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김사범, 2022시즌(내가 팀이고, 팀이 나다)(2)
어느새 4월이 다 지나가고, 5월이 찾아왔다.
‘이제 슬슬 진짜 성적이 드러나겠군.’
시즌 초반, 예상과 다르게 맹렬한 기세로 스탯을 쌓아 나가던 선수들은 빠르게 끌어올린 페이스 때문에 슬슬 힘이 빠지고 있을 테고…….
반대로 본인의 명성에 영 못 미치는 성적을 내고 있는 선수들은 슬슬 반등했거나, 반등을 준비하고 있을 거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 험난한 정글에 족적을 남기기 위해서는 5월을 아주 잘 보내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따악.
“에릭, 좀 더 다양한 코스로 던져 줄래요? 볼도 섞어 주면 좋고.”
“음…… 하지만…….”
“걱정 마세요. 내가 말해 놨으니까. 요즘 연구하고 있는 게 있어서 그래요.”
그런 이유로, 나는 최근 타격 훈련의 비중을 급격하게 늘렸다.
0.428/0.851/1.610. 21홈런, 17도루.
이 정신 나간 슬래시 라인(타율/출루율/장타율)을 유지하고 싶은 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넓게 보고 강하게 치는 데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
자세가 조금 무너진 상태에서도 확실하게 내 힘을 배트에 전달하고 싶기 때문이다.
다른 전문가들이 보기엔 -특히 세이버메트리션- 굉장히 무식하고, 뜯어 말리고 싶은 방법일거다. 확실한 출루 기회 한 번을 확률이란 주사위놀음에 맡기는 거니까.
하지만 작년에 비해 딱히 줄어들지 않는 홈런수가 내 접근 방식이 아직은 아주 잘 먹히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커리어 하이를 이룬 장타자들이 괜히 그다음 시즌에 슬럼프를 겪는 게 아니지.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치기 어려운 곳으로 냅다 공을 던져 대니까.’
홈런을 뻥뻥 쳐대는 타자 앞에서 투수라는 족속들은 ‘볼넷으로 내보내도 뭐, 이득이지.’라는 아주 치사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타자가 제일 자신 없어 하는 곳으로 공을 밀어넣는 거다. 제구력이 좋은 투수도, 나쁜 투수도.
볼이 된다?
어차피 장타 맞을 거, 베이스 하나 주고 끝내면 오히려 더 깔끔하지.
‘아주 치사해. 아주.’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런 타격법이 먹히는 거다. 선구안이 제법 좋다고 소문난 내게 아슬아슬한 공을 던지면서 ‘스트라이크면 좋고, 아니면 뭐, 어쩔 수 없지.’라는 태도로 접근하던 투수들을 전부 잡아먹었으니까.
따아악!
“방금 그 공 좋았어요! 이야, 에릭! 타이거즈에서 마무리로 뛸 생각 없어요? 폴리 같은 멍청이보단 훨씬 나을 거 같은데!”
“크프하핫! 그 말, 폴리가 들으면 굉장히 서운해 할 거예요.”
그러든가 말든가.
타이 음식이나 처먹이면 풀리겠지 뭐.
“이번엔 성질 더러운 케이시보다 더 죽여주는 공을 던져 줘요, 에릭!”
치사한 놈들.
나도 타이 음식 좋아하는데.
* * *
[아, 오늘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선수들의 몸이 조금 무거워 보이는군요.]
[1회 김사범 선수의 솔로 홈런을 제외하고는 3회까지 이러다 할 득점기회를 만들지 못했어요.]
[클리블랜드의 선발투수로 나온 셰인 비버 선수가 아주 대단한 구위를 가진 건 아닌데요…….]
[패스트볼이 평균 91-94마일 정도에 형성되는, 강속구 투수라기보단 제구가 좋은 스타일이에요. 원래도 커브가 좋은 선수인데 오늘은 더 날카로운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스트라이크!”
크리스는 오늘도 어김없이 훌륭한 피칭을 보여 주고 있다.
코리 클루버가 선수단에 합류하면서 로테이션의 맨 앞자리가 아닌 다음 자리로 밀려났지만, 본인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다행이지. 투수조 고참 두 명이 신경전을 벌였다면……. 생각만 해도 답답하네.’
물론 뭐, 한국야구와 달리 메이저리그는 경기장 내에선 파벌 같은 경기 외적 요소를 개입하는 일이 드물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드물다곤 해도 아주 없던 일도 아니고.
“크리스! 볼 좋은데요?”
스파이크에 엉킨 흙을 털어 내고 있는 크리스에게 슬쩍 말을 걸자, 씨익 웃으며 내게 대답하는 크리스.
“볼이 아니라 스트라이크지. 안 그래?”
“아…….”
저 사람은 잘 나가다가 꼭 저렇게 아저씨들이 할 법한 개그를 치더라.
“큭.”
웃기긴 웃기니까 뭐라 할 수도 없고.
[크리스 아처 선수, 클리블랜드의 놀란 존스 선수를 상대로 과감하게 존 안으로 공을 찔러 넣었습니다. 거의 한가운데네요.]
[하하, 사실 두 선수의 위치를 생각하면 과감하다고 말하기엔 좀 그렇죠. 물론 놀란 존스 선수가 작년 시즌부터 콜업 되어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만, 아직 신인에 불과하니까요.]
[그렇군요. 크리스 아처, 2구를 던집니다.]
아처의 손끝에서 공이 뻗어 나가는 게 보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스윙을 시작하는 타자의 움직임도.
따악!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기다렸다는 듯 크리스의 슬라이더를 받아친 타자지만, 생각보다 크게 꺾인 슬라이더에 공의 윗부분을 맞히고 말았다.
‘아슬아슬한데?’
최대한 빠르게 몸을 움직이고 있지만…… 이건 나도 힘들다. 이삭이 해 줘야…….
“뛰어! 뛰어!”
빠졌네.
아슬아슬하지만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봤는데.
1루를 지나 2루까지 달려오는 타자주자를 보며 2루 베이스로 커버를 들어갔다.
“붐!”
앞으로 대시하며 맨손으로 공을 잡은 라테가 내 이름을 크게 외치며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방향, 좋고. 속도도…… 어?’
이거, 잘만 하면!
펑.
글러브가 살짝 울릴 정도로 매서운 송구,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공에 클리블랜드의 주자도, 주루 코치도 당황했다.
그리고 사람이란 게 한번 당황하기 시작하면 논리적인 행동보단 본능에 따르게 되고.
[아, 런다운! 2루를 노리던 놀란 존스 선수가 급하게 방향을 틀었습니다!]
[아, 이건 의미 없어요. 런다운에서 특별한 실수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무조건 잡힐 겁니다. 차라리 슬라이딩을 해서 틈을…… 와!]
“아웃!”
나는 단숨에 거리를 좁혀 글러브를 대는 데 성공했다.
[아하하, 무슨 슈퍼맨을 보는 것 같았어요.]
[2루 베이스를 발사대 삼아 로켓처럼 쏘아진 김사범 선수입니다.]
- 우와아아아아!
터져 나오는 환호.
내 이름을 부르짖는 팬들에게 글러브를 들어 라테를 가리키며 박수를 유도했다.
그러자 내 이름 뒤에 라테를 넣어 더욱 더 환호하는 팬들.
‘이런 기억들이 쌓이면 더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겠지.’
팬들의 환호와 격한 반응은 라테에게 쉽게 잊을 수 없는 즐거움을 가져다줄 거다.
그리고.
“배부른 이삭, 이제 몸도 안 날리는 거야?”
“뭐? 뭔 헛소리야?”
“라테가 아니었으면 게임 스코어가 ‘타이’가 될 수도 있었어. 집중하자.”
내 말을 듣자마자 썩어 들어가는 이삭의 얼굴.
한 놈 해치웠다.
* * *
“그러니까 그때, 막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빨리 던져야 하잖아요? 그래서 내야를 보는데 딱! 붐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덩치가 커서 그런가? 아, 이건 좋은 의미예요. 아무튼 그래서 공을 오른손에 잡는 순간! 알죠? 그거? 실밥이 딱 잡히는 그 느낌, 아무튼 운이 좋았죠. 그 뒤에 붐이 녀석을 ‘사냥’하고, 날 가리키면서 막 호응을 유도하는데…….”
라테 녀석은 수비가 끝나고 덕아웃으로 돌아오자마자 오늘의 희생자를 잡았다.
‘불쌍한 코리. 아니, 저 녀석이 당돌한 건가?’
자타공인 돌부처. 코리가 오늘의 희생자다.
“음.”
“역시, 코리는 아실 줄 알았어요. 아, 혹시 프로에 오기 전에 다른 포지션에서 뛴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럼 더 잘 아실 수 있을 텐데. 그래서 그 환호가…….”
아쉽다.
내가 이번 이닝 두 번째 타자만 아니었어도, 세 번째만 됐어도 얼른 라커룸으로 달려가 핸드폰을 가져올 텐데.
‘그’ 코리 클루버에게 표정이 생겼다.
그것도 힘들어하는 표정이.
사진으로 남겨 신문사에 팔면 정말 쏠쏠하게 벌어들일 수 있을 텐데…….
“붐, 가자고. 내가 이번엔 무조건 나갈 테니까, 알지?”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할 건 해야겠지.
[타석에 들어서는 호세 라미레즈 선수, 음, 요즘 들어 살짝 주춤하고 있죠?]
[최근 3경기에서 안타 한 개, 홈런 하나. 삼진이 4개네요. 기록상으로는 분명 좋은 컨디션이 아니에요.]
[호세 라미레즈 선수가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 줘야 뒤타순인 김사범 선수도 수월하게 타격을 할 수 있을 텐데요. 공교롭게도 두 선수가 비슷한 시기에 페이스가 꺾였어요. 조금 아쉽습니다.]
[그래도 클래스가 있는 선수이기 때문에 곧 자신의 자리를 찾을 겁니다. 김사범 선수도 마찬가지구요.]
“볼.”
“스트라이크!”
“파울!”
“볼!”
“볼!”
“파울!”
음…… 원래 저렇게 비장하게 타석에 들어서는 사람이 아닌데.
오늘 호세는 뭐랄까, 월드시리즈에서 마지막 타석에 나서는 타자 같은 느낌이다.
“파울!”
저렇게 끈질기게 투수를 상대해 주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만큼 내가 공을 오래 지켜볼 수 있고, 더불어서 투수의 집중력은 떨어지고 있을 테니까.
“베이스 온 볼스!”
[아, 11구까지 가는 끈질긴 승부 끝에 볼넷을 얻어낸 호세 라미레즈 선수입니다.]
[이야, 이렇게 되면…… 셰인 비버 선수가 참 곤란하겠어요. 아마 힘이 탁 빠지는 느낌일 겁니다.]
“헤이, 보. 잘 지냈어?”
타석에 들어서며 클리블랜드의 어린 포수에게 말을 건넸다.
“뭐야? 왜 친한 척이야?”
“여기서 적어도 40번은 만나는데, 친해지면 좋지 않아?”
“왓?”
“아니면 말고. 아무튼 우린 친구지? 내가 좀 더 어려 보이긴 하지만.”
어차피 벤치에서 나오는 사인을 받아 전달해주는 역할밖에 못하는 녀석이지만, 조금이라도 정신을 어지럽게 하면 분명 뭔가가 나오겠지.
투수가 투구판에 발을 얹고, 사인 교환이 시작됐다.
나름 호흡은 잘 맞는지 단번에 고개를 끄덕이는 투수.
바로 그때.
그륵, 극.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초보적인 실수를 하면 쓰나. 포수가.’
기본 중의 기본을 놓칠 정도로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있는 거겠지.
난 유명세나 이름값, 인기를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경기장 내에서는 좋아한다.
‘내 커리어를 보고 위축된 이런 녀석이 가끔 이런 실수를 해 주거든.’
아무튼, 바닥을 긁는 소리는 조금씩 커졌었다. 그건 내 몸쪽으로 붙어 앉았다는 뜻.
제구가 좋은 투수니 충분히 몸쪽 공을 노릴 만하다.
요즘 내가 방망이를 내지 않는 공은 몸쪽 깊은 공밖에 없으니까.
‘치기도 힘들고, 몰리지 않는 이상 쳐도 썩 좋은 타구가 나오진 않지만…….’
그래도 맵핵까지 켰는데.
따아악!
[김사범 선수, 몸쪽 패스트볼을 받아쳤습니다! 이 타구는 외야를 향해 뻗어 갑니다!]
[넘어갔네요.]
[홈-런! 불안하던 한점차 리드에 2점을 더하는 투런포! 김사범 선수에게 연타석 홈런은 전혀 대단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넘겨 줘야지.
사실 좀 타이밍이 안 맞아서 파울이 될 줄 알았는데, 마지막 순간에 끝까지 배트를 밀고 나간 게 도움이 된 거 같다.
홈플레이트를 밟고, 날 기다리고 있던 호세에게 물었다.
“어때요? 이걸 원한 거죠?”
“Absolutely yes.”
* * *
[붐, 2홈런 폭발! 3타수 3안타 5타점 4득점. 만점 활약!]
[점점 붐과의 승부를 피하는 메이저리그 구단들, 쌓여 가는 팬들의 불만!]
[한 명의 스타를 위해 ‘야구’를 바꿔야 하나? 어림없는 소리.]
“붐, 가자.”
경기가 끝난 뒤, 짐을 챙기고 있는 내게 이삭이 말했다.
“어딜? 사빵아?”
“Sa-bbang? 그게 뭐야?”
“있어. 너같이 멋진 선수에게 붙여 주는 한국식 별명.”
오늘 내가 아니었으면…… 분명 졌을 거다.
다른 녀석들의 방망이가 거짓말처럼 식었으니까.
“그래? 흠. 아무튼, 타이 음식점 괜찮던데? 오늘 또 갈 거야. 같이 가자고.”
“뭐? 안 가.”
내 단호한 거절에 얼굴이 빨개진 이삭이 내게 소리쳤다.
“제길, 오늘 하루 내내 그놈의 타이 소리를 몇 번 들은 줄 알아? 닥치고 따라와.”
다섯 번? 여섯 번인가?
이삭의 표정을 보니 따라가지 않으면 날 죽일 기세다.
“그러니까 내 소중함을 잘 기억하…….”
“닥치고 따라오라니까. 가자.”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