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131화 (131/175)

131화 김사범, 2022시즌(내가 팀이고, 팀이 나다)(3)

“요즘 타자들이 안 좋아. 좀 분발할 필요가 있어.”

“뭔 헛소리야? 그런 놈이 오늘 그렇게 지저분하게 세이브를 올렸나?”

“중요한 건 내가 세이브를 올렸다는 거지. 이삭 넌 오늘 한 번도 출루 못 했잖아.”

“그건…….”

“정상적인 타격 사이클이니 뭐니 그런 상투적인 말이라면 사양할게.”

오, 간만에 똑똑한 폴리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뭐야 이건?”

“사인 하나 해 줘.”

“뭐?”

“똑똑한 폴리의 팬이거든.”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다. 빨라도 한 달에 한번 올까 말까 한데…….

“다들 그만하지. 분위기가 좀 과열됐군.”

“페이스 너는…… 그래. 괜찮아. 아! 좀! 사인 안 해 줄 거라고!”

하하. 개판이네.

뭐 좀 격한 말들이 오가긴 했지만…… 다들 그냥저냥 잘 받아들이고 있다. 음……. 말 안 듣는 조카가 떼쓰는 걸 지켜보는 느낌?

‘표현의 차이인 거지. 유독 승리욕이 강한 폴리니까.’

“그만해. 휘두른다고 무조건 다 안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요새 제법 던지는 케이시가 폴리를 보며 말했다.

수염을 깎지 않아 거뭇거뭇한 인중을 한 채로.

텅!

“흐흐, 고맙네. 저 멍청이랑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에휴, 근데 케이시.”

이삭이 남은 맥주를 원샷하고 나서 케이시에게 물었다.

“그 콧수염은 정말 기르려는 거야? 내가 친구라 말해 주는 건데, 정말 안 어울려.”

오. 알콜 파워?

모두가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한 바로 그 말을 이삭이 대신 해 줬다.

“크흠, 그냥 징크스야. 다들 알잖아?”

“알지. 알다마다.”

“그렇다고 주장하는 건 알지.”

“음, 그래. 알겠다.”

우연히 얼굴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정색하면서 징크스라고 말하고 다니는데 모를 리가.

이겨도, 져도 변하는 게 없는 징크스가 징크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보통 어린 투수가 상대 타자에게 얕보이지 않으려고 쓰는 방법이긴 한데…….’

저 수염은…… 음…….

“큼,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지금 우리가 재작년은 물론이고 작년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게 중요한 거야.”

구단주가 작심하고 돈을 풀어 좋은 선수들을 긁어모은 데다, 여기 있는 우리도 더 발전했다.

케이시도 잘 나가고 있지만, 무엇보다 폴리는 예전에 내가 봤던 그 모습을 벌써부터 보여 주고 있는데, 특별한 날-오늘 같은-이 아닌 이상 상대 타자들은 1루를 밟지도 못했다.

“클리어나 라체, 플랫도 좋은 선수다. 지금 이 시기를 잘 넘기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겠지.”

페이스의 말대로 이 순간을 이겨 내면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자원들이다. 그들의 미래를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본 바로는.

그렇게 본격적으로 케이스-페이스 듀오가 입을 열기 시작하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좋아. 좋아. 알겠어. 사과할게. 됐지?”

“……나도.”

케페이스 커플의 협공에 결국 폴리와 이삭이 서로에게 사과하고야 말았다.

‘다 큰 남자 둘을 싸우자마자 화해시키다니…….’

무서운 녀석들.

마치 소설 속에서 정의가 무조건 승리하는 것처럼, 둘이 합체(?)하기 시작하면 적어도 여기 있는 멤버 중에선 이길 사람이 없다.

‘그래서 저번 식사 때 클리어나 라체를 데려온 거였는데.’

전혀 효과가 없었지.

아무튼. 지금 이렇게 상황이 흘러간다면 앞으로 우리의 저녁 식사 자리는 저 둘의 철권통치 아래서 고통 받을 거다.

아마 유기농 채소, 유기농 과일, 인공 사료를 먹이지 않고 키운 청정한 고기가 아니라면 입도 댈 수 없는 악마의 식탁이 되겠지.

그래선 안 된다.

여기서 저 둘의 연합을 끊어야 한다.

다행히도 약점은…… 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아무튼 지금 이 시기엔…….”

“케이시, 네 수염. 정말 구려. 프링글스 통에 그려진 캐릭터 수염 같아.”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뱉은 내 말에 갑자기 싸해지는 분위기.

‘제발…….’

“풉.”

터졌다.

터졌어!

“페이스, 너…….”

페이스의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웃음소리에 굉장히 상처받은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는 케이시.

“아니, 이건……. 큽.”

끝났다.

이건 끝났어.

난 오늘, 작은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 * *

다음 날, 경기 전.

“안녕하세요. 디트로이트 선셋의 트리븐 와치입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올 시즌부터 클리블랜드를 떠나 디트로이트에 합류한 두 남자가 인터뷰하고 있었다.

“인디언스를 상대하는 마지막 경기에서 우리 둘을 상대로 인터뷰라니, 이거 노린 거 맞죠?”

웃음기를 머금은 호세 라미메즈의 말에 오늘 인터뷰를 진행하는 트리븐은 살짝 몸을 떨며 대답했다.

“오, 음…… 사실 맞아요. 저희 같은 언론들에겐 아주 좋은 기회죠. 오늘 경기 전에 인터뷰를 요청한 언론사가 수십 군데는 될걸요?”

“오호,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이 자리를 차지한 거네요?”

“그래서 오늘은 아침부터 굉장히 기분이 좋…… 아, 이거 제가 인터뷰 대상이 된 건가요? 하하.”

순식간에 뒤바뀐 상황, 익살스러운 트리븐의 말투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작게 웃기 시작했다.

코리 클루버를 제외하고.

“그거 좋은데요? 자, 말해 봐요. 여기 코리와 내가 합류한 디트로이트, 어때요?”

“아하하하, 좋아요. 대신 이게 마지막 질문입니다. 흠흠. 강해졌죠, 더 강해졌어요. 크리스와 ‘에이스 킬러’가 클루버 덕분에 조금 더 수월한 매치업을 이루게 된 것도 좋고, 당신이 온 뒤로 아직 공식전에서 한 개의 실책도 없는 내야진도 아주 만족스럽고요.”

“아하, 수비만?”

“하하하, 그럴 리가요. 자. 이제 진짜 본업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네요. 시간을 끌면 분명 제 직장을 잃을 게 분명하니……. 바로 묻겠습니다, 타이거즈, 어떤가요?”

보기완 다르게 베테랑 기자인지, 잠깐 말렸던 페이스를 되찾으며 바로 질문을 던지는 트리븐.

호세 라미레즈가 멈칫하며 고민을 하는 사이, 코리 클루버가 먼저 대답하기 시작했다.

“놀라운 팀입니다. 젋고 강력하죠. 밖에서 볼 때보다 훨씬 잘 짜여진 팀이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 않기도 하고.”

“아, 그렇다면…….”

트리븐이 클루버의 말을 듣기 위해 조금 더 깊은 질문을 던져 봤지만, 클루버는 라미레즈를 가리키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하하, 알겠습니다. 나머지 궁금증은 조금 뒤에 듣기로 하죠. 라미레즈?”

“음. 클루버의 말이 맞아요. 밖에서 보기에도 흥미롭고. 안에서도 그런 팀이죠.”

“어떤 의미인가요?”

라미레즈가 씨익 웃으며 가져온 물병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대답했다.

“예를 들면…… 붐? 붐은 정말…… 대단한 녀석이에요. 그런 성적을 내면서도 전혀 만족하지 않아요. 머릿속에 야구와 승리밖에 없죠. 심지어 자기 실력이 아직 모자란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진짜요?”

“진짜. 그래서 더 대단하죠. 내가 그라면 절대 그렇게 살지 않을 정도로 우직하게 앞만 보고 있어요. 그리고…….”

“그리고?”

“전체적으로 다른 어린 친구들도 굉장히 향상심이 강해요. 스스로가 경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고, 주변 모두를 라이벌로 생각하죠. 아, 붐은 예외로 두는 것 같긴 한데……. 아무튼, 그래서 경기 때마다 덕아웃이 아주 핫하죠.”

트리븐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간단히 대답을 정리한 뒤, 다시 라미레즈에게 되물었다.

“타이거즈에서의 롤에는 만족하나요? 인디언스 때는 상황에 따라 많은 포지션을 소화했지만, 여기서는 3루수로만 나서고 있는데.”

“물론이죠. 호흡이 잘 맞는 선수들과 내야를 지킨다는 건 꽤 즐거운 일이거든요. 물론 다음 FA 때는 타격이 아주 좋은 유틸리티가 아닌 가끔 담장을 넘기기도 하는 3루수로 시장에 나가야 하겠지만.”

“하하하, 그건 아쉽겠네요.”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인터뷰가 마무리되어 갈 때쯤, 드디어 클루버가 입을 열었다.

“팀 퍼스트. 이 팀의 장점이죠.”

“네?”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개인적인 성적을 위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 팀의 코어는 ‘팀 퍼스트’입니다. 론이 그러진 않겠지만…… 9회 말 만루 상황에서 붐에게 번트 사인을 내도 아마 받아들일 겁니다.”

“아하?”

“그리고 붐이 그렇다는 건, 다른 젊은 선수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죠. 그는 젊은 리더니까.”

* * *

클리블랜드와의 마지막 경기를 앞둔 라커룸.

불펜에서 연습투구를 마친 케이시가 언더셔츠를 갈아입기 위해 라커룸으로 돌아왔다.

“오늘 멋진데?”

돌아오지 않는 대답.

분명 어제의 나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투사였는데……. 오늘은 큰 실수를 저지른 신입사원이 된 기분이다.

“이삭, 어때? 얼마나 갈까?”

“길면 반년? 짧아도 로테이션 두 번은 돌겠네.”

“흠…….”

내 의견과 같다.

음……

될 대로 되라지 뭐. 남자놈이 치사하게 삐지기나 하고. 떼야겠네, 떼야겠어.

“저 자식 상처받은 거 아닌지 몰라. 알고 보면 섬세한 녀석인데.”

나보다 먼저 자신의 짐을 챙기고 덕아웃으로 향하는 이삭의 말이 내 마음을 후벼 팠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8회 말.

따아아악!

[김사범 선수! 오늘 홈런 두 개째! 케이시 마이즈 선수를 제대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아,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타자들이 빠른 템포로 스윙을 가져가고 있는 상황이라 조금 방심한 거 같네요. 아니면 긴장했나요?]

실수다.

적당히 치고 들어가려고 적당히 스윙한 건데, 하필 그때 실투가 들어와선…….

턱, 턱, 파악, 턱, 턱, 턱

한없이 고요한 그라운드. 들리는 소리라고는 최대한 빨리 달리고 있는 내 발소리와 가끔 베이스에서 나는 소리가 전부다.

플레이트를 밟고, 특별한 세레머니 없이 재빨리 덕아웃으로 튀어 들어갔다.

역시나 날 째려보는 녀석들. 수건을 뒤집어쓰고 집중 중인 케이시를 조심히 지나 내 자리에 아주 살포시 앉았다.

“정신 나갔어? 거기서 왜!”

“쉬잇!”

날 보자마자 자동으로 화를 내기 시작한 이삭을 손가락 하나로 막고, 케이시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수야. 정말 홈런을 칠 생각은 없었다고.”

“멍청이. 케이시가 ‘그걸’ 못하면 네 탓이야.”

“방금 케이시를 저주한 거야? 이제 네 탓이네.”

“뭐?”

따악!

“아웃!”

심판의 콜이 들리자마자, 우리 둘은 바로 몸을 튕겨 올리며 반사적으로 글러브를 집어 들었다.

“가자.”

“빨리.”

케이시의 커리어 첫 퍼펙트게임, 그 마지막 관문이다.

[자, 마지막 이닝입니다. 현재까지 전광판에 쓰여 있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란 글자 옆에는 0 말고 다른 숫자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 선수 시절 우승을 앞둔 마지막 이닝에 마무리 투수로 나설 때보다 더 떨리는데요?]

케이시가 마운드에 올라 투구를 준비하는 동안, 조금 더 꼼꼼하게 바닥을 살펴봤다.

아주 조그만 돌멩이라도, 완벽하게. 완벽한 투구를 하는……. 아, 이런. 실수다. 이거 설마?

딱!

[아, 빗맞았어요! 이거! 이거!]

[중견수, 유격수, 2루수가 모두 모입니다! 누군가 콜을 해야 해요! 다들 미루다 보면 아무도 못 잡습니다!]

괜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저런 대사를 넣는 게 아니다

“마이! 마이! 내 꺼야! 오지 마!”

시선을 돌릴 여유는 없다. 최대한 크게 콜을 했으니 부딪혀서 공을 못 잡게 되면 나와 부딪힌 그 사람을 공이 떨어진 자리에 머리부터 심어 버릴 거다.

“흐읍!”

마치 외야수처럼 반쯤 몸을 돌리며 뛰던 몸을 튕겨서 최대한 높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틱.

글러브 끝에 맞고 튕기는 공.

다행히 엄한 곳으로 튀지는 않았는……데…….

타이밍이 애매하다.

“숙여!”

바로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시 뛰려던 몸을 납작 엎드리자…….

“아웃!”

울리는 심판의 아웃 콜.

재빨리 몸을 돌려 공을 잡은 사람이 누군지 살펴봤다.

“그것도 못 잡냐? 하도 소리를 빽빽 질러면서 다가오길래 겨우 피해 줬는데.”

역시. 내 생각대로 빛삭 페레데스, 아니. 뭔가 이상한데. 아무튼, 이 시대 최고의 2루수가 늠름하고 작게 서 있었다.

그리고, 작고 거대한 2루수에게 행운을 도둑맞은 클리블랜드는.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헛스윙입니다! 케이시 마이즈 선수가 메이저리그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습니다!]

[아, 대단하네요. 풀카운트 상태에서 기어코 삼진을 잡아냈어요. 거기서 스플리터를 던지는 배짱은 도대체 무슨…….]

수염을 깨끗하게 민 케이시에게 퍼펙트게임을 선물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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