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힘 스탯 999 4번타자-152화 (152/175)

152화 김사범, 2022시즌(평천하(平天下))(9)

시리즈의 첫 경기를 앞둔 라커룸은 고요하거나, 시끄러웠다.

“그래서 오늘 홈런을 친다고요?”

“풉. 폴리. 난 애송이가 아냐. 그런 도발에 걸려들지 않는다는 거지.”

“에이, 재미없게. 알겠어요.”

쉴 새 없이 떠들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녀석이 있는 반면에,

“뭘 그렇게 긴장해서 앉아 있어?”

“아, 아니에요. 긴장 안 했어요.”

경기 시작 전임에도 쿵쿵대며 울리는 팬들의 함성을 들으며 과도한 긴장을 하는 녀석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라커룸의 문을 누군가가 발로 차며 들어왔다.

“헤이, 숙녀분들. 오늘 이길 준비는 끝났나?”

중요한 경기가 있을 때마다 연설가의 자질을 뽐내는 론이다.

‘그 연설이 명연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아. 이맘때쯤 들리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니 몇몇은 잔뜩 얼어붙어 있다는 뜻이군. 안 그런가 이삭?”

“예에. 라테가 갑자기 등이 아프다던데요. 제가 봤을 땐 오늘 아침부터 잔뜩 쪼그라 있어서 그런 거 같아요.”

“오. 좋은 제보군. 라인업은 이미 제출했지만, 지금이라면 내가 양해를 구할 수 있는 타이밍이지. 어때, 빠지겠나?”

이삭의 말마따나 라테는 오늘 엄청나게 긴장한 것 같다.

경기 전 타격 연습에서도, 간단하게 이뤄진 수비 연습에서도 헤매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아마 론도 그런 모습을 봤겠지. 봤으니까 이야기한 걸 거고.

“아, 아닙니다!”

“흠, 말을 더듬는군? 준비가 안 됐다는 뜻인가?”

말을 하며 성큼성큼 라테를 향해 다가가는 론.

“아닙니다!”

“아니라고?”

“뛸 수 있어요!”

“그것만?”

오. 이게 그 압박면접이라는 건가?

그렇지. 저렇게 얼굴을 들이대면서 묻는데 당황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거지.

“그…… 다 잡을 겁니다!”

“또?”

“타석에서는 무조건 쳐낼 겁니다!”

“그게 어떤 공이라도?”

“어떤 공이라도!”

“좋아!”

얼마나 소리를 질렀으면 대화, 아니 압박면접을 마친 라테와 론의 얼굴이 벌겋다.

“또 긴장한 사람 있나? 방금 한 사람을 구제하고 오는 길인데 말이야.”

“없습니다악!!”

론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라테의 대답이 터져 나왔다.

‘깜짝이야! 약빨이 너무 잘 들은 거 아냐?’

“그래, 좋아. 아주 만족스럽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긴장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네.”

오른팔을 펴 라테의 어깨를 짚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가는 론.

“우린 앞으로 몇 번이고 이곳에서 상대방을 기다릴 거고, 챔피언다운 태도로 상대를 눌러 버리면 돼. 긴장? 그건 도전자들이나 하는 거니까.”

오.

“우린 2021시즌의 왕이었고, 이제 2022시즌의 왕이 될 걸세. 왕에겐 성공과 실패가 없지. 그저 왕의 움직임일 뿐.”

-Yes, boss!

슬슬 라커룸에 울리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나가서 왕다운 경기를 보여 주게. 오만하고, 권태로운 표정으로 저 헐떡이는 도전자를 눌러 버리라는 말이야. 알아들었나?”

-Yes! Booooss!

“자, 그럼…….”

론의 말이 끝나기 전에, 슬쩍 일어나서 말을 더했다.

“나가죠. 론의 말대로 다 부숴 버리러.”

-Go! Go! Go! Go!

단순하고, 어린 동료들이 별 뜻 없는 이야기들을 크게 지껄이며 덕아웃으로 향했다.

그런 나를 툭 치고 지나가는 몇몇 동료들.

‘메츠, 아니 노아 신더가드. 넌 어떤 공을 던질 거지?’

새로운 맛집에 들어가 메뉴를 살펴볼 때처럼, 설레는 기분이 내 몸을 가득 채웠다.

* * *

“후우…….”

케이시가 호흡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안드레스 히메네즈, 아메드 로사리오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운 케이시 마이즈 선수입니다.]

[언제나 느끼는 사실이지만 패스트볼과 스플리터의 콤비네이션이 완벽하네요. 두 구종의 완급조절 능력이나 제구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어요.]

[케이시 마이즈 선수의 주 무기가 스플리터라는 건 이제 모든 메이저리그 선수가 다 알고 있을 텐데요. 어떤 구종이 올지 명확함에도 그걸 치지 못한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그 점을 보완해 주는 게 페이스 달턴 선수입니다. 케이시 선수의 인터뷰 중, 중요한 경기의 경우 모든 리드를 페이스 달턴 선수에게 맡긴다는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아, 그래서…….]

[단순히 패스트볼 두 개 던진 뒤 스플리터를 던지는 패턴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성적을 낼 수 있는 거죠. 거기다 적재적소에 슬라이더나 커브를 섞어 줌으로써…….]

“스트라이크!”

[지금과 같은 효과를 내는 거죠. 보세요. 로빈슨 카노 선수가 존 가운데로 들어오는 슬라이더에 배트도 내지 못했잖습니까? 저런 공을 요구하는 포수도, 그걸 던지는 투수도 대단합니다.]

케이시는 맞춰 잡는 스타일이 아니다.

10에 한없이 가까운 K/9을 보면 알 수 있듯, 강력한 패스트볼의 구위와 알고도 못 치는 수준의 스플리터를 이용하여 삼진을 산처럼 쌓는 스타일이지.

하지만 그런 피칭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평균 소화 이닝이 거의 7이닝에 가까운데, 평균 투구 수가 105개 안팎인 걸 고려하면 이닝 소화 능력 또한 대단하다.

이렇게 한없이 반대지점에 있는 두 수치가 모두 좋을 수 있는 이유는…… 페이스 덕분이다.

‘윽, 또 저 눈빛이네.’

페이스가 엄청나게 집중할 때 가끔 보이는 저 눈빛-이삭은 그 눈빛을 보고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이라 표현했다. 날 제외한 모두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줬고-.

저 눈빛을 한 페이스는 말도 안 되는 리드를 보여 주며 우리를 승리로 이끈다.

지금처럼.

‘아, 또 그거야? 그만 좀 하라니까.’

페이스가 내리는 시프트 지시는 조금 특별하다.

평범하게 수비 위치를 조정할 때도 있지만, 그 움직임에서 의도를 예측한 타자들이 몇 번 타격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이자 혼자 만들어낸 체계인데……. 이게 참…….

따악!

[아, 로빈슨 카노 선수가 몸쪽 공을 강하게 끌어당겼습니다!]

[타구가 빨라요! 이 공이 내야를! 헛!]

[김사범 선수가 안정적으로 공을 잡은 뒤 송구!]

“아웃!!”

[쓰리아웃, 공수 교대입니다.]

[이야, 조금 전 수비는 정말…… 저렇게 포핸드로 잡을 만한 공이 아니었는데요.]

[느린 화면이 나오는데…… 아, 공을 던지자마자 마치 타구가 올 위치를 알고 있다는 듯 스텝을 밟는 김사범 선수입니다.]

[이게 우연이 아닌 본능에 의한 예측이라면, 정말 대단하네요. 시즌 중에도 몇 번 보여 주지 못했던 수비인데요.]

“나이스 피칭.”

“굿.”

그러니까, 지금처럼 첫 스텝을 알려 주는 시프트다.

사실, 수비하는 입장에서 첫 스텝을 다른 사람의 말을 따라 밟는다는 건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내 수비율을 페이스가 책임질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적어도 나와 이삭은 페이스의 지시를 거의 백 퍼센트 따른다.

한두 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잡기 힘든 공을 잡을 수 있게 만들어 줬으니까.

“좋아. 아주 믿음이 없는 플레이였어. 붐, 넌 케이시가 안타를 맞을 걸 알고 있던 거지?”

“당연하지. 뒤에서 보니까 긴장한 게 보이더라고.”

“역시. 케이시! 좀 더 터프하게 던져! 나처럼!”

“닥쳐.”

그리고 더 좋은 건, 이런 플레이가 쌓여 갈수록 우리의 개복치 투수님들은 더 힘내서 던질 수 있고, 상대방은 기가 죽는다는 거다.

그렇게 1회 초가 끝나고, 1회 말.

뻐어어억!

시끌시끌하던 덕아웃이 조용해졌다.

“백 마일?”

“그 정도는 되겠는데?”

뻐어억!

“아, 이건 싱커네.”

“별 차이도 안 나는 거 같은데……. 저 정도면 시미즈 패스트볼보다 빠르겠는데?”

“……맞아요.”

뻐어엉!

“슬라이더다. 저게 슬라이더네.”

“보자, 96마일? 저 정도면 시미즈 패스트볼보다…….”

“그만. 왜 자꾸 시미즈를 걸고넘어지지?”

“아니 그냥 뭐, 농담으로…….”

금발벽안. 진짜배기 미국산 파워피처가 우리 앞에서 무력시위를 시작했다.

* * *

잠시 시간을 돌려, 경기 전날.

“그러니까, 일단 나가라는 말이지?”

“여기 리포트에도 나와 있잖아. 도루 저지가 거의 바닥권인 투수야. 올 시즌 메츠 도루의 절반이 이 녀석이 올라올 때 나왔다고.”

“그럼 대충 커트하면서 버티다가 볼넷으로 나가면 되겠네. 그리고 도루 두 번 하면 1점이잖아?”

나와 함께 데이터를 보던 이삭이 자신감 있게 말했다.

쉽다고.

이제, 비웃어 줄 차례인가?

“스트라이크! 아웃!”

[노아 신더가드 선수, 꽤 오래 쉬어서일까요? 오늘 공이 아주…… 대단합니다!]

[그러네요. 이삭 페레데스 선수를 맞아 다른 구종 없이 싱커로만 삼구삼진을 뺏어 냅니다.]

“페이스.”

“음?”

“어제 분명 누군가가 1루에 나가는 게 쉽다는 식으로 내게 말했거든.”

“음.”

“그리고 그 누군가는 지금 쉼 없이 중얼거리면서 덕아웃을 향해 오고 있지.”

“아, 이삭.”

“분명 아무 생각 없이 휘둘러 놓고 저러는 거야. 저러면 좀 있어 보이는 줄 알거든.”

마침내 이삭이 덕아웃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을 때, 뒷자리의 페이스가 말했다.

“이삭, 과도한 자신감은 좋지 않다.”

“……어?”

“다음 타석에서는 상대가 누군지 유념하고 들어가는 게 좋겠군.”

“어…….”

꼴좋네. 흐흐흐.

자, 이삭은 이삭이고. 이제 내가 창피를 당하지 않도록 공부할 시간이다.

연습투구 때 보여 준 패스트볼은 눈속임이었는지, 연속으로 싱커를 던져 이삭을 농락한 노아 신더가드.

‘단순하지만, 구위가 받쳐 주니 쉽게 치긴 힘들겠어.’

뭐…… 앞으로도 저렇게 계속 싱커만 던져 준다면 무슨 수야 나겠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게 접근하지 않을 거란 거지.

머리를 한참 굴려 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이미지도 잘 안 잡혀 있으니까 당연한 거지만.

‘에라, 일단 보자. 눈에 익어야 뭐라도 하지.’

“스트라이크! 아웃!”

타석에서 무조건 공을 쳐낼 거라던 라테는 자신의 약속을 아주 확실하게 지켜냈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 두 개의 공을 커트해 냈지만, 결국 삼진을 당하고 마는 라테 헤미체 선수입니다.]

공의 방향이 앞이 아니라 뒤라 문제지.

‘라테의 파울 타구가 전부 다 백네트에 맞았다. 구위가 살아있다는 거야. 최대한 오래 끌면서 장기전으로 보는 게 옳은 거겠지?’

슬라이더가 96마일까지 나오는 녀석을 첫 타석부터…… 잠깐, 왜?

‘왜 첫 타석에서는 때려내지 못한다고 생각한 거지?’

100마일이 넘는 패스트볼이든, 98마일짜리 싱커든, 96마일짜리 슬라이더도 마찬가지. 일단 존 안을 목표로 들어오면 때려내지 못할 것도 아니다.

특히 나는.

내게는 배트 중심에 맞추지 않더라도 담장을 넘길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 * *

[호세 라미레즈, 볼넷을 얻어 나갑니다.]

“그래! 그래야지. 이래야 사범이가 4번으로 나선 보람이 있지!”

“여보, 오랜만에 만났는데 또 야구만 볼 거야?”

“으응? 아냐, 잠깐만 보는 거야. 우리 애기 오빠 경기니까 보는 거지.”

김하별의 날카로운 공간침투에 김태연의 등이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가득 찼다.

‘이거, 삐지기 직전 같은데. 으……. 그렇다고 여기서 끌 수도 없고…….’

“훙!”

만약, 이 자리에 김사범이 있었다면 그대로 김하별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사범은 지구 반대편에서 야구를 하고 있고, 이 자리에는 사랑에 눈이 먼 김태연이 바보 같은 얼굴을 한 채 존재할 뿐이었다.

“우리 애기, 삐졌어요? 끌께, 끌께! 이깟 공놀이! 안 봐!”

“진짜루?”

“그래! 내가 어쩔 수! 없이 애기 먹여 살리려고 야구를 하긴 하는데, 이번에 투자한 거 떡상하기만 하면 바로 그만둘 거야!”

“진짜진짜지?”

“그럼!”

물론, 김태연의 그 말이 진실이 아닌 건 김하별도 알고, 김태연도 안다.

단지 지금 이 자리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것일 뿐.

[초구는 존 바깥으로 흘러가는 슬라이더. 볼입니다.]

[웬만한 투수의 패스트볼 구속보다 빠른 슬라이더입니다. 아주 잘 골랐어요.]

“우와…….”

“와…….”

투덜거린 여자도, 받아 주는 남자도 누구 못지않게 야구를 좋아했기 때문에 방금 전 공이 얼마나 위력적인 공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오빠가 칠 수 있으려나?”

“음…… 존을 좀 좁히고 완전 게스 히팅, 음, 그러니까 해서 배트를 돌리면 가능할 수도……. 사범이는 배트 스피드가 꽤 빠른 편이니까.”

[따악!]

[2구째 높은 패스트볼을 그대로 받아친 김사범 선수!! 이 타구는! 아, 아쉽게도 우측 폴 밖으로 휘어져 나갑니다.]

[살짝 늦었나요? 아니면 배트가 밀렸을 수도 있겠네요.]

“여보는 저 상황에서 어떤 공을 노릴 거야?”

자기도 모르게 집중하고 있었던 김태연의 귓가에 질문이 날아와 꽂혔다.

‘아무것도 안 노릴 건데. 아니, 몸에 맞는 공을 노려야지. 더럽게 아프긴 할 거 같은데 아프다고 드러누우면 교체라도 시켜 주지 않겠어?’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두 번째로 한 시즌 200안타를 친 타자의 속마음이라기엔 조금 저열하지만, 그만큼 화면의 노아 신더가드의 공이 위력적이었다.

“나? 나라면…… 싱커?”

“왜?”

“오늘 좋아 보이던데? 구속도 거의 패스트볼하고 비슷하게 나오고. 그리고…… 음, 몰라. 그냥 그럴 것 같은데?”

“그래? 나는 커브.”

“커브? 왜?”

“네 타자를 상대하는 동안 한 번도 안 던졌잖아. 올 시즌 전체 투구에서 19프로 정도 던진 공을 이렇게 중요한 무대에서 안 던지는 건 말이 안 되지.”

“어…… 어…….”

어디서 뭘 보고 알았는지, 왜 그런 자료를 알고 있는 건지는 지금 김태연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와…… 완전 섹시해…….’

“응? 야구 안 봐? 왜 나만…… 아! 오빠! 우리 야구…… 읍…….”

[노아 신더가드 선수, 힘차게 공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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