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142화 (142/175)

142화 김사범, 2022 시즌(치국(治國))(4)

대한민국, 수원.

“사장님. 정말 개발을 계속 진행하실 겁니까? 이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거와 다를 게 없습니다.”

“가까운 미래에는 결국 VR 시장이 크게 확장될 거야. 게임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결국 대리만족을 위한 도구니까.”

“그렇다면 좀 더 현실적인, 하이 레벨의 VR기기들을 개발하는 게 나을 겁니다.”

“누가? 우리가? 이미 시장에서 성과를 보이고 있는 저 공룡들을 제치고? 박 팀장, 그런 기업들이 연구개발에 투입하는 예산이면 우리 같은 중소기업 하나를 통째로 삼킬 수 있어.”

박 팀장은 답답한 듯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 두어 개를 풀며 대답했다.

“우리도 충분히 시장에서 인정받은 제품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실제로 스포츠 분야에서는 발주도 꽤 들어온 상황이구요. 이 상황에서 뇌파인식 기술을 건든다는 건…… 방향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결국 그뿐이야. 호평은 받았지만 결국 그들이 보기엔 장난감일 뿐이지. 스포츠 쪽은 특히 더 그런 기조가 강할뿐더러 그들이 발주한 물량이라고 해 봤자 얼마 되지도 않아. 그렇다고 일반 소비자들이 저 큰 부피의 기기를 사겠나? 고작 VR게임을 하려고?”

사장은 사무실 한곳에 설치되어 있는 VR기기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메리트를 만들어 내야 해. 모두가 침을 흘리고 달려들 그런 메리트. 그리고 이왕이면 시장의 최초 개척자가 되면 더 좋고.”

확신에 차 있는 사장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있던 박 팀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개척자, 좋아요. 좋습니다. 뇌파인식? 기반 기술이 있으니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될 겁니다. 하지만 사장님,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건 개발을 지속할 만한 자금입니다. 그게 해결이 안 된다면…… 다른 방향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알겠네. 무슨 말인지 나도 알아. 이만 나가 보게.”

철컥.

박 팀장이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홀로 사장실에 남은 사장은 습관적으로 사무실 한구석의 TV를 켜며 생각했다.

‘자금이라, 자금. 투자자들이 조금씩 모이고 있긴 한데……. 일단 개발 절차를 최대한 줄이고, 가장 필요한 몇몇 가지만 신경 쓴다면…….’

[오늘의 메이저리그입니다. 메이저리그의 2022 시즌이 10경기 남은 오늘, 디트로이트는 축제 분위기에 빠졌다는데요, 어째서인가요?]

‘하드웨어에 이식할 게임은 두 달 전부터 개발을 시작했으니 이제 남은 건 기기인가? 5년…… 5년을 버텨야 하는데…….’

[김사범 선수 때문일 겁니다. 바로 어제, 양키스와의 원정경기에서 3홈런을 몰아치며 시즌 76홈런, 바로 작년에 세운 자신의 기록과 동률을 이뤘거든요.]

[아쉽게도 일정이 맞지 않아 디트로이트와의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김병헌 선수의 표정이 화제였죠?]

[맞습니다. 두 선수 모두 승부욕이 아주 강한 걸로 알려져 있다 보니 서로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거죠.]

‘5년, 5년이라. 정말로 일반 VR기기 쪽에도 연구자원을 투입해야 하나? 그렇게 되면 출시가 더 늦어질 수도 있는데……. 그때가 되면 다른 대기업 측에서도 분명 이 시장에 뛰어들 거야.’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도 김사범 선수와 함께 순항하면서 시즌 118승째를 거뒀습니다. 이 페이스라면 작년의 기록, 당연히 경신할 거 같은데요. 이 정도면 ‘왕조’라는 단어를 써도 되겠어요.]

[맞습니다. 물론 조금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다른 팀들의 전성기보다 단기 임팩트 측면에서는 더 뛰어난 부분도 있죠. 작년 포스트시즌 전승 우승도 그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고요.]

‘투자자. 투자자를 모아야 해. 하지만 어디서? 누구에게? 후우.’

멍하니 TV를 보며 회사의 운영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 모든 것이 김사범 선수 덕분이라는 걸 생각하면,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는 정말 남는 장사를 한 거네요.]

[그렇죠, 매해 3천7백50만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하면 약 4백억 정도 되는 돈인데……. 처음 계약을 맺었을 때는 현지 언론에서도 살짝 오버페이가 아닌가 하는…….]

한참을 돈과 관련된 주제로 고민을 해서일까, TV 속에서 흘러나온 천문학적 금액에 저절로 사장의 입이 벌어졌다.

“사백억? 하하, 사백억이라. 허허, 허허허.”

허탈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사장실.

그런 그의 방 앞에 붙어 있는 명패가 그 웃음소리를 따라 흔들리기 시작했다.

[‘헤븐’ 우리의 꿈. 사장 정찬열]

* * *

뚜르르르르.

‘뭐지? 아침부터 웬 전화?’

“자기, 누가 화상통화 하자는데? 김태연? 이거 하별이 남자친구 이름 아냐?”

요리를 하고 있는 나 대신 핸드폰을 확인한 수리가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 알려 줬다.

“아, 그냥 무시해도 돼! 급한 거면 또 전화 오겠지.”

요새 좀 잘나간다고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 메이저리그에 대해서 물어보는 김태연이다.

‘포스팅까지 아직 한참 남았을 건데? 보자, 고졸이니까 7년이지?’

이제 프로 3년 차가 걱정하기에는 너무 먼 미래다.

“그러지 말고 받아 봐, 하별이가 말해 줬는데,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대. 곧 미국으로 올 수도 있다는데?”

“갑자기 뭐지? 웬 미국? 아, 잠깐, 아…….”

올해가 2022년이었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올해 아니면 내년에 개정되는구나, 포스팅.’

사실 아주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다.

메이저리그란 놈은 자신들이 가진 선수 풀을 최대한 크게 만들고 싶어 하는 녀석이니까.

세계에서도 제대로 된, 그러니까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이목을 끌 정도의 프로리그를 가진 나라는 별로 없고, 그중 한 나라는 이미 거의 문호를 개방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나라인 우리나라도 곧 개방하게 될 거고.

‘그래 봤자 구단 허락 없이는 절대 포스팅을 신청할 수 없지만.’

“받는다? 자.”

[레츠 기릿 붐! 붐! 붐!]

“끊는다.”

[잠깐, 잠깐! 야, 넌 왜 그렇게 인내심이 없냐?]

“너한테만 없는 거야. 아, 하나 더 있네. 아무튼, 왜?”

[오늘 기록 세웠다며?]

“타이기록. 그거 때문에 전화한 거야?”

[아니, 나도 오늘 200번째 안타 때렸다고.]

“어, 축하한다. 추카추카.”

시즌 시작 전, 훈련이 끝나고 나서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요새 아주 날아다니고 있는 김태연이다.

[반응 완전 쓰레기네. 아무튼, 너 소식 들었냐?]

“무슨 소식?”

[곧 포스팅 룰 개정한댄다.]

“아, 그거.”

[알고 있었나 보네? 어디서 들은 거야?]

음…… 미래에서 보고 왔어.

“미래에서 보고 왔어.”

아, 요리에 집중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바로 입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그건 또 뭔 신박한 개소리야? 아무튼, 그래서 나도 내년에 신청하려고.]

신박한 개소리는 자기가 하고 앉았으면서.

구단이 놔줄 리가 없는데.

“설레발 떨지 말고 그냥 있는 데서 잘해. 여기 와서 머리에 공 몇 대 말고 질질 짜면서 돌아가지 말고.”

[너……. 아무튼, 그래서 뭐, 구단 추천 좀 받으려고. 그때 되면 에이전트를 고용하긴 할 건데, 그래도 경험자인 네가…… 아, 야, 나 너네 에이전시 좀 소개해 주라. 거기 좋아 보이던데.]

“응, 싫어.”

[아 왜! 형님, 귀여운 동생 얼굴, 아니 이쁜 얼굴 봐서라도 이 매부에게 좀…….]

바로 끊었다.

“크흐흥, 자기, 그래도 돼? 태연 씨는 진지한 거 같던데.”

“그럼. 괜찮지. 그러니까 김태연이고. 그리고…… 만약 포스팅 제도가 좀 바뀐다 해도 쟤는 못 와. 구단에서 절대 안 놔줘.”

특별히 서비스 타임도 없고, 연봉조정제도도 선수에게 불합리하게 돌아가는 KBO에서 시즌 200안타를 치는 외야수를 포스팅으로 풀어 준다고? 말도 안 되지.

“그런가? 하긴, 거기는 그럴 수 있겠다.”

“괜히 저 설레발 다 받아 줬다가 그렇게 되면…… 김하별이고 김태연이고 울고불고 난리치면서 달라붙을 텐데……. 끔찍하지 않아?”

잠깐 뭔가를 상상하던 수리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끔찍하네. 인정.”

우리는 씨익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수리는 손, 나는 엉덩이로- 하고 곧이어 완성된 볶음밥을 식탁으로 옮겨 아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전화를 건 김태연에 대한 기억은 저 멀리로 날려 버리고.

* * *

[곧 연락이 갈 거예요. 엔트리 확정이 났거든요.]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네요. 알겠어요, 짐.”

[시즌 끝나고 거의 바로 이어지죠? 부상 조심하시고.]

“물론이죠. 아, 이제 준비할 시간이네요. 그럼.”

방금 난 아시안게임 최종 엔트리에 들었다.

아직 정식 발표는 안 났지만.

“뭐야? 왜 그렇게 웃고 있어?”

“응?”

“왜 그렇게 기분 나쁜 표정으로 웃고 있냐고. 오늘 ‘무조건’ 20승을 할 케이시 불안하게.”

폴리의 말을 무시하고 라커룸 저편에서 날 바라보고 있는 케이시와 눈을 마주쳤다.

‘없어도…… 돼?’

‘완봉할 거야.’

‘오케이.’

눈빛으로 짧은 대화를 마치고, 어김없이 폴리를 응징해 줬다.

‘이 정도면 경기 전 루틴으로 삼아도 될 거 같은데?’

마침 오늘 상대도 자기 동네-서부지구-에서 죄 없는 다른 팀들을 패고 다니는 휴스턴이니까. 폴리로 몸 좀 풀고 패 주면 되겠네.

몇 시간 후.

[이제 오늘, 아니 4이닝 뒤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잔여경기가 한 자릿수로 내려가겠군요.]

[사실상 혼자 하는 레이스입니다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승을 결정짓고 난 뒤 14경기에서 10승을 거둔 디트로이트입니다.]

[어떤 전문가들은 목표의 상실이나 유망주 위주의 기용 등을 근거로 들며 기록 경신에 비관적인 예측을 내놓았었죠?]

[네, 맞습니다. 하지만 론 가든하이어 감독은 거의 모든 경기에서 주전급 선수들을 내보내며 이런 예측을 물리쳤습니다. 오늘 경기도 마찬가지네요.]

[두 팀 모두 이미 포스트시즌 진출이 확정되었습니다만, 오늘 같은 잔여경기를 대하는 팀의 태도에서는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습니다.]

[휴스턴 에스트로스 입장에서는 딱히 기록이 달린 것도 아닌 상황에서 주전들을 내보낼 이유가 없죠. 오히려 이게 정상적인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시즌 운용 방식입니다.]

-Boom!! the Boom!! If you try to avoid him, you'll never escape him!

와우.

디트로이트 출신의 어느 언더그라운드 래퍼가 사이퍼(래퍼들이 특정 공간에서 모여 같이 랩을 하는 것)에서 선보여서 유명해진 가사라는데……. 다 같이 외치니까 그 기세가 무시무시하다.

‘그러게 좀 작작 걸러 대지. 오죽하면 관중들이 저런 랩을 떼창을 하겠냐고.’

내가 봤을 때, 오늘 휴스턴의 전략은 크게 두 개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주전 선수들을 쉬게 하면서 타자들은 우리 투수들에게 최대한 들러붙어서 우릴 피곤하게 만든다.

두 번째, 내 타석에서는 절대 좋은 공을 주지 말고, 느낌이 이상하면 바로 고의사구로 내보낸다. 기록의 희생양이 되는 건 싫으니까.

그 증거로 4:0으로 지고 있는 이 순간에도 휴스턴의 벤치는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도발을 좀 해야겠네.’

마침 오늘 선발로 나와서 꾸역꾸역 이닝을 먹고 있는 저 투수가 루키기도 하고.

잘하면 먹힐 수도 있다.

[5회 말, 원아웃 상황에서 2루에 주자를 둔 채로 김사범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1루가 비었으니 절대 정상적인 공으로 승부를 걸어오진 않을 거다.

‘보자……. 그래도 예고홈런은 사정없이 당겨서 좌측담장을 넘기는 게 멋있지.’

타석에 들어가 괜히 방망이를 두어 번 돌린 뒤에 좌측 담장을 가리켰다.

야구 팬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예고홈런 모션.

‘이 상태로 맞기 싫어서 뺀 공에 두어 번 정도 큰 헛스윙을 해 주고, 욕심에 눈이 멀어서 삼진을 잡으려 들어오는 공을 치면…….’

게임 세트.

꼭 홈런이 아니더라도 일단 그 근처만 가면 목표한 결과의 반은 이룬 거다.

어찌됐던 ‘그런 걸’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팀은 없을 테니까.

그사이에 틈이 나면 좋고, 아니면 또 뭔가를 노려보지 뭐.

“베이스 온 볼스. 고의사구야.”

아.

진짜 왜 이러냐 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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