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136화 (136/175)

136화 김사범, 2022시즌(제가(齊家))(2)

[경기가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탬파베이가 아주 끈질긴 승부를 펼치고 있어요.]

[시미즈 루이 선수가 6이닝을 던지고 투구 수가 105개, 아마 다음 이닝에는 교체가 될 거 같군요.]

[6:4, 2점의 점수 차이는 그렇게 큰 차이가 아니니까요. 디트로이트 입장에서도 낼 이유가 없습니다. 아마 뷰 버로우즈 선수가 올라올 겁니다.]

탬파베이와의 경기.

경기 전, 병원에서 정밀진단을 받는 게 어떻겠냐는 론의 제안을 뿌리치느라 힘들었다.

‘괜찮긴 한데, 몸통 돌릴 때 거슬리는 게 영…….’

야구를 하다보면 으레 있는 근육통. 붓기도 거의 없고 딱히 크게 아프지도 않은 부상을 가지고 엄살을 부릴 생각은 없다.

“멍청한 폴리가 아니었다면 쟤네들이 이렇게 달려들지도 않았을 텐데.”

“그러게. 멍청한 폴리.”

적진에서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마무리 투수가 불펜 투구를 한다?

사실상 오늘 경기에 마무리 투수 투입이 없다는 걸 알려 주는 거와 다름없다.

론은 그걸 감안하고서도 폴리의 불펜피칭을 허락한 거고. 어떻게 보면 리그 내 최강자의 여유라고도 할 수 있지.

‘문제는 그 소식을 들은 탬파가 저렇게 미친 듯이 물고 늘어질 거라곤 예상 못했다는 거지.’

옆구리가 아주 약간 신경 쓰인 나머지 나도 앞선 세 타석에서 안타 한 개, 볼넷 한 개만 얻어 냈을 뿐이니까.

“아까 붐이 2루타를 못 쳤으면 어쩔 뻔했어?”

“애초에 그게 2루타가 된 게 폴리 탓이라니까?”

케이시와 이삭의 혀 끝이 아주 날카롭게 폴리를 난도질하고 있다.

막상 당사자인 폴리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지만.

7회 초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펜으로 향하지 않고 덕아웃에서 투수 코치와 찰싹 붙어 있는 폴리.

뭘 그렇게 이야기하는지 궁금해서 슬쩍 다가가 들어봤다.

“코치님. 저 오늘 불펜 투구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봤어요.”

“그래.”

“물론, 그 위대한 실험에 어쩔 수 없는 희생자가 나왔지만. 붐은 튼튼하니까 괜찮잖아요? 절 불펜으로 보내 주세요. 절 전적으로 믿으셔야 한다니까요?”

“그래.”

“그럼 갑니다? 불펜에서 몸 풀면서…….”

“아니. 불펜으로 가자마자 한 일주일쯤 공도 못 잡게 만들어 줄게.”

“아! 진짜!”

내 몸이 튼튼해?

내 몸은 튼튼하지 않다.

그냥 일반적인 근육질 남성 정도의 내구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는 녀석에겐 교육이 필요하지.’

둘이 대화하고 있는 덕아웃 구석으로 슬쩍 다가가 투수 코치에게 말을 건넸다.

“지금 굉장히 불편해 보이시는데. 도울 거라도?”

“아, 붐. 괜찮아. 이게 내가 많은 연봉을 받는 이유거든. 다섯 살짜리 애처럼 징징대는 투수들을 다독이는 거.”

눈부시다. 직업정신이 빛나고 있다.

“혹시라도 힘쓸 일이 생기면…….”

“그것도 걱정 마. 이 정도면 직접 할 수도 있으니까. 그 힘은 다음 타석에서 쓰라고.”

폴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코치의 눈이 심상치 않았다.

* * *

최종 스코어 6:5.

9회 말에 한 점을 주긴 했지만 우린 승리했다.

경기 마무리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이삭이 작업에 들어갔다.

“오늘 나랑 한잔 하자.”

“안 돼. 컨디션 관리해야지. 오늘 내가 9회에 올라갔으면…… 으아악!”

“헛소리하지 말고, 따라와라.”

원래라면 내가 해야 할 역할을 이삭이 훌륭하게 대신 수행해 주고 있었다.

절대 안정. 슬쩍 운을 띄워 봤지만 론은 단 한마디로 나를 격침시켰다.

“그래, 호실 앞에 누굴 세워 두면 좋겠나? 팀의 상징에게 그 정도 배려는 해 줄 수 있지.”

“……그냥 쉬겠습니다.”

폴리 하나 살리자고 보초까지 세우기에는 좀…….

그리고, 늦은 밤.

수리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한참 고민하고 있을 무렵, 내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쾅쾅쾅!

“누구야? 이 밤중에?”

“나다, 이삭.”

“문 옆에 달려 있는 게 벨이라는 건데, 그걸 누르면 안에 있는 사람에게 연락이 가.”

“뭐?”

“멕시코에 없는 물건 같아서.”

“됐고, 들어간다.”

폴리와 한 잔 같은 한 병을 먹고 왔는지 거무스름한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는 이삭이 내 소중한 공간으로 침입해 왔다.

“무슨 일이야? 이 늦은 시간에?”

“내가 알아냈다. 폴리가 왜 그러는지.”

“……그건 좀 흥미롭네. 물 한잔 줄까?”

“시원하게.”

아무렴요.

아주 시원하게 드리겠습니다.

내가 준 얼음 반, 물 반인 물을 한 번에 들이켠 이삭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입을 열었다.

“크으…… 아, 그거 때문이야.”

“그거?”

“로라, 로라 때문이라고.”

“로라가 누구…… 아. 그 폴리 여자친구?”

“어.”

“헤어졌대? 그거 가지고 지금 저 꼬라지로 돌아다니는 거라고?”

이 미친 소가.

겨우 이별가지고 지금 저러는 거라고?

“아니. 그거면 다행이지.”

“……더 이상 들으면 안 될 거 같은데.”

“이미 시작했어. 그리고 이삭 페레데스는 입 밖으로 낸 말을 절대 끊는 법이 없지.”

“쓸데없이 3인칭으로 말하지 말고, 뭔데?”

폴리의 멍청함에 속에서 천불이 올라왔다.

‘아무리 그래도 프로 선수가 사적인 일 때문에 경기를 망쳐? 그것도 여자 문제로?’

물론, 메이저리거도 사람이니까 경기력이 다소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선이 있는 거지, 저렇게 정신줄을 놓고…….

‘후, 심호흡, 심호흡.’

마침 폴리 앞에 있는 얼음물이 보였다.

시즌 중에는 얼음물을 마시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물이 너무 필요하다.

물잔을 들고 막 물을 마시려는 찰나.

“로라가 폴리의 아이를 가졌대.”

“뭐?”

“크아악!”

촤악-

나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얼음물을 이삭에게 뿌리고 말았다.

잠시 후, 분노 어린 이삭의 난동을 잠시 받아 주고 나서야 다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건 근데 좋은 거 아냐? 서로 없으면 못 산다고 난리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그러는 건데?”

“그게 말이지…….”

이삭이 폴리에게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언제나처럼 홈경기를 마치고 로라와 저녁을 먹던 폴리, 그런데 그날따라 폴리가 보기에도 로라의 행동이 이상했단다.

계속해서 물어보는 폴리에게 아니라는 말만 자꾸 하던 로라가 마침내 입을 연건 저녁식사가 끝나고, 로라의 집 앞에서.

그 내용은 뭐…… 앞에서 들었던 이야기와 같이 폴리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야기다.

“그럴 수도 있지. 특히 여기선 아주 드문 이야기도 아니잖아?”

“문제는 바로 이다음이야.”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폴리는…….

십 분 동안 굳어서 아무 말도 못 했단다.

로라는 그런 폴리를 보다 집으로 들어가서 지금까지 만나 주지도 않고, 연락도 받지 않는 거고.

“십 분이란 것도 폴리가 느낀 시간이라니까 사실 얼마가 지난지도 정확하지 않은 거지.”

고요한 차 안에서 로라가 느꼈을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배신감이나 좌절, 슬픔이 아니었을까?

“폴리는?”

“그냥 당황했던 거래. 갑자기 한 아이의 아빠가 된다는 게 믿기지도 않고. 로라의 집이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는데……. 갑자기 로라의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더라고.”

“음.”

“알잖아? 폴리가 한 번에 두 가지 일 못 하는 거.”

“알지. 가끔 마운드에서 숨 쉬는 걸 까먹을까 봐 걱정되는데.”

그렇게 폴리와 로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헤이, 이삭.”

“왜?”

“해결책이 있는 것 같은데.”

“뭔데?”

“폴리만 잘하면 아주 성공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야.”

빠르면 빠를수록 성공률이 높을거다.

물론 로라가 아직 폴리에게 마음이 남아있어야 하겠지만.

내 해결책을 듣던 이삭의 표정이 애매하게 변했다.

“프로포즈? 맨 오브 더 매치 인터뷰에서?”

“그렇지. 대놓고 하면 좀 그렇고…… 뭐 둘만의 애칭 같은 걸로 하라고 하면 되겠지.”

“음…… 애매한데.”

“로라가 마음이 남아 있다면, 어떻게든 귀에 들어가지 않을까?”

“흠…….”

“문제는 폴리가 인터뷰를 할 수 있을지인데…….”

마무리 투수가 수훈선수로 뽑히는 건 조금 힘든 일이다.

애초에 경기 마지막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보직이다 보니, 역설적으로 잘 뽑히지 못하는 거지.

“폴리라면 9회에 등판해서 연장 18회까지 100개쯤 던지라고 해도 던지겠지. 지금 상황이라면.”

“음. 그건 나도 동의.”

남은 건 폴리의 반응인가?

우리가 아무리 여기서 이야기해도 정작 폴리가 반응이 없다면 말짱 꽝이니까.

* * *

다음 날.

“정말 그렇게 하면 로라가 내 연락을 받아 줄까?”

이삭과 함께 말을 꺼내자마자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폴리.

“그……렇지 않을까? 그냥 마음을 표현할 기회가 없었던 거니까…….”

내 말이 끝나자마자 굳은 표정으로 글러브를 챙겨 떠나려는 폴리. 그런 폴리를 이삭이 간신히 붙잡았다.

“폴리! 지금 던져 봤자 어차피 못 나가! 좀 기다렸다…….”

“안 던져.”

“응?”

“어제처럼 덕아웃에 붙잡혀 있다간 나가지도 못할 테니까. 거기서 있다 보면 내보내 주겠지. 투수 코치님보다 불펜 코치님이 상대하기 쉽기도 하고. 엊그제 탬파베이를 상대로 블론을 했으니 감독님이 날 내기에 부담스러울 수도 있고. 지금부터 철저하게 몸을 풀어서 불펜에서 보여줄 수밖에.”

나왔다. 똑똑한 폴리.

사랑이란 게 이렇게 위대한 거다.

잘하는 건 공을 던지는 거밖에 없는 미친 소를 논리로 가득 찬 문과생으로 만들어 버릴 만큼.

문과생 폴리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진심이 어린 말이 튀어나왔다.

“가기 전에 사인 좀. 여기 배트에.”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이삭.

왜, 뭐. 전에도 말했듯 이런 기회가 자주 있는 게 아니라고.

* * *

[삼진, 삼진, 삼진, 삼진! 8회 말, 원아웃 만루 상황에서 올라온 제이슨 폴리 선수가 9회 말 투아웃까지 오직 삼진으로만 아웃카운트를 쌓고 있습니다!]

[놀랍습니다. 아주 놀라워요. 심지어 9회 말은 두 타자 연속 3구 삼진입니다. 이 페이스라면 무결점 이닝에도 도전할 수 있겠는데요?]

[무결점 이닝이요?]

[네, 영어로는 Immaculate inning이라고 하는데……. 3타자 연속 3구 삼진을 잡는, 투수가 한 이닝을 소화하며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기록입니다.]

[아하, 그렇긴 하군요. 다른 수비의 도움을 받지 않는, 가장 완벽한 이닝이라, 멋진데요?]

“스트라이크!”

[101마일! 대타로 나온 탬파베이 레이스의 필립 리슨 선수, 몸쪽 패스트볼을 그대로 흘려보내네요.]

[저 코스는 치더라도 좋은 타구가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제이슨 폴리 선수의 제구가 정말 날카롭네요.]

저 자식. 분명 의식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살기가 담긴 공을 던질 리가 없지.

‘몸쪽 꽉 찬 존에 101마일? 맞고 뒤져라 패스트볼이야?’

“……스트라이크!”

[아! 헛스윙! 공의 아래를 통과하는 큰 스윙을 하는 필립 리슨!]

[살짝 높긴 했습니다만, 오늘 코너 햄프슨 구심의 존이 꽤 넓었거든요? 실투에 가까운 공이라고 볼 수도 있었는데, 이걸 놓치네요.]

얼씨구? 운도 좋네?

그리고 3구째.

폴리가 고개를 저으며 신중하게 공을 고르고 있다.

[배터리 간 사인 교환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아, 제이슨 폴리 선수가 한 번 발을 빼 봅니다.]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다.

이거 분명?

“폴리! 이상한 거 하지 말고 페이스가 시키는 대로 던져!”

옆에서 이삭이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 줬다.

그런 우리를 보며 만화영화의 주인공 같은 미소를 날리는 녀석.

[길었던 사인 교환이 끝났습니다. 제3구!]

“스트라이크! 아웃!”

[3타자 연속 3구 삼진을 달성하는 제이슨 폴리!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탬파베이 원정에서 위닝시리즈를 거뒀습니다!]

[방금 전 던진 마지막 공은…… 슬라이더인가요? 제이슨 폴리 선수는 패스트볼-체인지업 투 피치 투수일 텐데…….]

미친놈.

결국 던졌다.

그것도 제법 그럴싸하게.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길. 옆에서 같이 걸어가던 이삭에게 말을 건넸다.

“하루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나도. 저 녀석이 우쭐댈 걸 생각하면…….”

“케이시에게 부탁할까?”

“그것도 좋지.”

최고의 슬라이더 어쩌구 하면서 까불 폴리의 모습이 떠올라 괜히 머리가 아파왔다.

경기 후.

당연하게도 수훈선수 인터뷰 대상은 폴리로 선정됐다.

오늘만은 워터-붐을 하지 말자는 내 의견에 모두들 덕아웃 난간에 기대 폴리의 인터뷰를 지켜봤다.

“끝으로, 내게 아주 큰 선물을 준 내 보물에게 아주, 아주 보고 싶다는…….”

그래도 나름 계획대로…… 잠깐, 선물?

‘나도 큰 선물을 줄게. 아주아주 큰.’

뭐야……. 설마…… 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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