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김사범, 실감하다(1)
카퍼레이드라니.
어릴 적 놀이공원에서 본 이후로 처음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이제 나는 구경하는 쪽이 아니란 거?
“여기! 여기! 붐이 긴장했어!”
“뭐? 붐이?”
조금 떨려오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하는 걸 이삭이 보고 말았다.
“……긴장한 거 아냐.”
“예, 예. 그러시겠지.”
정말 긴장한 게…….
“땀이나 닦고 말해.”
음.
사실 조금 긴장되는 거 같긴 한데…….
아니 조금 많이.
“그러니까, 4만 명이 넘는 팬들 앞에서 경기할 땐 안 떨리고, 지금은 떨리는 건가? 흠.”
그러니까 내가 더 죽겠는 거지.
“저길 봐봐! 미기가 ‘왕의 의자’에 앉고 있어!”
누군가의 말에 뒤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두 번째 퍼레이드 카 가운데에 높게 솟아 있는 의자에 앉는 미기가 보였다.
찰칵.
스마일~
너무 휘황찬란해서 조금 웃긴 의자에 앉은 미기가 주변의 동료들에게 포토타임을 주고 있을 때, 마침내 퍼레이드 카가 출발했다.
- 우와아아아아아!!
코메리카 파크에서 시작해 구시가지를 지나 미시간 중앙역-조금 무서운 동네에 있는 폐역이지만, 그 경관이 꽤 괜찮아 들른다고 한다-을 찍고 다시 신시가지를 거쳐 파크로 돌아오는 코스.
일정상 1~2시간이 걸릴 거라고 하는데…… 과연.
“……긴장 안 되냐?”
“아니. 이제 나도 좀 긴장되는데.”
케이시의 대답에서 알 수 있듯. 파크를 나와 시가지로 진입하는 우리의 앞에는…… 정말 세상에서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 붐! 여길 봐요! 난 당신이 우릴 우승으로 데려다줄 거라고 믿었어!
- 디트로이트! 디트로이트!
- 모 타운! 모 타운!
- Let's get it booooooom!!
내 시야가 닿는 모든 곳에 우리의 팬이 있었다.
자동자 지붕 위, 가로등 중간, 건물의 창문, 쓰레기통 위, 소화전에도.
그리고 그들은 모두 우리를 보며 환호하고, 기뻐했다. 순수하게.
“붐, 그러지 말고 손도 좀 흔들고, 여기 모자도 막 던져 줘. 그게 우리가 할 일이야.”
“어, 어.”
옆에서 연신 손을 흔들고 있는 케이시의 말대로, 퍼레이드 카에 비치된 한정판 모자를 집어 맘 내키는 대로 던지기 시작했다.
- 이쪽! 이쪽으로!
- 붐! 우릴 떠나지 않을 거지? 네가 떠나면 저 빌어먹을 프런트를 싹 다 모아서 프레스기에 넣어 버릴 거야!!
긴장이 풀려가며 슬슬 뚫리는 귀.
‘음. 그냥 계속 긴장하고 있는 게 더 좋았을 수도…….’
좋은 말, 큰 환호만 들렸던 전과 달리 꽤 살벌한 외침들이 들려왔지만…… 그것마저 좋았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미시간 중앙역.
디트로이트시의 몰락을 상징했던 그 건물은 포드사의 손이 닿으며 제법 멋있는 건물로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중앙역 앞에서…….”
역을 사이에 두고, 과할 정도로 많은 앰프가 설치된 단상 뒤로 퍼레이드 카가 멈췄다.
그리고 시작된 알 아빌라 단장의 별로 궁금하지 않은 말들.
우리-거의 모든 동료들-는 단장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퍼레이드 카 난간에 기대 팬들을 구경했다.
“이삭.”
“왜?”
“디트로이트에서 제일 인기있는 스포츠가 하키라고 하지 않았어?”
“내가?”
“아닌가?”
“이 사람들을보고도 그런 이야기가 나와?”
아니. 아닌 거 같으니까 물어봤지.
“.... 해서, 이제 이 자리를 타이거즈를 메이저리그 역사상 넘버 원 구단으로 만들어낸 론에게 넘기겠습니다.”
-와아아아아아!!
팬들이 환호성을 지를 때, 우리도 같이 소리 질렀다.
“아. 아. 들리나요?”
-Yes!
“좋아요. 이 팀이 우승을 거둘 때까지 내가 한 일만큼만 이 마이크를 잡고 있겠습니다.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우승하리라고 생각했던 전문가는 단 한 명도 없었죠. 그런데 지금은……?”
론이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성호를 그었다.
“뭐, 그들 직업의 안정성은 나중에, 다른 곳에서 기회가 되면 말하도록 하죠. 음. 벌써 내 지분이 다 떨어진 것 같군요. 한 마디만 더 하고 마이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겠습니다. 큼큼.”
퍼펙트게임을 앞둔 경기장처럼 조용해진 공간.
그 공간을 둘러보던 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타이거즈, 우린 역사상 가장 완벽한 월드시리즈 위너입니다.”
- 우와아아아아아!!
- 론! 론! 론! 론!
- 붐! 붐! 붐! 붐!
‘내 이름은 왜 갑자기…….’
“네 이름을 왜 갑자기 외치는 거야?”
“글쎄, 이게 너와 나의 차이겠지. 나약한 폴리.”
내 생각과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게 왜 말을 걸어선…….
열광의 도가니가 된 현장에서, 론이 미기에게 손짓했다.
씨익 웃으며 의자에서 내려오는 미기.
그가 마이크를 잡았다.
“음……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다 까먹었군요. 제길.”
넓은 미기의 등이 쉴 새 없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면…… 처음 디트로이트에 온 순간부터 계약기간의 절반이 지날 때까지는 항상 이 순간을 상상했었죠. 매일.”
잠시 숨을 돌리고 말을 잇는 미기.
“그러고 나서는…… 팀이 무너지고, 난 게을러지고. 성적? 제길, 그걸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경기를 뛴 시즌이 드물잖아요. 맞죠?”
-Yeah!
방금 소리 지른 저 사람은 분명 사람들 사이에서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수없이 들으며 자랐을 거다.
“하지만, 난 결국 다시 일어나 여기 내 손가락에 우승반지를 꼈어요. 그래. 지금 이 도시처럼. 다시 일어나서.”
좌에서 우로. 천천히 시선을 움직이던 미기가 마침내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었다.
“굿 바이, 디트로이트. 굿 바이. 베이스볼. 그리고…… 내일 다시 일어날 타이거즈에게 축복을.”
* * *
환호, 침묵, 환호, 침묵, 여기서는 욕하고, 저기서는 눈물 흘리고.
하지만 내 앞에 있는 팬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었다.
“자, 이제는 우리가 다시 길을 걸어가야 할 시간이군요.”
그리고 그 감정의 틈새로 날카로운 멘트가 파고들었다.
‘어…… 이렇게?’
내 입으로 말하기엔 좀 부끄럽기도 하지만…… 난 올 시즌 디트로이트를 이끈 사람이다.
이번 월드시리즈에서도 윌리 메이스 상을 받기도 했고…….
물론 꼭 이 사람들 앞에서 멘트를 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고…… 그래도 준비한 게 있긴 한데…….
- 붐은?
- 붐의 말도 들어 봐야 하는 거 아냐?
- 우우우우우우우!!
- 붐! 붐! 붐! 붐!
저것 봐. 팬들도 날 원하잖아.
바로 그때.
내 어깨 위에 낮선 사람의 손이 올라왔다.
- 붐! 붐! 붐! 붐! 붐! 붐!
“키가 크네요. 이제 절 좀 도와줘야겠는데. 할 수 있죠?”
둥! 둥! 둥! 둥!
“hold up, hold up.”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왔다.
“D는 여전히 더럽게 차갑지
내가 더 이상 차가움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이제 이 엿같은 도시를 데우려면 더욱 더 큰 76개의 폭탄이 필요할걸!”
- 우와아아아아아아!!
에미넴이. 우리의 퍼레이드 카 위에서.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랩을 하고 있다.
“D는 모르지 지는 법을,
오늘도 내 BOMB은 커다란 폭발을 만들었어 또!”
에미넴이 쉴 새 없이 랩을 뱉으며 상체를 숙이기 시작한다. 어리벙벙한 상태에서 같이 내려가는 상체. 이내 나와 그는 격렬하게 리듬을 타고 있었다.
“Detroit vs······. 흠.”
한바탕 정신을 빼놓더니 곡이 끝나자마자 내게 마이크를 멋지게 던지고 사라지는 에미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관중들 사이에서 짐이 나를 보며 웃고 있을 것 같다.
“어…… 음, 당황스럽군요. 갑자기 움직이다 보니 무릎이 좀 아프기도 하고…….”
정말 당황스러웠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 휘익! 기다려 줄게! 천천히 말해!
- 붐! 붐! 붐! 붐!
‘뭐부터 말해야 하지? 가족? 팀? 미기?’
내가 속으로 수없이 고민하고 있는 사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입이 열렸다.
“타이거즈와 같이 즐기러 오신 여러분들, 고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 서 있을 수 있게 만들어 준 팀의 모든 사람들도 감사합니다.”
가슴에서 뭔가가 울컥하며 올라왔다.
“예전, 어느 때와 같이 열심히 경기를 준비하던 제게 누군가 와서 말했죠. ‘왜 그렇게 열심히 해? 넌 어차피 경기에 나가지도 못할 텐데.’ 분했습니다. 정말 세상의 모든 걸 부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지금 저는…… 여기서 상대 투수들을 부수고 있군요.”
팬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근처에 있는 동료들까지 목소리를 낮추며 소곤거리기 시작했고.
“누가 누굴 부수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제가 그때 느낀 감정을 잊지 않고 있고, 때문에 절대 방심하지 않는다는 거죠. 전 발전할겁니다. 꿈의 80홈런? 제길, 투수들이 상대만 해 준다면 시즌의 반만 뛰어도 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겠죠. 여긴 메이저리그니까.”
내년에는 이번 시즌보다 더 큰 견제와 맞서 싸워야 할 거다. 미기가 은퇴한 마당에 다른 녀석들은 아직 그 위치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테니까.
“그래도, 언제나, 항상 저는 열심히 뛸 겁니다. 음…… 홈런 기록을 깼으니 이제 도루 기록을 깰 차례겠네요.”
이제 마이크를 놓을 때다.
나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는 걸 더 좋아하니까.
내게 집중하고 있는 청중을 향해 말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우린 당신들이 없으면 필요가 없는 존재니까요.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음…….
에라 모르겠다.
“그리고 정말로 마지막으로, 수리. 넌 정말 최고의 여자야. 사랑해.”
하지 말 걸 그랬나?
사랑한다는 말은 처음인 거 같은데…….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한 고백이니까…… 좋아하겠지? 좋아할 거야.’
본능적으로 수리를 떠올린 30초 전의 나를 칭찬해 주고 싶다.
* * *
다음 날,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단장실.
“짐, 이젠 정말 미루고 싶지 않아요.”
디트로이트의 단장인 알 아빌라와 짐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흠……. 아시다시피 제 고객이 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장기계약을 맺는 걸…….”
“짐, 짐! 괜찮습니다. 그가 군대에 가도 상관없다는 이야기예요. 그러니 협상을 진행하죠.”
“음…… 일단 사범에게…….”
알이 소파에서 일어나 두꺼운 서류를 들고 왔다.
쿵!
“이게 제 제안입니다. 계약 기간? 금액? 거기 모든 경우에 따른 제안이 적혀 있어요. 우리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액수로.”
짐은 움찔거리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멈추며 여유로운 말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사범과 함께 검토하고 알려 드리죠.”
덜컹.
짐이 나간 후, 단장실 밖에서 대기하던 CFO, 스테판 퀸이 들어왔다.
“알, 반응은……?”
“모르겠어. 빌어먹을. 에이전트라는 놈들은 다 저런 식이지.”
“붐은 이미 후려칠 수도 없을 정도로 거대해졌어요. 다른 팀으로 보내기에도 늦었죠. 이제 우리에겐 두 개의 선택지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붐을 잡거나, 아니면 사무실에서 나가거나.”
퀸의 말에 짜증스런 말투로 대꾸하는 알.
“나도 알아!”
“……그래서, 구단주는 뭐라고 합니까?”
“잡으라고 하지, 무조건. 하지만 그 이상은 더 바라지 말라는 눈치야. 제길!”
“붐만 잡으라고요? 다른 선수들은요?”
“후…….”
골치 아픈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기 시작한 알. 그런 알에게 스테판 퀸이 재차 물었다.
“당장 생각나는 선수들만 이삭, 케이시, 제이슨, 크리스틴…… 오, 제길. 그들을 보내야 해요?”
“아마도. 몸값이 우리 예상과 다르게 비싸졌다면.”
“왜? 제길! 크리스토퍼!”
“그래. 그게 문제야. 우리 구단에 돈이 충분한 게 아닌 크리스토퍼의 돈이 충분하다는 게. 그리고 아버지의 소원을 이룬 크리스토퍼는 시즌이 끝나자마자 여기에 흥미가 떨어진 거 같더군.”
타이거즈는 다른 스몰마켓 팀처럼 돈에 허덕이는 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국적인 인기를 끄는 팀도 아니다. 가장 잘나갔던 2000년도 중반에도 팀 연봉총액의 일정부분을 구단주의 투자로 메꿔야 했을 정도로.
“흠…… 큰일이군요.”
“그래, 큰일이지. 붐과 계약을 해도, 계약을 하지 못해도.”
“미리 사표를 써 놓을까요?”
“아직도 안 써 놨어?”
단장실에 두 남자의 자조 섞인 웃음이 퍼져 나갔다.
* * *
“정말입니까? 이런 조건으로…….”
“물론이죠. 계약서는 거짓말을 못하니까.”
“흠…….”
“구단을 뺏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이 팀의 팬으로서 이 환상적인 팀이 자본주의적 논리로 허무하게 무너지는 게 보기 싫어서죠.”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죠.”
“길게 드릴 순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