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김사범, 2022시즌(평천하(平天下))(10)
커브란 구종은 원래 제대로 때리면 장타가 아주 쉽게 나오는 구종이다.
구속이 느리다던지, 뭐 그런 의미가 아닌 좀 더 과학적인 의미에서.
탑스핀을 넣어서 던지는 공 특성상 멀리 날아가는데, 뭐 이걸 매그너스 효과라고 한단다.
물론, 제대로 된 커브는 정타가 잘 안 나오는, 아주 클래식한 의미의 마구라고도 볼 수 있지만…… 난 지금 그 공을 노리고 있다.
‘오랜만에 구종 하나만 노리고 타석에 들어서는 거 같은데?’
모 영화의 천둥의 신처럼 커다란 덩치를 하고 마운드에서 날 바라보는 노아 신더가드.
1루에 있는 라미레즈를 흘긋, 정말 흘긋 보고나서 바로 공을 던졌다.
‘저러니 도루를 그렇게 쉽게 주지.’
뭐, 자신감일 거다. 우리나라의 구 선생님이 학창시절 때 일부러 만루를 만든 다음 뒤에 나오는 세 타자를 다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놀았던 것처럼.
쉬익! 펑!
“볼!”
패스트볼처럼 날아오다 순식간에 꺾이며 존 밖으로 나가는 공.
‘와우, 괜히 이번 시즌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수상자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게 아닌데?’
무브먼트도 무브먼트인데, 구속이 받쳐 주니까 정말 비디오 게임에서나 볼 법한 공이 됐다.
물론, 난 골라냈지만.
‘패스트볼만 노리다가 이런 공이 오면 못 치겠네, 못 치겠어.’
공을 돌려받자마자 어김없이 빠르게 투구자세를 잡는 노아 신더가드.
다른 타자를 상대할 때완 다른, 아주 빠른 투구 템포다.
‘투구 템포가 빠른 편이 아닌 투수가 이렇게 빠른 템포로 접근한다는 건, 경기 전에 미리 약속된 패턴이 있다는 거지.’
그걸 예측해 내야 한다.
투구가 시작되고, 오른손이 언뜻 보이는 순간, 순식간에 존 근처에 도달해 있는 공.
‘패스트볼!’
다른 공을 노리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치기 좋은 공을 그냥 흘려보내선 안된다.
따아아악!
-우와아아아아!
-아아아아…….
아주 조금, 조금 늦었다.
바깥쪽 높은 패스트볼을 결대로 밀었는데, 흠.
아깝네.
[아깝네요, 아까워요. 조금만 더 앞에서 맞았더라면 파울홈런이 아닌 진짜 홈런이 될 수도 있었는데요.]
파울홈런을 맞고, 이젠 거의 아이들 장난감처럼 눈을 빛내고 있는 녀석의 살벌한 눈빛공격을 흘려보낸 뒤, 계획대로 커브를 후려갈길 준비를 했다.
‘빠르면 지금, 적어도 투 스트라이크에서는 무조건 온다.’
그리고 3구째.
녀석이 던진 공이 급격하게 가라앉는 게 보였다.
‘이미지보단 조금 빠른데……?’
그래도 이 정도면…….
따아악!
맞춰낼 수 있다. 충분히.
[김사범 선수의 타구가 다시 한 번 우측으로 향합니다!]
[바깥으로 휘어나가는데요……. 아, 아직 안됩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텅!
[폴대 기둥을 정확하게 맞추는 김사범 선수의 타구! 오늘도 어김없이 1회에 홈런을 뽑아냅니다!]
[체인지업을 그대로 받아쳤네요. 사실 노아 신더가드 선수가 가진 구종 중에서 제일 만만한 구종이기도 하거든요? 올 시즌 구사비율이 7퍼센트 정도 되는데……. 피안타율이 3할을 넘어요. 의외의 공을 던졌지만 역시나 큰 타구를 맞았습니다.]
[허를 찌르려는 볼배합이었던거 같은데, 김사범 선수가 완벽하게 예측한거 같습니다. 아, 폴이 아직도 흔들리는 것 같아요.]
음.
치고 나서야 깨달은건데.
커브 아니었던 거 같은데. 스핀도 그렇고.
뭐…… 결과만 좋으면 됐지 뭐.
* * *
“베이스 온 볼스!”
[경기는 이제 중반으로 접어듭니다.]
[4회, 두 번째 타자인 김사범 선수가 나올 때까지 10타자 연속 범타로 1루를 허락하지 않던 노아 신더가드 선수인데, 김사범 선수에게는 볼넷을 허용했습니다.]
커브, 때려야 하는데.
준비 많이 했는데…….
내 속마음을 읽었는지 가차없이 볼넷을 준 녀석.
물론 뭐…… 고의사구는 아니었다. 어렵게 던지려다 보니 볼넷이 나온 거지.
터덜터덜 뛰어 1루에 도착해서 1루 코치에게 장비를 건네주자 내게 대뜸 말을 거는 코치.
“뭘 노리길래 타석에서 그렇게 얌전해진 거야?”
끙…….
그렇게 티 났나?
예전엔 그래도 나름 잘했던 거 같은데…….
[김사범 선수는 타석에 있을 때도 그렇지만, 루상에서도 굉장히 위협적인 주자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80-80을 이룰 수는 없었겠죠. ‘붐’의 난제라는 이름으로 MLB 관련 인터넷 포럼에서도 유명합니다.]
[하하하, 80-80이라니, 정규시즌이 끝난 지 2주 가까이 됐는데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네요.]
[노아 신더가드 선수는 긴장을 해야 합니다. 원아웃 1루와 2루는 분명히 다르거든요. 신경을 많이 써야 해요.]
“세잎!”
“세잎!”
1루에 올라서자마자 연달아서 날아오는 견제구.
내 경험상, 이런 견제구는 그냥…… 나중에 투수 코치에게 욕먹지 않으려는 요식행위에 가깝다.
물론, 일반적인 주자라면 리드를 줄이는 효과도 있을텐고, 그럼 도루가 힘들어지긴 하니까 영 효과가 없는 견제는 아니다만…….
[김사범 선수, 초구에 뜁니다!]
“스트라이크!”
“세잎!”
나한텐 의미가 없다.
하나도.
[허허허, 2루를 너무 쉽게 내줬네요.]
[맞습니다. 페이스 달턴 선수도 센스 있는 스윙으로 김사범 선수를 도와줬죠?]
[3루 도루와 2루 도루 간의 성공률 차이가 얼마 안 나는 김사범 선수이기 때문에, 아마 3루도…… 뜁니다!]
따악!
[페이스 달턴 선수! 쳤습니다! 런 앤 힛인가요?]
3루만 보고 달리는 내게 3루 주루 코치의 사인이 보였다.
‘스탑 사인?’
왼발로 급제동을 걸고, 뒤를 돌아보자 중견수 방향으로 뻗어 나가고 있는 페이스의 타구가 보였다.
‘아슬하겠는데?’
꽤 큰 타구, 어차피 중견수 뒤로 넘어가기만 하면 홈까지 노릴 자신이 있는 나는 재빨리 귀루해서 2루 베이스를 밟았다.
[브랜든 님모! 타구를 따라갑니다…….]
[펜스가 가깝습니다! 조심해야 해요!]
끝까지 힘을 잃지 않고 뻗어 나가는 페이스의 타구, 슬쩍 본 페이스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1루와 2루 사이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 타구가 담장을 넘…… 아! 잡아냈어요! 잡아냈습니다!]
[펜스를 밟으며 높이 솟아오른 브랜든 님모가 공을 낚아챘습니다! 5cm만 더 높았어도 홈런이었는데요! 아! 이 틈을 타 3루로 달리는 김사범 선수!]
페이스의 타구는 아쉽게도 슈퍼 플레이에 잡혔지만, 아직 우리의 플레이는 끝나지 않았다.
[빠릅니다! 빨라요! 브랜든 선수가 일어나기도 전에 거의 3루에 도달한 김사범 선수!]
[이야, 이거 잘하면 진귀한 기록을 보겠는데요?]
무아지경에 빠져 미친 듯이 왼손을 돌리고 있는 ‘락스타’ 3루 코치를 통과해서, 홈으로 달려갔다.
[김사범 선수, 홈까지! 홈까지!!]
[아직 송구는 내야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스튜어트의 사인대로, 몸을 왼쪽으로 기울이며 슬라이딩.
메츠 포수의 미트는 내가 홈플레이트를 지나가고 나서야 내 발끝에 닿았다.
“세잎! 세잎!”
그리고, 양옆으로 휘둘러지는 심판의 팔.
[대단합니다! 이젠 배트가 아닌 발로도 점수를 만들어 내는 김사범 선수!]
[브랜든 님모 선수가 공을 잡고 시간을 끌었던 게 실수였어요. 이런 상황이 쉽게 나오진 않지만, 염두에는 두고 있었어야죠.]
[이야, 이렇게 되면 페이스 선수는 주자 2루 상황에서 희생플라이로 1타점을 얻게 되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이야……. 예전, 빠른 발로 유명했던 빌리 헤밍턴 선수가 가끔 보여 줬던 모습인데…… 이걸 김사범 선수가 보여 주네요.]
덕아웃으로 향하는 길목.
나를 기다리고 있던 페이스가 말했다.
“죽여줬어.”
“이 정도야 뭘, 저녁 살 거지?”
“얼마든지.”
야구를 하는 순간순간, 머릿속으로 생각만 해봤던 플레이를 성공시키는 건 내게 엄청나게 큰 쾌감을 가져다준다.
“다음에도 이렇게만 쳐. 적어도 여기서 굴러먹던 다른 녀석들이 했던 플레이는 나도 무조건 해낼 수 있으니까.
내가 페이스에게 건넨 말대로.
난 이 다이아몬드 안에서 뭐든지 할 수 있다.
* * *
[‘묠니르’를 잃은 토르, 디트로이트에게 당하다. 1차전을 6:0으로 완봉패를 당한 메츠.]
[2홈런, 2도루. 희망에 찬 메츠를 부숴 버린 ‘뉴클리어’
- 코메리카 파크에 핵폭탄이 떨어졌다. 오직 메츠를 상대로 하는 치명적인 폭탄이.
1회부터 메츠 선발 노아 신더가드의 체인지업을 받아쳐 우측 담장을 넘기는 투런 홈런을 기록한 이 폭탄은 4회, 놀라운 주루로 다시 한 번 메츠를 조각내는 데 성공했으며, 7회에는 기어코 ‘토르’의 ‘묠니르(커브)’를 부수는 데 성공하면서 2홈런을 기록했다…….]
[미키 캘러웨이, ‘다음 경기 준비를 잘하겠다. 팀이 급하다고 디그롬을 내지는 않을 것.’]
[론 가든하이어, ‘우린 완벽하다. 붐의 홈런과 케이시 마이즈의 완봉이 그걸 증명했다.’]
“오늘 어땠어?”
“멋졌어! 정말로!”
“진짜? 다행이네. 아, 엄마 아빠는 어땠어요?”
“우리 아들 말고는 아무도 안 보이더라. 누굴 닮아 저렇게 자알~생겼지?”
“당연히 나 아냐? 얼굴 보고 결혼했다며?”
“이이는, 기분 좋으라고 했던 말을 아직도…….”
비즈니스 때문에 가족들과 다른 곳에서 야구를 본 필, 아니 장인어른에게도 아주 멋졌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다행이네요. 아, 오늘 친구들 좀 초대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세요?”
“친구들? 아, 그…… 2루수하고…….”
“마무리, 포수, 1선발, 5선발이요. 아, 아마 케이시, 그러니까…… 1선발은 안 올 거예요. 경기 끝나면 뻗어서 자는 스타일이라.”
“우리야 좋지. 네 동료들인데. 아, 음식이 되려나?”
기분 좋은 표정으로 “콜!”을 외치는 아버지.
옆에 계신 어머니의 표정도 좀 보고 그러시지…….
“엄마, 힘들면 나가서 먹어도…….”
“아냐, 얘는, 내가 너 친구들 데려온다고 했을 때 싫어하는 거 봤니? 데려와! 다들 한식은 잘 먹나?”
“그거 먹으려고 오는 거예요. 그냥 대충 불고기하고 잡채랑, 또…… 삼겹살? 삼겹살이 있나? 아무튼 그런 거 주면 되지 않을까요?”
외국인들 좋아하는 한식이야 뻔하지 뭐.
불고기야 대충 소스 사다가 끓이면 되고…….
잡채는 좀 어렵나? 당면이랑 야채랑 넣고 비비면 되는 거 아닌가?
“불고기…… 야채……?”
“아니면 돼지갈비 해 줄까요? 그냥 간단하게만 먹이면 되는데.”
“돼지갈비……?”
어째 엄마의 표정이 별로 안 좋다?
“어머니, 잠깐 사범 씨랑 이야기 좀…….”
“그래, 그러렴.”
갑자기 날 끌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수리.
“자기, 진짜 미쳤어?”
“어?”
미쳤냐니?
수리와 결혼까지 생각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폭언에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불고기, 잡채, 돼지갈비…… 이게 어떤 음식인지 몰라?”
“어…… 맛있는 한식?”
“맛……. 후우. 가서 어머님께 다시 말씀드려. 다른 건 다 됐고 그냥 삼겹살에 상추 같은 거 해서 먹자고. 알겠지?”
“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미쳤냐는 소리를 듣고서도 가만 있을 순 없다.
이럴 땐 나도 강하게 나가야 한다.
이런 걸 보고 그 옛날 선배들이 주도권 싸움이라고 한 거겠지.
“……내 말대로 하자. 나 지금 되게 당황스러워.”
“응…….”
지금은 부모님이 계시니까 넘어가지만. 월드시리즈가 끝나고 나서는 가만히 안 있을 거다.
그렇게 모두가 차에 타서 집으로 가는 길. 약간 엄숙한 분위기에 쉽게 입을 열 수 없었지만, 용기를 내어 말했다.
“엄마, 그냥 삼겹살에…….”
“사범아. 가는 길에 아시아 식료품 파는 데 있다고 했지?”
“네? 네…….”
“거기 들려라. 재료는 사야지. 장정 네다섯 명 불러놓고 밥을 새 모이만큼 줄 순 없으니까.”
“어…… 아니, 엄마 그냥 삼겹살에…….”
“그래, 불고기? 갈비? 잡채? 음…… 갈비는 미리 재워 놨어야 하는데……. 그거 말고 불고기하고 잡채로 하자꾸나. 다들 젓가락질은 할 줄 알지?”
“일식집 가서 보니까 그럭저럭 하더라고요.”
“그럼 됐다.”
* * *
[웬수 : 야, 오빠! 너 엄마한테 이상한 거 부탁했다며!!]
[김사범 : 어. 그리고 오빠든지 야든지 둘 중 하나만 해라.]
[웬수 : 무슨 거기까지 가서 잡채를 해 달라고해!! 미쳤냐?]
[김사범 : 안 미쳤다. 나도 했어.]
[웬수 : 니가 뭘 해! 아무것도 못하면서!]
[김사범 : 엄마랑 수리랑 요리하는 내내 주방에서 서 있었다.]
[김사범 : 아무것도 안 시켜 주는데]
[김사범 : 그냥 서 있으래서 서 있었어.]
[김사범 : 그러니까 조용히 해라. 알지도 못하면서…….]