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김사범, 2022시즌(제가(齊家))(4)
“그러니까, 선물을 사 와라, 나도 선물을 준비하겠다?”
“음…….”
일이 커졌다.
원래라면 도움이 될 만한 인원-라테, 라테, 그리고 라테-에게 조용히 물어보려고 했던 건데…….
그 조용히 물어보려는 상대가 얼마나 가벼운 입을 가졌는지 고려하지 않은 내 실수다.
“붐, 이거 그건데?”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삭.”
이삭과 폴리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안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프로포즈.”
“프로포즈해 달라는 거네.”
프로포즈?
“뭔 소리야? 이미 같이 사는 걸 양쪽 부모님이 다 알고 있는데 무슨 프로포즈?”
그리고, 프로포즈는 이미 했다.
수리와 같이 살기로 결심한 그 날.
수리도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내 프로포즈를 받아 줬고.
“그게 프로포즈라고?”
“같이 살아 보자. 지금부터. 이 두 마디가?”
“수리가 이 사실을 알까?”
“모르겠지. 알면 저런 놈하고 같이 살 이유가 없어.”
바보 같은 녀석들.
프로포즈는 화려하지 않게, 간단하게 하는 거다.
꼭 이런 놈들이 막 유람선 빌리고, 악사 섭외하고, 폭죽 쏘면서 프로포즈를 하지.
여자들이 그걸 얼마나 싫어하는지도 모르고.
“너희는 수리를 잘 모르고, 난 수리를 잘 알지. 적어도 프로포즈는 아냐.”
* * *
같은 시간, 디트로이트.
[오빠가 과연 프로포즈를 할까요?]
“글쎄……. 이 정도 눈치를 줬는데…….”
[그 인간이 눈치가 좀 없어야죠. 아무튼, 언니가 준비한 선물은 뭔데요?]
“나? 음…… 오빠한테 이야기 안 할 거지?”
[당연하죠. 난 무조건 언니 편이에요.]
잠시 고민하던 수리가 이내 결심한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
“프로포즈. 만약 프로포즈를 안 하면 내가 하려고. 꼭 남자가 프로포즈를 하라는 법은 없잖아?”
[와…… 신여성……. 오빠가 전생에 무슨 일을 했길래 언니 같은 사람하고 만난 걸까요?]
“프흐흣, 아냐,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거야.”
[아마 세종대왕님 아니면 이순신 장군님이었을거야. 아무튼, 언니. 만약 오빠가 프로포즈 안 하고 다른 걸 사다 줘도 너무 실망하지 마요. 그 인간 나름대로 엄청나게 고민하다 고른 거일 테니까.]
“나도 알지. 아, 빨래 다 됐다. 너도 얼른 자. 늦었잖아.”
[저도 어차피 태연 오빠 원정 갔다 돌아오는 거 기다리고 있어서……. 언니도 잘 자요!]
“그래.”
김하별과의 통화가 끝나고, 수리는 한참을 심각하게 무언가를 생각하다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기대하지 말자, 분명 또 이상한 걸 들고 와서 칭찬해 달라는 눈빛을 보낼 텐데 뭐.”
* * *
“그럼, 뭔데?”
“내 생각엔…….”
내가 말을 하려는 순간, 지금까지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라테가 끼어들었다.
“붐, 붐, 붐! 축하해요! 이거 그거네!”
호들갑을 떨며 갑자기 내게 축하한단 말을 건네는 라테.
‘역시. 다른 놈들 말고 라테에게 말한 건 좋은 선택이었어.’
“무슨 축하?”
여전히 감을 못 잡는 이삭을 보며 라테가 말했다.
“뻔하죠! 큰 선물? 같이 사는데 큰 선물이 뭐가 필요해요? 이건 그게 분명해요. 그게 아니면 이렇게 뜸을 들이면서 선물을 줄 리가 없지. 그것도 이렇게 힌트를 주면서! 아, 그렇게 안 봤는데 굉장히 멋있는 여자네요, 수리 씨는.”
“그렇지? 역시 네가 생각하기에도 수리가 아이…….”
“프로포즈네! 제가 보기엔 붐이 다른 건 몰라도 눈치가 좀 없잖아요. 지금 하는 말만 봐도 수리 씨가 얼마나 답답할지 눈에 보이는데! 야구는 잘하는데 이런 쪽으로 별로라는 게 웃기기도 한데, 아무튼. 뭘 사가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멋진 프로포즈를 할지가 포인트네요. 맞아요.”
얜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프로포즈는 이미 했다니까.
“그것보단 내 생각엔 수리가 아이를…….”
자꾸 주제에서 빗나가는 대화 주제가 좀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타당한 의견이군. 붐이 조금 눈치가 없는 편이긴 하다.”
“그럼 무슨 선물을 사가야 하지? 역시, 반지겠지?”
“반지가 제일 낫겠지. 간단한 디자인이라도 상관없을 거다. 아니면 목걸이도 좋고.”
“그렇지. 반지는 같이 골라도 되니까. 반지하고 같이 꽃다발?”
“꽃다발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는 법이지.”
이미 녀석들은 프로포즈에 꽂혀 눈이 돌아가 있었다.
리무진이니, 야경이니, 꽃다발이니, 반지니 하는 이야기들 사이에서 폴리만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 줬다.
“근데, 수리의 그 선물이 프로포즈라는 확신이 어디서 나온거야? 그건 보통 여자들이 준비하진 않잖아? 내 생각엔…… 수리가 아이를 가진 거 같은데.”
그래. 그거야.
“멍청한 폴리는 입만 열면 멍청한 소리를 내뱉지.”
“그게 폴리니까. 그래서 난 폴리가 새로 익힌 슬라이더를 Idi-lider라고 부르기로 했어.”
“괜찮군. 멍청한 짓을 하다 던지게 된 구종이니까.”
“그건…… 너무한 것 같아요…….”
“맞아요. 이디-라이더? 바보 같은 슬라이더라기엔 너무 공이 좋은데요? 무엇보다 그 공을 알려 준 크리스가 슬퍼할 거예요.”
난 결국 참다 참다 못해 한마디를 내뱉었다.
“다 꺼져. 혼자 있고 싶으니까.”
도움이 되는 놈들이 없어. 도움이. 폴리 빼고.
* * *
다음 날.
[어제 경기에 이어서 오늘도 좋은 흐름을 이어 가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입니다.]
[최근 7경기 데이터를 보면 시즌 초반보다 득점력이 조금 떨어지긴 했습니다만…… 오늘 경기만 봐서는 그런 면이 전혀 느껴지지 않네요.]
[오랜만에 선발로 출장한 라테 헤미체 선수가 9번 타순에서 아주 좋은 역할을 해 주고 있기 때문이겠죠?]
[5회까지 2타수 2안타 1타점. 덕분에 뒤타순인 이삭 페레데스 선수가 비교적 쉽게 카운트를 만들 수 있었고, 결국 호세 라미레즈 선수가 마무리를 짓는 패턴이 2번 연속으로 나왔습니다.]
[그 뒤에 터진 김사범 선수의 쓰리런도 큰 역할을 했죠.]
[아직 경기 초반임에도 6점까지 벌어진 양 팀의 스코어. 에인절스는 빠르게 추격하는 점수를 쌓아 나가야 합니다.]
“폴리, 그래서 넌 뭘 사 갈 거야?”
“그냥 로라가 말한 몇 가지 용품들? 나머지는 아이가 나올 때쯤 사도 충분하니까.”
“아기 신발이나 이런 건?”
“그걸 왜 벌써 사? 나중에 신발 신을 때쯤 되면 사면 되는데.”
역시. 우리나라와 여기는 조금 문화적 차이가 나는군.
‘잠깐, 수리도 여기서 자랐으니 비슷하려나? 흠……. 그래도 아기 신발은 사고 싶은데.’
따아악!
“좋아! 라테! 나이스!”
라테가 또 안타를 쳤나?
잘했네.
“여긴 다들 그런가? 음…….”
“좋아! 라테! 그렇게만 해! 뭐라고?”
“임신 초기엔 따로 선물을 안 하나 해서.”
“그냥 꽃 하나 들고 가면 되지. 안아 주고. 아, 격하게는 말고. 신발 같은 건 나중에 베이비 샤워 때 다들 받는 거잖아?”
흐음…….
* * *
경기 후, LA의 한 쇼핑센터.
“네, 아메리카나 엔 브랜드, 맞죠?”
[네, 맞아요. 거기에 가면 아마 있을 거예요.]
“고마워요 오타니 씨. 덕분에 살았어요.”
[뭐 이 정도 가지고. 근데 왜 갑자기…….]
“아, 뭐 살 게 있어서요.”
[하하하, 여자친구분이 좋아하시겠네요. 아 참, 거기 한국 관광객분들이 많아서……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고마워요. 그럼.”
경기가 끝나고, 오타니에게 물어 찾아온 쇼핑센터 -2연패 뒤에도 웃으며 안내해 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안내판을 보며 매장을 찾고 있자니 갑자기 싸한 감각이 내 등판을 타고 올라왔다.
‘이건?’
지난겨울, 한국에서 느꼈던 그 느낌이다.
“혹시…… 김사범 선수?”
딸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함께 내게 다가온 아저씨.
이미 한손에 들린 핸드폰 화면엔 카메라 앱이 실행되어 있었다.
“아, 네. 하하.”
“우와! 여기서 만날 줄 몰랐네요! 아, 오늘 원정 경기가 있죠? 에인절스하고?”
“네, 그래서 왔어요. 그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사진 한 장 같이 찍어 주시면…….”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아저씨-나, 딸-나, 아저씨-딸-나의 세 조합으로 쉼 없이 사진을 찍고 나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허허허, 제가 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런 경험도 하네요. 여기 LA 교민들도 김사범 선수하고 김병헌 선수 경기 잘 챙겨 보고 있어요. 대부분이 다저스 팬이긴 하지만요. 허허.”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당연한 거죠. 만리타향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잘 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도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는, 그런 느낌이 있거든요. 아무튼, 나중에 원정 오면 한인타운에 한번 들러 주세요. 서비스는 확실하게 드릴게요. 허허.”
그렇게 갑작스럽게 다가왔던 아저씨가 떠나가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목표로 삼았던 매장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베이비타워입니다.”
한국과는 다르게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자동으로 울리는 인사를 제외하곤 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는 직원들.
이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신발, 신발…….’
그리고, 난 천국을 봤다.
형형색색, 다양한 사이즈별로 전시된 아기 신발들.
그 행복한 파도 속에서 허우적대다 겨우겨우 두켤레를 골라 카운터로 향하기까지 거의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는 건…… 수리에겐 비밀로 해야지.
“여자친구분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좋아할 겁니다. 이런 선물은 처음이거든요.”
신발을 사고 우버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들린 노점상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있어 구입했다.
내일 모레, 드디어 결전의 순간이다.
* * *
“아웃!”
[김사범 선수! 자칫 잘못하면 대량실점을 할수도 있는 상황에서 믿을 수 없는 호수비를 보여줍니다!]
[무사 1, 3루 상황에서 오타니 쇼헤이 선수의 타구가 그대로 내야를 통과할 뻔했었죠? 그 공을 다이빙으로 건져 내서 그대로 2루에 연결했습니다. 6-4-3 병살 성공시키며 순식간에 아웃카운트 2개를 올리는 디트로이트입니다.]
[경기 후반, 코리 클루버 선수가 살짝 흔들리는 상황에서 아주 좋은 수비가 나왔습니다.]
“오늘따라 날아다니네? 나이스 수비.”
이삭의 말에 손짓으로 대답을 해 주고 다시 수비 위치로 향했다.
‘후, 닿아서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으면 경기가 길어질 뻔했네.’
누가 경기 시간을 결정하는 건지, 일요일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낮 경기가 아닌 오후 늦게야 시작한 오늘의 경기.
나는…… 오늘 하루만큼은 퇴근을 위한 플레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김사범 선수! 파울 타구를 끝까지 따라가 잡아내는군요!]
[김사범 선수의 콜에 옆으로 피해 있던 호세 라미레즈 선수가 허탈한 미소를 짓네요. 유격수가 이 정도의 수비 범위를 가지고 있다는 게 참…… 대단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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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경기의 마지막 타석, 마이크 트라웃 선수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점수 차가 조금 있긴 하지만 아직 긴장을 늦추면 안됩니다.]
“스트라이크.”
[제이슨 폴리 선수의 하이 패스트볼이 존 상단을 통과했습니다.]
[구속이 102마일이 나왔어요. 최근 컨디션이 아주 좋은 제이슨 폴리 선수입니다.]
“스트라이크! 투!”
[다시 과감한 몸쪽 승부로 카운트를 잡아내는 제이슨 폴리!]
폴리도 퇴근이 그립긴 마찬가지겠지.
어서 로라를 만나야 하니까.
살짝 마음이 급해졌는지, 몇 번의 사인을 거부한 폴리가 세 번째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 존 아래쪽에 걸치는 체인지업에 그대로 루킹 삼진을 당하는 마이크 트라웃!]
[좀 낮았던 것 같은데…… 구심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습니다. 타석에서 물러나지 않고 심판을 노려보고 있는 마이크 트라웃 선수입니다.]
[아쉽겠지만, 이미 선언된 아웃이 다시 번복되진 않을겁니다. 이렇게 되면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는 이번 원정 7연전에서 6승 1패,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네요.]
음…… 저건 누가 봐도 볼인데…….
나와 폴리만 퇴근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 * *
샤워, 이동, 전용기, 내 차.
이동수단을 하나 옮길 때마다 내 심장은 점점 더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집 앞, 나는 심호흡을 하며 준비한 선물을 트렁크에서…….
“자기!”
“으억!”
깜짝이야. 애 떨어질 뻔, 아니 그럼 안 되지.
“왜 여기 나와 있어?”
“왜? 그럼 안 돼?”
현관에서 차고를 향해 몸을 기울여 나를 놀라게 한 수리.
“아니, 그냥. 날도 추운데, 아니 춥진 않은데. 아무튼 밤바람이 차잖아. 조심해야 할 시기인데.”
“……조심?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잠깐! 내 선물은!”
“어…… 그게…….”
막상 트렁크를 열어 꺼내려고 하니 머릿속에서 수많은 상념이 휘몰아쳤다.
‘이 선물을 받고 웃으면서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 뭐라고 답해야 하지?’
‘일단 웃어야 하나? 아니면 수리를 잡고 빙글빙글? 아냐, 그건 위험할 수 있으니까. 그럼 안아 줘야 하나? 그래, 그게 낫겠어.’
“좋아, 합격!”
응?
“그래도 다행이네, 그래도 나하고 살면서 눈치는 좀 는 거 같아. 자, 이제 꺼내도 돼!”
뭐지? 뭐야?
“그…… 지금? 꺼내?”
“지금 주면 되지! 아, 혹시 뭔가 준비했어? 음…… 그건 나중에 해 줘. 오늘은 내가 주인공이니까.”
‘준비하긴 했지. 아기 신발.’
뭔가 떨떠름한 기분으로 트렁크를 열려는 순간, 갑자기 내 몸 깊숙하게 가라앉아 있던 본능이 내 몸을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이게 내가 준비한 선물이야.”
아기 신발을 산 뒤, 길거리 노점상에게 산 반지.
로즈골드? 아무튼, 붉은빛이 나는 금반지가 왠지 모르게 수리와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 충동적으로 구매한 물건인데…….
“와…… 정말이네, 진짜야…….”
순식간에 수리의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내 본능, 고맙다. 정말 고맙다.’
“그냥 뭐, 음…… 끼워 줄까?”
“응!”
다행히 눈대중으로 산 반지는 수리의 왼손 약지에 아주 딱 맞았다.
그리고 이어진 잠깐의 포옹.
수리는 살짝 훌쩍이며 내게 말했다.
“이제 내 차례네. 잠깐만.”
위이잉-
차고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수리는 차고의 불을 모두 끄며 수줍은 말투로 속삭였다.
“눈 감아…….”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을까.
“눈 감은 채로 하늘을 봐봐.”
감은 눈 틈새로 뭔가 환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어느새 내 옆으로 수리가 내 손을 잡으며 내뱉은 마지막 한마디.
“이제 눈 떠도 돼.”
살며시 뜬 눈 사이로 보이는 보습은…… 차고 천장을 수놓은 은하수와 그 별들을 이어서 만든 글씨.
‘나와 결혼해 줄래?’
내 시선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수리가 내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나와 결혼해 줄래? 특별히 내가 허락해 줄게.”
맙소사.
2022년, 어느 날 밤.
나는. 프로포즈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