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127화 (127/175)

127화 김사범, 2022시즌(순조로운(?) 출발)

시카고. 2022시즌 첫 경기.

첫 경기부터 원정을 떠나는 일정이 익숙하진 않다. 뭐랄까, 5분 거리에 내 집을 두고 허름한 여관방에서 하루를 묵는 기분?

화이트삭스 선수들은 그런 우리를 보며 질색하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뭐,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따아악!

[홈런! 호세 라미레즈 선수가 1회 초부터 투런포를 쏘아 올립니다!]

[시즌 전, 시범경기에서 론 가든하이어 감독이 말했죠. 타이거즈는 가장 생산력이 높은 방식으로 리그를 지배할 거라고. 지금 이 홈런이 바로 그 답입니다.]

[아, 김사범 선수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타석으로 향하고 있네요.]

[호세 라미레즈 선수와 프레디 프리먼 선수가 합류하면서 타선이 굉장히 단단해졌죠? 물론 프레디 프리먼 선수가 예전만큼의 장타력을 보여 주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한 방이 있는 선수이기 때문에 투수들이 상대하기 까다로울 겁니다.]

마이클 코펙, 리빌딩을 위해 온몸을 불사르던 화이트삭스가 점찍은 1선발 투수.

실제로 토미존 수술 후 2021 시즌에 복귀해서 25경기 12승 9패, 3.12대의 방어율로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 선수다.

‘타자 쪽에선 일로이 히메네스, 투수 쪽에선 마이클 코펙. 아깝네. 좋은 선수들인데.’

퍼엉!

“볼!”

원래라면 더 좋은 선수가 됐을 텐데.

하필 내가 디트로이트로 오는 바람에…….

초구를 꽤 먼 곳으로 향하는 패스트볼로 시작한 이 배터리는, 2구째에는 나름의 노림수를 보여 주기도 했다.

“볼!”

위아래 변화가 심하진 않지만 꽤 옆으로 많이 흘러나가는 슬라이더.

제구가 꽤 잘 잡힌 패스트볼과 섞이기 시작하면 굉장히 피곤해질 타입이다.

‘이런 타입은 카운트가 불리해지기 전에 얼른 때리고 도망가는 게 답이지.’

슬라이더와 패스트볼, 커브, 체인지업.

기본적으로 패스트볼 타이밍을 잡고 브레이킹볼이 오면 타이밍을 죽이면서…… 음.

3구.

패스트볼이라기보단 조금 더 비리비리한 느낌의 공이 존 가운데, 낮은 방향으로 오는 게 보였다.

‘커브, 아니면 체인지업.’

방금 전에 세운 계획대로, 하체의 힙턴은 유지하면서 왼쪽 어깨를 최대한 덮으며 타이밍을 한 템포 죽였다.

그리고…….

따아아악!

거의 상체 힘만으로 퍼 올린 타구는 개런티드 레이트 필드의 우측 담장을 가볍게 넘겼다.

[김사범 선수! 시즌 첫 홈런을 자신의 첫 타석에서 기록합니다! 아, 시카고 화이트삭스로서는 악몽 같은 시작입니다.]

[선발투수, 그것도 에이스 투수가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12구 만에 안타-홈런-홈런, 시즌 개막을 기다리던 팬들에게 최악의 스타트를 보여주네요.]

-Let's get it Boom! Boom! Boom!

1루, 2루를 지나 3루를 돌다 보니 어디선가 우리 팬들의 응원소리가 들렸다.

양키스나 보스턴, 다저스 팬들같이 미국 어디에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내가 처음 메이저에 올라왔을 때보다는 훨씬 많아진 팬들.

괜히 코가 높아지는 기분에 오른손을 들어 작은 하트를 만들어 팬들에게 바쳤다.

“역시 붐! 대단해요! 근데 마지막에 3루를 돌면서 보여 준 그 손동작은 뭐죠?”

아, 이거 한국에서 시작됐다고 했지.

다른 사람들의 축하를 받아 주면서 라테에게 설명을 해 주려는 순간, 클리어와 폴리가 나타났다.

“아하-하, 내가 정답을 알려주-지!”

“클리어가 생각보다 아주 똑똑해. 나도 붐하고 꽤 오래 있었는데 한 번도 보지 못한 손동작이었거든.”

불안하다.

클리어가 두 손가락을 교차하며 말했다.

“화이트삭스 녀석들을 요-만하게 만들겠다는 소리야, 하하하!”

“역시! 과연! 붐!”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우리 팬들에게 하는 걸 보고 아닌 것 같았거든. 그런데 클리어가 그 위치에 중계 카메라가 있는 걸 딱 본 거지. 역시. 이게 연륜이다 싶더라니까?”

연륜은 개뿔.

말똥이다.

아니면 똥 같은 말이던가!

* * *

일산, 스튜디오.

“네, 오늘 기분 좋은 소식이 많죠? 김병헌 선수의 호투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아나운서의 말이 스튜디오에 울리자, 패널로 나온 선수 출신 해설자들은 재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며 질문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홈 개막전, 보스턴과 매치업에서 팀의 3선발로 나와 8과 1/3이닝 무실점, 12개의 삼진을 잡아냈습니다. 위원님들은 어떻게 보셨나요?”

“사실 구위로 보나 최근 성적으로 보나 팀 내 1선발인 루이스 세베리노 선수와 차이가 없죠. 양키스의 초반 전략에 의해서 세 번째 선발투수 자리를 맡게 되었는데……. 저번 시즌에 던지기 시작했던 커브가 자리를 잡고 투심의 무브먼트가 아주 날카로워 지면서 상대 타자들이 손을 대지도 못했습니다.”

한 해설자가 운을 떼자 다른 해설자가 말을 이어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에 비해 팔각도를 낮추면서 패스트볼의 제구와 구위를 끌어올린 김병헌 선수에게 조금 아쉬운 점이 바로 이 변화구였거든요. 이번에 장착한 커브, 본인은 커브라고 하지만 슬라이더와도 흡사한 이 커브로 효과적으로 카운트를 잡아내고 있습니다.”

그 뒤로도 투구판을 밟는 위치를 살짝 조절했다든지, 견제 동작이 매끄러워졌다는 이야기를 나누던 아나운서와 해설자들은 PD의 신호에 맞춰 다음 주제를 꺼내기 시작했다.

“자, 그리고 또 하나의 기쁜 소식입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김사범 선수가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개막 3연전에서 4개의 홈런을 몰아치며 어김없는 홈런 생산 능력을 보여 줬죠?”

“네, 맞습니다. 이번 시즌 디트로이트의 타선은 정말 핵타선이란 말이 부럽지 않죠. 개막 3연전에서 팀 홈런 개수가 벌써 10개가 넘었어요.”

“김사범 선수가 4개, 호세 라미레즈, 클리어 피스 선수가 2개를 기록했죠? 크리스틴 스튜어트 선수와 프레디 프리먼 선수 또한 한 개씩을 기록했습니다.”

“정말 피할 곳이 없네요.”

“프흡!”

PD의 신호에 맞춰 메인 화면에 띄워진 사진들을 보던 아나운서가 웃음을 참지 못해 멘트를 날리지 못하는 사이, 해설자들은 방송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이야, 김사범 선수가 유행시킨 건가요?”

“팬들에게 하는 거죠? 아, 클리어 선수는 화이트삭스 선수단에게 하고 있네요.”

“홈 팬들에게도 하는 거 같은데……. 하하하, 디트로이트가 메이저리그에 사랑을 뿌리고 있네요.”

심호흡을 하며 겨우 진정한 아나운서가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마무리 멘트를 말하기 시작했다.

“방금 보신 화면, 익숙하시죠? 우리나라에서 일명 ‘소심한 하트’, ‘작은 하트’라고 알려진 이 손동작이 디트로이트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됐는지, 2차전 수훈선수인 클리어 피스 선수의 인터뷰에서 들어 보시죠.”

[오늘 두 개의 홈런을 뽑아내며 엄청난 경기를 펼쳤습니다. 마이너와 메이저, 인디언스와 타이거즈로 급격하게 바뀐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된 건가요?]

[그야 물-론이죠. 이 팀은 정말 놀라워요. 모두가 올라가고 싶어 하고, 모두가 전-투적인 하루를 보냅니다. 그들을 보고 배우는 거죠.]

[아하, 전투적인 하루요?]

[예를 들면, 어제 붐-이 카메라를 보고 날린 이 손동작 같은!]

카메라가 클리어의 오른손을 클로즈업 했다.

[이 핸드사인은 붐-이 상대방을 요-만하게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남들이 모르는 순간에도 항상 전-투적인 마음가짐으로! 우리 팀은 그래요!]

[어…… 그건…… 다른 의미 아닌가요?]

[이게요? 워워, 당신이 틀렸어요. 붐-에게 직접 들은 뜻이거든요.]

그리고 정지한 화면.

스튜디오에도 정적이 흘렀다.

“큼큼, 음. 저건 누가 봐도…….”

“그래서! 제작진이 김사범 선수와 어렵게 전화통화를 연결해 진실을 물어봤습니다.”

[김사범 선수, ‘작은 하트’ 영상이 화제인데, 정말 클리어 피스 선수가 한 인터뷰 내용이 맞나요?]

[……할 말 없습니다. 하고 싶지 않아요.]

“하하하, 한국에서 사랑의 표현으로 시작된 하트가 굉장히 전투적인 의미로 바뀐 순간이군요. 메이저리그에 한해서요.”

* * *

- 톡톡!

- 톡톡!

아까부터 울리기 시작한 메시지 알람 소리.

재빨리 폰을 들어 진동모드로 바꿔 놨다.

- 위이이이잉!

- 위이이이잉!

- 위이이이잉!

아.

내가 죄인이네, 내가 죄인이야.

오랜만에 팬서비스 한번 해보려 했던 내가 아주 큰 죄인이야.

“붐, 아까부터 전화 온다.”

“이삭, 제발 날 그냥 놔 둬.”

“뭐라는 거야? 시끄러우니까 끄든가 무음으로 하든가 하라고.”

“제발…….”

원정 3연전이 끝나고 디트로이트로 돌아와 핸드폰을 켜자마자 보이는 친구들, 지인들, 가족들의 ‘ㅋㅋㅋㅋ’ 메시지.

이제는 오해라고 변명할 힘조차 없다.

“붐, 근데.”

기운이 빠져 축 늘어진 나를 집으로 실어다 주고 있는 고마운 친구, 이삭이 말했다.

“나 사실, 그거 알고 있었어.”

“뭘?”

“코리안 하트, 그거 알고 있었다고. 여동생이 케이팝 팬이거든.”

순간 엄청난 배신감이 몰려왔다.

땀 흘리며 하루 종일 놀아 준 아들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물음에 고민하지도 않고 ‘엄마!’라고 하는 걸 본 아빠의 마음이랄까?

‘그래도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

“근데 왜 폴리하고 클리어한테 말 안 한 건데?”

“재밌잖아. 클리어도 클리어인데 첫 경기에서 폴리가 마지막 타자, 걔 누구야? 그래. 일로이 히메네즈, 그 녀석 삼진으로 잡고 하트하는 걸 보고 깨달았지.”

나도 지금 깨달은 게 있다.

“이건 대박이라고! 크크크큭, 그 바보는 이제 내가 제대로 된 의미를 알려 줘도 안 믿을걸?”

사탄은 정말 극한직업이라는 거.

너처럼 끔찍한 악마가 지상에 존재하니까, 지옥에서 손가락만 빠는 실업자로 살아가고 있을 거 아냐?

“아무튼, 아, 어제 오늘 정말 웃겨서…… 붐? 야? 뭐해? 위험해! 위험하다고!!”

시즌 초에 흔들리고 있는 내 멘탈이 더 위험해. 그러니까 가만히 좀 있어, 이삭.

운전 중이던 이삭을 응징한 뒤-물론 갓길에 차를 세우고- 벌게진 눈으로 훌쩍이는 이삭을 뒤로한 채 마음의 안식처로 향했다.

철컥.

“자기! 왔어!”

가슴에서 배까지 이어진 흉터를 제외하고는 언제 투병생활을 했는지 모를 수리가 있는 내 집으로.

‘아니, 우리 집이지.’

“나 왔어. 후우.”

“하하핳! 그 하트 때문에 그러는 거지? 괜찮아, 괜찮아! 인터넷 보니까 다들 알고 있던데?”

“그래?”

“그럼,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이리 와, 배고프지? 내가 멕시칸 스튜 해 놨어.”

“좋지.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잘됐네.”

현관을 지나 거실에 걸려 있는 커다란 필의 사진-동거 조건-을 지나쳐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 식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 * *

같은 시간. 클리어의 집.

“대디!”

“오- 나의 귀염둥이들! 이리 오렴! 아빠가 왔단다!”

클리어가 다시 야구를 시작한 이유이자 목적, 프란츠 피스(6세)와 엘리스 피스(4세)가 달려와 클리어에게 안겼다.

“대디! 나 봤어요! 대디가 홈-런 치는 거!”

“나도! 나도!”

“그-래? 좋아! 내일도 이 대디가 홈-런을 칠게! 아빠 믿지?”

“네에-”

그렇게 흥분상태로 아빠를 맞이해 주던 프란츠와 엘리스는 이내 졸려 하기 시작했다.

“프란-츠! 앨리스! 이제 올라가서 자자꾸나!”

“대디하고 더 놀고 싶... 하암..”

“하하하! 내일 같이 또 놀자꾸나!”

앨리스가 먼저 잠든 방 안, 프란츠는 끝까지 버티고 버티다 잠들며 클리어에게 말했다.

“대디, 사랑해요.”

“나도 사랑한단다. 프란-츠.”

이불속에서 꼬물락거리던 손을 빼 아빠에게 하트를 그려 준 프란츠는 작게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었다.

“클리어, 왔니?”

“예, 엄마. 혹시 애들이 말썽부리진 않았죠? 나쁜 친구들하고 어울린다든지…….”

“애야, 프란츠는 이제 여섯 살이야. 갑자기 그건 왜?”

“프란츠가…… 아주 못된 말을 했어요. 방금. 저에게.”

클리어는 어머니에게 프란츠가 자기 전, 아빠를 요-만하게 만들려고 했다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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