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김사범, 2021 포스트 시즌(열망)(7)
[경기는 어느새 정규 이닝의 마지막, 9회 말 투아웃 입니다.]
[마운드의 제이슨 폴리 선수가 엄청난 구위로 다저스 타자들을 돌려세웠죠?]
[케이시 마이즈 선수도 그렇고, 요 몇 년 사이 디트로이트는 유망주라 불리던 선수들을 아주 잘 키워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돌아오기 전, 다저스의 유니폼을 입고 상대방의 9회를 지워 내던 폴리는 지금 디트로이트 유니폼을 입고 다저스의 9회를 지워 나가고 있다.
“아웃!”
9회의 마지막 아웃카운트까지.
[이제 정규 이닝이 끝났습니다. 경기는 연장으로 접어들겠습니다.]
[경기 전 양팀 감독들이 말한 대로 총력전이네요. 이제는 정말 원하지 않아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순간이 왔어요.]
공수교대 시간, 화장실을 가기 위해 덕아웃을 나선 내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끄응…… 윽…….”
화장실을 지나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소리.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미기?”
“으흐…… 붐?”
진동하는 파스 냄새.
역시, 내 생각 그대로의 포즈로 자신의 왼손을 붙잡고 끙끙대는 미기가 거기에 있었다.
“진통제…… 효과 떨어졌나 봐요?”
“……알고 있었어?”
“론과 이야기하는 걸 우연하게 들었어요.”
“허허, 허허허.”
내 말에 허탈하게 웃는 미기.
“어제 쉬면서 어느 정도 나은 줄 알았는데……. 진통제였어요?”
“그렇지. 9회가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 안 아플 거라고 말하더니, 정말 끝나자마자 아프기 시작하는군.”
그럴 리가. 그 의사가 무슨 전설의 의사도 아니고. 무의식적으로 참은 거겠지.
자신을 계속해서 속이면서.
“제가 보기엔 지금 그 말을 해야 할 때 같은데요.”
“그런가? 지금? 정말로? 그렇겠지?”
주저앉아 날 바라보는 미기의 눈빛이 떨리기 시작했다.
“제 생각엔…….”
“아냐, 아직 아냐. 적어도 지금은.”
“미기…….”
미기는 몸을 일으키며 날 바라봤다.
놀랍도록 빠르게 빛을 되찾아 가는 눈.
“다시 한 번, 또 그런 생각이 들면 내가 아닌 론에게 알려 줘. 지금은…… 내가 생각하기에 그 순간이 아니니까.”
자신의 왼손을 안고 덕아웃으로 향하는 미기.
난 그를 잡을 수 없었다.
[LA 다저스가 결국 로스 스트리플링 선수를 등판시켰습니다.]
[원래라면 오늘 등판 예정이었는데요, 이렇게 되면 5차전에는 훌리오 유리아스 선수가 등판하게 되겠군요.]
10회 초, 우리의 타순은 7번부터 시작됐다.
“아웃!”
[아, 스트리플링 선수, 첫 타자인 키브라이언 헤이스 선수를 내야 팝 플라이로 잡아냈습니다.]
“스트라이크! 아웃!”
[대즈 카메론! 낮게 떨어지는 브레이킹 볼에 헛스윙!]
대기타석에 나가 있는 폴리의 모습이 낯설다.
바로 그때.
[아, 론 가든하이어 감독이 대타를 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제이슨 폴리 선수가 10회에 나오지 못한다는 이야기인데요.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다저스 타선을 누가 상대하게 될까요?]
덕아웃으로 돌아온 폴리의 얼굴이 새빨갛다.
누구보다 자신의 위치를 좋아하던 녀석이니. 어린아이가 사탕을 빼앗긴 느낌이겠지.
그런 폴리에게 투수 코치가 다가가 몇 마디 말을 나누며 진정시키기 시작했고, 의외로 녀석의 얼굴은 빠르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이싱을 위해 덕아웃을 나가는 폴리의 얼굴은, 뭐랄까. 이상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 이렇게 되면 대타 작전이…….]
수비를 위해 글러브를 들고 그라운드에 나서는 순간. 불펜에서 나오는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디트로이트도 정말 총력전이네요. 로테이션상 내일 경기 선발이던 케이시 마이즈 선수가 등판합니다.]
마운드를 고르던 케이시에게 슬쩍 다가가 말했다.
“케이시.”
“왜?”
“세 명 다 삼진 아니면 플라이로 잡을 수 있어?”
“……뭐?”
“이유는 나중에. 가능해?”
내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하는 녀석.
“물론이지.”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케이시는 자신의 말을 지켜냈다.
[하하하, 사실 이닝이 시작하기 전에는 케이시 마이즈 선수가 조금 고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 생각이 틀렸군요.]
[압도적인 투구였습니다. 정말 그 표현 외에는 다른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아요.]
10개. 케이시가 세 명의 타자를 덕아웃으로 돌려보내는 데엔 그거면 충분했다.
“이삭.”
“왜?”
“무조건 나가. 무조건. 할 수 있어?”
“뭔 헛소리야?”
툴툴대며 타석으로 향하는 이삭.
할 수 있을 거다.
분명.
* * *
진통제가 다시 혈관을 타고 도는 게 느껴진다.
‘그럼 그렇지. 그저 약해졌을 뿐이야.’
조심스럽게 왼손을 쥐어 봤지만, 감각이 조금 없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볼넷을 얻고 나가 1루에서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날 보는 녀석.
아직 이런 취급을 받기엔…… 음.
“이제 내가 게임을 끝낼 때인가?"
쓸 만한 녀석들이다. 3루에 나가 있는 이삭도, 저기 2루에 있는 페이스도, 그리고 이 녀석은…… 더 쓸 만하지.
‘내가 은퇴하고 싶어질 만큼.’
큰 타구는 무리다. 작은 스윙으로 그때그때 넘어가긴 했지만……. 그런 스윙으로는 병살이나 안 치면 다행이겠지.
‘그래도 먹음직스러운 공 하나만 오면……. 그래, 그거면 충분하지.’
나를, 아니 내 존을 향해 공이 다가왔다.
‘볼.’
“볼!”
겁에 질려 벌벌 떠는 투수의 모습을 보니, 우리 팀의 저 녀석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크게 다가온다.
2구.
‘스트라…….’
“스트라이크!”
제길.
좋은 공이었는데.
3구.
“흡!”
“스트라이크!”
커브, 빌어먹을 커브.
왼손은?
살짝 쥐어 본 왼손은 다행히 아프지 않았다.
그리고 4구.
빠른 공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를 향해.
‘피할까?’
아니.
피하지 않는다.
피하지 않을 거다.
* * *
뻐어억!
“미기!”
[몸에 맞는 공! 미구엘 카브레라 선수의 옆구리에 공이…….]
1루에서 타석까지. 난 이 거리가 이렇게 길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닥터!”
이미 뛰쳐나오고 있는 팀 닥터를 채근했다.
“미기, 괜찮아요?”
대답 없이 그저 꺽꺽거리기만 하는 미기.
곧 팀 닥터가 도착해 조심스럽게 공에 맞은 부위를 검사하기 시작했다.
“……들것이 필요합니다. 당장 병원으로.”
“네?”
“맞은 부위가 갈비뼈예요. 당장 부풀지 않아 괜찮아 보이지만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아, 미구엘 카브레라 선수가 실려 나갈 것 같군요. 큰 부상일까요?]
[느린 그림으로 보면…… 갈비뼈 부위에 맞은 것 같습니다. 보통 저 부위는 많이 다치지 않는 부위인데…….]
[그런가요?]
[왜냐하면 저 코스로 공이 오면 본능적으로 몸을 틀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등에 맞으면 맞았지 갈비뼈는…….]
실려 나가기 직전, 겨우 진정된 미기가 내게 말했다.
“어때, 이 정도면…… 아직 쓸 만하지?”
저 정도로 절실했을까?
옆구리로 날아오는 공을 피하지도 않고 맞을 정도로?
미기가 실려 나가고, 대주자가 들어오고. 3루에 있던 이삭이 홈으로 들어갔다.
타석으로 향하는 스튜어트의 눈빛이 사납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서너 번 젓던 투수가 마지못해 끄덕인다.
하늘을 보고 심호흡 한 번. 그리고 와인드업.
스튜어트는 그 공을 담장 밖으로 날려버렸다.
* * *
“숏!”
“내가!”
이상한 감각이다.
분명 공은 떨어져 내리고 있는데, 점점 내게서 멀어지는 느낌.
왼손의 글러브를 들어 올리려다 흠칫 놀라서 다시 턱 밑으로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참다 들어 올려 벌린 글러브에는…… 어느 때와 다름없는 야구공이 있었다.
-우우우와아아아!!
[게임 셋! 게임 셋입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연장 11회!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냈습니다!!]
[결국 포스트시즌 스윕을 달성했네요. 역사에 남은 강팀들도 하지 못했던 기록인데요.]
[1984년 이후 37년 만의 우승입니다! 아, 디트로이트 팬분들은 정말 믿기지 않는 날이겠군요.]
나를 향해 모든 동료들이 달려왔다.
가장 가까이 있던 헤이스, 이삭, 스튜어트, 페이스. 그리고 케이시.
“이게, 이게. 이게!”
“잠깐, 잠깐! 아웃카운트, 전광판! 전광판!”
“우와아아아아악!”
“엄마…… 형…… 내가…….”
내가 있어 내 주위로 모인 게 아니라, 그냥 글러브 속 이 공이 있어 여기로 몰린 거 같다.
얼싸안으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와중에도 모두 각자의 마음속 말을 토해 내기 바쁘다.
3루 쪽 우리 팬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보니 거기도 역시 축제분위기인 건 마찬가지. 어느 할아버지 팬은 맨 앞자리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론! 론을 찾아와!!”
“어디 있어? 어디야?”
“없어! 그럼 일단 붐을 죽이자!”
마치 뭐에 홀린 것처럼 3루 관중석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내 귓가에 이 순간에도 어김없이 멍청한 폴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글러브에 든 공을 꺼내들었다.
그 순간 마주친 눈빛. 눈물이 가득한 수리의 눈이 흔들렸다.
“자기? 자기! 안 돼! 그거 아냐!”
뭐가 아냐.
이게 마지막도 아니고.
“사범아!”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버지의 큰 목소리에 맞춰, 나는 내 오른손에 든 공을 관중석을 향해 던져 올렸다.
“안 돼!”
* * *
“큭큭큭, 내가 본 것 중 제일 커다란 팬서비스였어.”
“그만해요. 그냥 분위기에 휩쓸린 거니까.”
“미기, 더 해도 돼요. 그 공을 잡은 팬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 되돌려 받았지…….”
우리가 우승을 한 다음 날.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먹고, 마시고, 춤춘 우리는 오후 늦게서야 미기가 입원한 병원에 올 수 있었다.
“분위기도 분위기 나름이지. 구단 입장에서 그게 얼마나 비싼 공인데, 안 그래?”
“그렇죠. 그걸 하늘로 던져 버리는 멍청한 놈이 있을 줄이야.”
아…… 내가 다른 건 다 참아도 폴리에게 저딴 소리를 듣는 건 못 참겠다.
“자기 팔꿈치 부서지는 것도 모르고 던져 댄 멍청이 투수가 할 말은 아니지.”
거짓말 아니다. 정말 폴리의 팔꿈치엔 뼛조각이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그만해. 우리 병문안 온 거 아냐?”
“오, 케이시. 사실 난 너를 제일 좋아해. 멍청한 놈들은 도대체 대화가 통하질 않거든.”
그냥 나한테 삐진 건데.
지 공 허락 안 받고 던졌다고.
“별말씀을. 갈비뼈는 어때요?”
“이제야 그 이야기를 듣는군, 그냥 살짝 금 간 거야. 오늘 안정을 취하면서 상태를 보고 내일이면 보호대를 차고 퇴원, 좋지?”
“그럼요. 미기가 와야 제대로 된 퍼레이드를 할 수 있으니까.”
퍼레이드라는 단어에 미기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직 우승한 게 실감 안 나지?”
“뭐, 그렇죠.”
“신나서 먹다가 뻗은 다음 바로 여길 왔으니까…….”
“난 실감 나요. 내 핸드폰엔 술 취한 론의 술주정이 담겨 있거든.”
이삭의 한마디에 술렁이는 병실.
“뭐?”
“나도!”
“나도 보자!”
짝!
“집중, 어린이들.”
“왜요? 미기는 안 궁금해요?”
“이삭, 나중에 따로 보내 줘. 아무튼. 다들 각오하고 디트로이트행 비행기를 타는 게 좋을 거야. 정말 세상이 달라진다는 게 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음…… 귀찮은 거 싫어하기로 소문난 우리 팬들이? 공항까지?
“디트로이트에 도착하는 날, 그리고 퍼레이드가 펼쳐지는 날. 그 순간을 잘 기억해 두라고. 정말 놀라운…… 아니 음…… 후, 놀라운 순간이 될 거니까.”
뭔가를 회상하며 추억에 잠긴 표정을 짓는 미기에게 이삭이 물었다.
“근데 미기, 미기는 우승한 적 없지 않아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죠?”
1분 뒤.
“으익, 윽! 아니 제가 악! 뭐 잘못했!”
잘못했지.
미기, 우승해 본 적 있다.
2003년도,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자마자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