했다.
“볼!”
역시. 거의 미기의 어깨 정도로 들어온 패스트볼.
미기는 그 공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세잎!”
“세잎!”
“……세잎!”
그리고 다시 시작된 사냥.
반 발자국의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 우우우~
분위기 좋고.
곧 달빛이 구름에 가려지는 순간이 올 것 같다.
[훌리오 유리아스 선수가 또다시 견제구를 던졌습니다.]
[워낙 픽오프가 좋고 주자를 많이 잡아내는 투수다 보니까 김사범 선수같이 많이 뛰는 선수를 가만두지 못하는 겁니다.]
[일종의 직업병 같은 건가요?]
[하하하, 조금 느낌이 다르긴 한데.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군요.]
왔다.
팽팽히 당겨져 언제든지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던 사냥감의 근육에 힘이 떨어진 게 느껴졌다.
“흐읍!”
짧은 들숨과 함께 2루 베이스를 향한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1초, 2초.
아직 시야에 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목표물을 코앞에 둔 내가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 몸을 던졌을 때, 시야에 나타난 공이 2루수의 글러브에 들어가는 게 보였다.
‘조금……!’
타이밍은 내가 빨랐지만, 송구가 너무 정확했다. 여유롭던 사냥이 급박하게 바뀌었다.
바로 그때.
또다시 세상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아, 김사범 선수! 2루 도루입니다!]
[피치아웃! 과감한 판단입니다! 키버트 루이스!]
[거의 비슷! 아! 세잎! 세잎입니다!]
습관처럼 내민 왼손과 베이스에 사이엔 이미 글러브가 자리하고 있었다.
느려진 세상 속, 난 왼손을 땅에 강하게 박아 넣었다.
흙이 튀기고, 손가락 보호를 위해 질기고 두껍게 제작된 장갑이 비명을 지른다.
속도가 줄었는지, 조금 더 늦게 다가오는 글러브를 피해 오른쪽으로 허리를 뒤틀며 골반을 튕긴다.
땅에 긁히던 몸이 살짝 떠오르며, 땅에 박아 넣은 왼손을 축 삼아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이제 마지막으로 땅을 긁던 왼손을 살짝 퉁겨주면…….
“세잎! 세잎!”
사냥감의 목덜미를 무는데 성공했다.
[느린 그림으로 보시죠. 아, 조금 늦었지만 송구가 굉장히 정확했습니다만……. 보시면 완전히 아웃 타이밍이었거든요.]
[김사범 선수가 절묘하게 몸을 오른쪽으로 틀어 태그를 피했어요. 마치 다시 한 번 날아오르는 듯한 움직임이었습니다.]
* * *
“봤어? 내가 잡지 못할 거라고 했지?”
어린 포수 녀석이 인상을 구겼다.
“더 이상 붐에게 매달리지 말고 나에게 집중해야 할걸?”
투볼. 오 년 전의 나였으면 반드시 배트를 휘둘렀을 카운트다.
‘뭐, 그때였으면 이 녀석들이 이렇게 나를 무시하지도 않았겠지만.’
슬쩍 타석에서 나와 왼손의 장갑을 만지며 컨디션을 체크했다.
‘통증은…… 있군. 뒤를 크게 휘두르기엔 조금 무리가 있겠어.’
야구를 30년쯤 하다 보면 자신의 몸 상태를 아주 잘 알 수 있다. 우연에 기대기엔 여기서 너무 오래 굴러먹었으니까.
‘보자…… 아직도 내게 온전히 집중하지는 않은 것 같고…….’
저 마운드 위에 애송이 투수는 2루를 내주면서 완전히 붐에게 꽂혀 있다. 젊음이란 그런 거니까. 어느 순간에는 팀보다 자신을 우선시하는 그런 마음.
‘앞은 길게, 뒤는 짧게.’
마치 내야에 공을 굴리고 미친 듯이 달려 나가는 그런 선수들처럼 스윙할 거다. 그렇다고 내 타구가 향하는 곳이 그들처럼 짧진 않겠지만.
체인지업은 없다. 커브도 없고.
남은 건 슬라이더와 패스트볼.
이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는 녀석.
오른쪽 눈이 살짝 찡그려졌다 펴졌다. 못 보던 표정이군. 기억해 놔야지.
[훌리오 유리아스 선수, 제3구!]
투볼에 몰린 투수의 공은 대개 정직하다.
‘존 위로 뿌린다고? 그럴 리가.’
두 번째 타석에서 봤었던 녀석의 슬라이더를 떠올렸다.
짜르르 울리는 왼손.
나는 오늘도 붐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
[미구엘 카브레라! 훌리오 유리아스 선수의 슬라이더를 받아쳤습니다! 좌중간에 떨어지는 타구! 2루까지 가기에 충분합니다!]
[욕심을 내지 않은, 굉장히 절제된 타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흔히 말하는 영웅스윙이 나올 만도 한데, 역시 베테랑은 다르네요.]
* * *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LA 다저스에 4:2 승리.]
[뒤늦게 터진 다저스의 타선. 제이슨 폴리, 1과 2/3이닝 퍼펙트.]
[2차전 선발투수 예고. LA 다저스 - 클레이튼 커쇼,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 케이시 마이즈.]
[론 가든하이어 감독 ‘포스트시즌 8연승. 우린 우리의 힘을 보여 줬다.’]
경기가 끝난 뒤 라커룸. 한바탕 인터뷰의 폭풍이 지나갔다.
“오늘 저녁은 어디서 먹을 거야? 붐은 가족하고 먹을 거지?”
“그래야지.”
“간단하게 이삭네 가서 먹을까?”
뜬금없는 케이시의 공격에 발끈하는 이삭.
“갑자기 왜 우리 집이 나와? 난 빠질 거야. 내일 경기에 집중할거거든.”
“음…… 그럼 어쩔 수 없지.”
오. 웬일로 이렇게?
“이삭은 빼고, 이삭 집에서 먹자. 간단하게.”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불쌍한 이삭.
‘그런데 미기는 어디 있는 거지?’
평소 같았으면 이럴 때 갑자기 튀어나와 같이 이삭을 놀렸을 텐데…….
‘미기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어딘가에서 인터뷰라도 하고 있나 보지.’
“내일 보자. 이삭 집에서 과식하지 말고. 이모님 솜씨면 분명 과식하겠지만.”
“안 갈 거라고!”
이삭의 외침과 폴리의 낄낄거림을 뒤로하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차장의 내 차 앞에 도착한 순간, 난 권선징악이라는 사자성어의 참 뜻을 알게 됐다.
‘오늘 이삭을 너무 놀렸나……?’
차 키를 놓고 왔다.
아오.
“뭐야? 왜 돌아가?”
“몰라.”
“보면 몰라? 뭘 놓고 온 거겠지.”
“표정 보니까 딱 알겠네.”
날 놀리는 녀석들을 지나쳐.
“붐, 왜 다시 왔어?”
“아, 스튜어트. 뭘 좀 놓고 와서요.”
“하하, 나도 가끔 그래. 내일 보자고.”
“스튜어트도 푹 쉬어요. 내일은 한 방 쳐야죠.”
“하하, 그래.”
몇몇 동료들을 지나치고 나서야 라커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라커룸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복도 저편에서 들리는 목소리.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그래서, 손바닥은 어때?”
“뭐, 오늘 봤잖아요. 괜찮아요.”
“보니까 꽤 부었던데?”
“오늘 하루 쉬고 내일 진통제 맞으면 돼요. 이 정도야 뭐…….”
“흠…….”
“혹시라도 날 라인업에서 뺄 생각은 하지 마요, 론.”
“곧 LA로 가는데. 거기서는?”
“스튜어트를 그대로 쓰세요. 대타 요원으로 나서도 되고. 그때까지 손이 좀 가라앉으면 한 경기쯤은 선발로 나설 수 있겠죠.”
“뼈에는 이상이 없는 건가?”
“난 그 정도로 터프하지 않아요.”
“음…….”
음…….
그러니까, 미기의 손바닥이 정상이 아니라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