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김사범, 2022시즌(평천하(平天下))(1)
“이 야구라는 게임은 지독히도 숫자놀음에 집착하죠. 80홈런, 125승…….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면 아무도 인정하지 못할 그런 기록 말입니다.”
론이 말을 할 때마다 찰칵거리는 소리와 번쩍거리는 불빛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기록의 달성을 지금, 이순간 목격했습니다. 믿을 수 없게도.”
시즌 마지막 경기의 8회, 김사범의 홈런으로 마침내 5점 차로 앞서게 됐을 때, 폴리를 준비시키라는 지시를 내리고 론은 생각했다.
“감독으로서 순수하게 이 기록을 즐길 수도 있지만, 전 그것보다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싶군요.”
덕아웃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선수들, 이 선수들이 더욱더 주목받지 못하는 게 아쉽다고.
“80홈런은 물론 대단한 기록입니다. 붐은 항상 근면하며, 매일 자신의 경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선수죠. 하지만…… 저는 그런 붐 보다는 다른 선수들을 더 칭찬해 주고 싶네요.”
론이 생각하기에, 김사범의 앞뒤에서 각각 38홈런, 32홈런을 기록하면서 상대방이 붐을 쉽게 피해 가지 못하게 해 준 두 베테랑-호세 라미레즈와 프레디 프리먼-이 없었더라면 이런 기록이 절대 나올 수 없었다.
“누군가는 우리를 붐의 팀이라고 말하겠지만, 단언컨대, 그건 잘못된 판단입니다. 우린 아주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 물려 있고, 이는 라커룸에 있는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충분히, 아니 그 이상으로 해 줬다는 걸 의미합니다.”
시즌 후반에 자리 잡은 두 테이블 세터도 마찬가지, 1번 자리에서 여전히 경쟁력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이삭과 2번 타순에서 제법 단단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라테도 팀에 아주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지금 타이거즈가 연 새로운 시대는 어느 한 사람이 연 게 아닌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열었다는 겁니다.”
페이스, 클리어, 스튜어트. 6번부터 시작되는 이 타순은 모두 20+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그대로 떼어다 중심타순에 가져다 놔도 손색이 없는 공격력을 보여 줬다.
“숫자가 아닌 문학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적어도 앞으로 5년간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만 누릴 수 있는, 황금의 시대’가 될 겁니다.”
그런 이유로, 론은 포스트 시즌을 앞둔 시즌 마지막 인터뷰에서 아주 당당하게 장담할 수 있었다.
이제, 디트로이트의 시대가 왔노라고.
[타이거즈의 붐, 80-80 달성. 야구 역사상 가장 흉악한 무기.]
[‘야구 그 자체’, 다른 선수들을 순식간에 그저 그런 선수로 만들어 버린 붐의 행보.]
[붐의 80-80 달성 소감. '언제나 그랬듯, 100-100이 목표. 아직 난 80점.]
[익명을 요구한 전문가, ‘분명 약물의 힘을 빌렸을 거다. 그렇지 않으면 이뤄 낼 수 없는 기록’]
[2022시즌 아메리칸리그 포스트시즌
와일드카드 결정전
보스턴 레드삭스 vs 오클랜드 애슬래틱스
디비전 시리즈
휴스턴 애스트로스 vs 뉴욕 양키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vs 와일드카드
내셔널리그 포스트시즌
와일드카드 결정전
시카고 컵스 vs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디비전 시리즈
뉴욕 메츠 vs 밀워키 브루어스
LA 다저스 vs 와일드카드]
* * *
[그래, 내가 없이도 잘 나가는 걸 보니 좀 맘이 안 좋은데?]
“미기, 오랜만에 전화해서 한다는 말이 저주예요? 그럼 실망인데.”
[푸하하핫. 그래. 듣고 보니 저주같이 들리기도 하는군. 아무튼, 기분이 어때? ‘황금의 시대’에 살고 있는 기분 말이야.]
론의 ‘황금의 시대’ 발언 때문에 요새 인터뷰마다 저 말을 귀에 달고 있다.
“황금의 시대를 사는 건 좋은데. ‘황금의 시대’는 싫어요. 뭔가 더 멋진 표현이 있을 텐데 론은 도대체…….”
[그게 그 사람의 단점이지. 가끔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할 때가 있다니까. 그래도 라커룸의 누군가는 론의 그런 표현을 좋아하잖아?]
“설마요. 전 처음 그 표현을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는데. 뭐…… 무슨 뜻으로 한 건지는 알겠지만.”
팀의 주전 라인업에 20대 초반이 7명이다.
야수로만 한정해도 6명이고.
FA로 영입한 선수들은 아직 계약기간이 꽤 남아 있으며, ‘먹튀’라고 불릴 만한 선수들이 없다. 오히려 싸게 사왔다고 흐뭇해하는 반응이 있을 뿐.
[Golden Era. 이 미국에서 시작된 힙합이 가장 주목받는 시기를 우린 그렇게 말해.]
“골든 에라요?”
황금시대라.
[무엇보다도 그 시기가 주목받았던 건 그저 장르의 하나일 뿐이었던 힙합을 메인스트림으로 올려놨기 때문이야. 새로운 시도, 새로운 패러다임. 론이 그런 의미로 그 표현을 쓴지는 모르겠지만.]
음……. 요 근래 메이저리그에서도 새로운 시도들이 많이 늘긴 했다.
오프너도 그렇고, 서비스타임이 아직 많이 남은 유망주에게 연장계약을 제의하는 것도 예전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일 테니까.
[아무튼, 잘해 보라고. 난 이미 월드시리즈 표를 예매해 놨거든.]
“와우. 그러다가…….”
[잠깐, 잠깐만.]
띠-
뭐지?
[다시 말해 봐. 방금 녹음 기능을 켰거든. 그리고 만약 타이거즈가 월드시리즈 진출에 실패한다면 난 이 파일을 그대로 인터넷에 뿌릴 예정이야.]
이 아저씨가 정말…….
“정말 이러기예요?”
[하하, 난 진심이야. 그리고 지금도 녹음기능은 작동하고 있어, 붐.]
잠깐, 이왕 이렇게 된 거…….
“크흠, 큼.”
[오. 역사적인 발언이 시작되는 순간인가?]
“난…….”
내 말이 끝난 후.
[맙소사. 넌 정말…….]
미기는 말을 잇지 못했다.
* * *
후웅!
“오늘 저녁 알지? 이삭네 집에서 모이기로 했어.”
후욱-
훙!
“알아. 수리도 데려갈게.”
“좋지. 나도 로라를 데려갈 생각이거든. 아, 붐, 잠깐 이리 와 봐. 그 흉악한 건 내려놓고.”
아메리칸리그의 와일드카드 결정전이 펼쳐지는 오늘, 나는 어김없이 코메리카 파크에 나와 운동을 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나온 폴리가 날 괴롭히기 전까진.
“왜? 그리고 이건 흉악한 게 아니라 배트라는 거야. 야구라는 스포츠에서 너 같은 얼간이 투수들의 뚝배기를 깨는데 사용하는 거지.”
어? 말하고 보니 흉악한 거 맞네.
“뚜그뷔에기? 그게 뭔데?”
“그런 게 있다. 아무튼, 왜?”
폴리는 왼쪽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서 나에게 주며 말했다.
“‘황금의 시대’, 이걸 너네 나라 말로 써봐.”
“뭐? 왜?”
또 무슨 미친 짓을 꾸미려고…….
“그냥 쓰라면 써 봐. 흘려 쓰지 말고, 최대한 정자체로.”
이렇게 뭔가 꽂혀서 이상한 짓을 벌이는 폴리는 말리려고 해도 말려지지 않는다. 그저 장단을 맞춰 주고 그게 좀 덜 미친 짓이길 바랄 수밖에.
‘잠깐…… 풉.’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뭐야? 좀 짧네? 아까 시미즈가 써 준 일본어는 좀 길던데. 일본이나 한국이나 비슷한 언어를 쓰지 않나?”
“너, 그 말 한국 기자에게 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질 수도 있다.”
“뭐?”
“많이 달라. 한글은 일본문자보다 훨씬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며, 아름답고…….”
갑자기 내 심장 한구석에 잘 감춰져 있던 애국심이 끓어올랐다.
“알겠어. 그 강의는 나중에 따로 듣도록 하지. 흠. 한굴? 아무튼 이것도 멋있네. 저녁에 보자.”
“잠깐만, 아무튼 그 세종대왕이란 분이 어떤 마음으로…….”
“오케이, 오케이. 좀 이따 보자고.”
분하다.
아직 이야기는 시작도 못했는데.
그렇다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폴리를 잡기에는 좀 뭐해서, 나중에 만나면 다시 한글의 우수성을 알려 주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1회 초부터 보스턴을 몰아치고 있습니다.]
[보스턴은 이번 시즌 토미존 수술 후 재활을 마친 마커스 윌든을 선발로 내보냈지만, 그는 정규 시즌의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군요.]
[애슬레틱스가 기회를 놓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기도 합니다.]
“폴리는 언제 온대?”
“몰라, 아까 다운타운에 잠깐 들렸다 온다고 하던데.”
폴리를 찾는 이삭의 말에 케이시가 야구공을 만지작대며 대답했다.
“아까 시미즈에게 뭔가를 받아 가더군.”
“일본어로…… 황금의 시대를 어떻게 쓰냐고…….”
“그래? 아까는 나보고 스패니시를 물어보던데.”
그러니까, 한국어, 일본어, 스페인어로 ‘황금의 시대’를 물어봤고, 그 이후에 떠났다는 거지?
“자기, 폴리가 또 무슨 이상한 사고 치는 거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없지.”
정말로, 그럴 리가 없다.
“무조건 사고 치고 올 거야. 당연하지. 폴린데.”
이건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다.
“하아.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있는데 아주 이상한 건 아니겠지.”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들 내 생각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레드삭스! 무키 베츠! 오클랜드가 힘겹게 얻은 점수를 단숨에 동점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선수는 홈런을 주머니 속의 동전 꺼내듯 쉽게 치는 선수죠. 무키 베츠의 투런으로 점수는 2:2가 됐습니다]
띵동-
왔다. 폴리다.
“왜 이제 와? 같이 모여서 올라올 팀을 분석하자는 건 네 생각이었잖아?”
“아, 이번 포스트 시즌과 우리 팀을 위해서 뭔가 할 일이 있었거든.”
불안하다, 불안해.
그래도 늦은 건 알았는지, 다운타운의 꽤 유명한 중국집에서 여러 음식들을 싸 온 폴리.
“로라,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붐. 아, 붐이라고 불러도 되죠?”
“그럼요. 여긴 수리 베이커. 제 여자친구예요.”
“반가워요 로라. 폴리를 휘어잡는 여자가 누군지 궁금했었는데…….”
수리가 이 자리에 처음 온 로라를 위해 제법 친절하게 말을 걸고 있는 사이, 우리는 폴리를 도와 포장음식을 테이블에 세팅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내 눈에 보이는 아주, 아주 이상한 글자.
“폴리, 너 이거……?”
“응? 아, 나중에 보여 주려고 했는데. 이거 하느라 늦은 거야. 어때?”
이 정신 나간 멍청이가?
너무도 어이없는 상황에 잠시 할 말을 잊어버린 사이, 케이시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읊었다.
“지금,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문신을 했다고? 그것도 공을 던지는 오른팔에? 제정신이야?”
그랬다.
폴리는 오른팔-전완근 쪽 팔뚝-에 큼지막한 글씨를 새기고 왔다.
“케이시, 내가 항상 말하지만, 난 바보가 아냐. 이건 헤나라고. 그것도 천연 염료를 사용한 헤나. 절대 문제없어. 내가 성분표도 다 확인했거든.”
“음…… 팀 닥터에게 확인은 받았나?”
“물론이지. 난 그렇게 멍청하지 않으니까.”
그 뒤로 폴리는 자기가 왜 이런 문신, 아니 헤나를 팔뚝에 새기고 왔는지를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번 론의 인터뷰를 보고 느낌이 왔지. ‘황금의 시대’, 죽여주잖아? 처음에는 모자에 새기려고 했는데…… 써놓고 보니까 눈에 잘 띄지 않더라고.”
사실, 그건 문제가 아니다.
폴리가 저기에 똥을 그려 놓고 왔더라도 그게 경기를 뛰는데 지장이 없다면 상관없으니까.
“그래서 생각했지, 내가 공을 던질 때 가장 눈에 띄는 부위가 어딘지. 오른팔이더라고. 그리고 로라가 아이디어를 줬고, 오늘 아침에야 팀 닥터에게 확답을 받은 거야.”
아이디어도 꽤 멋지다.
어쨌든 론은 우리의 보스고, 저런 식의 일탈은 팀의 분위기를 외부에 자연스럽게 알릴 수 있는 아주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영어로 할까 하다가 좀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외국어로 하기로 했지, 번역기를 이용할까 하다가 아무래도 좀 그래서 너네들에게 물어본 거야. 그리고 디자인을 놓고 고민하다 이걸로 결정한 거고.”
내가 오늘 아침 폴리에게 써 준 단어가…….
“음, 한글이군. 일본에 있을 때 가끔 봤다. 아주 강해 보이는 글자지.”
“그렇지? 여기 이 부분이 뭔가 스파이크 같아서 이걸로 결정했지. 붐, 어때? 괜찮아?”
잠시 로라와 대화를 나누던 수리가 갑자기 얼어붙었다.
“자기…….”
“음…….”
“저거…….”
“한국어로 이야기하자.”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거야?”
“설마.”
“어떻게 하지?”
“음…… 일단, 일단 비밀로 하고……. 후우……. 모르겠어 수리. 일단 비밀로 하자.”
폴리가 자랑스레 내민 오른팔에는…….
[최 사범 강]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 * *
[무키 베츠, 8회 말에 또 하나의 홈런을 담장 밖으로 넘겼습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디비전 시리즈 진출이 거의 확정되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