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김사범, 2022시즌(내가 팀이고, 팀이 나다)
배드볼 히터.
그저 ‘나쁜’ 공을 때린다고 주어지는 게 아닌 타구를 그라운드 안, 수비수의 글러브가 닿지 않는 곳으로 ‘많이’ 날려 보내야 얻을 수 있는 수식어.
그래서 배트볼 히터란 별명으로 유명세를 떨친 선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다수가 그 시대를 주름잡던 대타자인 경우가 많다.
심지어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긴 양키스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도 그 당시엔 배드볼 히터로 꽤 날렸던 인물이었으니까.
“요즘 타석에서 접근 방법이 조금 바뀐 것 같던데?”
“아, 프레디, 역시. 알아봐 주는 건 프레디밖에 없네요.”
프레디 프리먼, 이 냉혹한 메이저리그 바닥에서 나름 끗발 좀 날리는 1루수와 나는 요즘 급격하게 친해졌다.
“스팬이 워낙 넓으니 상관없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조심해야 해. 존 바깥쪽의 공을 노리다보면 바깥쪽에서 더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공에 약해지니까.”
“음…… 그럴까요?”
“투수들이 볼을 던지면 안타를 맞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만의 선이 있잖아?”
그렇긴 하지.
그것까지 의식하며 타석에 들어서기는 좀 힘드니까.
“하지만, ‘내가 칠 수 있으면 그건 좋은 공이다’라는 말도 있지. 결국 이건 우리가 늘 하는 그거야, 아슬아슬한 서커스.”
“오, 좋은 말인데요? 누가 한 말이에요?”
“요기 베라.”
그 아저씨. 나하고 통하는 게 조금 있는 것 같은데?
그 외에도 아주 성숙하고 진지한 여러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보니 곧 론이 들어왔다.
자유분방한 자세로 각자 경기를 준비하고 있는 선수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론이 대뜸 내게 물었다.
“붐, 오늘 컨디션은 어떤가?”
“아, 괜찮아요.”
어느새 조용해진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는 론.
“들었지? 붐의 컨디션이 괜찮다니 오늘 경기도 이기겠군. 잘하면 전설 속에 나오는 붐의 힛 포 더 사이클을 볼 수도 있겠어.”
저 양반, 나 때문에 조금 시달리더니 요즘 좀 꽁해 있다.
‘조금 많이 시달리긴 했나?’
여하튼, 당하고 가만있을 수는 없지.
“오늘 힛 포 더 사이클이 아닌 홈런 포 더 사이클을 보여 드리죠.”
이 표현이 맞나?
사이클링 히트가 힛 포 더 사이클이니 사이클링 홈런은 홈런 포 더 사이클이겠지, 뭐.
* * *
코메리카 파크, 클리블랜드와의 경기.
“스트라이크! 아웃!”
아, 공 좋네.
저런 선수가 어디에 처박혀 있던 거야?
[아, 오늘 첫 타석에서 삼진으로 물러나는 김사범 선수입니다.]
[오랜만에 보는 김사범 선수의 루킹 삼진이네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선발, 대니 루도어 선수의 싱커가 기가 막히게 몸쪽을 파고들었습니다.]
[좌투수임에도 불구하고 95마일까지 나오는 싱커를 던지는 투수죠?]
[마이너리그에서는 주로 마무리로 등판했습니다만, 선발진이 무너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사정상 올 시즌에는 선발투수로 나오고 있습니다.]
[전화위복이네요, 불펜에서 던질 때보다 지금 더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으니까요.]
[맞습니다. 네 경기에 나와서 방어율이 2점대예요. 아직 시즌 초반이긴 하지만 좀 더 지켜볼 가치가 있는 선수입니다.]
몸쪽으로 깊게 들어올 것 같아서 피했는데, 아주 기가 막힌 무브먼트로 존 안으로 꺾여 들어갔다.
“홈런 포 더 사이클? 흠…….”
날 바라보는 폴리와 케이시의 눈빛이 아주 매섭다.
“기다려 봐, 언젠가 꼭 해 줄 테니까.”
언젠간 하겠지. 돌멩이 다섯 개 모아서 손가락 튕기는 것보단 쉽지 않겠어?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와 얼굴을 들이미는 폴리를 겨우 치우고 나서야 그라운드가 시야에 들어왔다.
따아아악!
때마침 울리는 시원한 타구음.
프레디가, 쳤다. 홈런을.
[프레디 프리먼! 우측 담장을 가볍게 넘기는 선제 쓰리런 포! 아직 아웃카운트는 단 하나만 올라간 상태입니다.]
[바로 이게 올 시즌 디트로이트의 무서움입니다. 타선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모든 선수가 담장을 넘길 수 있어요.]
홈플레이트에서 만나 같이 들어오는 이삭과 라미레즈, 프레디를 격하게 환영해 주고 난 뒤, 자리에 앉자마자 이삭이 내게 말했다.
“홈런 포 더 사이클?”
“할 거야.”
“포 더 사이클?”
“할 거라고.”
“사…….”
“그만. 더 입을 놀리면 내가 널 접어 버릴지도 몰라.”
“크크크큭. 난 그냥 사이영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데. 어때, 크리스와 코리, 케이시 중 누가 탈 거 같아? 푸하하하핫!”
개막 후 27경기에서 20승을 거둔 팀이 있다는 건 이 야구라는 스포츠가 불합리한 스포츠라는 걸 증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불합리한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 승리 행진은 결국 크게 보면 야구를 망치는 일이 되겠지.
‘이렇게 야구를 망칠 순 없지. 나라도 나서서 우리 팀 1번타자의 허리를 꺾어서…….’
이건 개인적인 분풀이가 아닌 야구를 위한, 즉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다.
“붐, 잠깐, 잠깐! 경기 중이잖아!”
“45도만 꺾을게. 많이 안 아파.”
[하하하,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덕아웃은 오늘도 활기차네요.]
[방금은 김사범 선수였죠? 이삭 페레데스 선수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것 같은데요?]
[새로운 세레머니인 거 같군요. 이삭 선수가 평생 맡아 보지 못할 높이의 공기를 마시고 있네요.]
[어, 방금 그 발언은 키가 작은 시청자분들을 무시하는 발언인 것 같은데요?]
[죄송합니다. 실언을 했네요.]
[하하, 농담입니다. 이삭 페레데스 선수도 즐거운지 계속해서 웃고 있군요.]
“크아아핫핫! 미안해! 미안하다고!”
“너만 희생하면 돼. 걱정 마.”
“나한테 이런다고 네 멍청한 소리가 없어지는…….”
“힘 더 준다. 이 꽉 물어라.”
실제로 접을 생각은 없다.
그냥, 뭐랄까. 복수? 아니, 야구를 위한 제물?
“하하하핫! 붐, 그만해! 이삭은 저렇게 높은 곳에 올라가 본 적이 없어서 지금 기절 직전일걸?”
“으으, 호세. 여긴 산소가 너무…….”
“그래, 거긴 우리가 있을 곳이 아냐. 어서 내려와. 붐?”
호세 라미레즈의 넉살 좋은 말에 결국 난 이삭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후, 다행이네. 호세도 조심해요. 저 괴물에게 잡히면 이렇게 되니까.”
이삭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는 라미레즈.
“음, 나한테는 안 그럴걸? 들어 올려질 거 같으면 론에게 다가가 2루를 본다고 말할 거거든.”
오, 좋은 생각인데?
“좋아요. 그걸로 딜 하죠.”
“딜.”
“뭘 딜이야? 내 의견은? 난 3루 못 봐!”
네 의견이 필요했으면 이런 이야기를 나누지도…….
따아악!
[맙소사!! 백투백 홈런입니다! 페이스 달턴 선수!]
[이거, 이렇게 되면 이번 경기에 괜히 코리 클루버 선수를 낸 게 아닐까요? 4점 차이는 클루버 선수에게는 너무나 아까운 점수 차이죠.]
시선을 돌렸을 땐, 페이스는 이미 배트를 내려놓고 묵묵히 1루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이거, 오늘 느낌이 이상한데? 붐 빼고 다들 홈런 하나씩 치는 거 아냐?”
* * *
경기 후, 인터뷰 룸.
론이 기자들을 앞에 두고 인터뷰를 하고 있다.
“오늘 경기, 타이거즈 선수들이 4개의 타구를 담장 밖으로 넘기면서 또다시 10점 이상의 득점을 기록했는데요, 연습 때 특별히 주문하시는 게 있나요?”
“아뇨, 없습니다. 요즘같이 타선이 폭발하는 시기에 감독이 할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하죠. 전 그저 신나서 무리하는 선수들을 덕아웃으로 불러들일 뿐입니다.”
“개막 후 오늘까지 28경기, 21승 7패를 기록하고 있는 비결이 있다면?”
기자의 말에 론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음, 이번 시즌을 준비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건 타선의 조화였는데……. 팀에 새로 합류한 선수들이 제 몫을 다해 주면서 그런 점이 아주 잘 이뤄진 것 같군요.”
“오늘 붐이 안타 없이 볼넷만 하나 기록했는데, 몸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닌가요?”
화기애애하던 인터뷰 룸의 분위기를 냉각시키는 누군가의 질문에, 다른 기자들은 숨을 죽였다.
붐의 건강상태는 앞에 앉아 있는 론에게 있어 굉장히 예민한 주제였으니까.
“방금 질문한 기자분, 혹시 소속과 성함이?”
“데일리 뉴 스포츠의 아담 존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제가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몸이 안 좋은 선수가 시즌이 한 달이 지난 이 시점에 4할대 중반의 타율과 21홈런을 기록할 수 있나요?”
“그건…….”
“붐, 붐 하니까 정말 그를 사람이 아닌 폭탄이나 홈런 치는 기계쯤으로 생각하나 본데…… 그도 사람입니다. 설사 기계더라도 잘 맞은 타구가 야수 정면으로 가는 걸 막을 순 없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다른 기자들과 얼굴이 점점 빨개지는 아담 존.
론은 그 모습을 보고 저 기자 같지도 안은 기자가 뒤늦게 자신의 멍청한 질문을 깨닫고 창피해한다고 생각했다.
문제의 그 기자가 쏘아내듯 토해 낸 다음 질문을 듣기 전까진.
“요즘 붐이 덕아웃 내에서 폭력적인 행동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은 어떻게 보십니까? 야구가 잘 풀리지 않자 다른 선수들에게 그 화를 푸는 거 아닌가요?”
오 맙소사.
론은 반사적으로 튀어 나갈 뻔한 욕설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는데 성공했다.
아니, 욕설‘만’ 참는데 성공했다.
“헤이, 존. 폭력은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게 폭력이야. 별다를 거 없는 스킨십을 잘난 혓바닥으로 왜곡하고, 키보드 위 손가락으로 씹어 대는 거. 보아하니 우리가 이번 시즌에 스윕한 팀들의 팬인가 본데……. 당신은 지금 이 순간부터 내 인터뷰 룸에 출입 금지야.”
“그게 무슨…….”
“셧 업.”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인터뷰 룸에 대기하고 있던 보안요원이 아담 존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언론을 이딴 식으로 통제할 순 없어!”
아담 존은 발악하듯 외치며 주변 기자들을 둘려봤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비웃음과 쓰레기 같은 놈이라는 속삭임, 그리고 보안요원의 두꺼운 팔뿐이었다.
“좋아요. 데일리 뉴 스포츠의 ‘언론인’ 아담 존. 당신이 여기서 한 행동에 책임을 져야 될 겁니다. 아니면 내가 아니라 우리 구단의 법무팀을 먼저 만나게 될 테니까. 그럼.”
그렇게 한바탕 촌극이 끝나고 난 뒤, 론은 남아있는 기자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다른 질문 있습니까? 방금 전에 제가 살면서 들어 본 질문 중 가장 멍청한 질문을 받아서 지금이라면 어떤 질문도 아주 성의껏 답변할 수 있을 거 같군요.”
* * *
“일부러 걸어 나갔다고?”
“당연하지. 내가 거기서 홈런을 쳤으면 스튜어트의 그랜드 슬램은 없었을 테니까.”
내 당당한 대답에 멍하니 날 바라보는 이삭과 폴리. 옆에 있던 케이시가 웃으며 다시 물어봤다.
“그러니까, 팀 홈런 포…… 아무튼. 그걸 위해서 그랬다는 거지?”
“그렇지. 난 스튜어트가 넘길 줄 알았거든. 오늘 배팅 컨디션이 좋았잖아.”
언제나 내가 이 팀에서 주인공이 될 순 없다.
때로는 팀을 위해 개인적인 기록을 희생해야 할 순간이 있고, 그게 지금 이 순간이다.
“아하, 그래서 존 밖으로 나가는 공에 붕붕 휘두르다가 끝에 가서야 볼넷을 고른 거군.”
“좋은 공이었으니까. ‘내가 칠 수 있으면 그건…….’”
“그만.”
흠. 딱 명언 타이밍인데. 몰상식한 녀석들.
내 말을 끊은 케이시가 이삭과 폴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위대하고 헌신적인 ‘더 배드볼 히터’, ‘디트로이트의 상징’은 오늘 바쁠 거 같으니까, 우리끼리 먹자고.”
어어…….
“잠깐, 케이시?”
“콜. 다운타운에 새로 타이 음식점이 생겼다는데, 가 볼까?”
“좋지.”
오늘 밖에서 먹고 간다고 말해 놨는데…….
내 차가 주차된 곳으로 향하며 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자기. 밥 먹었어? 먹었다고? 아냐, 더 먹을 수 있을 거야. 왜 그런 말도 있잖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